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코스텔로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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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8개의 레슨과 1개의 후기로 되어 있어 레슨 1의 분위기를 파악하면 나머지는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레슨 6 까지의 분위기와 남은 7, 8 레슨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고 후기는 또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나가수의 가수들이 하는 것처럼 하나의 곡을 록으로 펑크로 포크로 부분부분마다 다르게 편곡한 느낌이다.

 

읽는 내내 불안 불안했다.

싸움은 어디서 하는 게 유리한가? 싸움이라고 하니 너무 거친가? 축구나 야구경기라고 해 보자. 어딜까? 당연히 홈 그라운드다. 홈 그라운드에서 우리는 보다 여유롭고 유연할 수 있다. 원정경기는 컨디션 유지도 힘들뿐더러 환경이 낯설어 홈경기보다 훨씬 어렵다. 젊은 사람들에게도 그러한데, 여기 이 늙은 저명한 소설가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여정을 보라. 안쓰럽기까지 하다. 호주에서 미국으로, 아프리카로 가는 크루즈 선상에서, 아프리카에서, 암스테르담까지 가서 연설&강의를 한다. 그녀가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아들(아들 또한 100% 그녀 편은 아니다)을 제외하고는 전부(며느리나 언니까지 포함해서), 어느 모로 보나 정치적인(언제라도 적대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람들이다. 잠재적 적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물론 우리는 안다. 허나 그녀는 지식인 소설가다. 그것도 저명한. 사람들이 저명한 소설가에게 듣고 싶어 하는 것들. 수상 연설에서 듣고 싶어하는 것들. 투사된 페르소나들. 그 각각의 페르소나를 열심히 연기하는 것에 대해 그녀는 뭐랄까. 나도 이제 이만큼 나이 들지 않았나. 그 사람들과 얼굴 붉히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한가. 라고 생각하고 있다. 정면으로 불꽃 튀기기도 하지만 세련된 사교가 몸에 밴 이 지식인들은 보다 치사하고 추잡하다 obscene. 그래서 냉소와 비아냥, 정면 반박들이 날아든다. 타자의 말들이 면도날처럼 도끼 날처럼 쉭 하고. 물론 그녀도 꽤 만만치는 않다.

 

그녀는 강연에 선 자신의 모습을 엔터테이너. 라고 지칭하며 스스로를 조금은 비아냥거린다. 그렇다. 그녀는 나는 소설가다. 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하는 사람이다. 레슨 8에서 저승의 염라대왕의 판결을 받는 듯한 장면(이라고는 하지만 소설 속에서 화자가 말하듯 확실히 카프카적 공간으로서의 법정이나 성 같은 분위기)에서 그녀는 스스로를 소설가로 규정짓는다. 그런데도 나이 들어 엔터테이너 역할을 해야 한다. 더더군다나 힘든 것은 타자들이 기억하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옛 대표작으로 고정된 캐릭터일 뿐이다. 그녀의 생각은 젊었을 때의 그것은 아니다. 스스로의 확신이 변해가고 있음을, 그것이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것들 때문인지 확신하진 못하지만 틀림없이 그것을 알고 있다.

 

위태위태함이 소설 전반의 분위기를, 배경을 만들고 있다. 배경이라기 보다는 실은 이 분위기를 전면적인 주제로 삼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느낌은 스멀스멀 끊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레슨이다. ‘무엇이 있을 터이고 그 무엇은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리얼리즘과 탈식민주의, 동물해방, 그리스도교적인 것과 그리스적인 것, , 에로스, 심판 등에 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강연되고 질문되고 답해진다. 하지만 실은 무엇 하나 똑 떨어지게 정리되거나 종료되진 않는다. 마침표는 없다.

 

레슨 1 <리얼리즘>과 후기 <레이디 찬도스, 엘리자베스의 편지>에서 특히 느껴지는 것 한 가지가 나름 정리한 이 소설의 무엇이다.

