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 로맨스에는 꽃청춘 브레드 피트가 나오는데, 크리스찬 슬레이터가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을 때라 브레드 피트는 단역이다.

델마와 루이스 속 브레드 피트는 그야말로 지구에서 가장 멋진 꽃미남의 모습인데 이 영화에서 브레드 피트는 꽃미남이긴 한데 뭔가 완성되지 않은 꽃미남이다.

요즘 주인공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을 유명 배우들이 단역으로 잔뜩 나온다. 데니스 호퍼도 클리렌스(크리스찬 슬레이터)의 아빠로 나오는데 총맞고 죽는다.

조직의 두목에게 맞아 죽는데 두목 역으로 크리스토퍼 월켄이 나온다. 이름이 빈센조인데 한국 드라마 빈센조 이름과 연관이 있을까? 한국 드라마를 보지 못했다.

게리 올드만이 약쟁이 중간 두목으로 나오는데 거기에 총 맞고 죽고, 발 킬머도 나오는데 누구였지? 하며 찾지 못했다.

트루 로맨스는 90년대 특별한 영화도 아닌데 토니 스콧 감독에 영화 중간중간 나오는 음악이 좋다.

클리렌스는 영화광에 토요일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세 번씩 본다. 특히 일본 출신 액션배우 소니 치자에 미쳐있다. 생일에도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데 톡톡 튀는 앨러 베마가 다가오고 데이트하게 되고 집에서 몸의 대화도 나눈다.

엘러 베마는 클리렌스가 일하는 레코드점 가게의 사장이 불러준 콜걸이라고 말을 하는데 클리렌스는 쿨하게 받아들이고 그런 모습에 엘러 베마는 클리렌스를 좋아하게 되어 두 사람은 결혼하자 한다.

콜걸이기에 포주에게서 빼내와야 하고 앨러 베마의 짐을 챙겨 나오는데 짐이 바뀌어서 마약을 들고나오면서 쫓고 쫓기는 액션 영화다.

지금 보면 터무니없는 이야기지만 트루 로맨스는 매력적인 액션 영화다. 각본이 쿠엔틴 타란티노다. 소니 바치를 좋아한 쿠엔틴이 주인공 클리렌스에게 이입을 했다. 극장에서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데 영웅본색이 나온다.

후에 쿠엔틴이 킬빌을 찍었을 때 소니 바치를 카메오로 출연시킨다. 원래 앨러베마 역에는 드류 베리모어를 점찍어 두었는데 스케줄 때문에 패트리샤 아퀘트가 하게 되었고, 남자 주인공인 클리렌스 역에 발 킬머가 눈독을 들였다고 한다.

지금은 브래드 피트와 크리스챤 슬레이터의 입지가 완전히 바뀌었다. 그래도 이번 덱스터 오리지날 씬 시리즈에 덱스터의 아버지 역으로 나오는데 아주 재미있다.

쿠엔틴은 73년 영화 황무지를 오마주 해서 각본을 썼다고 한다. 트루 로맨스에는 말 그대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식의 일탈로 빠져들어가는 당시의 짜릿함과 무모함 그리고 사랑을 말하고 있다.

눈에 총 맞고 죽은 줄 알았던 클리렌스를 데리고 앨러 베마가 운전을 할 때 나오는 음악은 요즘도 라디오에 신청이 되어 흘러나온다.

트루 로맨스의 모든 음악이 뭐랄까 잊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하고 신나게 하고 과거로 간 나를 현재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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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하는 이유는 평화를 위해서다. 평화를 위해평화를 깨트리는 일을 인간은 그동안 지키지 않고 해 왔다. 전쟁을 하면 전쟁에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 사람들이 죽는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 덕분에 산 사람들이 평화롭게 산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진짜로 믿고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마치 타노스가 우주의 평화를 위해 우주의 절반을 없애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강하기 위해서 소식하고 달리기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건강을 위해 맛있는 거 잘 먹고 많이 먹는 사람도 있다. 결론에 도달하면 목적은 같은데 완전히 다른 길을 우리는 걷는다.

