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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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호메로스는 오디세이아를 지었다.

3천 년 뒤매들린 밀러는 키르케를 써야 했다.

 

사회가 여자에게 허용해준 힘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여성에게 주어지는 단어가 마녀였어요틀림없이 키르케가 그런 경우죠그녀는 오디세우스와 1년을 보냈죠그렇다면 그녀의 나머지 인생은어떻게 그녀는 지금의 그런 존재가 되었을까?

 

10년도 더 전에 친구의 은사가 오랜 기간 연구하고 완역했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책을 선물 받아 아주 힘들게 읽었는데필사한 몇 구절들 이외에는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매력적인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서 <키르케>를 잘 읽어 보고 싶으니지금에 와서 <오디세이아>가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것이 몹시 아쉽다.

 

키르케의 탄생 장면과 대화들은 시대를 감안하더라도 충격적인 성차별 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외모이름능력부모의 기대 등의 모든 것이 그러하다누가 누구를 더 반영한 것인지는 몰라도 인간계나 신계 역시 씁쓸한 장면이다아이들 용 책제목을 보니 <오디세우스를 사랑한 마녀 키르케>라고 뜬다그 책에서는 아마 얻을 수 없는 정보 중 하나로 키르케,가 hawk라는 것을 알게 되어 뜻밖의 기분이 들었다그저 적당한 남편을 만나는 일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있을 듯한 기대가 생기는 이름이다.

 

예전에 아버지가 지상에는 그의 뜨고 짐을 기록하는 천문학자라는 인간들이 있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그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최고로 존경을 받았고 왕의 고문으로 왕실에서 지냈지만아버지는 가끔 여기저기에서 미적거려 그들의 계산을 어그러뜨렸다그러면 이 천문학자들은 섬기는 왕 앞으로 끌려가 사기죄로 처형당했다.

중략.

아버지,” 그날 내가 말했다. “천문학자를 죽일 만큼 늦었을까요?”

그렇구나.” 아버지는 대답하고 짤랑거리는 고삐를 흔들었다.

빨래를 짜듯 가슴이 조여오는 느낌이었다.

중략.

폐하태양 자체가 늦은 게 저희 탓은 아니지 않습니까.

태양이 늦을 리가 있느냐왕들은 왕좌에서 대꾸했다그렇게 이야기하는 자체가 불경죄이니라죽어 마땅하다이와 함께 도끼가 떨어지고 읍소하던 남자들이 두 동강 났다.

아버지,” 내가 말했다. “기분이 이상해요.”

배가 고파서 그런 거다.” 그가 말했다.

 

모두가 비슷한 성격의 자신만만한 가족들에 둘러싸여 사는데자신만 다른 감수성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불편할지 혹은 그 이상의 어려움이 있을 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다이 시대의 신들이 왜 이리 무감한 성격으로 설정되어 있었을까가차 없고 냉정한 것이 신에 속하는 것이고공감 능력과 측은지심은 인간에 속하는 것이라고 그리스인들은 그렇게 믿었을까.

 

키르케는 인간에게는 늘 반가운 이름으로 기억되는하지만 그 행동의 이유는 잘 알 수 없는영원한 고통이라는 상상 가능한 가장 큰 형벌을 받는 프로메테우스와 조우한다.

 

인간들을 도우셨죠.” 내가 말했다. “그래서 벌을 받으시는 거죠.”

그렇다.”

인간은 어떻게 생겼는지 얘기해주실 수 있어요?”

어린아이의 질문이었지만 그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마디로 대답할 순 없어저마다 다르게 생겼거든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뿐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

알아요하지만 죽는다는 걸 이해하지는 못해요.” 내가 말했다. “용서해달라고 빌라는 걸 거부하셨다던데 진짜예요붙잡힌 게 아니라 제우스한테 가서 솔직하게 얘기하셨다는 것도요?”

그렇다.”

왜요?”

그의 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네 얘길 한번 들어보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나로서는 대답을 알 수가 없었다신의 처벌을 자청하다니 내가 보기에는 미친 짓 같았지만그가 흘린 피를 밟으며 서 있는 마당에 내 생각을 얘기할 수는 없었다.