 

리얼리즘의 잔인성에 대해 말한다. 추잡하다 obscene. 라는 말을 사용하면서까지. 그러면서도 경외한다. 아이디얼리즘의 동어반복에 대해 말한다. 추상적인 어휘들이 갖는 거대한 동어반복. 상투성, 효과가 사라진 낱말들에 대해 얘기한다. 이 모순이 소설에서 화자가 얘기하고 싶은 그 무엇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상투적인 말로 씨줄과 날줄의 관계일 수도 있고 아래와 것과 위의 것(메타적인 것)의 관계일 수도 있지만, 소설을 창작해 나가는 데 있어 어느 것 하나도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들. 정도의 문제일까? 서로간의 비율의 문제? 그럴 수도 있고 전혀 아닐 수도 있겠지. 근대 소설의 속내, 그리고 창작으로 인한 주체의 삶의 구성의 문제가 새삼스럽게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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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단 한가지 방법
다치바나 아키라 지음, 서수지 옮김 / 도어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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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숏 헤드는 능력 있는 사람들끼리 나눠먹게 내버려두고 롱테일 안에 숨겨져 있는 작은 숏 헤드를 찾으라. 자기계발서 치고는 알토란 같은 내용전개가 일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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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간절히 필요한 순간, 두뇌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지적 유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예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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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과 샤워를 베헤못과 가네샤로 대비시키고 다시 우파와 좌파로 설명하는 대목부터 맘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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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멜랑콜리아 - 상상 동물이 전하는 열여섯 가지 사랑의 코드
권혁웅 지음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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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의 구현체인 몬스터들, 사랑의 논리를 외양으로 드러낸 그 존재들에 대해 읽으면서도 나는 좀 무덤덤했다. 나중에 참조용으로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만 자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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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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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첫 장 <선비>에서 눈에 띈 것이 공간성이었다. 워낙 대비되게 써 놓아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정약종이 칼을 받을 때,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서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문장과 흑산 가는 배 타기 전에 사람들이 찾아낸 죽은 거지 여자아이. ‘얼굴은 물 쪽에 처박혀 보이지 않았고’라는 문장. 정약전이 흑산을 향한 돛배에 타서 바다를 바라보니 ‘물과 하늘 사이를 바람이 내달렸다.’는 문장에서. 수직의 선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를, 수평의 선을 사이에 둔 전경과 배경의 흐릿한 경계를… 이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알레고리를 떠올리게 했다. 천주교도의 믿음과 백성들의 참혹함, 산 자의 막막함 같은 것들 말이다.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소설을 읽으면 대개 화자(작가)가 신경 쓴 묘사나 대사 같은 것들이 눈에 띄기 마련이고 또 나 스스로도 그런 것에 감응되기 마련인데, 어쩐지 이 소설에서 내가 감응 받은 것들은 저자가 신경이나 썼을는지 모를 그런 것들이었다. 흑산으로 유배를 떠나는 정약전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선비>에서, 돛배가 뜨기 전날 ‘물소리에 실려서 정약전의 의식은 먼바다로 흩어졌다. 정약전은 불려가듯이 잠들었다.’라는 문장이 아주 선명하게 다가왔는데, ‘불려가듯이’라는 말이 애초에 내가 품고 있던 ‘과연 정약전은 진짜로 천주교를 배교한 것인가?’ 라는 의문에 해답처럼 주어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소설 안에서도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하겠다. 그런데도 나는 그 ‘부른 이’가 천주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 했더랬다. 그러자 정약전의 진실이 바로 목전에 보이는 것 같았다. 마부 마노리에 대해서도 ‘마을과 마을 사이에 길이 있어서, 그 길을 사람이 걸어서 오간다는 것이 마노리는 신기하고 또 편안했다.’라는 문장에서 ‘편안했다’가 또 그렇게 와 닿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마노리라는 한 인물의 천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육손이> 장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게 된 황사영과 그의 처 명련(정약전의 조카)이 밤일에서 ‘제 몸의 기쁨으로 남자의 기쁨을 빨아들였다.’ 라는 문장 또한 ‘빨아’라는 어감에서 느껴지는 젊음의 신선함과 적극성이 명련을 지금 살아 숨쉬는 존재로 다가오게끔 만들었다. 이런 식의 표현들이 소설 전체 여기저기서 출몰한다. 인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흑산, 하늘, 바다, 강물 같은 것들에도 똑같이 해당됐다.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읽을수록 확실해졌다.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저 공간성과도 떼어놓고 생각할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흑산>>은 한 명의 주인공이 있는 소설이 아니다. 마노리, 문풍세, 박차돌, 황사영, 오칠구, 육손이, 창대, 아리, 강사녀, 길갈녀, 오동희, 순매, 조 풍헌, 박한녀, 오호세. 이 모두가 주인공들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이들을 피지배층이니 학대 받는 자들이니 하는 식으로 묶어서 부르지 않는 것이다. 이름으로 불려져야 한다. 분류된 개념어로 호명하는 것이 몹시 꺼려진다. 독자들 각자가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사람들을 보면 그뿐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들 중에서 박차돌과 문풍세가 가장 와 닿았다. 박차돌은 삶의 비극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풍세는 진실한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생각해 보니 이 둘은 가장 소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마노리도 문풍세와 더불어 흥미롭다. 각자의 직업이 마부와 사공이라는 점도 그렇고 마노리가 의주와 서울을 연결하고 문풍세가 육지와 흑산을 연결한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처음부터 공간성이 와 닿았던 소설이라 그런지 그들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예사롭지 않다. 전령의 역할을 하는 천사의 환생 같다는 생각을 했다. 좀 유치하긴 하지만. 어쨌든.