어떤 사람은 노년을 잘 보내기 위해 젊은 시절 잠잘 시간 줄이고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길을 택했고, 어떤 사람은 노년에 평온하고 조용하게 보내면 되니까 젊을 때 마음껏 즐기면서 보내는 길을 택했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가지만 목적은 행복이다.

나의 행복은 이 길이고, 너의 행복은 저 길이다. 불행은 세세하며 전부 다르고 깊이도 더 깊고 크지만, 행복의 종류와 깊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행복하기 위해 누군가는 물건을 팔고, 누군가는 물건을 산다.

19일 새벽에 방송을 계속 보고 있다가 윤의 구속결정이 나자 사람들이 폭도가 되어가는 모습을 봤다. 윤의 구속결정에 기뻐할 새도 없이 지지자들의 폭력성을 보면서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저녁에 먹은 채소가 몸 안에서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가시를 품고 자라는 것 같았다.

새벽에 너무나 맑은 정신으로 유튜브를 통해 실시간으로 폭도로 변한 지지자들이 법원으로 침투해서 기물을 파손하고 판사를 잡으러 다니는 모습에서 슬프고 우울했다.

분명 이쪽이나 저쪽이나 목적은 같다. 평화롭고 좋은 나라가 되는 것. 그런데 이렇게 눈에 띄게 사람들이 반으로 쩍 갈라지는 모습을 보니 침통하다.

오래전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라디오 첫 맨트 중 -

한 마을에 이 집 저 집이 동시에 제사를 맞게 되는 것, 그곳은 슬픔과 공포의 역사일 따름이지요. 양민 학살이 자행되었던 거창군 신원면, 경찰 총기 안동이 있었던 의령군 궁유면, 4월 3일을 영원히 잊지 못할 제주, 그리고 아직 채 시신도 인양하지 못하고 있는 부안군 위도 마을, 모두 한날한시에 제사를 지내야 하는 곳입니다. 아깝게 목숨을 잃은 분들의 명복만 빌 뿐입니다.

변화는 변해야 하는 것에 전혀 변화를 끼치지 못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다.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 건 변하지 못하겠지. 19일 새벽도 슬픔과 공포의 역사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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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잔인함에 대해서 잔인하게 보여준다.


유이치를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수음시키는 잔인함.

츠다에게 원조교제를 시키는 잔인함.

화대의 일부를 가로채는 잔인함.

쿠노를 집단 성폭행하는 잔인함.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삭발을 해버리는 잔인함.

호시노를 버리는 가족의 잔인함.

카이트를 보며 하늘을 날고 싶다며 목숨을 끊어버린 잔인한.

친구인 슈스케를 죽이는 잔인함.


잔인함의 틈을 비집고 너무 아름답게 흘러나오는 드뷔시의 잔인함.

https://youtu.be/9mVyNOUD744?si=vjo1g4PEAtfr5NzW


하나씩의 아픔을 잔인함으로 대신한다.  

인간의 가장 큰 아픔은 존재 그 자체.

고통은 이미 알을 깨고 나온 후부터라는 걸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린 그들.

고통을 이겨내는 방법으로 잔인함을 택하는 그들.

위로를 받을 수 있는 통로는 잔인함 뿐인 그들.

눈을 비비고 보는 부연 시야 같은 잔인한 서정적 영상.

보는 내내 어떤 부분을 찌르는 이질감.

괴리 속에서 괴로운 건 마음속에 유치와 호시노와 쿠노와 츠다의 잔인함을 지니고 있어서.

그것이 아직도 위로라는 허울 속에서 눈시울을 위로 치켜뜨고 있어서.

존재 그 자체는 상처를 내지만 아프지가 않다.


존재, 호흡. 우주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존재해 있었다는 것. 호킹이 평생 연구를 거쳐 밝히고자 한 우주의 존재.



오프닝 살루 아라베스크 https://youtu.be/fcrgQ67MYEM?si=z5cC20S2t7HEqiGU


릴리 슈슈에서 마지막 장면.

