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정순하게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양식 3
청림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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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형편과 처지를 인내로써 참고 받아들이는 것은 순응이라고 할 수 없다이런 태도는 내면에 화가 누적되게 한다.”

 

오래 전 잠을 자면 열이 나고 식은땀도 나고 몸이 불편하고 아프기 시작했다그 외 시간에는 아프지도 않고 검사를 받아도 이상 소견이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토요일 아침불편한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별 생각 없이그저 답답해서 가까운 한의원을 가보았다.

 

주체적으로 간 첫 한의원 진료에서 젊고 정중한 의사는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질문하는 이유가 뭐냐고 되물었더니 스트레스가 큰 직업군에 있는 사람에게 이런 증상이 보인다고 했다두 가지 다른 성질의 에너지가 흩어지지 못하고 몸 안에서 뭉쳐 다니면서 건강을 해치게 되는 증상이라고하나는 울이고 다른 하나는 화라고즉 합쳐서 내 병명은 울화였다.

 

* 울화증 (鬱火症) [명사] [한의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하여 간의 생리 기능에 장애가 와서 머리와 옆구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병.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새 직장이었고채식에 대한 이해가 지금보다도 현저히 낮을 때라 섭식도 힘들었다직장이야 적응 기간이 끝나면 적응하거나 못하거나 둘 중 하나로 결론이 날 일이라기한이 있는 일이라 큰 스트레스가 아니었다.

 

문제는 섭식. 여러 해 채식을 한 지라 식당마다 풍기는 생선과 육류 냄새가 역했고 채소 반찬이란 해도 액젓을 넣은 음식은 거북했다. 가장 곤란한 경우는 선의와 설득이 적극적인 결합을 이루는 반응인데, 예를 들면 동치미냉면을 주문하면서 고기 조각만 빼달라고 하면 사리 밑에 숨겨 두는 분도 있었다내 건강을 무척 걱정하며 한 달 전 온 승려도 고기 잘 먹더라며 설득하시는데나로선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고기를 잘 먹은 일을 내 일로 어떻게 연결해야 할지 모를 일이었다뭘 더 달라는 것도 아니고 빼달라는 일도 이토록 힘들다니과연 많은 한국이었다어쨌든 맛도 없이 먹는 식사가 매일 불편하기까지 하니 스트레스가 차오른 것은 당연하다.

 

단시간에 낙천적인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미루거나운명 또는 하늘 또는 그 무엇인지 모르는 막연한 것에 내맡긴다이런 사람은 사실 운명을 믿지 않는다.”

 

간혹 드물게 공개적으로 의견을 발표하지는 않지만 소명 의식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는 분들을 만난다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무조건 해낸다는 생각으로 사시는 분들얼마 전 인터뷰 내용을 보고 원래도 존경하던 분을 더 깊이 존경하고 감사하게 되었다.

 

나의 우선순위는 정해져 있어요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여성의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향이라면 무조건 해요.”

 

주어진 뭔가를 놓치는 사람은 되지 않으려고 해요여전히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조건 뛰어드는 입장이죠지금도 어떤 결과 하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될지 안 될지 몰라요그런데 이게 꼭 돼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뛰어들었어요.”

 

<이수정 범죄 심리학자>

 

흉내도 못 낼 치열함이라 그런지 나는 이런 진짜 보수구도자와 같은 분들이 좋다이수정이 존재하는 세상이 훨씬 더 좋다그리고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세상이 더 좋다그 세상에서 여성들은 분명 덜 두렵고 덜 맞고 덜 죽고 덜 억울할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기다려 주는 것이 없다면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과 같아서 곧 황금알을 더 이상 얻을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배 속에 있는 만들다 만 황금알 하나가 최후에 얻는 것일 것이다.”



농장일을 하는 부부가 거위에 대한 이해가 그토록 없었을까 의아한 이야기지만황금알에 판단이 흐려졌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해본다.

 

적지 않은 분량으로 저자가 깊은 성찰과 학습에서 벼린 이야기들을 전해주는읽기 어렵지 않은 에세이 형식의 글이다독자인 내 깜냥에 맞는 단상으로 문장으로 이해할 뿐이지만마음이 고요해지고 기분도 차분해지는 읽기 명상의 효과를 누린다.

 

정순하다2 (貞順하다) [형용사행실이 곧고 마음씨가 순하다.

정순하다1 (貞純하다) [형용사마음이 곧고 정성스럽다.

