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칼더의 모빌을 보고 왔다. 수직의 선에 가로로 기우뚱하게 그렇지만 절묘하게 중심을 잡은 모빌들. 큰 모빌들일수록 오히려 가볍게 중력을 거부하는 듯. 그리 보였다. 가만히 보니 수직의 철선과 수평으로 휜 철선이 만나는 지점. 그 각각의 무게중심들간의 묘한 균형이 만들어내는 조화가 그런 가벼움을 자유로움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그 무게중심들은 각각의 선들을 분절하여 공간도 시간도 좀 더 작고 가볍게 만들어 부유하는 기분을 자아내는 듯 싶었다.

 

리움에서의 알렉산더 칼더 전시회 관람은 계획했던 일이지만, 씨네큐브에서의 블루 재스민관람은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재스민(케이트 블란쳇)은 뉴욕의 화려함을 뒤로한 채, 샌프란시스코의 여동생 집에 얹혀 살기 위해 온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삶과 뉴욕에서 남편(알렉 볼드윈)과의 삶이 교차하는데, 그 교차점이 또한 오묘하다고 생각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화자처럼 재스민은 신뢰할 수 없는 주인공임을 그 회상씬들이 보여주는데교차점이 가중될수록 재스민이라는 인물의 추한 실체가 드러난다. 그렇지만 서서히 더 빠른 템포로 나타나는 듯한 교차점이 누적되어 갈수록, 우리는 재스민이라는 인물을 또한 받아들이게 된다. 연민을 느끼게 된다. 지독한 쓸쓸함과 더불어.

 

민음사판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첫 페이지를 보니, 37살 때를 회상하며 시작하고 있었다. 두 번 읽었는데도 기억이 희미하다. 37살 때를 회상하는데, 37살의 그가 다시 대학생 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다시 대학생 이전 시기를 회상하는 대목도 있다. 왜 이런 방식여야 했을까? 분절의 지점들을 이렇게 여러 개 만든 이유가 있을까? ABS(Anti-lock brake system)같은 기능이 필요했던 걸까..

 

알렉산터 칼더의 모빌,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의 편집, 하루키 노르웨이의 숲의 구조. 그 모든 분절점을 생각하며, 그 모든 무게중심을 연민하며. 주말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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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휴버트 드레이퍼스 외 지음, 김동규 옮김 / 사월의책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1.

이슈메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미 느낀 바 있다. 인간이란 어떤 경우에서건 자기가 얻을 수 있는 행복에 대한 기대치를 결국에는 낮추거나, 적어도 바꿔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2.

호메로스 → 아이스킬로스, 예수, 바울, 아우구스티누스 → 단테, 칸트, 니체 → 멜빌

호메로스로 대표되는 그리스시대는 다신주의적 관점을, 아이스킬로스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는 유일신적 관점을, 멜빌로부터 다시 다신주의적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루터와 마호메트, 그리고 중세 해석자들을 등장시켜 번뜩이는 통찰력을 드러냈던 사사키 아타루를 떠올리게 한다. 호메로스로부터 멜빌까지. 마치 세계를 하나의 빛으로 꿰뚫은 것 같다.

 

 

3.

가장 강렬한 빛을 내뿜는 내용은 6. ‘광신주의와 다신주의 사이-멜빌의 악마적 예술이다.

 

 

4.

유일신적 세계관과 니체적 세계관 모두에서 발견되는 허무주의를 극복하는 처방으로 저자들은 포이에시스메타 포이에시스를 말한다.

 

포이에시스적 실천 즉 창작적 활동은 특히 사물을 최선의 상태로 만드는 장인의 기술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중략) 우리 시대의 일반적 경향이 창작적 기술의 발전과는 동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창작 능력이 여전히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영역들이 있다. 예를 들어 야구나 테니스 기술 또는 피아노 연주기술은 지금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전수된다.’

