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볶음

은 욕망의 음식이다.


오징어볶음이 도시락에 들어 있으면 젓가락들이 경공술을 하는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휙휙 오고 간다. 그러고 나면 순식간에 도시락 바닥이 드러난다. 그래도 괜찮다 남은 오징어볶음과 양념장을 밥에 쓱쓱 비벼 먹으면 된다. 오징어볶음은 그만큼 맛있다. 오징어로 수많은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 오징어는 회로도 일품이고, 오징어 탕도 너무나 맛있다. 오징어튀김은 말해 무엇 하리. 그래도 오징어볶음만큼 자주 해 먹을 수 있는 오징어 요리는 없다.


매콤함이 가득한 오징어볶음은 욕망의 음식이다. 후하후하 매워서 헐떡이면서도 오징어의 톡 터지는 그 맛이 좋아서 계속 집어먹게 된다. 만약 오징어볶음을 열로 익혀 먹는 것이 아니라 직화로 구워 먹는 다면 멈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바닷가에 살기 때문에 가끔 수산시장(은 아니지만) 같은 곳에 가면 그날 잡아온 오징어가 대야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도 쪼그리고 앉아서 오징어를 구경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밤에 바닷가에 나오면 저 멀리 까만 수평선에 불빛을 켜 놓은 오징어배들이 마치 수학 기호처럼 보인다. 잡혀온 오징어들은 자신이 뭔가를 잘못한 것인지 잡아서 올리면 먹물을 지익지익 뿜어내기도 했다.


기묘하게 생긴 생물체들은 죄다 바다에 살고 있다. 개불도 멍게도 불가사리도 해마도. 그리고 오징어도 참 묘하게 생겼다. 그래서 그런지 오징어는 영화 속에서 대접받지 못하는 캐릭터로 나오기도 한다. 오징어의 사촌은 아기공룡 둘리에서 꼴뚜기 왕자로 나오기도 했다. 못생긴 사람의 대명사처럼 보이지만 오징어는 그간 수많은 밥상 위를 책임졌다.


보통 밥상 위를 책임지는 음식 중에서도 식당에서 당당하게 이름을 내걸고 메뉴로 나오는 식재료는 그렇게 많지 않다. 나는 오이를 좋아하지만 오이가 주 재료로 해서 이름을 내걸고 ‘산내 오이 집’하며 오이를 가지고 요리를 하는 곳은 없다. 콩나물무침 전문점도 없고, 무가 맛있는 집이라는 무 요리 전문점도 없다. 그러고 보면 오징어는 오징어 회, 오징어무침, 오징어 불고기 등 많기도 하다.


오징어볶음은 욕망을 부른다. 볶을 때 더 빨갛고 더 매운 고추장을 넣어서 볶는다. 욕망의 냄새가 퍼진다. 주방으로, 의식으로 점점 퍼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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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에 속아서 또 이렇게 크림빵에 마요를 뿌려 먹는다



뇌를 어떻게, 어떤 식으로 잘 속이느냐에 따라서 가까이는 다이어트에서부터 넓게는 불안, 망각, 결락 같은 감정도 조절할 수 있다. 감정의 부분을 문학적으로는 마음의 문제라고 하지만 현실에서 마음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고 머릿속에 있는 뇌의 감정을 조절하는 부분의 역할일 뿐이다. 특히 다이어트할 때 뇌를 속이지 못하면 뇌에 끌려가서 눈앞의 맛있는 음식 앞에서 굴복하고 만다. 먹음직한 음식을 보면 즐거운 물질이 뇌에서 죽죽 흘러나온다. 그리고 먹는 동안 행복해진다. 도파민이라는 말을 근 몇 년 동안 아주 많이 들어온 단어다. 이 도파민 분출에 우리는 중독이 되고 만다. 그건 분명하지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자폐가 있는 아이를 훈련시키지 않으면 단맛에 중독이 되고 맛있는 음식을 끊임없이 찾게 된다. 우리 동네에도 예전에 자폐가 있는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이 아이가 부모의 훈련을 받지 못하니 18살이 되었을 무렵 거의 100킬로그램이 넘는 몸이 되었다. 매일 분식집 앞에서 튀김을 사 먹고 있었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을 보면 도파민을 분출하지 못하도록 두정엽의 절제를 하여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많았다.


