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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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선물 받은 유리병 안에 가득한 알사탕을 하나씩 맛별로 빼먹는 기분이다. 재밌다. 완전 마음에 안 드는 인물 유형들이 등장할 때도 있는데 웃고 만다. 화가 나지 않으니 지치지 않아 좋다.

 

현실에서 비슷한 하소연을 한 내용이 다른 문장에 담기니 위로다. 질문은 작품 속에서도 답 없이 남고 말지만. 다급한 변명도, 눌러 사는 마음도, 이해할 수 없이 휘둘리는 어느 날도, 나에게 지고 마는 나도 낯설지 않아 짠하다.

 

결국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끝에서 결정되어 버리는 일이, 일생의 가장 기쁜 순간씩이나 되는 그런 삶은 결코 살지 말아야겠다고…….”

 

가장 불순한의도로 의미로 사용되는 말이 순수성이라고 생각한다. 한 때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내내 순수나 들먹이며 그렇게까지 순진무지하면 곤란하다. 그런 존재는 없고 그런 세상도 없다. 불완전해서 서로 배우며 산다.

 

남의 속물성을 싫어하거나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 이유가 나는 깨끗하다라면 진지하게 들어줄 이유가 없다. 아니 그런 무지한 오해가 위험해 보인다. 단편 제목 공모처럼 많은 순간 알고도 모르고도 공모는 이루어진다.

 

한 때 경제적 독립이 가능한 줄 철없이 믿어서, <연수>의 주인공이 이해하는 관계와 세상이 내게 닿은 꾸짖음처럼 아팠다. 내가 무탈하게 부족하지 않게 살아가기 위한 수많은 노동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

 

내가 뒤에서 막아줄테니까, 그때 오른쪽으로 차선 하나 옮겨요, 지금.”

 

약자여서 온갖 부당함을 겪고 다치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청년 여성 화자들의 이야기를 6편이나 만날 수 있어 감사하다. 자신의 부족함에 주눅 들지 말고, 더 모자란 어른들 사는 꼴을 보고 타석으로 삼기를 바란다.

 

사람들이 죽어도 반성도 사과도 진상규명도 책임자도 없고, 교사가 죽으면 학생 인권을 망가뜨려 참사를 틀어막으려는, 음습하고 몰염치한 이들의 면모와 추태를 잊지 말기를. 갈라치기(divide and rule)에 맞서 꼭 연대를 이루기를!

 

마지막으로 <미라와 라라>의 질문에 답합니다.

 

저기, 육 번 출구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한번 물어봐요. 소설을 읽느냐고 말이에요. 그런 걸 묻는다니, 도를 아십니까도 아니고, 정신나간 사람인 줄 알거라고요.”

 

, 소설 읽는 사람 여기 있습니다.

요즘은 소설만 읽는 듯합니다.

현실에서 간절히 도피 중입니다...

 

책을 덮으면

현실이 눈앞에 바짝 다가와 있습니다.

아마 떠난 적도 없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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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초난난 - 비밀을 간직한 연인의 속삭임
오가와 이토 지음, 권영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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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유는 찾으면 무수하지만, 어쨌든 현실에 늘 지고 지치는 자신이 별로다. 현실감 없는 책 속으로 오늘도 도피한다. 언제까지 이럴까 싶었는데 계속 소설만 읽힌다. 이 따위 현실 다 사라져... 심정.

 

? 낯선 곳이다. 불륜의 세계네. 무척이나 정성스러운 설정과 감각적인 묘사에 첫사랑이니 설렘도 한 가득이다. 소재도 문화도 무척 일본적(?)이라, 민속학 같기도 하고 일본 근대 소설을 읽는 듯도 하다. 그런 점이 흥미롭다.

 

계절의 흐름을 따라 만나고 가까워지는 사람들 이야기라 계절감이 화려하다. 문득 보고 싶어지는 꽃들 이름이 반갑고 - 매화, 벚꽃, 울금, 달리아, 치자, 물옥잠, 연꽃, 모란 등등 - 음식들의 향연도 즐겁다. 특히 말차와 유부.

