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의 연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6
마누엘 리바스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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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지 일주일 이상 지난 책에 대해 뭔가를 끄적거리려고 하니 좀 멍하다. 하지만 희미해져 가는 기억이 좋은 점도 있다. 시간의 흐름에도 씻겨 나가지 않은 한 두 가지만 간단히 얘기할 수 있게 만들어 줄 테니.

 

인물들간의 대화에서 애너그램이 자주 보인다. 애너그램은 단어를 구성하는 철자의 순서를 바꾸거나 다른 철자로 대체해서 새로운 뜻의 단어를 만드는 놀이인데, 저 연필. 목수의 연필이 뜻하는 것 중 하나도 이거다. 새로운 배치를 만들 수 있음.

 

산책은 좋은 것이지.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하지만, 스페인 내전 중의 교도소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산책하러 간다는 뜻은 그 사람을 다시는 보지 못한다는 의미니까. 맥락이 조금만 달라져도 단어의 뜻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애너그램과 소설에서 기능하는 바가 같다.  전환의 이야기, 어떻게 전환(또는 변신)이 가능한가? 그게 이 소설의 중심이라고 느껴진다.

 

많은 것들을 잊었고 잊은 채로 내버려 두고자 한다. 소설에서 밝히는 20세기초 스페인의 아픈 역사나 종교적이면서 철학적이고 낭만적이기까지 한 카미노 데 산티아고의 종착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그곳조차 그 역사에서 전혀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도 잊어버려도...

 

안 잊은 첫 번째 것. 무엇이 삶의 전환을 가능케 할 수 있는가. 교도소 간수이자 마리사를 짝사랑하는 에르발의 순정, 마리사의 남자 의사 다 카르바의 의지, 마리사와 다 카르바의 사랑, 교도소에 갇힌 추레한 몰골의 사람들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영광의 문에 나오는 인물들로 변모시킨 화가의 시선, 칭기즈 칸이라고 불리는 거인에게 발가락이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의 유머와 여유, 산티아고의 알 카포네로 불렸던 마리사의 할아버지를 (이상한 모습이었지만)변화시킨 ..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 하리라. 창대 할 수 있는 씨앗들에 관한 이야기.

 

안 잊은 두 번째는 장면.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거리 한 복판에서 찰싹 달라붙은 채, 서로를 마셔댈 듯 정신 없이 입 맞추는 커플. 안 잊은 첫 번째라고 얘기한 순 고상한 것들을 모두 잊어버릴지라도, 이 육체적 열망, 육체적 그리움만은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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