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릿광대의 나비
엔조 도 지음,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1.

작가? 뜨개질? 악기? 그게 무엇이 되었든 무언가를 자유자재로 갖고 놀 수 있는 사람은 늘 부럽다. 팀 버튼 전시회에 가서 「빈센트」라는 짧은 애니메이션을 봤는데,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7살 빈센트는 그 또래 아이들이 보는 동화는 안 보고 에드거 앨런 포를 탐독한다. 팀 버튼 자신의 어린 시절을 나타냈다고 하는데.. 전시된 수많은 드로잉과 완성된 작품들을 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정말 이 남자. 팀 버튼. 에드거 앨런 포를 제대로 갖고 놀았구나. 하고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에드거 앨런 포의 세계관을 가져왔으되 똑같지는 않다. 그가 그린 캐릭터들은 어딘가 귀여운 데가 있다. 신체의 일부분이 엄청 과장되어 있는 그의 캐릭터들은 푸동푸동 솜인형처럼 꼭 껴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20대 여성들이 여기저기서 꺅꺅거린다. . 정말 귀여워. 피칠갑한 괴물 캐릭터를 보면서 그런다.

 

오늘 아침 이불을 뒤집어쓰고, Andy McKee의 「Rylynn」에 꽂혀 유튜브 동영상을 계속 돌려 보았는데, 역시나.. 기타를 갖고 노는 모습이 정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소설의 저자에게서도 이 두 아티스트와 비슷한 점이 느껴진다. 저자에게는 아마도 언어가 그 놀이 대상일 텐데언어를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는 보통(?)의 놀이 말고, 언어의 구조와 논리를 마치 레고조립하듯 갖고 노는 기술. 그게 보통이 아니다.

 

2.

앞과 뒤가 같은 모양인 자수는 세계적으로 종류가 꽤 있지만 요즘 들어 앞뒤로 다른 모양이 나타나는 자수는 놓을 수 없을까 흥미가 생겼어요. 그냥 모양을 바꾸기만 하는 건 할 수 있어도 그것뿐이 아니라 어떤 미묘한 구속이랄지 틀이랄지 규칙 같은 게 있을 것 같아서요. 머리보다 몸에 넣어 버리는 편이 빠르니까요.”

 

두 편의 중편에 나타나는 많은 중의 하나가 모로코의 페즈(Fez)에 자수를 배우러 가서 한 이 말의 결과가 이 소설이다. 언어의 미묘한 구속, , 규칙 같은 것을 갖고 논 결과. 이런 소설이 나온 것. 많은 현대 소설처럼 이 소설도 이야기의 요약은 무의미해 보인다.

 

3.

중요해 보이는 것은

자수를 할 수 있음으로써 생성되는 것은 이야기나 캐릭터, 이 소설을 좋아하게 될 독자는 아니라는데 있다. 작가 자신. 나 자신.

생성되는 것은 라고 지칭되는 소설 속 누군가가 아니라 이쪽의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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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3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4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Yona's Kitchen 요나의 키친
고정연 지음 / 나비장책 / 2012년 10월
평점 :
품절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왜 이 책 요리 사진들이 맘에 드는 걸까.. 하고 잠깐 생각해 봤다. 실은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느낀걸 테지. 요리 사진은 어렵다. 내 경우엔 인물사진 보다 더 어렵다고 늘 생각해 왔다. 차가운지 더운지, 불고기 같은 육류인지 오이나 토마토 같은 것을 마요네즈 등에 버무린 샐러드인지. 식당인지 부엌인지. 카메라 색온도 조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원하는 사진은 굿바이다. 아주 잘 찍은 요리 사진이다. 저자가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어서 그런 걸까? 그건 모르겠지만. 요리의 온기와 질감 표현뿐 아니라 구도 또한 뛰어나다. 피사체를 프레임 안에 가득 담아서인지 아주 먹음직스럽다. 이 사진들이 더 마음에 든 이유는 그릇과 테이블셋팅이 조연으로 충실하다는 데 있다. 최근의 음식 잡지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 요리가 주인공인지 테이블셋팅이 주인공인지 모를 정도로 뒤죽박죽인 게 많다. 핵심은 요리여야 한다. 그릇과 테이블셋팅에 지나치게 치중하면 주인공인 요리는 파라핀으로 밀랍 된 것처럼 죽어 보인다. 입맛이 확 달아난다. 행복감도 싹 가셔진다. 68페이지의 차나 마살라 탄두리 치킨 버거 사진이나 54~55페이지의 칠리 빈 파스타 사진 등을 보면 군침이 돈다. 아주 행복한 기분이 든다.

