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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
백석 외 지음 / 북카라반 / 2022년 9월
평점 :
백석, 박인환, 김영랑, 김소월, 정지용, 한용운 그리고 윤동주! 이름 하나, 하나씩 입안에서 굴리며 속삭여보면 그 이름마저 시처럼 감미롭게 느껴지는 시인들이다. 이러한 감상을 느끼게 하는 데에는 한국 현대시사에 그들이 남긴 굵직한 발자국들 때문일 것이다. 7명의 여기 적힌 시인들이 남긴 아름다운 시들은 그들의 특별한 이야기와 함께 8, 9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전폭적인 사랑은 "평생 간직하고픈 필사 시"가 되어 많은 사람의 노트에 쓰였거나, 쓰일 것이고, 낭송되기도 할 것이다.
현재 이들 시인은 대부분 학교 교과서에서 다루고 있는데, 초중고교 학생들에게 '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표 시인들이다. 이들의 작품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도 교과서에 실릴 확률이 높은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100년이 지나도 다양한 해석과 감상을 내놓을 수 있는 작품을 고전 반열에 올리듯이 우리 현대시사에서의 그러한 시인과 작품을 찾는다면, 이들의 작품이 그 classic 범주에 담길 듯하다.
눈이 내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가 있다.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눈'으로 대표되는 흰색의 이미지가 매우 강한 시이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 마지막 시행을 무척 좋아하는데, 당나귀에게 이러한 울음소리를 붙여 준 시인은 백석뿐이리라. 이 시를 알게 된 이후로 당나귀의 울음소리는 '응앙응앙'이 돼버렸다.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를 처음 알게 해준 시인은 박인환이다. 감수성이 넘쳐서 굴러가는 낙엽만 보고도 웃음이 만발하던 시절의 나는, 박인환의 이 시를 참 많이 필사했다. 가을이 되면 이 시를 노트에 써놓고는 친구와 함께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이미지를 놓고 얘기하곤 했다. 그 앞 시행에 쓰인 '버지니아 울프'는 자연스레 그 숙녀의 이미지가 되었다. 버지니아 울프의 매우 현실적인 선언,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돈과 스스로 생각한 것을 정확히 표현할 용기와 자유 습성은 가치 있다'는, 그 선언을 알게 된 것도 서른두 행으로 쓰인 <목마와 숙녀> 때문이었다.
김영랑의 시 중에서 노래로 부르고 싶어지는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은 지금도 여전히 직유법과 의인법의 대표 예시로 사용되는 시가 아닐까 생각한다. 역설적 표현의 예시로 자주 사용되는 시구 "찬란한 슬픔의 봄"을 만날 수 있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도 참 많이 필사되는 시일 것이다.
우리 현대시사에 시작점을 찍은 시인 김소월은 말해 무엇하랴! 그의 시는 노랫가락이 붙어 불리는 시도 많고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애송되는 시도 많다. 이 책에는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는 가슴 시린 반어적 표현으로 인상을 남긴 <먼 후일>도 포함되어 있다.
정지용의 시 중에서 사랑하는 아이를 잃고 그 슬픔을 시로 승화시켜 표현한 <유리창 1>은 다시 읽어도 마음 한 켠이 찢기듯 아릿하다.
박인환의 시만큼이나 학창 시절 자주 필사했던 시가 한용운의 시다. 애틋한 마음을 담은 사랑 시들이 많아서였는데, 당시 국어 선생님이 한용운의 시에 나오는 '님'이 대부분 '조국'을 뜻하기도 한다고 알려주셨겠지만, 그것이 소녀의 애잔한 사랑 감성에 걸림이 되지는 않았다.
아~~, 마지막에 실린 시들은 윤동주의 시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시인이 윤동주다. '부끄러움의 시인'이라고 불릴 만큼 그의 많은 시는 자기성찰적 태도를 보이는데 그러한 시적 분위기가 주는 여운이 늘 사랑받게 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실린 시인들의 수록된 시 분량을 보면 윤동주 시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는데, 일본 유학 생활 중에 윤동주가 쓴 그의 마지막 작품 <쉽게 씌어진 시>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필사'라고 제시된 제목에 맞추어 책에 직접 시를 필사할 수 있도록 여백을 두고 있다. 시가 쓰인 쪽 맞은편 페이지는 그 시를 음미하면서 써 내려갈 수 있도록 잔잔한 그림이 그려져 있거나 줄이 그어져 있거나 칸을 만들어 놓는 등 필사할 공간을 할애하고 있다. 서체의 크기도 다양하고 모양도 다양하다. 처음엔 예쁘게 써볼까 했다가 잠시 미뤄두기로 했는데, 그 이유는 시만큼이나 그 필사할 여백과 그 여백의 한 켠을 채운 시화가 또 다른 멋스러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담아 선물하기에도 참 예쁜, 아름다운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