 

잘 사용한 적 없는 단어를 새롭게 감사히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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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떠났고 다시 만났다
하상인 지음 / 지식과감성#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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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소설 장르로 분류되어 있다장편을 좋아하는 나로선 짧은 느낌의 작품이다소설에 자전적 이야기를 어느 정도로 두냐는 것은 작가의 결정이기도 하고 글 자체가 끌어내는 인력에 비례하는 분량이기도 할 것이다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주인공과 작가가 자주 겹치는 자전적 에세이처럼도 읽히는 소설이다.

 

“‘작가라고 불리고 싶어 글에서 발을 완전히 담그지도 빼지도 않은 어정쩡한 자세로 살아왔다어정쩡한 인간은 항상 결단력이 부족하고 책임지지 않는 태로도 삶을 일관하기에 방금처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도 돌려 말하거나 제대로 답을 듣지도 못하고 끝나기 마련이다뜨겁지도차갑지도 않은 미온적인 삶을 살면서영원히 자신을 성공할 가능성있는 상태에만 놓고 최선을 다해 어려움에 맞설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작가라는 단어만 바꾸면 여느 직업에도 모두 그럴 듯하게 대입할 수 있다그냥 직업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사는 태도 전반을 아우를 수도 있을 듯하다.

 

판데믹 시절 친구의 표현을 빌자면 너무하다 싶을 만큼의 책읽기로 지내는 일이 익숙해졌다책을 펴지 않는 날이 기억에 남을 정도이다지난 주 지루한 느낌 없이 몰입해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정말 오랜만에 즐겁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책읽기가 즐겁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거의 유일한’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이 해소보다는 긴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날의 탈선(?)은 행복한 휴식이었다.

 

어쨌든 책과 지내는 날이 많아지니 작가들과도 가까워지고작품 이외의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어 여전히 생경하고 때론 어색하기도 하다한편으로는 책소비자나 독자에 한정된 입장으로부터 창작자의 말과 글을 듣고 읽고 대화를 나누며 직업으로서의 창작 활동에 대해 생각해 보는 기회를 만난 것은 마음에 드는 세계의 확장이다마침 5월의 북클럽 책은 제목 자체가 소설이고 당연히 소설에 관한 많은 이야기이다.

 

예전엔 나이가 들어도 하고 싶은 거 눈치 보지 말고 하면서 지내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악상 나이가 드니까 그렇게 못하는 나 자신이 보이더라고. (...) 게다가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게 아니기도 했었고. (...) 나이 때문이라고 했지만 결국 오늘처럼 시간을 보낼 수도 있는 거였는데 선택하지 않은 건 결국 나였거든.”

 

줄거리를 굳이 상세하지 않아도 작가가 되고 싶은 이들이 견뎌야 하는 많은 것들은 익히 아시리라 믿는다등단까지도 지난하지만 등단 후에도 순탄치만은 않다그저께인가 좋아하는 작가에게 초판 1,000부가 팔리면 통장에 100만원이 들어온다고 작가의 기부나 후원 소식을 들으면 형편을 짐작해서 마음이 아릿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배운 대로 살지 못하는 이로서 변명의 여지는 없으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내 전공으로 지원할 데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연구소나 재단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 당시 어느 대학과 기업에서도 배운 바를 활용할 가능성은 전무 했다다른 말로 하자면 돈이 되는 않은 공부를 오래 한 셈이다그제야 유럽 떠돌이 생활이 싫어졌단 다소 낭만적인 이유로 지나치게 여유롭게 귀국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여전히 돈으로 잘 환산되지 않은 공부나 일을 고집스럽게 치열하게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빈부격차와 불평등이 극심하고 노동가치가 쓰레기 취급 받는 한국에서 여전히 그런 꿈과 노력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신비로움이다그런 의미로 인간은 참 강인한 존재이기도 하다타협과 설득과 다른 선택이 불가능한그런 이유로 어찌 되었든 짧은 유일한 삶을자신만의 시간을 그려나가는 존재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와 심정이 이해 불가한 것이 아니라 애틋한 마음으로 그래도 여전히 응원하고 싶다지난주의 어지러운 일상을 격하게 마무리하고 푹 쉰다는 기분이 들기도 전에 한 주의 시작을 맞는 아까운 일요일 아침, 맞춤한 분량과 메시지가 담긴 글을 잘 읽었다


다들 다시 힘을 내시라


계속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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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빨간 입술 젤리 넝쿨동화 16
이나영 지음, 김소희 그림 / 뜨인돌어린이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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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고 있었다가 다시 생각난 표현입니다. ‘새빨간 거짓말*!’ 왜 새빨갛다고 했는지 가만 생각해보니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저만 모르나요?