모든 신이 똑같을 필요는 없어.” 그가 말했다.

 

영웅담이나 단발성 에피소드를 읽는 것보다 주인공을 따라 중심이 잡힌 서사 속에서 그리스로마신화의 접점을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다프로메테우스는 철학자의 면모를 가진 듯 생각과 주관이 뚜렷해 보인다키르케가 마실 것을 가져다 준 것에 감사 인사를 건네는 것도 다른 신들과 구분되어 보인다신이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프로메테우스의 질문을 받은 것처럼 나도 잠시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모두 똑같을 필요는 없다는 것키르케는 프로메테우스와의 이 만남과 대화를 통해 어떻게 변화할까어떤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진지하게 상상해본다인간들을 벌레처럼 하찮게 여기는 생각과 달리 키르케는 신과 인간의 존재와 관계 맺음에 대해 다른 의미를 찾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이에테스(남동생)가 내 귀에 대고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저길 봐다이달로스야인간계의 경이로운 작품으로 꼽히는거의 신에 맞먹는 재주꾼이지내가 왕위에 오르면 저런 자랑거리를 모아서 곁에 두고 싶어.”

그래언제 왕위에 오르는데?”

조만간.” 그가 말했다. “아버지가 왕국을 하사하시겠대.”

나는 농담인 줄 알았다. “나도 거기서 살아도 돼?”

아니,” 그가 말했다. “내 왕국이잖아누나도 누나의 왕국을 가져야지.”

중략.

내 것 하나 없이 땅속에서 평생을 썩을 수는 없어.”

나는 어쩌라고묻고 싶었다나는 그냥 썩으라고?

 

다른 동생들이 모두 자신이 속할 곳을 찾아 자신의 몫을 챙기러 떠난 후 홀로 남은 키르케는 자신이 머물 장소도 자신의 역할도 찾지 못한 채로 홀로 남는다그러다 우연히 만난 글라우코스라는 인간과 얘기를 나누다 사랑을 느낀다그리고 그제야 프로메테우스와의 대화 속에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기억해낸다인간은 나이를 먹고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다.

 

제발 도와주세요.” 내가 말했다. “위대한 여신이여그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영생을 부여해주세요.”

그건 어떤 신도 할 수 없는 일이란다.”

저는 그를 사랑해요.” 내가 말했다. “무슨 방법이 있을 거예요.”

글라우코스를 내 옆에 붙잡아놓을 수만 있다면 뒤흔드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을 찢고 불태울 수도 있었다하지만 내 머릿속에 가장 생생하게 남은 건 내가 파르마콘이라는 단어를 내뱉었을 때 외할머니가 지은 표정이었다.

나는 공포가 뭔지 알아가고 있었다신은 뭘 두려워할까? 나는 그 대답도 알고 있었다.

자기보다 더 뛰어난 능력.

 

똑같은 형태는 아니라 해도 프로메테우스처럼 인간을 사랑하게 된 키르케외롭지 않은 처지였다면 인간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지도 후에 마녀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이 또한 모두 정해진 운명이었을까키르케가 원한 것은 인간을 신으로 만드는 것일까자신이 인간이 되는 것일까.

 

문득 <개구리가 된 왕자>란 동화와 <슈렉>이 함께 생각난다슈렉의 피오나 공주는 유쾌하게도 상징적인 인물이고 반전과 파격을 보여주는 사랑스러운 인물이다틀에 얽매어 고민에만 빠져 있지도 않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한 선택을 한다자신의 삶을 자신이 결정하고원하는 행복을 위해 특권을 포기하고 자립한다자신을 구해 줄 갑옷 입은 기사나 백마 탄 왕자에 완전히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구한다사랑을 위해 자유와 독립을 제한하는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삶에 반드시란 없다죽음 말고는.