조깅을 하다 보니 조깅에 관한 이야기나 연구 같은 것들을 찾아서 보게 된다. 나처럼 야외에서 조깅을 하는 사람도 있고 체육관의 트레드밀에서 조깅을 하는 사람도 있다. 각각 장단점이 있다. 야외는 아무래도 시시때때로 변하는 자연에 반응하며 달려야 하니 힘들다. 비가 많이 오면 달리지 못하고 눈이 많이 와도 힘들다. 몹시 추워도 힘들도, 너무 더워도 힘들다. 강변을 달리다 보면 이 죽일 놈의 날벌레들이 벌떼처럼 웅웅 하는 것도 힘들다. 그러나 실내에서 조깅을 하면 이런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래서 연구를 해보니 실내의 트레드밀에서 조깅을 하면 뇌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다리를 움직이니까 뇌가 조깅을 하는 것을 인지하는데 시야로 들어오는 풍경의 변화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몸은 극렬하게 움직이는데 보통 이렇게 달리기를 하면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바뀌거나 흘러가기 마련인데 그대로니까 뇌가 피곤해진다. 해서 실내에서 조깅을 하면 야외에서 조깅을 하는 것보다 더 피곤하게 느끼는 사람이 있고 또 효과도 더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협소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다. 왜냐하면 체격이나 수면시간, 하루의 사이클, 그리고 먹는 음식과 얼마나 빨리 달리느냐에, 또 나이에 따라 사람에게 전달되는 반응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평지를 계속 달리는 것으로 인지하는 뇌가 주인에게 더 피곤함을 안겨 주는지, 그래서 효과를 더 주는지 아니면 역효과를 주는지 자세한 건 알 수가 없다.


어떻든 뇌는 이렇게 잘 속기도 하며 우리를 잘 속이기도 한다. 특히 지나간 과거에 대한 어떤 사실이 있을 때 뇌가 그 기억을 명확하게 할 수가 없다. 만약 했더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진실이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이번 옥장판 사태 같은 경우에도 기사에는 이런이런 내용으로 기사가 흘러나왔지만 인맥이라는 게, 또 그 인맥의 끈을 연결한다는 게 확실한 구분이 없다. 아, 나 그 사람이랑 하니까 잘 맞던데.라고 말했다면 그게 권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난 후에 이런 일들이 당한 쪽에서는 뇌가 그거 불이익이라고 인지를 해버리면 그렇게 흘러간다. 1세대 뮤지컬 배우들이 배우는 연기만 하고 캐스팅은 제작사가 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분명 1세대 뮤지컬 배우들도 그랬을 것이다. 안 그렇다고 할 수가 없다. 그때 뮤지컬 배우들이 많이 없고 관객도 별로 없으니까 어떻게든 나와 잘 맞는 배우들과 좋은 공연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나 이 배우와 잘 맞아, 나 저 배우랑 하니까 너무 좋던데. 이런 말들에 대해서 그 기준이 확실하지 않다. 1세대 배우들이 지금 성명서 같은 것으로 한 말은 정치가가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책임지는 사람도 없고 명확한 답도 없다. 모호하고 우리 모두 행복했으면, 하는 말과 같다. 그저 지금의 뇌가 그렇게 말하기를 바라고 있어서 그렇게 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아이돌 출신의 노래 잘하는 가수가 뮤지컬 배우가 되었을 때 티켓 파워가 엄청나니 그 이익을 뮤지컬 배우들도 보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 뮤지컬 배우가 나 저 배우와 하니까 무대가 꽉 차는 거 같아, 라는 말을 들은 제작사가 오디션을 통해서 비슷한 실력이면 주연 배우와 잘 맞는 배우를 캐스팅하는 것을 어디쯤에서 이게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요즘 나는 마요네즈를 두고 이 작고 쪼글쪼글한 뇌와 열심히 싸우고 있다. 뇌는 매일 밤 마요네즈를 여기저기 뿌려 맛있게 마음껏 먹으라 한다. 유튜브를 통해 티브에서 방영한 건강 방송을 보면 비만, 복부비만, 뱃살, 100킬로가 된 몸의 주인공들이 나온다. 그들 역시 눈앞의 맛있는 것들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이 영상들을 보다 보면 참 묘한 게 유튜브에서 전문 먹방러들이 먹는 모습보다 건강 걱정 방송에 나온 사람들이 먹는 모습이 훨씬 맛있게 보인다. 게다가 그들은 인슐린을 배에 꽂아 가면서도 먹는 것을 손 놓지 못하는데 먹을 때만은 너무나, 정말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을 정도로 행복한 얼굴이다. 분명 건강 방송이니까 이들의 건강문제를 지적하고 고치려는 방송인데 방송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음식 앞에서 평온하거나 들뜨거나 세상 행복한 모습들이다. 자막과 패널들은 걱정이 한가득이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음식은 또 맛난 거, 맛있게도 먹는다.