참게와 고등어와 날치도 빼먹을 순 없겠지. 많은 이들이 <<흑산>>을 역사소설이라고 말한다. 광고 카피를 빌려 말하자면 이것은 <<흑산>>을 반만 아는 것이다. 절반 이하 일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절반 또는 그 이상. <<흑산>>은 지리소설이다. 예부터 지리에는 동물, 식물, 광물, 날씨, 풍토 같은 것들이 모두 포함된 것이었다. 각종 물고기에 대한 묘사가 구석구석 자리잡고 있는 것을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이름의 분명한 호명(주요인물들을 ‘그’라든가 ‘그녀’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인물만큼이나 주어 역할을 많이 하는 산, 섬, 하늘, 강물, 바람. 첫 장부터 등장하는 비상한 공간성. 이런 것들은 역사에 포함되어 있다기 보다 지리의 영역으로 보여진다. 왜 이런 방식이어야 했을까? 나 개인적으로 역사책이나 역사소설, 평전(전기)류를 좀 싫어하기 때문에 오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는 그 역사의 주된 흐름이라는 측면 때문에 소수의 몇 명 위주로 작성 되는 것이 보통이다. 왕이니 황제니 장군이니 학자니 하는 사람들. 피라미드가 누구의 무덤인지 확인할 수 있지만 피라미드를 짓다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역사에 쓰여 지지 않는다. 역사는 정말 많은 것들을 배제해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장르다. 지리는 역사가 배제한 많은 것을 메워줄 수 있다. 책으로 쓰여진 역사들을 고고학이 때론 공격하고 때론 지원하듯. 그렇게 말이다. <<흑산>>은 지리가 역사를 보조하는 수준을 떠나 리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를 다투려는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이 내겐 그런 뜻으로 들렸다. 판단을 통해 ‘인물’의 뒤나 위에 다른 말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이백여 년 전에 박해 받던 천주교가 오늘날 이런 위상이 된 건 모두 이와 같은 사람들 때문이다. 라는 식의 말. 그럼으로써 ‘이와 같은 사람들’로 묶여 싸잡아 배제되고 천주교만이 부각된다던가 하는 식의 것들. 개별의 실존 외에 덧붙일 것은 없다. 라는 느낌이랄까.


당면한 곳만이 삶의 자리. 라고 작가는 말한다. 참게도 고등어도 날치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걸 느끼는 순간 우리는 들고 있던 판관의 의사봉을 자신도 모르게 내려 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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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2 10: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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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2 20: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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