새빨간 거짓말신어 뻔히 드러날 만큼 터무니없는 거짓말.

 

제목도 표지도 한 번 못 것만으로 잊을 수가 없게 인상적입니다특히 휴대폰 화면이 현실적이고 시사적입니다.

 

설정은 제게는 살짝 충격적이었습니다거짓말을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그런데 가만 내용을 보니 곤란한 답변을 요구하는 주변 사람들 어른들 포함 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맛있니예쁘니이런 순전히 취향에 관련된 질문은 좀 더 자제하고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하기 곤란했을 이솔이의 심정을 짐작해보니 안타깝습니다부담이 점점 커져서 솔직한 답변보다는 거짓말을 술술’ 잘 하고 싶어진 거니까요.

 

게다가 들어보면 뻔한 거짓말인데 편하게 잘 하는 친구가 있으니 화도 났겠지요그래도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만으로 바라던 게 이루어지다니너무 위험한(?) 소원 성취 방식입니다생각은 말보다 즉각적이고 제 멋대로 일 수 있으니까요.



팝업창과 뜨고 구매의사를 묻는 장면이 정말 노골적입니다아이들도 이제 휴대폰으로 물건을 구매하는 일을 어색해하지 않나 봅니다.

 

눈을 감고 맛있어 새빨간 입술 젤리!’라고 속삭이세요.

그 다음 입술을 세 번 핥으면 끝!

당신은 이제 최고의 새빨간 거짓말쟁이가 될 거예요!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는 얼마간 짐작할 수 있으시지요거짓말 효과로 인기를 얻고 즐겁기도 하지만거짓말이란 일단 자신이 한 거짓말을 다 기억할 수 있어야 하고 이야기는 할수록 내용이 더 불어나게 되지요거짓말을 잘 할수록 더 주목을 받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테니 그 감당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른들에게 직접 듣는 것보다는 거짓말에 대해 아이들이 혼자 읽어 보고 혼자 자연스럽게 생각을 정리하기에 좋은 이야기입니다.

 

거짓말에 관한 책인데 저는 일상적으로 하는 그다지 생각을 깊이 하지 않은 질문들에 대해서 더 오래 생각하게 되었습니다너무 편안하게 너무 쉽게 상대에게 대답을 기대하고 묻는 일에 더 조심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오래된 질문이긴 한데 좋은 거짓말은 정말 존재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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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어린이 마음 사전
마음꽃을 피우는 사람들 엮음, 박희진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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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꼬맹이가 내일로 10살이 되면 이젠 십 대 두 명이 된다.

본인들은 법적 성인 이전까지는 미성년 대신 어린이로 불러 달라고 주장하지만

어린이날을 즐기고 싶은 의도인 듯 -

이제 아동 도서는 나만(?) 읽겠구나 싶은 시절이 곧 도래할 듯하다.

어린이 그림책과 동시와 청소년 문학을 애독하는 나로서는

함께 읽는 시간이 사라지는 건 상당히 쓸쓸한 상상이다.

 

어쨌든 나는 모르던 어린이 월간 잡지 만드는 이들 소식도 덕분에 알게 되었다.

어린이학부모초등교사그림 작가 등

여러 사람이 모여 만든 잡지에 실린 글들을 모아 만든 책이다.

57명의 어린이들이 직접 쓴 글이다.

귀하고 사랑스럽고 진짜 어린이들의 현실이다.

제목에 진짜라고 붙은 이유를 이해했다.

 

풍선은 환경 문제로 인해 더 이상 즐기지 않지만

아이들이 마스크 벗고 자유롭고 신나게 노는 표지가 멋지다.

상상 속 친구들이야기 캐릭터들도 함께 라서 더 좋다.

 

시도 있고 산문(?) 수필 형식의 글도 있다.

형식이 무엇이건 다 멋진 글들이다.

가족과 형제와 학교 이야기가 당연히 주를 이룬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세상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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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속한 것
가스 그린웰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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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색감에 마음이 사알떨렸다강렬한 보색은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처럼 읽히기도 한다이 정도는 표지디자인이 아니라 전시작품처럼도 느껴진다연초록 심장 부근에 저자와 장르와 역자가 글자 크기를 달리하며 자리 잡은 것도 무척 세련된 감동을 준다.