이 뇌에 그만 잘 속는 사람들 중에는 평생 운동을 했던 운동선수들도 있다. 운동선수들은 대부분 날씬하고 몸이 좋다. 이유는 당연하지만 하루 종일 운동을 하기 때문이다. 8시간씩 운동을 하는데 살이 붙을 여력이 없다. 그러나 초등부터 중 고등, 대학, 그리고 프로선수를 거치면서 식사를 할 때 빠르게 먹는다. 운동선수들은 운동 중간에 점심을 먹을 때 빨리 먹는다. 빨리 먹어야 후배들에게, 또는 선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남은 시간 좀 쉴 수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음식일수록 우리는 빨리 먹는데 운동선수들은 먹는 양도 많다. 그렇게 평생 습관이 들려 버렸다가 은퇴를 하게 되면 그 습관이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뇌는 그렇게 하기를 강요하고 뇌를 따라다가 보면 은퇴 후에는 급격하게 살이 찐다. 운동선수들의 은퇴는 일반 회사원들의 은퇴와는 다르게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한다.


조깅이나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들 중에 이온음료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도 뇌에 속아서 그 맛에 길들여졌을지도 모른다. 이온음료가 필요한 사람은 선수처럼 운동을 한 경우에다. 농구선수들은 훈련을 하고 나면 농구화에서 땀이 비어져 나올 만큼 고강도로 운동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 이 이온음료다. 이 정도로 운동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렇게 이온음료가 몸에 필요가 없다. 운동 한 시간하고 이온음료 한 병씩 다 비운다면 뇌에 굴복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온음료가 맛도 있으니까. 오늘도 우리는 뇌에 속고, 뇌를 속이며 하루하루 아슬아슬하게 보낸다. 그게 사는 묘미라고 한다면 그래 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식빵에 마요일 뿐인데도 맛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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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인간은 모두 죽는가? 그리고 모두가 죽는데 어째서 자신은 그 죽음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가? 안 죽는 인간이 없고 150년 전에 태어난 인간 중에 안 죽은 인간도 없다.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가는 항해를 할 뿐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죽는다. 가깝게든 멀게든 죽음은 나의 곁에서 생과 사처럼 붙어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죽음 속에 자신은 교집합 시키지 않는다. 언제 죽을지 몰라서 내일이라도 죽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 오늘을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은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사는 걸까. 인간은 죽을 뿐인 삶인데 새치가 나는 것에 신경을 쓰며, 헤어스타일에 울고 웃을까. 네일 손질을 하고 신발이 있는데 또 구입을 하고, 수염을 깎고, 향수를 뿌리고 더운 날 조깅을 하며 땀을 흘릴까. 왜 줄을 서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것일까. 어차피 죽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데 인간은 왜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며 고민을 하며 지낼까. 죽고 난 다음에 죽기 전에 좋은 곳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먹기 전에 사진을 찍고, 옷을 구입해서 입고. 이런 것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으며 그저 허공에서 팡하며 사라진다.