 

모든 책은 성장이거나 성숙이다. 그런데 요리 책은 행복이다. 그걸 느끼고 싶어서 요리 책들을 요즘 좀 샀다. 계속 봐줘야 할 듯. 일단 이 책은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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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12-18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게 말씀하신 그 책이로군요! 방금 미리보기로 조금 봤어요. 저는 요리를 잘 하지도 못하고 뭔든 만들기만 하면 요리가 메롱이 되어버리는데 그래서 요리에 관심 없는데, 음식 사진을 보는건 왜이렇게 좋을까요. 이 책 저도 한 번 봐야겠어요. 흣.
:)

dreamout 2012-12-18 20:22   좋아요 0 | URL
저도 음식 솜씨는 꽝인데.. 잘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기도 하고, 음식 사진 보는게 마냥 좋기도 하고.. ㅎㅎ

라로 2012-12-18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는 요리책을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인데 왜 이 책을 몰랐을까요!!! 당장 보관함에 담아갑니다. 늘 좋은 책 소개 감사드려요~~.^^

dreamout 2012-12-18 20:24   좋아요 0 | URL
레시피를 읽으니 저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요리더라구요. ㅎㅎ
요리책 좋아하고 음식 잘 하시는 분들은 괜찮을 듯 해요~ ^^

samsuni76 2012-12-23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리책이라니 정말 의외!!^^진짜 요리책이에요?

2012-12-23 2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1.

제목에 빗대어 내 심정을 표현하자면 이렇다. ‘실패할 줄 뻔히 알면서도 리뷰를 쓴다.’

오에 겐자부로의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읽고서 리뷰를 적을 때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분석할만한 것들. 즉 형식적인 요소들이 작품 전반에 뒤엉켜 있으면 어디서부터 실타래를 풀어야 할지.. 막막해진다.

 

하나 확실한 것은 기억. 회한. 등에 대한 얘기는 더 이상 할 것이 없다는 거다.

 

 

2.

작가가 처음에 얘기하듯 나도 특별한 순서 없이떠오른 것들을 적어 나가야겠다.

 

독자를 배제한 상태에서 소설의 서사에만 주목한다면, 충격적 진실은 세가지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두 통의 편지로 드러난), 두 번째, 수재였지만 결국 그 또래 남자애들이 그랬듯 그랬던 화자의 친구 에이드리언(그의 드러나지 않은 행동은 토니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으리라는 예감), 세 번째는 에이드리언의 아들 에이드리언의 엄마가 누구인지. 그 중 세 번째 진실 때문에 책을 다시 읽으려고 한다면 이는 이 소설을 미스터리로 간주했다는 의미다. 서사 내에서의 결론(ending)에 방점을 찍은 경우다.

 

독자를 서사와 엮어 생각하면 이 소설을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진다. 피에르 바야르의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처럼. ‘진범은 따로 있다.’ 라는 독자만의 망상적 독서를 한다면 이 소설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실상, 앞의 미스터리적 결론은 굉장히 부실하다. 이 소설을 다시 읽는다고 해서 누가 엄마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정확한 증거를 찾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독자는 이 소설을 한 번 읽고서 알게 된 그 결론(ending)에 고착화 되어 다시 읽을 때 그 증거만 찾게 될 것이다. 물론 독자는 분명히 자신만의 증거를 찾게 될 것이지만 또한 당연하게도 그 증거는 진짜 증거가 될 수 없다. 왜냐면 그것은 사후 자기합리화 된 증거이기 때문이다. 패러독스에 빠질 수 밖에 없다.

 

 

3.