 

메타 포이에시스는 열광하는 군중과 하나가 되어 일어나야 할 때가 언제이고, 발걸음을 돌려 그곳에서 재빨리 빠져 나와야 할 때가 언제인지를 알아차리는 차원 높은 기술

 

 

포이에시스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하다. ‘생활의 달인프로그램에서 봐 왔던 것이 그거니까. ‘행복의 건축이나 일의 기쁨과 슬픔에서 본 알랭 드 보통의 철학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

 

메타 포이에시스 하면 떠오르는 문장. ‘신이시여, 제게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화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그리고 그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여기서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메타 포이에시스라고 말해도 되겠다.

 

 

이렇게 얘기하니 확실히, 벌써부터 진부하다. 하지만 실제 이 책을 처음부터, 즉 그리스적 아레테를 해석하는 지점부터 멜빌의 모비 딕을 해석하는 지점까지 읽으면(자연스럽게 몰입하게 되는데) 뭔가가 번쩍 한다. 어두운 마음 한 구석에서 춤추는 빛의 무리가 쿵짝거리는 게 느껴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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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입맛에 맞는 것을 그렇게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일까. 교보에서 사려고 했던 책의 목록들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이 책이 내 손에 잡히게 되었는지, 어떻게 내 눈에 들어온 것인지.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저자를 전에 알던 것도 아니고, 책의 표지가 화려한 것도 아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아마 감각. 이라는 단어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르케스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콜레라가 단순히 전염병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라 4개의 기질(choleric, melancholic, sanguine, phlegmatic)을 함축하고 있음을 안 이후에, 가스통 바슐라르의 4원소(, , 공기, )가 다시 4개의 기질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나중에 확인한 이후로. 결정적으로는 다이앤 애커먼의 감각의 박물학을 읽은 이후로 확실히 나는 감각이라는 단어가 일으키는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이며 의학적이고 진화론적이며 인류학적이고 경험적인 그리고 시적이기까지 한 어떤 것에 감수성이 좀 예민해진 듯 하다. 그런 맥락으로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도 흥미롭게 읽었고.. 이제 이 감각이 우리 몸을 벗어나 좀 더 확장된 것에서, 즉 건축에서 어떻게 개념적으로 또는 물리적 건축으로 표현되어 있을 것인지 나는 궁금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단하다. 시각 우위의 건축을 여러 감각이 관여하는 경험으로서의 건축으로 돌려놔야 한다는 유하니 팔라스마의 주장 자체도 의미 깊지만, 건축가이지만 철학자보다 더 철학적으로 명료하게 이를 풀어내는 솜씨가, 읽는 내내 감탄을 자아냈다. 현상학을 바탕으로 펼쳐내는 깊이 있는 건축론을 읽는다는 것이 허무주의에 대항하는 하나의 처방이 될지는 전혀 몰랐지만, 그런 효과가 내게는 있었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다.

 

 

 

#

시각을 우리의 가장 중요한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에는 생리학적, 지각적, 심리학적으로 매우 훌륭한 근거들이 있으며 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시각을 다른 감각들과의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으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으로부터 제기된다. 다른 감각을 제거하거나 억제하면서, 세계에 대한 경험은 점차적으로 시각 영역에 국한된 것으로 축소, 제한된다. 이러한 분리와 감소로 인해 지각체계에 있었던 내적인 복합성과 포괄성, 그리고 조형성이 산산조각 나면서, 분리(detachment)와 외부화(alienation)의 감각은 늘어만 간다.

 

 

#

무의식적이고 촉각적인 형상화와 초점을 두지 않는 주변적인 시야는 체험에서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만들어낸다. 초점을 두는 시야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와 맞서게 하지만, 주변적인 시야는 우리를 세상의 살(flesh of the world)로 감싸준다. 시각이 가지는 헤게모니에 대한 비평도 필요하지만, 우리는 그와 함께 시각 그 자체의 가장 중요한 본질과 다양한 감각 영역들의 협력 가능성을 제고해야 한다.