죽음에는 5단계, 죽음의 5단계가 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 쿼블러 로스가 69년에 자신의 저서에 죽음의 5단계를 구분 지어 놓았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은 처음에는 부정한다. 난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두 번째는 분노한다. 왜 하필 나인가.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세 번째는 타협이다. 이렇게 하면 살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운동과 이런 음식을 먹으면 되는가. 네 번째는 우울이다. 극심한 우울이 찾아온다.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자신이 죽고 난 후 남겨진 가족의 걱정과 그들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마지막으로 수용이다. 모든 감정이 지나가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일찍 죽을 뿐이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보통의, 죽음을 선고받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죽음이라는 것에서 자신을 떨어트려 놓는다. 자신의 문화적인 카테고리 안에 죽음을 빼버린다. 그건 정말 궁금하다. 어째서 인간은 그럴까. 꼭 명확한 해답을 알아야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간 수많은 영화, 소설, 시, 음악을 통해서 그런 부분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어째서 동물과는 다른, 인간이 동물처럼 죽음을 멀리하는 것일까. 동물은 죽음이라는 관념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이 오는 두려움이 없다. 생과 사는 동전처럼 붙어있는 것인데 생에만 집착을 한다. 이 황망함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 동물도 인간과 같은 대접을 해주자는 겁니까.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인간도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 비밀 같은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한다. 과학 커뮤니티 엑소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뇌가 작용하는 것으로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을 타인에게서만 찾는다. 타인의 죽음을 접하면 뇌의 몇 구간은 그 부분이 활성화가 되지만 자신과 죽음을 연관하려고 하면 비활성화가 되어 자신은 죽음과 무관한,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오늘을 열심히 보낸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죽음도 없을 텐데. 탈 나지도 않고 아프지도,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될 텐데. 우울하지도 않을 것이고 슬퍼서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일을 위해 사는 삶이 옳은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우리는 태어났다. 무엇 때문에 태어났다기보다 태어났기에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누군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 마냥 자연스럽게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뇌는 죽음이라는 걸 삶을 보내는 동안 열심히 밀어낸다. 들어오려고 하면 자꾸 밀어낸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하며 보낸다. 가족을 위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또는 자신을 위해 열심히 보낸다.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보고 사진을 찍는다. 오늘 그렇게 보내고 내일 살아있다면 또 그렇게 보낼 것이다.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이 세계를 위해서 대단한 일을 하겠지만, 그런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처럼 밤이 되면 잠이 들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는다. 어디서 자느냐, 무슨 음식을 먹느냐 하는 건 다른 문제지만 인간은 모두가 똑같다. 죽음은 어떤 인간에게도 공평하다. 죽음은 눈과 같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 이 눈이 내리면 전부 눈을 맞는다. 죽음도 그렇다. 모두가 죽는다.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죽음을 여럿 봤다. 주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버렸다. 사고로 또는,,,,  자신이 자기의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 사람이 죽고 나면 사후처리도 만만찮다. 여러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마치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장례식은 며칠 할 것인지. 오는 사람 수에 따라 음식은 어떻게 할 것인지. 관은 뭘로 할 것인지. 수의는 어떻게. 같은 문제들이 따라온다. 그게 끝나면 화장을 할 것인지 묻을 것인지. 화장을 하고 나면 뼈를 어딘가에 뿌릴 것인지 수목장을 할 것인지. 주택이나 자동차가 죽은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다면 명의이전을 해야 한다. 법원에 갈 때도 있고 관공서에 갈 경우도 있다. 혼자서 못하면 법무사를 통하기도 한다. 사람 한 명이 죽고 나면 뒤처리가 며칠 내지는 몇 달간 죽 이어진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건 살아있는 사람과도 이어진다. 죽음을 인지하는 생물체도 있다고 한다. 개미가 그렇다고 한다. 개미는 죽고 나면 개미들이 죽은 개미를 개미무덤에 끌고 가서 거기에 놓는다. 개미에게는 페로몬이 나오는데 죽은 개미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은 살아있는 개미에게서 나오는 페로몬과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개미에게 죽은 개미에서 나온 페로몬을 묻히면 살아있는 개미가 개미 무덤으로 가서 그곳에서 죽어 버린다. 죽음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생물체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어떤 사람, 누구도 이런 위안을 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 개미가 위안을 준다. 삶에 있어서 죽음은 중요하다. 죽음만큼 삶도 중요하다. 생과 사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삶의 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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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6-25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끼리도 해당되지 않을까요? 코끼리도 죽음이 다가오면 특정 장소로 이동해 죽는다고 하더군요

