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입맛에 맞는 것을 그렇게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일까. 교보에서 사려고 했던 책의 목록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이 책이 내 손에 잡히게 되었는지, 어떻게 내 눈에 들어온 것인지.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저자를 전에 알던 것도 아니고, 책의 표지가 화려한 것도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감각. 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콜레라가 단순히 전염병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4개의 기질(choleric, melancholic, sanguine, phlegmatic)을 함축하고 있음을 안 이후에, 가스통 바슐라르의 4원소(불, 물, 공기, 흙)가 다시 4개의 기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나중에 확인한 이후로. 결정적으로는 다이앤 애커먼의 ‘감각의 박물학’을 읽은 이후로 확실히 나는 ‘감각’이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이며 의학적이고 진화론적이며 인류학적이고 경험적인 그리고 시적이기까지 한 어떤 것에 감수성이 좀 예민해진 듯 하다. 그런 맥락으로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도 흥미롭게 읽었고.. 이제 이 감각이 우리 몸을 벗어나 좀 더 확장된 것에서, 즉 건축에서 어떻게 개념적으로 또는 물리적 건축으로 표현되어 있을 것인지 나는 궁금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단하다. 시각 우위의 건축을 ‘여러 감각이 관여하는 경험’으로서의 건축으로 돌려놔야 한다는 유하니 팔라스마의 주장 자체도 의미 깊지만, 건축가이지만 철학자보다 더 철학적으로 명료하게 이를 풀어내는 솜씨가, 읽는 내내 감탄을 자아냈다. 현상학을 바탕으로 펼쳐내는 깊이 있는 건축론을 읽는다는 것이 허무주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처방이 될지는 전혀 몰랐지만, 그런 효과가 내게는 있었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다.
#
시각을 우리의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에는 생리학적, 지각적, 심리학적으로 매우 훌륭한 근거들이 있으며 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시각을 다른 감각들과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으로부터 제기된다. 다른 감각을 제거하거나 억제하면서, 세계에 대한 경험은 점차적으로 시각 영역에 국한된 것으로 축소, 제한된다. 이러한 분리와 감소로 인해 지각체계에 있었던 내적인 복합성과 포괄성, 그리고 조형성이 산산조각 나면서, 분리(detachment)와 외부화(alienation)의 감각은 늘어만 간다.
#
무의식적이고 촉각적인 형상화와 초점을 두지 않는 주변적인 시야는 체험에서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만들어낸다. 초점을 두는 시야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와 맞서게 하지만, 주변적인 시야는 우리를 세상의 살(flesh of the world)로 감싸준다. 시각이 가지는 헤게모니에 대한 비평도 필요하지만, 우리는 그와 함께 시각 그 자체의 가장 중요한 본질과 다양한 감각 영역들의 협력 가능성을 제고해야 한다.
#
댄서는 발가락에 귀가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만약 우리의 몸을 이해하는 일이 쉬었다면, 누구도 우리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리처드 로티)
화가나 시인이 그가 세상과 직접 마주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모리스 메를로-퐁티)
#
메를로-퐁티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삼투적(osmotic) 관계-세계와 자아가 서로를 해석하고 규정하는-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감각들 사이의 동시성(simultaneity)과 상호작용을 강조하였다. 메를로-퐁티의 다른 언급을 살펴보자. ‘(그러므로)나의 지각은 시각적, 촉각적, 청각적으로 주어진 것의 합(sum)이 아니다. 나는 나의 존재 모두(whole being)를 이용하여 전체적인 방식으로 지각한다. 나는 사물의 독특한 구조, 독특한 존재방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대상이 내 모든 감각에 동시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기도취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눈
#
오직 시각만이 분리되었을 때 허무주의적 태도를 가능하게 한다. 허무주의적인 촉각은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는 촉각이 가지는 불가피한 성격들인 근접성, 친밀성, 진실성, 동일시 때문이다.
#
시인은 ‘존재의 경계’에서 뿐만 아니라, 가스통 바슐라르가 언급했듯 언어의 경계에서도 이야기한다. 같은 의미에서 예술과 건축 모두의 일반적 임무는 분화되지 않은 내면세계에 대한 경험을 재구축하는 것이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그저 관중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와 분리불가능한 방식으로, 그 안에 속해 있다. 예술 작업에서, 실존적 이해는 세계와의, 그리고 세계-내-존재와의 직접조우를 통해 일어난다. 이는 개념화되거나 지적으로 처리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
좋은 건축은 눈에 의한 기분 좋은 만짐을 위해 만들어진다.
#
안개와 황혼이 상상력을 일깨우는 이유는 그것들이 시각적 이미지를 명료하지 않고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안개 낀 산경을 그린 중국화나 료안지 경내의 갈퀴로 무늬를 낸 모래정원은 꿈결 같고, 명상할 때와 비슷한 상태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과정에서 초점을 두지 않는 보기의 방식이 발생한다. 멍한, 아무 생각이 없는 시선이야말로 물리적 이미지의 표피 속으로 뚫고 들어가 무한성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
건물들은 우리의 시선에 반응하지 않지만, 소리는 건물에 반향 되어 우리의 귀로 들어온다. 월터 옹은 ‘중심부로 회귀하는 소리의 작용은 인간의 우주에 대한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하면서, ‘구강 중심의 문화에서,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을 때 우주는 지속되는 사건이 된다. 인간의 세계의 중심, 세계의 배꼽(umbilicus mundi)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현대세계에서 중심에 대한 감각이 상실된 것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들을 수 있는(audible) 세계의 통합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
시각은 외로운 관찰자의 감각이다. 반면 청각은 연결과 연대의 감각을 창출한다. 우리의 눈은 대성당의 어둡고 깊은 공간에서 외롭게 방황하지만 오르간의 소리는 공간에 대한 친밀감을 즉각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
건축에 의해 창조되는 가장 본질적인 청각 경험은 평온함(tranquility)이다. 건축은 물질과 공간, 빛을 통해 침묵에 이른 구축의 드라마를 제공한다. 궁극적으로, 건축은 석화된 침묵이 만들어내는 예술형식이다.
#
그러므로 진정한 건축적 경험은 접근’하기’와 대치’하기’의 구성으로 이루어지며, 파사드를 형태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건축적 경험을 구성하는 것은 행동이다. 문의 시각적 형태보다는 열기라는 행동이,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창문 그 자체 보다는 창문 안팎을 내다보거나 들여다 보는 행동이, 시각적 디자인으로서의 벽난로 보다는 온기의 영역을 점유하는 행동이 건축적 경험을 채우게 된다. 건축적 공간은 물리적 공간인 동시에 삶이 반영된 공간이며, 삶이 반영된 공간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형태(geometry)와 측정가능성(measurability)의 경계를 넘어선다.
#
공간(space) 대신 ‘공간을 두기(spacing)’, 시간 보다는 ‘시간을 들이기(tim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