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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하는 삶’이라는 표현은
‘척하지 않는’, ‘진실 그대로인’ 삶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기 자신은 발생된 사건과 무관하다고,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고. 그런 제스처를 하지 않는
삶은 가능하긴 할 것이지만, ‘압정 구멍’처럼 작게 파인
곳 모두를 검사한다면 감히 ‘척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다. A gesture life는 가깝고 The ideal life는 멀다. 그리고 언제나 ‘a’는 ‘the’보다 우리의 마음을 뜯어내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데 유능하다.
닥 하타(주인공)의 ‘a gesture life’가 시작된 결정적 사건은 독자를 둔감해지게 만든다.
둔감해지지 않으면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조정되는 둔중한 느낌. 사건의 당사자라면 어땠을까. 끔찍함. 나는 그때 ‘절단된 신체’라는
개념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재빨리 그 어휘 뒤로 숨었다. ‘시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구부러져 있는 것 같았’던 그 사건의 한복판에서, 닥
하타는 자기 총체의 일부(또는 전부)를 절단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단된 몸은 ‘gesture’라는
말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데… 절단되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행동의 부자연스러움. 그러니까 그 ‘부자연스러움’이야말로
‘자연스러움’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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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애’는 세계 2차 대전에 일본군 군의관으로 참전한 구로하타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다.
(과연 사랑이었는지. 아닌지..) 구로하타는
일본인에 입양된 한국인이고, 끝애는 집안의 막내아들이 징집되는 것을 피하고자 일본군에 대신 보낸 넷째였다. 끝애와 셋째 언니는, 그리고 그의 부모들은 그들이 ‘위안부’로 ‘처리’될지 전혀 몰랐지만 일은 그렇게 되고 만다. 구로하타는 끝애를 ‘K’라고. 이니셜로 쓴다. 월드컵
붉은 악마들이 외치는 대한민국. 틀림없이 그것의 영문 이니셜을 감안하고 만든 이름이겠지. 갑자기 치밀어 올랐다. 나는 ‘K’가
아직 ‘K’도 아니었던 그 시대의 ‘허약함’에 대해 ‘씨발됨’으로
응수해 주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하지만 그 ‘씨발됨’에는 특정의 목적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러고 나니
‘신에게 위로를 구하지 않겠’다는 그의 독백이 뇌리에 가득
울렸다.
‘끝애’를 사랑한다는 그의
말이 ‘끝애’에게도, 독자에게도
진실이라고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세력이 균형을 이뤄’ 꼼싹달싹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젊은 몸은 의식과는 달리 작동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니. 몸 보다는 분위기. 나는
안다. 비극이 목전에 있으면 사랑이 얼마나 극적으로 팽창하는지를.
그의 첫 번째 순진한 희망은 지울 수 없는 비극이 된다. 이제 그가
마지막으로 품은 희망은 어떻게 될지. 나는 소설의 마무리 분위기와는 다르게, 순진한 마음으로 기대하진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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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이언 매큐언의 『암스테르담』처럼 막판에 급전직하 한다. 마지막에
가서 엄청난 가속이 붙는 소설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말은 이제 그만.
다만, ‘관계를 존재와 아주 밀접하게 여기던 시절’이라고. 이제는 관계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기. 관계가 존재와 밀접할 때에야 위장하기의 필요는 적어질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