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모자(bowler hat)가 눈에 들어온다. 예외적인 소품.

 

오랜 시간이 지나, 읽었던 소설을 떠올리면 어슴푸레한 잔상만 남아있게 마련인데, 특이하게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어슴푸레하기는 매한가지였지만 문장이 기억에 남았었다. 정사를 나누고 싶은 욕망과 수면의 욕망을 분리했던 문장과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는 문장. ‘einmal ist keinmal’ 같은 문장.

 

중산모는 기억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다시 다 읽은 후에 보니 민음사의 새로운 표지디자인,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선택이었는지 새삼스럽다.

 

사비나의 중산모는 이들 네 명 모두와 관련된 유일한 소품이다. 네 명하고만 관련된 소품도 아니다. 그렇지만 특히 토마시와의 에피소드에서 뭔가가 탁 걸렸다. 나체인 채로 중산모를 쓰고 서 있는 사비나를 바라보는 토마시. 살짝 변태적인 느낌이 들긴 하지만곧이어 키치라는 단어가 떠오르며.. 드라마나 영화에서 샤워를 마친 여주인공이 남자주인공의 하얀 와이셔츠만 걸치고 거실에 서 있는 모습을 생각한다면하얀 와이셔츠는 가리면서 드러낸다. 모자도 마찬가지다. 다만 드러내는 범위가 다를 뿐. 모자는 마치 허리띠를 허리에 차지 않고 머리에 두른 모습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중산모는 머리 아래 전체, 사비나의 몸 전체를 섹시하게 만들고 만다. 그런데 이 대목을 읽는 내게는 이 이미지가 두 사람간의 독특한 성관계 보다는 오히려 토마시가 어떤 사람인지를 인지하게 만들었다.

 

그는 관능 기계.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섹스 머신 이라는 말은 어감상 어울리지 않는다. 섹스 머신 이라는 말은 말초적인 부분만 흥분시키는 성인용품을 떠올리게 하는데, 토마시는 여성의 존재 전체를 성적으로 깨우는 기계. 처럼 보인다.

 

그러니 토마시의 입장에서 볼 때, 테레자와 함께한 세월은 자신의 기계성을 녹슬게, 멈추게, 고장 나게 한 시간이었다. 사비나에게 벗어라고 명령했던 권력의 관능 기계는 나중에 병든 카레닌 앞에서 으르렁대는 개를 연기하며 장난을 칠 정도로 변한다. 테레자의 꿈에서 드디어 토끼가 된다.

 

 

테레자가 사비나를 사진 찍기 위해 방문했을 때, 중산모자는 이미 장난의 모티프를 제공했었다. 이 두 사람. 아내와 정부 사이, 학생과 선생 사이, 작가와 모델 사이로, 다채롭게 포지셔닝을 바꾸는 일종의 놀이를 한다. 교감할 수 있다는 것은 상대의 기분이나 상황에 맞게 내가 내 역할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두 사람의 묘한 관계는 존재의 무거움가벼움에 대해, 내게 뭔가 메시지를 전해 주는 것만 같다. 소설 제목의 가벼움대신에 무거움을 넣어도 전혀 상관 없는 것 아닐까. 진짜 중요한 말은 참을 수 없는이 아닐까. 영원히 반복되는 삶이든 단 한번의 삶이든. 어쨌든 참을 수 없는 것 아닐까. 그게 진실 아닐까.

 

 

사비나가 프란츠 앞에서 중산모자를 썼을 때는, 둘 사이에 심연이 가로막는다. 마치 토마시의 머리에서 나는 다른 여성의 성기 냄새가 토마시와 테레자 사이의 심연이었듯. 그렇지만, 사랑한다. 는 한 문장보다, ‘사랑해. 그렇지만 아직도 여전히 널 잘 모르겠어라는 말이 더 낭만적이지 않은가. (그녀)에 대한 하나의 미스터리가 생기고, 궁금해 하다가 운 좋게 풀고 나면 또 다른 미스터리가 생기고, 다시 궁금해 하고 풀고, 또 다시쿤데라가 말했듯 행복은 반복에의 욕망이다. 그렇다면 아마 낭만도, 사랑도 그 점에선 같다. 다만, 미스터리와 그 해결 사이의 주관적 시간의 격차.는 삶의 모습을 완전히 다르게 만들고야 말겠지만.

 

 

중산모자와 카레닌은 어떤가. 나는 어쩐지 중산모자가 카레닌처럼 시간에 관해 뭔가를 은유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만 오팔카는 1, 2, 3, 4….. 숫자를 끊임없이 캔버스에 기입함으로써 인간의 시간성을, 시간성의 무게를 표현했다. 30여 년의 세월을 거친 후 5607249에서 결국 끝나고 만숫자 ‘1’을 그리는데 1초가 걸렸다고 한다면 ‘5607249’는 최소 7초 이상 걸렸을 테다. 삶은 이처럼 자릿수가 늘어나는 하나 하나의 숫자처럼 점점 무거워지는 시간들로 구성된 듯 보이고, 카레닌은 1, 1, 1, 1… 이렇게 같은 무게를 지닌 숫자의 반복처럼, 중산모자는 1~ 이렇게 하나의 숫자가 지속되는 것처럼 여겨졌다. 

 

 

토마시는 여섯의 우연한 수에 집착했지만, 나는 넷(네 명) 플러스 하나(개 한 마리) 플러스 하나(중산모자)가 왠지 필연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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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9-11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은 책에서는 '토마스' 였던것 같은데 이 책에서는 '토마시' 인가 보군요. 제가 읽은 책에서 그 구절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공개적으로 변한 사랑은 무게를 더한다' 는 구절요. 펜으로 그 문장에 밑줄을 그었던 기억이 나네요.

중산모자, 라니.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중산모자가 전혀 연관이 안돼요. 아마도 읽은지 오래되어서일 수 있겠지만, 읽으면서도 별 생각 없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올리신 페이퍼를 읽노라니 제가 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을 뿐더러 기억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드림아웃님이 읽으신 책으로 저도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아, 그렇지만 세상엔 안읽은 책이 많고도 많은데 이미 읽은책까지 다시 읽어야 할까요? 그렇지만 다시 읽고 싶으니 읽어야 할까요? 그렇지만 포기하고 새 책을 읽어야 할까요? 그렇지만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니 다시 읽어야 할까요? 아...갈등 .........삶은 갈등과 고민의 연속이네요. 하아- (써놓고나니 엄청나게 뜬금없는 댓글이네요..ㅜㅜ)

dreamout 2013-09-12 21:06   좋아요 0 | URL
전에 읽었던 책 다시 읽기는 무의식적인 저항에 부딪힐 때가 많은 것 같아요. 왠지 다시 집어들기가 망설여져요.. 그래도 그리운 책이 있잖아요.. 그런 책들만 읽어볼려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