교관 2022-06-26 11:46   좋아요 0 | URL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ㅎㅎ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가난해서 단칸방에 세 들어 산 적이 있었다. 그때 다행히 주인집을 잘 만나서 우리에게 잘해 주었다. 단칸방에 친척이 오기라도 하면 부모님은 난처했을 텐데 주인집에서 방을 하나 내주어서 멀리서 왔는데 그냥 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아침에 다 같이 밥을 먹기도 했다. 그게 사진으로 남아 있어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주인집에는 나보다 형이 두 명, 그리고 누나가 있었는데 아주 친하게 지냈다. 특히 막내 형과는 많이 붙어 다녔다. 잠을 자는 시간 빼고는 늘 같이 놀곤 했다. 가난했다지만 어린이라서 그게 불행한 것인지, 흠결인지, 불편한지도 몰랐다. 막내 형과의 기억나는 일은 주인집, 형네 집에서 자두주를 담갔는데 때가 되어서 항아리를 다 따서 자두는 빼고 술만 따로 병에 붓고 있었다. 막내형과 밖에서 놀다가 들어와서 자두가 쌓여 있기에 그걸 몇 개 집어 먹고서는 둘 다 요단강을  건널뻔했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형편이 좀 나아져 방에 두 개짜리 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주인집과는 계속 교류를 했다. 더 시간이 지나 큰 형이 대학교를 다닐 때 나는 과외를 받았다. 나의 영어실력에 망연자실한 큰형은 나에게 영어를 꼭 가리켜야겠다는 의욕을 불태우고 또 태웠다. 얼마 되지도 않는 과외비를 받으며 지치지도 않고 매일 와서 그 하기 싫은 영어를 가르쳐주었다. 과외를 받으며 기억나는 것은 큰형은 꼭 들어와서 양말을 벗었는데 나는 속으로 벗지 마라, 벗지 마라, 했다. 양말을 벗는 순간 기묘한 발 냄새가 콤콤하게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큰형은 뭐든 잘 먹었다. 가리지 않고 어머니가 주는 대로 다 잘 먹었다. 이토록 튼튼하게 보일 사람이라니, 하고 생각이 들었다. 큰형은 군대를 제대하고 자동차를 만드는 대기업에 들어갔고 바로 결혼을 했는데 대기업에 입사한 지 일 년 만에 과로로 죽고 말았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회사에서 압박감이 굉장했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는 주인집 아주머니를 만나서 위로를 했다. 어려울 때 돈을 턱 주며 도와줄 수는 없지만 그렇게 한 번 맺은 인연은 아직까지 이어졌다. 계중은 아니지만 계중처럼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은 모임을 갖고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몇십 년 동안 우정 같은 것이 이어진 것이다. 그러던 주인집 아줌마가 할머니가 되었고 어제는 치매가 걸려서 치료를 받으러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와 주인집 아줌마를 보면 인연이라는 게 존재하는구나, 먼 친척보다 낫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라는 건 어떻게 정의하는 게 맞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관계라는 건 정의할 수 없는 관념일까. 그나저나 인간은 나이가 들면 어째서 치매 같은 것에 굴복하게 되는 걸까.  