 

 

#

댄서는 발가락에 귀가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만약 우리의 몸을 이해하는 일이 쉬었다면, 누구도 우리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리처드 로티)

 

화가나 시인이 그가 세상과 직접 마주하는 것 이상의 무엇을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모리스 메를로-퐁티)

 

 

#

메를로-퐁티는 자아와 세계 사이의 삼투적(osmotic) 관계-세계와 자아가 서로를 해석하고 규정하는-를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감각들 사이의 동시성(simultaneity)과 상호작용을 강조하였다. 메를로-퐁티의 다른 언급을 살펴보자. ‘(그러므로)나의 지각은 시각적, 촉각적, 청각적으로 주어진 것의 합(sum)이 아니다. 나는 나의 존재 모두(whole being)를 이용하여 전체적인 방식으로 지각한다. 나는 사물의 독특한 구조, 독특한 존재방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대상이 내 모든 감각에 동시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자기도취적이고 허무주의적인 눈

 

 

#

오직 시각만이 분리되었을 때 허무주의적 태도를 가능하게 한다. 허무주의적인 촉각은 상상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이는 촉각이 가지는 불가피한 성격들인 근접성, 친밀성, 진실성, 동일시 때문이다.

 

 

#

시인은 존재의 경계에서 뿐만 아니라, 가스통 바슐라르가 언급했듯 언어의 경계에서도 이야기한다. 같은 의미에서 예술과 건축 모두의 일반적 임무는 분화되지 않은 내면세계에 대한 경험을 재구축하는 것이다. 그 세계에서 우리는 그저 관중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세계와 분리불가능한 방식으로, 그 안에 속해 있다. 예술 작업에서, 실존적 이해는 세계와의, 그리고 세계--존재와의 직접조우를 통해 일어난다. 이는 개념화되거나 지적으로 처리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다.

 

 

#

좋은 건축은 눈에 의한 기분 좋은 만짐을 위해 만들어진다.

 

 

#

안개와 황혼이 상상력을 일깨우는 이유는 그것들이 시각적 이미지를 명료하지 않고 모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안개 낀 산경을 그린 중국화나 료안지 경내의 갈퀴로 무늬를 낸 모래정원은 꿈결 같고, 명상할 때와 비슷한 상태를 불러일으키는데, 이 과정에서 초점을 두지 않는 보기의 방식이 발생한다. 멍한, 아무 생각이 없는 시선이야말로 물리적 이미지의 표피 속으로 뚫고 들어가 무한성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

건물들은 우리의 시선에 반응하지 않지만, 소리는 건물에 반향 되어 우리의 귀로 들어온다. 월터 옹은 중심부로 회귀하는 소리의 작용은 인간의 우주에 대한 감각에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하면서, ‘구강 중심의 문화에서, 인간이 우주의 중심에 있을 때 우주는 지속되는 사건이 된다. 인간의 세계의 중심, 세계의 배꼽(umbilicus mundi)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있다. 현대세계에서 중심에 대한 감각이 상실된 것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들을 수 있는(audible) 세계의 통합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것은 시사 하는 바가 크다.

 

 

#

시각은 외로운 관찰자의 감각이다. 반면 청각은 연결과 연대의 감각을 창출한다. 우리의 눈은 대성당의 어둡고 깊은 공간에서 외롭게 방황하지만 오르간의 소리는 공간에 대한 친밀감을 즉각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

건축에 의해 창조되는 가장 본질적인 청각 경험은 평온함(tranquility)이다. 건축은 물질과 공간, 빛을 통해 침묵에 이른 구축의 드라마를 제공한다. 궁극적으로, 건축은 석화된 침묵이 만들어내는 예술형식이다.

 

 

#

그러므로 진정한 건축적 경험은 접근하기와 대치하기의 구성으로 이루어지며, 파사드를 형태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건축적 경험을 구성하는 것은 행동이다. 문의 시각적 형태보다는 열기라는 행동이,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창문 그 자체 보다는 창문 안팎을 내다보거나 들여다 보는 행동이, 시각적 디자인으로서의 벽난로 보다는 온기의 영역을 점유하는 행동이 건축적 경험을 채우게 된다. 건축적 공간은 물리적 공간인 동시에 삶이 반영된 공간이며, 삶이 반영된 공간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형태(geometry)와 측정가능성(measurability)의 경계를 넘어선다.