 

홍차를 우려 레몬즙을 넣어 마시며 읽었는데, 슬그머니 일어나 술을 따르고 싶다. 먹방 보며 식사 하듯, 책 읽다 식욕이 동하는 건가. 여러 의미로 내 생명은 종이에 기록한 활자로 겨우겨우 이어나가는 것 같네...

 

봄에 만나 다시 봄을 맞는 설정이지만 나는 역시 겨울이 가장 좋다. 겨울을 묘사한 문장이 아름다워 행복했다. 쪽빛 염료를 탄 것 같은 짙은 감색 하늘 아래 겨울밤이 고요히 번지고 있었다.”

 

이제 오지 마요.”

 

일본이라서, 소설이라서, 아름다운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2023년 한국에서는 헤어지자했다가 운 좋으면 폭행당하고 운 나쁘면 살해당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가족들도 함께 살해당하기도 한다. 책을 덮자 바로 현실이다,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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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Stars Are Scattered (Paperback, 미국판) - 『별들이 흩어질 때』원서
빅토리아 제이미슨 / Dial Books for Young Readers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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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듄 티셔츠에 홀려서

사심 반으로 구매한 선물용 책이지만,

채색된 만화 형식이라 다행이고(?)

 

후딱 읽어본 덕분에

좁혀들던 내 세계가

다시 저만큼 확장되었다.



 

10여 년도 더 전에 독일 출장 중에 산

그래픽 노블 <Persepolis> 이후 처음인가.

대문자 영어는 신기할 정도로 가독성이 높다.

 

“FOR ME, THE FIRST YEARS ARE LOST.”

 

슬프다는 말도 얄팍하게 느껴지는

서글프게 수미상응하는 작품이다.

더한 현실이 있을 테지.



 

전쟁 중인 나라에 태어나

평생을 전쟁의 소음을 듣고

기아, 폭력, 학살을 경험하거나

 

어쩌면

기후재난으로...

삶이란... 이어지지 않는 답 없는 질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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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문 자리 - 김산아 소설집
김산아 지음 / 솔출판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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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머문 자리들이 갑작스럽게 텅 비워진다. 스스로 이동한 것이 아닌, 오래 머물지 못한, 놀라고 슬프고 무섭고 아프게 갔을 이들의 머문 자리들에 내처 생각이 머무른다. 몸도 따라 지쳐서 간신히 움직거린다.

 

비우고 떠나는 일은 중요하다. 그걸 늦추느라 건강보다 수명을 택한 인류는 아프고 지친 상태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장수의 형태가 고민스럽다. 내가 머무는 자리나 잘 정리하고 살다가 쓰레기 없이(적게) 떠나야겠다고 생각한다.

 

무기력해지고 자기연민이 떠오를 것 같으니 다른 사람들 어떻게 사나 보고 배우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너무 길지 않은 몰입으로 여러 풍경을 만날 수 있는 소설집이라 반갑고 유용했다. 머문 자리와 머물던 자리가 구분되기도.


 

돌아가려면 가진 걸 놓아야 할 거 같아서, 둘 다 가지고 사는 건 이율배반 같아 돌아가지 않을 정도의 양심은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평범하게 살기가 너무 어려운 시절에, 다들 평범한 척하며 대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 요란하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은 일상에 담담하고 서늘한 대처들이 조금조금씩 위로가 되어 쌓인다. 모두들 누군가를 돌보고 있구나.

 

근래에 본 두 편의 영화 중 하나는 원칙과 희망이 가득한 이가 현실에 부딪치다 좌절하는 결말이었고, 다른 하나는 차근차근 지극히 현실적으로 대처하여 당시엔 승리했지만, 세월이 흘러 어이없이 뒤집어진 사실이 모티브였다.

 

지향과 꿈을 따라 현실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수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기도 하고, 어렵게 이룩한 것들이 어이없이 시간과 함께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혹은 시도나 도전이 전무하기도 하다. 개인도 사회도 불완전하고 허약하다.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였다. 불행해도 죽지는 않을 거라는, 절망이 주는 안도였다. 그건 또 하나의 평안한 일상이었고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냥 살면 된다고 생각했다.”


 

일견 힘이 쭈욱 빠지는 진실이기도 하지만, 지친 사람은 물러나고 새로운 이들이 새롭게 힘을 내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안타까움도 돕고 싶은 기분도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모두 각자의 방식대로 하면 될 일이다.