주인집과 우리 집은 마당에서 부추전을 그렇게 자주 만들어 먹었다. 부추는 넘치고 밀가루를 버무려 마당에서 지글지글 부추전을 구우면 두 집만의 파티였다. 그 냄새가 골목으로 퍼지면 다닥다닥 붙어있던 옆 집, 뒷 집에서도 와서 같이 부추전을 나누어 먹었다. 혼자인 게 편하고 혼자서 뭘 먹는 것이 좋지만 부추전은 다 같이 둘러앉아 죽죽 찢어 먹었던 맛이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부추전을 자주 해 먹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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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6-22 12: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추는 베어 먹고 열흘만 지나면 다시 그만큼 자라 있어 여름 내내 먹을 수 있죠.

교관 2022-06-23 11:10   좋아요 0 | URL
부추가 쑥쑥 자라는군요 ㅎㅎ. 부추의 엄청난 생명력을 부추전을 통해 냠냠
 


나이가 들면 날씬해 보이지 않는다. 어떤 노력으로 살을 빼면 마르거나 그렇지 않게 보일 뿐이다. 나이가 들면 살이 찌거나 마른다. 나이가 들었어도 날씬해 보이는 사람은 20대부터 매일 운동을 해서 60대까지 지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운동을 매일 30년 이상 한 사람들이나 나이가 들어도 날씬해 보인다. 유명인이나 연예인들이 거기에 속하겠다.


살이 늘 쪄 있는 상태로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 아 안 되겠군, 하며 살을 뺐다고 해도, 설령 날씬해졌다고 해도 날씬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가끔 기사에 볼 수 있듯이 하루에 4시간씩 헬스클럽에서 근력운동을 체계적으로 한 나이 든 사람일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누구나에게 다 해당하는 일이지만 모두가 다 똑같이 나이가 든다고 해서 내가 나이가 드는 것을 기분 좋게 생각하는 사람은 잘 없다.


일단 나이가 들면 눈에 보이는 현상들이 결락감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그 오래전 이런 현상을 캐치할 무렵이 되었을 때, 이런 현상이 눈에 막 들어오기 시작할 때 수명이 다 하는 시기가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그 정도의 나이에 죽는구나,라고 알고 있으니까 그것대로 사람들은 움직이며 사고했다. 그러나 지금 시대에는 뭐 그런 것까지 신경을 쓰냐?라고 할지 모르지만 지금의 사람들은 먹을 때에도 과당류, 다당류, 단당류까지 다 체크해가면서 먹는 시대가 되었다. 이렇게 일일이 따져가며 먹는 사람들이 어떻든 좀 더 나이를 덜 먹게 되는 신체를 가지고 있다.


매일 조깅을 하면서 늘 비슷한 체형과 체격을 유지했는데 근래에 마요네즈를 일주일에 한 통은 먹다 보니 여기저기 살이 붙는다. 그게 눈으로 보인다. 겨드랑이 밑으로 살이 붙었다. 허리도 등 쪽에 살이 붙었다. 그래서 조깅의 강도를 올리고 운동량을 늘리고, 나름대로 시간과 강도를 올리지만 예전만큼 쉽게 살이 빠지지 않는다. 더 붙지 않게 유지되는 거 같다.