공연을 시작하기 전의 장면에서 엑스트라 수천 명이 공연장 앞에 모여 대기를 한다. 이와이 슌지는 그 수천 명에 달하는 엑스트라에게 전부 다른 대사가 적힌 대본을 준다. 그리고 누가, 어떤 장면으로 촬영이 되어 영상으로 나올지 모르니 열심히 해주기 바란다고 했다. 이와이 슌지는 그렇게 영화를 만들었고, 현재 만들고 있고, 앞으로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것이 이와이 슌지의 힘, 내지는 록웰 아이즈가 가지는 특별함이다.


언두와 피크닉으로 빠져들어간 이와이 월드에서 만난 릴리 슈슈에서 하늘을 날고 싶었던 츠다를 두드려 깨워 밝은 모습의 하나와 엘리스로, 첫사랑을 찾은 사월의 이야기를 넘어 조금은 답답하지만 립 반 윙클의 신부를 거쳐 스왈로우 테일 버터 플라이의 미래에서 모두가 애벌레가 되는 것이다.


예고편 https://youtu.be/ggLxJJoyk4I?si=HwLFaFYLwVmMwdV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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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쓰려면 자신의 이야기,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고 유홍준 교수께서 말했다.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할까. 좋아하는 이야기도 일종의 흐름이 있다.

사람들은 타인의 불행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의 아픔에 관한 이야기, 내가 망한 이야기,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권선징악을 좋아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착한 것만을 권할 수 있냐는 것이다. 나아가서 착한 사람이 흥하고 나쁜 사람이 망하는가 한다면 오히려 그 반대다.

정말 착해야 하는 걸 권해야 할까. 착한 콤플렉스가 얼마나 무섭냐면 카렌 카펜터가 그것 때문에 결국 거식증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갔다. 어릴 때부터 착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으며 오빠 말을 잘 들어야 하며 커서도 재능이 있는 오빠의 그늘에 가려 앵무새처럼 만들어준 노래만 불렀다.

결국 카렌이 죽음으로 해서 사람들은 카펜터스의 불행을 흥미로 몰고 갔다. 언론과 출판사는 카펜터스의 불행을 팔고 사람들은 카렌의 불행을 먹고 즐거워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흐름이 있다. 한동안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자기 경험을 쓴 글을 좋아했다. 왜냐하면 우울증이 걸리지 않았더라도 우울함은 누구나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보면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많은 건 알았지만 이렇게나 많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데뷔도 많이 했다. 우울증에 관한 경험 에세이가 나왔는데 겉표지부터 내용이 대부분 비슷하다. 예전 번아웃에 관한 글이 유행일 때 나온 에세이가 다 엇비슷한 것과 같았다.

이혼에 관한 글은 시대를 막론하는 스테디셀러다. 이혼하면서 홀로 아이를 키우며 빚까지 다 갚은 이야기는 이혼을 한 사람은 물론 이혼하지 않은 사람까지도 사로잡았다.

이런 이야기를 사람들이 좋아한다고 해서 이혼을 해 본 적 없는 내가 이혼에 관한 이야기를 쓴다던가, 우울증에 걸리지 않았는데 우울증에 걸린 이야기를 쓰는 건 이상하다.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쓰는 것이 글을 잘 쓰는 것이라면 나는 글을 잘 쓰는 것에 대한 욕심은 버려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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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1-20 0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둘레 사람이 좋아하는 글이라면, 내가 사랑하는 글이기는 어렵습니다. ‘좋다’라는 낱말은 ‘좁다’를 나타냅니다. ‘좋다 = 마음에 들다’인 터라, 둘레 사람들이 마음에 든다고 하는 글은 “둘레 사람이 가까이하면서 누리는(소비하는) 글”이고, 이런 글은 늘 물갈이하듯 바뀌는 부스러기(소모성·일회성 정보)입니다. 이를테면 서로 다투거나 싸우도록 불씨를 붙이는 줄거리를 좋아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줄거리에는 우리가 스스로 이 삶을 사랑하는 살림길하고 동떨어지더군요.

