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트랜스크리틱 - 칸트와 마르크스 넘어서기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한길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트랜스크리틱>>이 다루는 것을 내 몸과 바짝 붙여 생각해 본다. 일주일 전, 일 개월 전, 일 년여 전. 짧은 기간 동안 아는 이들의 잇따른 자살이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소화기처럼 사용할 만한 뭔가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칸트의 문장 하나가 대문짝만하게 크게 붙여져 있다. “너의 인격과 모든 타자의 인격에서 인간성을 결코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동시에 항상 목적으로 대하라.”
칸트가 말하는 타자는 죽은 자, 미래에 태어날 자 등 훨씬 먼 존재도 포함한다고 고진은 말한다. 롤스가 장막을 설정하고 타자를 본 것처럼 나도 내 식으로 그 타자를 설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너’라는 2인칭 타자는 배제. 그건 내가 투사한 ‘너’의 모습. 즉 ‘내 머리 속 너’일 뿐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나는 노천극장을 생각해 본다. 무대에는 나와 너(상대배역)가 있다. 객석에는 관중이. 하지만 나는 ‘관중’을 의식하고 있고, 관중도 내가 서 있는 무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들이니 배제해야겠다. 노천극장 주변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기다리는 행인1을 설정하고, 그가 3류 배우인 먼 무대 위 나를 본다는 설정은 어떨까. 딱 그 정도 무관심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타자’를 설정해 볼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살의 충동이 느껴질 때, 타인의 시선의 도입은 요긴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견고하게만 느껴지는 나를 둘러싼 현실을 조금은 말랑말랑하게 생각해 볼 수 있고, 나만의 단독성, 유니크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새롭게 발견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각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세계는, 고진의 말에 따르면 자본제-네이션(민족)-스테이트(국가)의 삼위일체다. 기존의 자본주의에 대항한 체계들이 실패한 이유는 자본제만을 대처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도 자살의 충동을 느끼는 개인의 시점에서 바꿔보기로 했다. 그러면 자본제-가족(결혼제)-사회(국가/기업)의 삼위일체가 내가 보는 세계가 될 터이다.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반항’과 ‘이기심’과 ‘감정에 괄호치기’ 일지도 모르겠다. 설사 고진이 말한 물리적 정신적 ‘이동’을 통한 사고의 ‘전회(강한 시차)’를 이뤘더라도, 우리가 세계에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은 ‘이기심’이라고 욕 얻어 먹는 것들일지 모르겠다. <<화이트 타이거>>의 자유인 발람처럼 스스로 족쇄를 깨부수고 나오기 위해선 감정에 괄호치기를 하고 실천에 옮기는 수밖에 없다.
그들의 자살이 이런 ‘죽음을 각오한 도약’을 실천해서 나온 사후적 결과라면 그것에 대해선 침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실천 없이,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원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거나 유약한 자기합리화의 결론이라면 정말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의 화폐 분석도 괜찮은 아이디어 하나를 품고 있다. 화폐를 가진 자는 ‘갑’이고 물건(상품;몸뚱어리)을 가진 자가 ‘을’이라는 아이디어. 내가 발행하는 감정(심리)의 화폐를 하루하루 내게 선물하는 것. 자기가 한국은행이 되어 보는 것. 자기계발서 어디선가 비슷한 아이디어를 본 적이 있는데, 이것은 화폐라는 언어(또는 실체)가 갖고 있는 자기증식, 자기강화를 스스로에게 호혜적으로 증여하는 행위가 될 터이고 그건 ‘갑’인 나를 조금은 더 멀쩡하게 세워줄 터이다.
자살이 옳은지 그른지, 자본이 옳은지 그른지, 삶이 옳은지 그른지. 우리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은 부조리 밖에 없을지 모르지만 그 길을 굳세게, 때론 헤매며 가는 모든 이들에겐 파이팅을. 혹 마무리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치 이혼 숙려기간에서처럼, 자신을 타인의 시점으로 바라보려고 한 번 만이라도 더 노력해 보길. 자신은 더 이상 무언가로 환원할 수 없는 고유의 무엇이라는 것을 잊지 말길. 한 없이 작고 약한 것일지라도 ‘유일한’ 그 가능성을 제발.. 너무 쉽게 등지지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