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에는 통상 ‘받는 사람’이 있다. 내가 텍스트를 읽었을 때, 그 ‘받는 사람’은 우선 나 자신이다. 내가 읽을 필요가 있는 텍스트는 그 ‘받는 사람’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말하며, ‘받는 사람’에 내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그런 책은 아마도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어떤 책이 자신에게 보내는 것인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있다. 학술논문의 경우, 어딘가 ‘잘 알려진 대로’라는 말이 있고, 그 뒤에 ‘내가 모르는 것’이 쓰여 있는 경우는, 그것은 ‘내가 모르는 것이 잘 알려진 그런 세계의 주민’에게 보내는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다른 사람에게 온 편지를 읽는 일이 좋다는 사람도 있고, 자기에게 보내는 것이 아닌 책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은 그냥 그렇게 하셔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말해, 레비나스뿐만 아니라 무릇 텍스트를 읽을 때, 읽는 사람은 어딘가에서 ‘나’임을 그만두고 그 텍스트에 고유한 ‘지(知)의 주파수’에 동조하고 마는 때가 있다. 그럴 때의 상태는 ‘내가 텍스트를 읽고 있다’기보다 ‘텍스트에 따라 나 자신이 조율되고 있다’는 것에 가깝다.
아름다운 대답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도대체 언제가 되면 알겠는가. 모르겠는가. 속임수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야. 인간의 알맹이가 정해지는 것은 그를 불안케 하는 것에 의해서지, 그를 안심시키는 것에 의해서는 아닌 게야. (……) 신은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이지, 설명을 의미하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수께끼를 심화시키기 위한 에크리튀르(글)’
주해란 비인칭적인 지적 눈길 아래서, ‘영원의 상 아래서’, 조용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거의 ‘아전인수’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구체적이고, 고유하고, 생생한 해석자의 현실에 바탕해 진행되는 것이다.
‘지향한다’는 동사로부터 우리는 ‘목표를 향하고 있으나 도달해 있지 않다’고 하는 부달성, 피아의 현격이라는 함의를 길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시선은 죽이고, 노래는 살린다.’ 이것은 모리스 블랑쇼가 사랑한 오르페우스 이야기의 주제이다. 관조적 지향작용의 근본적 난점은 그것이 무언가를 ‘죽인다’고 하는 점에 존재한다.
에로스의 근본에는 향유나 권능의 어법으로는 다 말해질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근본적인 수동성이다. (중략) 자기 자신에 의해서는 자기를 기초 지울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 자신의 기원이 자신 안에는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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