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차 없는 나의 촉법소녀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 31
황성희 지음 / 현대문학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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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有名)하지 않은 존재들의 이름과 사소하고 시시하게 취급되는 일상의 시간들조차 열심히 불러주는 시인이라고 전해 들었다.

 

좋아하는 이들의 말에는 늘 솔깃하니 마음이 울리는 호평을 듣고 나서 만난 시인의 모든 시들이 잘 보이지 않는잊혀진지워진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존재들을 부르는 목소리로 들렸다시인이 돌아본 모든 존재들이 오래 소외당했거나 가장 쉽게 소외되기 쉬운 아주 사적인 존재들로 느껴졌다그 세상은 고공관찰로 파악되는 말끔한 세상의 모습이 아니었다.

 

20대엔 모든 시가 반갑고 좋기만 했다이제는 시를 읽는 일에 용기와 체력이 필요하다심지어 아는 시를 다시 읽는 일도 그렇다여전히 읽히지 않는 시들은 황당하고 속상하고 예나 지금이나 절창들인 시들 역시 강렬한 감정을 품은 만큼 난감하고 버겁다.

 

황성희 시인이 시 속으로 데려온 모든 사소한 존재들은 이전까지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이 무색할 만큼 반짝거린다그리고 그만큼 시들 또한 만물을 주관할 능력을 키우며 성장해가는 듯 풍성해진다인간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미시세계의 원자들에 대해 전 세계가 연구하면서도 일상에서의 실체적인 소외는 못 보거나 안 보거나 한다그래서 사는 일이 너나없이 지치고 서글픈가 싶기도 하다시들을 읽을수록 내 일상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오래 전 융의 심리학 강의를 듣고 기억에 남는 내용들 중 하나가 '우울depression'이라는 말의 공허에 대해서였다잘 생각해보면 우울하다라는 의 실체란 건 모호하기 그지없거나 공허한 호명이다. ‘우울하다고 느끼는’ 이들에게 물어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대화에서 우울은 사라지고 신체적 느낌들이 대체된다머리가 아프다배가 아프다다리가 무겁다팔이 저리다…….

 

아예 우울함을 드러내지 않고 하루 내내 슬픈 느낌도 들지 않고 증상을 감추고 가리며masking 자신의 고통을 경시하는 방식으로 대처하는 전혀 우울해 보이지 않는 가면우울증masked depression이 있다공식적인 진단 구분이 존재하지 않지만 상당히 흔한 질환이고오히려 신체 통증으로 전혀 상관없는 진료를 받거나 검진을 받기도 한다슬픔을 느끼고 싶지 않아 강박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한다마치 한동안 정보폭탄 속에 사는 방식을 선택하니 판단할 시간도 정서적 여백도 없어 오히려 편안했던 2020년의 내 모습 또한 그렇다.



그래도 아프다는 신호는 몸의 어느 부위든 두드리게 마련이고내 경우에는 복통인 듯 아닌 듯 오락가락하는 위통이 달라붙어 있다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우울증을 어떻게 평가하고 진단할 수 있을까불안이나 우울과 꽤 오랜 시간 함께 지낸 자신감에 나는 이번에도 단지 번거롭고 성가실 뿐이지만올 해 역시 생존하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그런 시간이 이어질 거란 생각이 들 때마다 명치가 구겨지는 느낌이 든다.

 

[가차 없는 나의 촉법 소녀]의 시들을 읽으(려 노려하)며 마치 기억나는 시절부터의 시간을 누가 억지로 헤집듯 속이 울렁거렸다딱히 반드시 감추고 싶은 기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도 나는 알지 못하는 알려지기 싫은 기억이 떠오를 것처럼 불쾌했다날카로운 사회의식과 발화 방식과는 별개로 시인은 담담하게 자신이 감내한 고통을 이야기하는 정제된 작품들 안에서 시인의 언어들이 단정할수록 내 감정은 경계색을 현란하게 발산했다.

