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간은 모두 죽는가? 그리고 모두가 죽는데 어째서 자신은 그 죽음 안에 포함시키지 않는가? 안 죽는 인간이 없고 150년 전에 태어난 인간 중에 안 죽은 인간도 없다.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가는 항해를 할 뿐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죽는다. 가깝게든 멀게든 죽음은 나의 곁에서 생과 사처럼 붙어있다. 그러나 사람은 그 죽음 속에 자신은 교집합 시키지 않는다. 언제 죽을지 몰라서 내일이라도 죽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면 오늘을 그렇게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인간은 오늘을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사는 걸까. 인간은 죽을 뿐인 삶인데 새치가 나는 것에 신경을 쓰며, 헤어스타일에 울고 웃을까. 네일 손질을 하고 신발이 있는데 또 구입을 하고, 수염을 깎고, 향수를 뿌리고 더운 날 조깅을 하며 땀을 흘릴까. 왜 줄을 서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 하는 것일까. 어차피 죽으면 아무런 소용도 없는데 인간은 왜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며 고민을 하며 지낼까. 죽고 난 다음에 죽기 전에 좋은 곳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먹기 전에 사진을 찍고, 옷을 구입해서 입고. 이런 것은 죽고 나면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으며 그저 허공에서 팡하며 사라진다.


죽음에는 5단계, 죽음의 5단계가 있다.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 쿼블러 로스가 69년에 자신의 저서에 죽음의 5단계를 구분 지어 놓았다.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은 처음에는 부정한다. 난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두 번째는 분노한다. 왜 하필 나인가. 다른 사람은 멀쩡한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세 번째는 타협이다. 이렇게 하면 살 수 있을까. 내가 이런 운동과 이런 음식을 먹으면 되는가. 네 번째는 우울이다. 극심한 우울이 찾아온다.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자신이 죽고 난 후 남겨진 가족의 걱정과 그들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마지막으로 수용이다. 모든 감정이 지나가면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비록 고통스럽지만 모두가 죽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조금 일찍 죽을 뿐이라고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보통의, 죽음을 선고받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죽음이라는 것에서 자신을 떨어트려 놓는다. 자신의 문화적인 카테고리 안에 죽음을 빼버린다. 그건 정말 궁금하다. 어째서 인간은 그럴까. 꼭 명확한 해답을 알아야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간 수많은 영화, 소설, 시, 음악을 통해서 그런 부분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궁금해졌다. 도대체 왜. 어째서 동물과는 다른, 인간이 동물처럼 죽음을 멀리하는 것일까. 동물은 죽음이라는 관념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죽음이 오는 두려움이 없다. 생과 사는 동전처럼 붙어있는 것인데 생에만 집착을 한다. 이 황망함이 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 동물도 인간과 같은 대접을 해주자는 겁니까.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것보다 인간도 동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이 비밀 같은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한다. 과학 커뮤니티 엑소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뇌가 작용하는 것으로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을 타인에게서만 찾는다. 타인의 죽음을 접하면 뇌의 몇 구간은 그 부분이 활성화가 되지만 자신과 죽음을 연관하려고 하면 비활성화가 되어 자신은 죽음과 무관한, 동떨어진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내일에 대한 희망을 품고 오늘을 열심히 보낸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죽음도 없을 텐데. 탈 나지도 않고 아프지도,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될 텐데. 우울하지도 않을 것이고 슬퍼서 눈물을 흘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내일을 위해 사는 삶이 옳은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지만 우리는 태어났다. 무엇 때문에 태어났다기보다 태어났기에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누군가 그렇게 정해놓은 것 마냥 자연스럽게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뇌는 죽음이라는 걸 삶을 보내는 동안 열심히 밀어낸다. 들어오려고 하면 자꾸 밀어낸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을 최선을 다하며 보낸다. 가족을 위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또는 자신을 위해 열심히 보낸다. 음악을 듣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보고 사진을 찍는다. 오늘 그렇게 보내고 내일 살아있다면 또 그렇게 보낼 것이다. 누군가는 어딘가에서 이 세계를 위해서 대단한 일을 하겠지만, 그런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처럼 밤이 되면 잠이 들고 배가 고프면 음식을 먹는다. 어디서 자느냐, 무슨 음식을 먹느냐 하는 건 다른 문제지만 인간은 모두가 똑같다. 죽음은 어떤 인간에게도 공평하다. 죽음은 눈과 같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 이 눈이 내리면 전부 눈을 맞는다. 죽음도 그렇다. 모두가 죽는다.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 죽음을 여럿 봤다. 주변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죽어 버렸다. 사고로 또는,,,,  자신이 자기의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 사람이 죽고 나면 사후처리도 만만찮다. 여러 가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마치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장례식은 며칠 할 것인지. 오는 사람 수에 따라 음식은 어떻게 할 것인지. 관은 뭘로 할 것인지. 수의는 어떻게. 같은 문제들이 따라온다. 그게 끝나면 화장을 할 것인지 묻을 것인지. 화장을 하고 나면 뼈를 어딘가에 뿌릴 것인지 수목장을 할 것인지. 주택이나 자동차가 죽은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다면 명의이전을 해야 한다. 법원에 갈 때도 있고 관공서에 갈 경우도 있다. 혼자서 못하면 법무사를 통하기도 한다. 사람 한 명이 죽고 나면 뒤처리가 며칠 내지는 몇 달간 죽 이어진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건 살아있는 사람과도 이어진다. 죽음을 인지하는 생물체도 있다고 한다. 개미가 그렇다고 한다. 개미는 죽고 나면 개미들이 죽은 개미를 개미무덤에 끌고 가서 거기에 놓는다. 개미에게는 페로몬이 나오는데 죽은 개미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은 살아있는 개미에게서 나오는 페로몬과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살아있는 개미에게 죽은 개미에서 나온 페로몬을 묻히면 살아있는 개미가 개미 무덤으로 가서 그곳에서 죽어 버린다. 죽음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는 생물체가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어떤 사람, 누구도 이런 위안을 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존재, 개미가 위안을 준다. 삶에 있어서 죽음은 중요하다. 죽음만큼 삶도 중요하다. 생과 사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삶의 큰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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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6-25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끼리도 해당되지 않을까요? 코끼리도 죽음이 다가오면 특정 장소로 이동해 죽는다고 하더군요

교관 2022-06-26 11:46   좋아요 0 | URL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