소설의 전체 구조는 러셀의 크레타 사람 패러독스를 따르고 있다. 크레타 섬 주민이었던 에피메니데스가 모든 크레타 섬 주민들은 거짓말쟁이다.’라고 진술했다던 그 패러독스 말이다. 이 이율배반은 자기 언급(Self-reference)’의 논리적 모순을 극명히 보여준다. 소설은 모두 토니의 진술이다. 그런데 토니는 정말 믿지 못할 화자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론(ending)을 믿을 수 있는가?

 

러셀이 현대에 다시 부각시킨 거짓말쟁이 패러독스는 힐베르트 프로그램과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까지 이어지는 20세기 초 수리논리학의 장쾌한 여정의 출발점이었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불완전성 원리는 이런 느낌이다. 어떤 체계 안에는 그 체계를 유지하는 기본 전제(공리)가 있는데, 그 전제는 체계 안의 논리로는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수 없다는 것. 이 소설을 빗대 말한다면 소설의 화자인 토니가 소설의 결론에 이르러 진실을 드러내지만 그게 진실인지 거짓인지 여부는 이 소설 안에서는 밝혀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델의 불완전성 원리가 던져주는 빛은.. 그러한 한계 속에서도 수학과 논리를 펼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한 사람의 평생을 CCTV나 기타 등등의 기술을 이용해 전부 기록한다고 해도 그 사람에 대해 이렇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살아야 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 또 하나는 이런 것. 현대 소설의 모든 것이라고 말해도 과히 틀리지 않은 리얼리즘. 그 한계는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얼리즘 소설을 써 나갈 수 있고 써 나가야 한다는 점. 다만, 그 한계는 분명히 인식한 상태에서 작품을 완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 반스가 말하고 싶어한 어떤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4.

소설의 전체 구조를 더 단순히 말하자면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기 보존 능력이 있다는 토니의 자기 진술과 요점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제3자가 토니에게 충고했던 말 간의 간극. 또한 제3자가 토니에게 충고했다는 요점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말. 그 말 또한 진짜로 제3자가 한 말인지 아닌지. 그 부분까지 생각한 간극. 이 간극들의 집합(무한을 포함한 칸토어의 집합 개념과 같은)이 이 소설이라고 말이다.

 

 

5.

간극. 은 그저 내 생각이지만, 반스의 소설을 일관(一貫)하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플로베르의 앵무새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진실(이것임. Haecceity)에 근접도 못했음을 자괴하는 화자. 아무리 사랑해도 사랑하는 대상은 타자이고, 영원히 다가갈 수 없는 간극이 나와 너 사이에 있음을 생각했다. 10 1/2장으로 쓴 세계 역사에서는 쓰여진 것과 실제 일어났던 일 사이에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간극이 있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무엇과 무엇 사이의 간극인가. 나와 나 사이의 간극. 나 라고 생각한 나와 진짜 나와의 간극. 그 간극 또한 영원히 메워질 수 없음을 말해주는 듯 하다. 반스는 일관된 주제를 아주 집요하게 탐구하고 있다.

 

 

6.

이 소설은 또한 리얼리즘 소설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올해 읽은 정영문의 소설과 다른 측면에서 이 소설 또한 리얼리즘 형식의 한계, 거짓, 구태, 독자와의 공모.. 등에 대해 저항한다. 형식적인 측면에 이처럼 공을 들인 작품을 노년에 썼다는 사실은오에 겐자부로가 노년에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를 집필한 이유와 같을지도 모른다. 롤링 스톤스가 데뷔한지 50년이 되었다지. 뭐랄까.. 오에도 반스도 늙기 싫은 거다. 잊혀지기 싫은 거다. 사그라지기 싫은 거다.

 

 

7.