 

제목 때문이었을까. <난동 직전>이라는 시를 며칠 째 잡고 읽고 또 읽었다말이나 글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단 한글자도 떠오르지 않아 마치지 못하는 업무처럼 갑갑했다. 2020년 내내어쩌면 더 오랜 시간 상상 속에서만 가능했던꼭 한번이라도 부리고 싶었던 난동이 새삼 아쉬웠던 심정 때문이었는지, ‘직전이라는 단어가 풍기는 아찔한 긴장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헛다리를 짚었든 둘 다이든 별 상관은 없다.

 

난동 직전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

단 한 가지 결말을 위해 수십 년을 허비해왔다

똑같은 모양에 머무르지 못하고 매 순간 무너졌다

...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아무의 멱살이라도 잡아야 했다

한 번 정도는 확실한 것을 붙잡고

흔들어보고 싶었다

 

출발하지 못하는 차들이 비키라고

경적을 울려댈 때면

가장 큰 경적을 울리는 차를 향해

왜 달려들지 않겠나

 

꽉 쥔 주먹으로 차창을 깨는

구체적 사건을 저지르고

피범범 손엔 팡파르처럼

왜 경적을 울리지 않겠나

 

어쩌면 나는

이 한 장면을 위해 급조되었는지 모른다

 

살가죽이 째지고

뼈가 부서지는 타격감을 위해서라면

 

모든 호흡이 매도당하고 낭비되는

쓸쓸함이야 얼마든지

 

아이약한 것어두운 것이런 존재들을 부르는 시인이라 감동하고 감사했는데 이번엔 시인이 불러내는 소녀의 윤곽이 뚜렷해질수록 소름이 끼친다시사 뉴스라면 머리끝까지 화가 날지라도 동요 없이 들을 수 있을 일이 시인의 고민과 문제의식으로 표현되자 마주할 자신이 없어진다제목에 등장한 소녀의 상태를 바로 아는 일도 성장을 보는 일도 두렵다시인은 반복해서 아직 악몽을 꾸는 어린 사람’, ‘자라지 않는 것을 선택이라며 쳐다보기 무서운 그 소녀를 부른다.

 

억지로 눈을 뜨고 끝까지 읽은 상당히 비겁한 모양새이긴 하지만어쨌든 다 읽고 나니 50번의 부름 - 50편의 시 을 통해 시인은 서서히 치유되고 추스르고 화해하고 용서하며 적어도 그 자리에서는 벗어났구나 싶다자신의 언어만큼 용감하고 단단한 분일 것이다단 한 발도 떼기 싫어 다 잊히기만 바라는 그런 순간들이 여러 모로 멀쩡한 어른들에게 얼마나 많은지를 모르지 않는 나이라서 그렇다그런 어른들 말고도 이 시들이 필요한 소녀들은 이 시들을 만나게 될까……어차피 크리스마스 소원은 안 이뤄졌으니 다시 빌어볼까 싶다.

 

시인의 말

...

당신의 시간을 조금 빼앗고

내 방식으로 낭비해도 되겠는가

 

당신의 마음에 나의 상처를 새겨 넣고

조금 흔들어보아도 되겠는가

...

 

지난 며칠 동안 내가 한 일이 이거구나시인의 시를 읽었다는 내 말은 이 말에 다름 아닌 것 같다.

 

말랑할 것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시어보다는 좀 더 다정스런 산문 글을 읽게 되리란 막연하고 멍청한 기대를 걷어차듯 시인의 에세이를 읽고 소스라치는 경험을 했다가면 우울증을 앓는피에로를 두려워하는 독자가 스티븐 킹의 괴물 피에로(IT)를 마주칠 줄이야황성희 시인의 강함은 에세이에서 절정을 맞는다자신의 일부로 녹아 붙은 태생적인 두려움의 정체를 찾고 시를 만나고 그 괴물의 근원과 시의 구동력이 동일한 힘이라는 것을 인식하고……이제 시인은 다시는 도망갈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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