하루에 나는 두 끼나 한 끼 반 정도를 먹는다. 조깅을 할 때 빼고는 누구를 만날 때나 일을 할 때에는 거의 대부분 앉아 있기 때문에 먹는 것을 신체보다 뇌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그래서 조깅을 하기 직전까지 한 끼를 가지고 늘어뜨려서 먹는다. 쪼개서 조금씩 먹어서 허기를 잊어버리게 한다. 만약 뇌를 따라갔다면 이것저것 맛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서 아마도 금방 살이 불어났을 것이다. 이를테면 조금만 먹어도 금방 배가 부르다. 그러나 맛있는 것이 눈앞에 남아 있기 때문에 배가 불러도 잘 들어간다. 그래서 많이 먹는다. 뇌는 그걸 원하고 있다. 그런 뇌의 명령과 부탁과 바람을 거부하고 조금만 먹는다. 이제 뇌가 지칠 만도 한데 눈앞에 맛있는 것이 보이면 뇌는 또 달려들라고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하루 종일 앉아서 일을 하다가 조깅을 할 때에는 신나게 하는 편인데 그것도 최근에는 예전만큼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거리를 쉬지 않고 달릴 수가 없다. 중간에 한두 번은 헉헉 거리며 쉬게 된다. 그러면 근력운동을 정말 팔다리가 끊어질 듯하는데 그럴 때 오는 고통이 좋아서 매일 그렇게 하고 있다. 제대로 근육을 풀어주지 않으면 아침에 일어날 때 온몸이 아우성을 지르는데 그 아우성을 듣는 게 좋다. 비록 몸을 으 하며 일으켜야 하지만 정말 나는 살아있다는 기분이다.


저녁에 조깅을 하다가 산스장에 가면 주로 노인들이 많다.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지 먼지 많고 무더운 이런 곳에는 잘 나오지 않는다. 돈을 들여 클럽에서 제대로운동을 하는 게 운동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를 보는데 가장 이상적이다.


헬스클럽에 어르신들은 거의 없고 대부분 저녁에 야외에 운동을 하러 나온다. 그래서 산스장에도 어르신들이 많은데 운동이라고 할 수는 없는 동작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운동은 역효과를 부르는데, 보통 어르신들은 저녁을 먹고 집에서 나와서 운동을 하고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저녁 먹은 것만 소화가 되고 배가 출출하니까 뇌가 야식 먹기를 바란다. 그래서 또 먹게 된다. 어르신들은 야외에서 벤치에 앉아서 휴대전화만 보고 들어가도 가족한테는 나 운동하다가 들어왔어!라고 한다.


산스장에서는 재미있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매일 나오는 어르신 두 분이 있다. 매일 나와서 매일 열심히 운동을 하신다. 어르신임에도 불구하고 운동하는 강도나 시간은 젊은 사람들 못지않다. 두 사람 다 살이 찌지는 않았다. 한 어르신은 보기 좋을 정도이고, 한 어르신은 몸이 좋다. 이 두 사람의 특징은 산스장에 몇 년 동안 매일 나오기 때문에 이곳에 운동을 하러 나오는 어르신들끼리(보통 어머님들에게) 인사를 한다. 안부도 묻고, 주말에는 뭐 했냐, 정치 이야기도 가끔 하고, 또 소리도 높이고, 그동안은 코로나 때문에 백신이니 같은 이야기도 하고. 또 한 어르신은 위에서 말한 운동 동작이 엉망인 어머니들이 있으면 가서 참견을 한다. 그런 서로는 절대 인사를 하지 않는다.


동선도 교묘하게 겹치지 않는다. 그러나 서로 스칠 때가 있지만 서로 먼산만 보며 아는 척을 하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산스장에 다른 어르신들이 오면 반갑게 인사를 한다. 아아 정말 알 수 없는 세계다. 막 플랭크를 하고 있는데 그런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무릎을 꿇고 만다. 그 미묘한 신경전, 그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아우라, 그들을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모습. 정말 재미있는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두 어르신은 매일, 격하게 보일 정도로 운동을 해서 그런지 마르게 보이지 않고 살이 찌지도 않았다. 그리고 두 어르신 중에 한 아버님은 운동 후에 집으로 가서 절대 먹지 않는다고 했다.


라면도 어느 때가 가장 맛있냐 하면 지금 먹는 라면이다. 조깅 후에 라면 끓여 먹으면 그렇게나 맛있다. 정말 참을 수 없다. 두 개 끓여 먹고 싶지만 나의 뇌와 타협을 하고 하나만 끓여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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