토니의 편지는 자기 실현적 저주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그가 쓴 글(바로 이 책)은 무엇이 될 것인가? 그건 분명한데, 소설이 된다. 그렇다면 그가 소설을 쓴 의도는 무엇인가? 회한에 젖은 자기 반성인가? 아니면 또 다른 자기 보존의 발로인가? 아니면 이 소설 전체가 평생에 아무런 대단한 일도 벌이지 않고 혼자 쓸쓸히 늙어 죽어가는 이가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고 싶어 끄적거린 완전한 허구인가. 이 모두이기도 하지만 남은 하나의 가능성이 더 있다. 독자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고, 성찰하게 하고, 회한에 젖게 함과 동시에, 독자를 끌어들여 공범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독자는 어느 순간 그를 두둔하게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 순간 독자는 심정적 공범이 된다. 토니는 자주 증거라는 말을 쓴다. 그가 법정의 피고인석에 선다면, 그리고 스스로를 변론하기 위해 이 글을 내보인다면, 이것은 또 다른 자기기만적 행위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체호프였나소설에 권총이 등장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발사되어야 한다고. 그는 이 책을 썼고 그가 법정에 선다면 당연히 이 소설은 변호인 측의 증거로 제출될 터다. 심정적 공범이 된 독자는 그에게 합당한 형벌을 내리지 못하는 온건한 배심원이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생각이 내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편지든, 소설이든 쓰여진 모든 것들은 읽는 이들을 자기 구속에 빠트리게 할 가능성이 있다. 게임이론에는 비협조적 게임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죄수의 딜레마가 대표적인데.. 자기 구속적 행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자신의 이익과 부합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뿐이다. 결론에서 토니는 자기 보존의 본성을 얼마나 깨트렸나? 토니가 이 소설을 쓴 진정한 의도는 무엇인가? 자기 반성인가. 아니면 또 다른 자기 보존의 발로인가. 알 수 없다.

 

 

8.

나 또한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서사는 패러독스이고, 독자는 딜레마에 빠진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맞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말인가. 그는 그런 등장인물이다. 토니의 그런 꼴을 보고 거기서 교훈을 얻어도 좋고, 논리적 구조 안에서 헤매도 상관없다. 더 중요해 보이는 것은 이렇다. 오이디푸스도 죄를 저질렀다. 부친을 살해했고, 근친상간을 했다. 모두 모르고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 책임을 졌다. 토니는 결과는 어떻게 될지 전혀 몰랐지만 자기가 한 짓을 모르지는 않았다. 단지 잊어버렸다. 그럼 그는 어떤 벌을 받아야 하나? 첫 번째는 이것. 잊어버렸다는 사실. 그 자체다. 그는 자기기만에 빠진다. 그것 자체가 벌이다. 자기기만에 빠져 시간을, 삶을 허비했다. 그리고 늙어 결국 혼자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결론(ending)은 뻔하다. 중요한 것은 결론이 아니다. 결론에 대한 센스다. 예감했다면 달리 행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9.

피에르 바야르의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를 따라 덧붙여 소설을 써 나갈 수도 있다. 토니는 베로니카와 헤어지고 나서 섹스를 나눴다고 했다. 별것 아닌 일처럼 얘기하지만, 그건 데이트 강간이었으리라. 베로니카가 그렇게 말한다. 강간이나 마찬가지였다고. 그럼 이렇게 내 나름대로 소설을 써도 될지도 모르겠다. 토니가 베로니카를 강간했고, 베로니카는 그 충격으로 한동안 섹스를 두려워하게 된다. 에이드리언은 그때 베로니카와 사랑을 만들어 가는 초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남자를 두려워하게 된 그녀는 스킨십을 꺼려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아마 에이드리언을 실망시켰을 것이다. 실망의 상처와 20대의 들끓는 욕망에 이끌려 다른 여성(에이드리언의 아들의 엄마)에 욕망을 풀어 버리고 만다. 라는 식의.. 구태의연한 드라마 식으로 말이다. 어찌됐든 소설의 여백을 독자는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독자가 조금만 더 상상의 나래를 편다면 아마 훨씬 드라마틱한 얘기를 꾸밀 수 있겠지.

 

 

10.