 

 

#

공간(space) 대신 공간을 두기(spacing)’, 시간 보다는 시간을 들이기(ti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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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특수성이라는 딱지가 망막에 붙어 있었나. 일상화된 테러, 분리장벽, 분노와 불안, 흥건한 피와 부러진 뼈들. 공포에 절은 눈빛.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이미지는 이런 것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소설을 읽기 전에 나 스스로는 그런 것에 그리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그 딱지는 의외로 착 달라붙어 있었던 거다.

 

이 소설의 도회적 분위기가 그래서 의외였다. 현실이 초현실을, 초현실이 현실을 침투하는 소설의 형식보다 오히려 뉴욕이나 서울, 파리나 도쿄. 세상의 모든 대도시 시민들이라면 느낄 만한 것을 이 소설에서 똑같이 느꼈다는 것이 의외로 다가왔다.

 

작가의 주된 관심사와 그 관심사들간의 평행성이 그런 느낌을 갖게 한 원인 아니었을까. 첫 단편을 시작으로 주요 주제를 대략 나열해 본다면 - 심심함, 거짓말, 싱글맘이 된 딸, 위장결혼, 바람난 아내, 이혼 후의 외로움, 이혼 후 아들을 자주 못 만나는 아빠, 내 안의 나도 모르는 나, 항상 싸우는 부모, 향수에 미친 아내, 유산한 아내와 그녀의 남편, 고독, 투기를 통해 횡재를 노리는 사람들

 

단편을 한 편씩 읽어나가다 보면 작가가,

이 모든 도회적 주제 하나 하나를 폭탄테러나 자살테러와 동급으로 보고 있음이 느껴진다. 아빠와 엄마와의 일상적 싸움으로 인해 누구보다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아이가 지닌 문제가 폭탄테러만큼 똑같이 시급하고 중대한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듯 하다.

 

~듯 하다. 라고 썼지만 실은 같다고, 나 또한 그리 생각한다고 말하고 싶다. 무서운 것. 우리가 드라마에서 시트콤에서 개그프로에서 자주 접하는 도회적이고 현대적인 문제들과 폭탄테러로 누군가의 팔다리가 잘리는 것은 똑같다는 것. 똑같이 무서운 일이라는 것.

 

 

두 개의 이야기만 언급해 볼까.

 

표지 디자인에 등장하는 금붕어 이야기. 세르게이 고랄리크는 러시아에서 이스라엘로 이주한 남자다. 그가 젊었을 적에 KGB가 집 문을 자주 두드렸다. 아버지가 시온주의자라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겁나 이주했다. 그에게는 금붕어가 한 마리 있는데, 이게 마법의 금붕어다. 그 금붕어는 세르게이의 두 가지 소원을 들어준 상태인데여동생의 암을 치료해 달라는 것과 동거녀의 아이의 기형적인 뇌를 치료해 달라는 것(얼마 지나 동거녀는 다른 남자에게로 갔다). 그런데 요나탄이라는 남자가 소원을 들어주는 금붕어가 있다면 어떤 소원을 빌겠냐는 질문을 사람들에게 묻는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세르게이의 집을 방문하고세르게이는 그가 마법 금붕어를 낚아채기 위해 왔다고 생각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다. 금붕어는 마지막 한 가지 소원을 요나탄을 다시 살리는데 사용하라고 종용한다. 결국 그는 우발적 살인을 없던 일로 하는 소원을 사용한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그냥 금붕어. 다시 살아난 요나탄(그는 자기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영원히 모르겠지만)이 그에게 묻는다. 물고기에게 어떤 소원을 빌 건가요? 세르게이는 아무 소원도 빌지 않을 거라고. 그저 커다란 유리병에 물고기를 넣어 선반 위에 올려두고는 하루 종일 얘기를 할 거라고. 아무 얘기나 상관 없다고, 스포츠든 정치든. 아무거나.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이 금붕어에게 무슨 소원을?)