‘잘 쓴 글 = 좋은글’인 얼거리입니다. 그렇다면 글을 왜 잘 써야 할까요? 왜 둘레에서 좋아하는 글을 써야 할까요? 우리가 스스로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하루를 사랑으로 짓는 이야기를 쓰면 넉넉하지 않을까요? ‘눈치(남이 좋아하느냐 마느냐 하는)’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눈빛(내가 나로서 나답게 보는)’을 가꾸면서 비로소 ‘이야기(좋은글도 나쁜글도 아닌 우리 삶)’를 쓸 수 있다고 느껴요.

언제나 오늘 이 하루를 손수 추슬러서 몸소 다독이는 글을 쓴다면, 누구나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빛이로구나 싶은 이야기를 여미어서 나눌 만하다고 봅니다.

교관 2025-01-20 11:41   좋아요 0 | URL
좋은 글입니다. 잘 보았습니다!
 


학창 시절에 멤버들과 자주 가는, 영화를 틀어주는 카페가 있었다. 대학교 근처에 있는 카페로 극장에서 잘 볼 수 없는 영화를 주로 틀어주었다.

상영관에 걸리지 못하는 이류 문화를 지향하는 영화나, 철 지난 예술영화 위주로 틀어주는 카페였다. 소규모 상영관 같은 곳이었다.

그곳은 몇 주 동안 포르노물이나 음악에 관련된 다큐를 상영할 때도 있었고, 누벨바그의 고다르 영화가 잔뜩 나오기도 했다.

이런 영화들이 대체로 따분하고 재미없다고 느끼는 대학생 대부분은 이곳을 찾지 않았다. 대학교 밴드나 음악을 하는 고등학생 밴드부, 각 학교의 문예부, 영화에 심취한 외톨이들과 순수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서로 모르지만, 이곳에 들어오는 순간 알 수 없는 위로를 서로에게 건네고 받곤 했다. 나이와 생김새는 다르나 어떤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묘한 곳이었다.

그날은 영화 ‘졸업’을 상영하는 날이라 일요일 오전부터 그곳을 찾았다. 우리는 몽땅 졸업의 마지막 장면을 좋아했다. 졸업의 마지막 장면은 현실 파괴의 동기부여가 되었고 이상주의자였던 우리에게 이상적인 영화였다.

오전 열 시에 영화는 시작한다. 공간은 협소했다. 스무 명 정도가 앉을 수 있고 벽장같이 생긴 벽에 프로젝트 빔으로 빛을 쏘아 영화를 틀기 때문에 극장에서 보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는 고3이었다. 이렇게 몰려 다는 것도 이제 마지막일지 몰랐다. 빔에서 쏘는 빛을 타고 먼지의 입자들이 춤을 추었다. 그 먼지를 따라 영화 ‘졸업’에 빠져들었다.

벤저민과 일레인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였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노래들이 영화를 꽉 꽉 메웠다.

우리가 영화 졸업을 보게 되는 건, 일탈에 성공한 벤저민과 일레인의 웃음기가 미묘하게 걷히면서 앞으로 닥쳐올 암울한 현실의 불안함을 암시하더니, 그나마 남아있던 행복한 표정이 완전히 사라진 장면에서 두려움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성 가치와 부조리에 학생이라는 특권적 시효 상실과 언젠가 닥쳐올 자기 자신에 대한 호기심 고갈이 막연하게나마 영화를 통해서 엿볼 수 있었다. 충격이었다.

그때는 어렸지만, 그 충격파를 견디기 위해, 충격을 몸과 마음으로 흡수하기 위해 우리는 영화 졸업을 3년 내내 몇 번이나 봤다.

그리고, 우리는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동시에 슬픈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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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1-19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노래가 MRS.ROBINSON 이었던가요. 다른 노래보다도 졸업하면 이 노래가 먼저 떠오르네요.
전 예전 영화관에서 가장 그리운 것이 영사기 빛의 일렁거림입니다. 뭔가 아스라한 느낌이랄까요.

교관 2025-01-20 11:41   좋아요 0 | URL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가 나오는데 묘하죠 ㅎㅎ. 정말 기묘하게도 노래가 너무 부드럽고 좋은데 이 좋은 거 금방 끝날 것 같은 느낌.

아스라한 느낌,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