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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 - 우리의 민주주의가 한계에 도달한 이유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24년 5월
평점 :
만성피로감에 묵직한 몸을 누였지만, 달콤한 금요일 밤이라 유튜브로 책을 만나보던 9개월 전에는, 흥미롭게 분석된 위기 상황이 아직 내 현실은 아니었다. 무지성, 무능력, 무원칙의 집권 세력의 행태가 기막히긴 했지만, 내란과 독재를 상상하지는 못했다.
연말이 실감나는 12월 초, 기념일이 많은 일정을 가족들과 의논하던 화요일 밤, 오용범위가 확대된 AI, 딥페이크같은 뉴스를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지켜보았다. 수요일 출근을 위해 잠들어야 하지만 잘 수 없던 밤사이 계엄은 해제시켰지만, 내란은 종식시키지 못했다.
추운 겨울, 온 가족이 번갈아 참가했던 집회는 체력은 고갈시켰지만, 살기 위해 서로에게 온기와 희망을 채워주고, 두려움 대신 용기를 교환하고, 한 번도 직접 만나지 못한 다양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귀한 기회이자 학습의 공간이었다.
2016년 10살과 5살이던 우리 집 십대들은, 2024년 중고생이 되어, 뉴스 대신 광장에서 탄핵정국을 경험하고 스스로 기록했다. 우리가 공화국에 살고 있으며, 내가 권력의 주체인 시민이며, 이념으로 호명되는 민주정이 어떤 체제적 가치를 가지며, 한국사회가 어떻게 위태로운지를 찬찬히 배우고 있었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의 문장 속 '미국'을 '대한민국'으로 바꾸면 이제는 소름이 일도록 내 이야기로 들린다. 지목된 위협의 내용들은 지금 내가 당면한 구체적 현실로 이해된다. 그리고 나는,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자'들인지를 묻고 또 의심하게 만든다.
이 책은 개인이 스스로 깨우쳐 전체를 계몽하라는 식의 수양과 깨달음의 권장도서가 아니다. '극단주의 세력'을 알아보라고 선명하고 간곡한 설득력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이런 극단성이 어떤 토양과 배경에서 창궐하게 되었는지도 명료하게 설명한다. 일부는 상식처럼 익숙한 지적이고 - 여전히 유효한, 어떤 내용은 가린 눈을 벗겨주는 시원한 손길처럼 반가운 분석이다.
미국 정당이 제 수명과 집권을 위해 거침없이 저지르는 행위들은, 미국처럼 차선과 최악의 양당제 형식을 갖춘 한국 사회에 거의 바로 대입해서 생각해볼 내용들이다. 정치인들이 택하는 태도와 선택과 실천의 방식은, 주권자인 나에 대한 수치심과 울화를 동시에 일으켜, 폭염에 노출된 듯 얼굴을 달군다.
민주주의 사회의 정당이 민주주의를 저버린다. 다수결을 따르는 듯하지만, 실제로 적용되는 통치 방식은 교묘하게 반다수결 적이다 - 자유를 제한하고 억압하고 지배. 법치주의의 한계 혹은 결함에 관한 사례와 분석은, 합법적 독재라는 모순 같은 현실이 어떻게 가능한지, “족쇄를 찬 다수”가 어떻게 위협을 가하는지, 헌법을 따른 결과가 어떻게 “소수의 독재”를 가능하게 하는지, 한기가 들도록 잘 설명한다.
하지만 그 약점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른 정치체제를 대안으로 삼는 실험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필요한 것은 엉망진창이 된 그러나 아직 완전히 망가지지 않은 '민주정democracy'을 민주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한국의 정치 현실을 톺아보면, 상당히 오랜 기간은 할 일이 없어질 걱정이 없을 정도로 해야 할 일들이 많다.
부족하거나 부재해서 채워야했던 내용들에 더해, 내란 정권이 망가뜨린 내용들이 무수하다. 흔히 엄중한 위기, 총체적 난국이라고 부르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의 위기와 난국으로 만들어야지, 민주주의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살고자하는 이들의 좌절과 포기와 패배여서는 안 된다.
저항은 촘촘하고 끈질기고 거세겠지만, 이제는 주류 언론을 틀어쥔 세력이 독점적인 스피커가 되는 시대가 아니다. 비속한 협잡 세력이 아무리 크고 요란한 목소리로 떠들어도, 가스라이팅과 설득을 당하지 않을 방법은 있다. 단 한 명의 메시아와 구원자를 간구하지 않아도, 함께 하는 연대가 끊어지지 않으면, 함께 바꿔나갈 수 있다는 것도 배운다.
정치 - 삶 - 는 개인기가 아니라 잘 정비된 시스템과 협업의 결과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 특별한 재능과 엘리트주의에 의존하거나 현혹되지 않을 수 있다. 숨이 턱 막히는 갑갑함을 뚫어준 공기 한 줌은 매번 자기 자리에서, 원칙과 가치를 지키며 산 이들의 힘에서 나오는 것을 요 몇 달 동안에도 거듭 보았다.
자유가 지배자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법치가 피지배자의 사슬이 되는 엉망진창인 사회를 겪게 해서 당혹하고 미안했지만, 아이들이 수동적 존재들도 미숙한 존재들도 아니라는 것을 다시 기억한다. 첫 대선투표를 함께 하게 될 큰 아이와 솔직하게 의견을 나누는데 열심인 둘째에게 감사하며 기록을 남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