 

세르게이에게 고독은 KGB만큼 무서운 것. 그렇게 된 것이다.

 

 

남편이 죽었다. 그녀가 운영하는 식당에는 개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남편을 묻은 다음날 식당을 열려고 한다. 아들은 분통을 터뜨린다. 그래도 그녀는 연다. 역시 손님은 들지 않는다. 이제 영원히 식당 문도 닫아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스무 명 가까운 러시아 사람들이 들이닥친다. 그러고는 자기들이 싸 온 음식을 식당에서 그녀와 함께 시끌벅적 마시고 먹는다. 그러고는 이제 그녀에게 요리를 시켜 또 마시고 먹는다. 손님으로 온 남자가 마지막으로 지폐를 지불하고 묻는다. 남편 분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아내를 혼자 두고 갔네요? 그러면 안 되는데. 그녀는 안간힘을 쓰며 눈물을 참는다.  (애도하는 자들의 식사)

 

이 초현실적인 식사 이야기를 읽은 나도 안간힘을 써야 했다.

 

 

크고 파란 버스? ‘완전히 혼자는 아닌? ‘문예창작은 어떤가? 내가 이 단편들에서 쓰라린 아픔을 느낀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여기 나, 바로 여기 내가 아는 사람들의 삶의 단면들. 저 멀리 모래 먼지로 희뿌연 도시의 자살 폭탄 테러가 실은 서울 한 복판에서도 다른 양상으로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다는 진실 때문 아닐까.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리면 두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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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16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2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중산모자(bowler hat)가 눈에 들어온다. 예외적인 소품.

 

오랜 시간이 지나, 읽었던 소설을 떠올리면 어슴푸레한 잔상만 남아있게 마련인데, 특이하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어슴푸레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문장이 기억에 남았었다. 정사를 나누고 싶은 욕망과 수면의 욕망을 분리했던 문장과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는 문장. ‘einmal ist keinmal’ 같은 문장.

 

중산모는 기억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다시 다 읽은 후에 보니 민음사의 새로운 표지디자인,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선택이었는지 새삼스럽다.

 

사비나의 중산모는 이들 네 명 모두와 관련된 유일한 소품이다. 네 명하고만 관련된 소품도 아니다. 그렇지만 특히 토마시와의 에피소드에서 뭔가가 탁 걸렸다. 나체인 채로 중산모를 쓰고 서 있는 사비나를 바라보는 토마시. 살짝 변태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곧이어 키치라는 단어가 떠오르며.. 드라마나 영화에서 샤워를 마친 여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의 하얀 와이셔츠만 걸치고 거실에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한다면하얀 와이셔츠는 가리면서 드러낸다. 모자도 마찬가지다. 다만 드러내는 범위가 다를 뿐. 모자는 마치 허리띠를 허리에 차지 않고 머리에 두른 모습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중산모는 머리 아래 전체, 사비나의 몸 전체를 섹시하게 만들고 만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는 내게는 이 이미지가 두 사람간의 독특한 성관계 보다는 오히려 토마시가 어떤 사람인지를 인지하게 만들었다.

 

그는 관능 기계.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섹스 머신 이라는 말은 어감상 어울리지 않는다. 섹스 머신 이라는 말은 말초적인 부분만 흥분시키는 성인용품을 떠올리게 하는데, 토마시는 여성의 존재 전체를 성적으로 깨우는 기계. 처럼 보인다.

 

그러니 토마시의 입장에서 볼 때, 테레자와 함께한 세월은 자신의 기계성을 녹슬게, 멈추게, 고장 나게 한 시간이었다. 사비나에게 벗어라고 명령했던 권력의 관능 기계는 나중에 병든 카레닌 앞에서 으르렁대는 개를 연기하며 장난을 칠 정도로 변한다. 테레자의 꿈에서 드디어 토끼가 된다.