제목엔 Sense가 들어가 있는데, 너무 같잖은 Think만 한 기분이 든다. 여전히 나는 요점을 파악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요점을 모르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의 한계는 생각하며 살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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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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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 읽는 방법』에서 플롯 전진형 술어, 주어 충전형 술어라는 개념을 읽고서 그럴싸하다는 생각을 했다. Interpreter(통역사)는 수지(주인공)와 그레이스(주인공의 언니)의 이야기를 전진시키는데도, 두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네들의 성격을 충전해주는데도 중요하다. 거기에 나는 하나의 단어를 더 추가하고 싶다. 퀸스 출신. 김용수를 처음 만났던 첫 장면에서 3인칭인 화자의 목소리는 등장인물인 수지의 그것과 포개진다. 3인칭이라기 보다는 1인칭적인 묘사. 흔히 자유간접화법이라고 하는 인칭 변화를 통해 김용수를 묘사하는 그 대목에서 나는 수지의 안목에 상당히 놀랐다. Profiler(범죄 심리분서가)의 그것과 같은 정도의 날카로운 관찰력. 수지는 Interpreter로서만이 아니라 Profiler의 능력도 갖춘 사람이라는 사실. 이것은 소설의 가장 큰 수수께끼인 수지 부모님의 죽음은 대체 어떻게 된 건가?’하는 의문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를 더한다. 가족과의 행복한 기억이 없던 유년시절과 부모와 절연하게 만들었던 중년 백인과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갑작스런 부모의 죽음. 이 모든 것들로 인해 속이 텅 빈 수지. 그녀가 Profiler 수준의 관찰력과 추리력을 갖고 있다는 그 사실은

 

5년 전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 그녀가 짐작하는 바가 무엇인지, 독자에게 아직 말하지 않은(못한) 것은 무엇인지, 기억의 수면 위로 아직 떠올리지 못한(않은) 것은 무엇인지.. 하는 의문을 떠올리게 했다. 감춰진 이 수수께끼야 말로 나를 흔들었다. 사실의 파편들을 꿰어 하나 하나의 진실을 접할 때마다 느꼈을 그녀의 아픔. 속울음 울고 있을.. 그 모습이 그려졌다.

 

 

Interpreter(통역사)로는 더 질긴 이야기, 어쩌면 더 아픈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못하겠다. 나중에..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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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의 연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6
마누엘 리바스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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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 일주일 이상 지난 책에 대해 뭔가를 끄적거리려고 하니 좀 멍하다. 하지만 희미해져 가는 기억이 좋은 점도 있다. 시간의 흐름에도 씻겨 나가지 않은 한 두 가지만 간단히 얘기할 수 있게 만들어 줄 테니.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애너그램이 자주 보인다. 애너그램은 단어를 구성하는 철자의 순서를 바꾸거나 다른 철자로 대체해서 새로운 뜻의 단어를 만드는 놀이인데, 저 연필. 목수의 연필이 뜻하는 것 중 하나도 이거다. 새로운 배치를 만들 수 있음.

 

산책은 좋은 것이지.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하지만, 스페인 내전 중의 교도소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산책하러 간다는 뜻은 그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의미니까. 맥락이 조금만 달라져도 단어의 뜻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애너그램과 소설에서 기능하는 바가 같다.  전환의 이야기, 어떻게 전환(또는 변신)이 가능한가? 그게 이 소설의 중심이라고 느껴진다.

 

많은 것들을 잊었고 잊은 채로 내버려 두고자 한다. 소설에서 밝히는 20세기초 스페인의 아픈 역사나 종교적이면서 철학적이고 낭만적이기까지 한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그곳조차 그 역사에서 전혀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도 잊어버려도...

 

안 잊은 첫 번째 것. 무엇이 삶의 전환을 가능케 할 수 있는가. 교도소 간수이자 마리사를 짝사랑하는 에르발의 순정, 마리사의 남자 의사 다 카르바의 의지, 마리사와 다 카르바의 사랑, 교도소에 갇힌 추레한 몰골의 사람들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영광의 문에 나오는 인물들로 변모시킨 화가의 시선, 칭기즈 칸이라고 불리는 거인에게 발가락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의 유머와 여유, 산티아고의 알 카포네로 불렸던 마리사의 할아버지를 (이상한 모습이었지만)변화시킨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 창대 할 수 있는 씨앗들에 관한 이야기.

 

안 잊은 두 번째는 장면.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거리 한 복판에서 찰싹 달라붙은 채, 서로를 마셔댈 듯 정신 없이 입 맞추는 커플. 안 잊은 첫 번째라고 얘기한 순 고상한 것들을 모두 잊어버릴지라도, 이 육체적 열망, 육체적 그리움만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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