옆모습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티모시 샬라메Timothee Chalamet를 떠올리게도 한다배경과 배우가 너무 아름다워서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감상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영화였다살짝만 슬픈 결말 역시 어울렸다이 책은 영화와는 사뭇 다를 분위기이긴 하다.

 

표지에 집착했다 옆길로 빠지는 이야기에서 돌아와서어쨌든 어떤 사랑이든 어떤 거래든 구태연 하거나 지루하진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박상영 작가의 추천을 가장 큰 이유로 삼아 읽는 것이니 이미 편애 가득이다.

 

나이가 드니 화들짝 놀라는 일이 적어져서 정말 그것만은 편안하다발간되자마자 클래식이 된 레전드 문학작이라는 퀴어 문학을 이렇게 태평한 마음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태도를 내가 지녔다니 조금 뿌듯하다.

 

밀도가 높은 감정일 거란 예상은 했다경험 상 내가 읽은 퀴어문학작품 속 인물들은 늘 그렇게 사랑에 면역도 없고 저항도 못하는 허약한 존재들이었다한편으로는 그 정도 농밀한 감정으로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면 엄청 강한 이들이란 모순적인(?) 생각도 한다애틋한 마음이 드는 사랑이다아주 짧고 직선적인 표현들임에도 이 작품의 장면들 속에서는 모두 아릿하다.

 

나는 네 고객이 되고 싶지 않아네가 너무 좋아하지만 널 그렇게 많이 좋아하는 건 나한테 좋지 않아.”

 

나는 너한테 뭐야? (...) 넌 그렇게 사는 삶이 마음에 들어?”

 

읽은 분량이 늘어갈수록 주인공에게는 아주 매력적이고 신비로운 인물로 보이는 미트코보다 자신을 부정할 지라도 지극한 애정을 그치지 않는 주인공에게 훨씬 더 마음이 쓰인다감정은 눈앞의 동시적인 발생품인 듯 더할 수 없이 생생한데생각이든 대화든 문장들은 서글플 정도로 담담하다화를 버럭 내기도 전에 미리 기운이 빠진 사람처럼.

 

처음엔 그냥 읽었는데아름다운 날 여느 공개적인 멋진 곳이 아니라 문화의 전당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처음 만나는 장소 설정이 함께 사는 세상의 가장자리로 누군가를 힘주어 밀어낸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자신의 정체에 대해 혼자서도 물어야하고 관계 속에서도 확인해야 하고 사회 속에서도 설명해야 하고이쯤 되면 정체성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일들이 악몽이다그러고 보면 정체를 밝혀라시리즈의 최고봉인 아무나 빨갱이라는 정체를 뒤집어씌우던 세월이 짧지 않았음이 새삼스럽다결이 다른 이야기인가.

 

어쨌건 그렇게 시작되어 힘껏 사랑을 이어나간 주인공이 대단하다무리하지 않으면서도 간곡하게 이어나간 순간들이 나는 눈물겨웠다사랑이란 감정의 한 가운데가 있다면 가장 깊은 곳에서 뽑아내고 다시 그곳에 담아 두는 감정이라 느껴졌다자기 연민이 아니라 상대의 처지를 헤아려 생각하고 아파하고 슬퍼하는 그런 유대를 혼자 마련해 둔 사랑이 느껴진다.

 

미트코는 어리둥절하다는 듯 잠시 서 있었고거리에 홀로 서 있는 미트코를 본 나는 다시 그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 찼다그가 언제나 혼자였다는 생각이 들었다자기 자리를 한 번도 찾지 못한 채. (...) 


문득 나는 미트코 대신 분노를 느꼈다. (...) 기름칠하지 않은 기어가 긁히는 것 같은 미약한 분노를 느꼈다. (...) 이 분노도 그저 내 생각뿐이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미트코에게 어떤 의미에서는 사랑했으나 그를 알고 지낸 세월 내내 내게는 그저 이방인이었을 뿐인 이 남자에게 조금이나마 다가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 


나는 그가 대로 쪽으로그를 멀리 데려갈 버스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어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지켜보았다나는 얼마간 그대로 서서 그가 사라진 모퉁이를 바라보았다그런 다음 안으로 들어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내 옆에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아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도 얼굴을 잠시 묻었다.

딱히 슬프거나 아파서는 아니다.

느낀 감정의 모두가 고작 그것이라면 작품에 대한 모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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