 

 

테레자가 사비나를 사진 찍기 위해 방문했을 때, 중산모자는 이미 장난의 모티프를 제공했었다. 이 두 사람. 아내와 정부 사이, 학생과 선생 사이, 작가와 모델 사이로, 다채롭게 포지셔닝을 바꾸는 일종의 놀이를 한다.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은 상대의 기분이나 상황에 맞게 내가 내 역할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두 사람의 묘한 관계는 존재의 무거움가벼움에 대해, 내게 뭔가 메시지를 전해 주는 것만 같다. 소설 제목의 가벼움대신에 무거움을 넣어도 전혀 상관 없는 것 아닐까. 진짜 중요한 말은 참을 수 없는이 아닐까. 영원히 반복되는 삶이든 단 한번의 삶이든. 어쨌든 참을 수 없는 것 아닐까. 그게 진실 아닐까.

 

 

사비나가 프란츠 앞에서 중산모자를 썼을 때는, 둘 사이에 심연이 가로막는다. 마치 토마시의 머리에서 나는 다른 여성의 성기 냄새가 토마시와 테레자 사이의 심연이었듯. 그렇지만, 사랑한다. 는 한 문장보다, ‘사랑해. 그렇지만 아직도 여전히 널 잘 모르겠어라는 말이 더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녀)에 대한 하나의 미스터리가 생기고, 궁금해 하다가 운 좋게 풀고 나면 또 다른 미스터리가 생기고, 다시 궁금해 하고 풀고, 또 다시쿤데라가 말했듯 행복은 반복에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아마 낭만도, 사랑도 그 점에선 같다. 다만, 미스터리와 그 해결 사이의 주관적 시간의 격차.는 삶의 모습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고야 말겠지만.

 

 

중산모자와 카레닌은 어떤가. 나는 어쩐지 중산모자가 카레닌처럼 시간에 관해 뭔가를 은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 오팔카는 1, 2, 3, 4….. 숫자를 끊임없이 캔버스에 기입함으로써 인간의 시간성을, 시간성의 무게를 표현했다. 30여 년의 세월을 거친 후 5607249에서 결국 끝나고 만숫자 ‘1’을 그리는데 1초가 걸렸다고 한다면 ‘5607249’는 최소 7초 이상 걸렸을 테다. 삶은 이처럼 자릿수가 늘어나는 하나 하나의 숫자처럼 점점 무거워지는 시간들로 구성된 듯 보이고, 카레닌은 1, 1, 1, 1… 이렇게 같은 무게를 지닌 숫자의 반복처럼, 중산모자는 1~ 이렇게 하나의 숫자가 지속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토마시는 여섯의 우연한 수에 집착했지만, 나는 넷(네 명) 플러스 하나(개 한 마리) 플러스 하나(중산모자)가 왠지 필연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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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9-1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에서는 '토마스' 였던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토마시' 인가 보군요. 제가 읽은 책에서 그 구절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공개적으로 변한 사랑은 무게를 더한다' 는 구절요. 펜으로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던 기억이 나네요.

중산모자, 라니.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중산모자가 전혀 연관이 안돼요. 아마도 읽은지 오래되어서일 수 있겠지만, 읽으면서도 별 생각 없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올리신 페이퍼를 읽노라니 제가 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을 뿐더러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드림아웃님이 읽으신 책으로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아, 그렇지만 세상엔 안읽은 책이 많고도 많은데 이미 읽은책까지 다시 읽어야 할까요? 그렇지만 다시 읽고 싶으니 읽어야 할까요? 그렇지만 포기하고 새 책을 읽어야 할까요? 그렇지만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니 다시 읽어야 할까요? 아...갈등 .........삶은 갈등과 고민의 연속이네요. 하아- (써놓고나니 엄청나게 뜬금없는 댓글이네요..ㅜㅜ)

dreamout 2013-09-12 21:06   좋아요 0 | URL
전에 읽었던 책 다시 읽기는 무의식적인 저항에 부딪힐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왠지 다시 집어들기가 망설여져요.. 그래도 그리운 책이 있잖아요.. 그런 책들만 읽어볼려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