 

느리게 가는 것, 천천히 크는 것, 조그맣게 전하는 것들은 (...) 이에 관한 노력과 애착은 (...) 우리의 삶을 언제까지고 부지하며 갱신해가리라 믿는다.”

 

작가의 시선은 깊이 볼 만큼 날카롭고 누구도 섣불리 판단하지 않을 만큼 맑은데, 나는 과거의 모든 판단들이 눈앞을 흐리게 한다. 땅에 발을 딛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우 중에 떠도는 습기처럼 떠돌며 휘둘리며 사는 건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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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위에서 니체를 만나다 - 사람과 예술, 문화의 연결고리 다리에 관하여
토머스 해리슨 지음, 임상훈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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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목공학을 전공한 할아버지께서는 어린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며 자신이 설계하고 참여한 다리들을 보여주고 관련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을 좋아하였다. 이해하기엔 어린 나이였지만 옛날이야기처럼 재밌고 신기했다.

 

이야기 속에는 정직하고 성실한 이들과 방해꾼들, 거짓말쟁이, 협잡꾼, 도둑들도 등장했다. 학과는 다르지만 안식년에 연구자금을 받아 놀기만 한 교수가 선박에 녹이 슬지 않게 시멘트를 바르자고 했다는 뻔뻔한 얘기도 들었다.

 

성수대교 붕괴참사가 있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기억을 황급히 꺼내보고 할아버지가 설계하신 다리가 아니란 이기적인 안도를 잠시 느끼기도 했다. 그런 분이 작은 다리에서 실족한 후 시신경을 잃어간 것이 잔혹하고 서글프기도 했다.



 

그래서 다리는 내겐 좀 특별한 건축물이다. 내 전공이 아니라 그동안 건너다닌, 방문한 다리 사진과 기록이 없는 것이 지금에서야 많아 아쉽다. 공기도 나쁜 양화대교를 함께 여러 번 걸어준 지금은 아주 멀리 사는 친구도 그립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잘 써지지 않는 학기말 논문을 고민하다가, 겨울눈이 쌓인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다. 아주 작은 다리 난간에 소복한 눈을 치웠다가, 한글로 누구누구 왔다감, 이라고 적혀서 너무 당황해서 다시 눈으로 덮었다.

 

꼬맹이가 다섯 살 때 여행간 어느 장소에 흔들다리가 있었는데, 건너도 좋고 건너지 않아도 좋고, 손을 잡고 건너도 좋다고 했더니, 입구에서 고민하다가 제가 겁은 많은데 막상 해보면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요라고 해서 감동했다.

 

다리란 무엇일까. 다리의 목적은 건너는 것일까, 잇는 것일까, 만나는 것일까. 현실에서는 물론 경험하지 못하는 죽음과 이후의 세계에 대한 묘사에도 다리는 왜 거듭 등장하는 것일까. 인간은 다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의미를 두는가.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무지개는 흔히 인간과 신의 영역을 잇는 연결고리로 여겨졌다. (...) 다양한 문화권에서 무지개는 땅과 하늘 사이를 잇는 기적의 연결점을 만든다.”

 

이런 질문들을 이 책을 통해 이리저리 배우고 생각해보는 시간이 새로운 다리를 건너보는 경험 같아서 즐거웠다. 다리는 물질이고 관념이고, 존재했거나 존재한 적이 없고, 그럼에도 인간의 예술과 철학에 등장한다.

 

다리라는 인공의 길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적 방어는 취약해졌다. 그래서 다리 입구에 요새 같은 작은 성과 탑을 세웠다. (...) 자연이 분리하기로 선택한 것을 악마의 힘으로 연결해서 이 구조물 위로 왕래를 가능하게 하는 것 같았다.”



 

어릴 적 힘겨웠던 육교, 배를 타고 들어가선 섬에 생긴 다리, 장소는 여전하지만, 형태는 완전히 달라진 다리들, 위로는 다닌 적 없지만 아래로는 지나간 다리들. 차로 지나간 다리들, 걸어 지나간 다리들. 모든 계절의 다리들.



 

다리 앞에서, 다리 위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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