 

동화든 신화든 현실이든 삶이란 본질적으로 죽음과 연결된 길이고최종적인 죽음이 아니더라도 종종 매우 비극적인 단계에 이를 수 있다바라고 꿈꾸는 것과 다르게 아주 씁쓸할 수도 있다그래서 어쩌면 많은 동화의 끝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그 과정을 생략하는 지도 모른다가장 확실한 운명이 죽음이라면영생을 누리는 신들에게는 삶 또한 죽음의 부재처럼 가치가 부재한 시간일 뿐일지도 모른다그래서 나는 시간의 두 축 사이과정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감정들이 가장 궁금하다사랑을 느낀다는 것은 분명 성장의 신호이다.

 

파르마콘자기보다 뛰어난 능력을 두려워하는 신들대단한 위계적 사회이다능력이 없거나 적은 존재라면 신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불멸의 삶이 얼마나 무력한 형벌일까 상상해본다.

 

키르케의 손을 거쳐 스킬라와 글라우코스가 변신했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운명의 여신의 소행이지키르케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

아버지가 잘못 알고 계신 겁니다.”

중략.

그런 술수를 파르마케이아라고 부릅니다세상에 변화를 유발하는 능력이 있는 약초 파르마콘을 쓰기 때문인데신들이 피를 흘린 곳에서 피어나기도 하고 지상에서 지천으로 자라기도 하죠그 약초의 능력을 끄집어내는 것이 재능이고 저 혼자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크레테에서는 파시파에가 독약으로 왕국을 다스리고 바빌론에서는 페르세스가 육신에 영혼을 다시 불어넣습니다키르케가 마지막으로 능력을 입증한 셈이죠.”

 

어쩌면 누나는 파르마키스가 아닌가보다는 생각이 들려던 참이었다고.”

내가 모르는 단어였다그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모르던 단어였다.

파르마키스.” 내가 말했다.

마녀라는 뜻이었다.

 

그 아이는 내 명령을 거부하고 내 권위에 도전했소독약으로 동족을 변신시켰고 다른 반역 행위도 저질렀소.” 새하얗게 이글거리는 아버지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그 아이는 우리 이름을 더럽혔소우리가 보여준 애정에 배은망덕한 태도를 보였소그렇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제우스와 합의를 보았지키르케는 아무런 해를 끼칠 수 없는 무인도로 추방될 거요바로 내일.”

 

그리웠던 남동생아이에테스를 통해 아버지 앞에서 키르케와 형제 자매들의 능력을 발설되고 확인된다그리고 바로 그 일이 키르케를 각성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이제 키르케는 더 이상 아버지의 딸님프가 아니였고그제야 본격적인 자신을 찾아 본격적인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펼치기 된다신화 속에 등장하는 최초의 마녀 이야기.


세상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거야키르케나는 아버지에게 마법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얘기하고아버지는 내 말을 믿는 척하고제우스는 아버지의 말을 믿는 척하고그렇게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지실토한 누나가 잘못했어왜 그랬는지 나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야.”

 

그렇다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프로메테우스가 채찍질을 당했을 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으니.

 

마치 피오나 공주처럼또한 그 자신에 가장 어울리는 모습으로 마녀 키르케는 유배지 섬을 감옥이 아닌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바꾼다주어진 상황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원망도 회복도 귀향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마법 능력을 연마한다헤르메스다이달로스오디세우스 등 쟁쟁한 인물들을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지만그들은 키르케에게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들이다키르케는 아무도 붙잡거나 매달리지 않는다자신의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지키려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온갖 주술로 보호하며 양육하지만아들이 떠나려하자 순순히 보내 준다운명에 휘둘리는 것도 순종하는 것도 아니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원하는 것을 알고 얻고 지키고 또 다른 흐름에 따른다그 과정이 모두 주어진 능력이나 행운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고 의지를 발휘해서 도전하는 모든 과정이다신으로 태어나 인간적인 모습으로 살아간온 마음으로 응원하게 하는 결심을 하는 주인공반전에 놀라는 한편 그 결심이 가장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그래도 그의 끝이 어떻게 될까 한참을 생각 속에 머물렀다.

 

확실한 건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저희도 압니다.

하지만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저는 당신에게 맡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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