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평온하게 보이는 날은 코로나 시기에도 늘 그랬다. 자연은 더 푸르러졌고 조깅을 하는 강변에는 뱀과 메뚜기가 늘어났고 몇 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제비의 비행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평온하지 않았다. 마음은 불편한데 몸만 편하거나, 몸은 불편한데 마음이 편할리 없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세상이 이렇게 평온하게 보인다. 이렇게 평온하면 조금은 불안하다. 알 수 없는 껄끄러움, 침을 삼키면 목이 조금 따끔거릴 정도로 불안하다. 내일이라도 당장 이 평온의 얼굴을 버리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코로나가 전염병 1급에서 2급으로 내려간 지금, 쏟아지는 평온을 보며 지난 2년간의 일들을 떠올렸다. 백신 1차의 후유증으로 2, 3차는 맞지 않아서 작년 12월부터 몇 개월 동안 “저는 백신 1차만 맞은 미 접종자입니다”라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그럴 수 없는 분위기였다. 12월 한파가 한창이었던 어느 날이었다.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지는 날 엔진오일을 갈아야 했다. 대기를 하고 작업을 하는 동안 실내의 대기실에서 보통 기다려야 하지만 나는 미 접종 자여서 밖에서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하지 않아야 했다. 친구도 1차 접종 후에 비염이 너무 심해져서 2차는 맞지 않으려 했지만 남편과 아이들의 식사를 위해 마트에서 장을 보지 않으면 안 되기에 어쩔 수 없이 2차를 맞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지금은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정도 이런 점에 대해서는 평온해진 것이다. 어떤 기간 동안, 어떤 장소에서는 분위기가 그러지 말아야 하는 압도된 공기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지금의 나는 백신 1차만 맞았고, 3차까지 맞은 어머니도 코로나에 걸려 집에서 격리를 했고 며칠 아파서 고생을 했으며 식사 같은 것을 챙기느라 같이 있었음에도 나는 아직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있다. 내 주위는 대부분 코로나에 걸렸기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지켜봐야 했다. 3차까지 맞은 아는 동생은 서른 살 초반인데 너무 아파서 울기까지 했다. 보통 성인이 되면 슬프거나 기뻐서 눈물을 흘리지 아프다고 해서 엉엉 울지는 않지만 코로나는 그걸 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너무 아프고 정신이 가물거려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다. 심각했던 것이다. 지금도 코로나의 후유증이 있다고 했다.


아직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나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데 1차 밖에 맞지 않았기에 이론적으로는 걸리게 되면 지옥을 맛보게 된다는 말이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하지만 코로나에 걸린 사람들 역시 조심했는데도 걸리고 말았다. 이제는 코로나에 걸려도 정부 지원금도 받지 못하며, 병원비와 약값도 개인부담이다. 여러모로 별로다. 어떻든 이런 이야기도 지금은 편하게 할 수가 있게 되었다. 보이지 않을 것 같았던 분위기의 실타래가 풀려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별거 아니지만 도움이 된다.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 제목 같지만 진짜 그러하다. 수학여행을 가게 되었고, 대학교 공연이 열리게 되었다. 버스킹은 물론이고 초등학교의 운동회도 마스크를 벗고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 역시 기쁘고 들떠있는 것 같다. 이런 것들이 책에서만 보던 평범한 일상이 무너지게 된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그동안 2년이나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하찮은 일상이 없어지면 인간의 생활이 지옥이 되는지 전 세계사람들이 경험을 했다.


코로나 초기에는 신천지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 그러면서 내가 있는 도시에도 첫 코로나 확진자가 신천지 교인이었다. 교인이면서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타 지역에서 생활을 하다가 주말에 이 도시로 들어와서 여러 곳을 다닌 다음 부모님의 집으로 간 것이다. 첫 확진자가 다녀간 빵집과 여러 곳이 확진자의 동선에 들어감으로 강제 폐쇄가 되었다.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코로나 확진자 어쩌고 같은 문구가 붙었고 장사를 못하게 되었다. 이건 당시에 낙인과도 같은 것이다. 하루아침에 거지꼴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비난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던 첫 확진자에게로 쏟아졌다. 첫 확진자이자 슈퍼 전파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첫 확진자의 아버지가 그 동네에서 작은 병원을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도 불똥이 튀었다. 결국 그 병원은 진료를 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던데 요즘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내가 일하는 건물에도 그 여파가 불었다. 시내 중심가에 있는데 몇몇의 확진자가 시내의 서른세 가지 맛 아이스크림 가게와 분식집을 다녀가면서 폐쇄를 하고 딱지를 붙였다. 덩달아 확지자가 다녀가지 않아도 그 옆 가게들도 같이 문을 닫았다. 그러면서 바글바글 해야 하는 저녁 8시의 시내 중심가가 유령도시처럼 변했다. 조깅을 하고 돌아오면 전부 불이 꺼져있고 학생들로 가득해야 하는 중심가의 거리에 사람들이 싹 빠져버렸다. 이런 모습은 나도 처음 봤다. 이런 현상이 몇 달 가겠지, 했는데 1년이 넘어 이어졌다. 그러면서 장사가 아주 잘 되어서 큰 평수로 장사를 했던 대패 삼겹살부터 없어지기 시작하더니 맥주 거리에 있던 술집들이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하나씩 사라졌다. 내가 일하는 건물도 저녁 8시가 넘어가면 문을 닫고 귀가를 바란다는 번영회의 권유가 있었다. 건물도 저녁에는 유령건물이 되었다. 그렇게 한 번 무너진 상권은 좀처럼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게 된다. 콧물 효과처럼 내려갈 때는 쑥 하며 빠르게 내려가지만 올라올 때는 아주 더디게 천천히 올라온다.


2020년 여름까지는 전문가들의 입에서 야외에서는 거리두기를 하고 혼자일 경우에는 마스크는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조깅을 하러 나가면 운동을 하러 나온 어르신들이 마스크를 그때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확진이 되면 죽음 내지는 생사를 오가는 대단한 바이러스라는 걸 알게 된 후에는 전문가들의 발언도 달라졌고 야외에서도 마스크를 착용해야 했다. 그럼에도 작년까지 마스크를 쓰지 않고 나오는 어르신이 있었다. 그 어르신은 70대임에도 탄탄한 근육으로 비슷한 연령대의 부러움을 사는 어르신이었다. 독불장군 같은 면모를 지니고 있었는데 운동하는 시민을 위해 시에서는 무료로 시원한 생수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 어르신은 밤이 되면 집에서 들고 온 커다란 생수 통에 얌체처럼 물을 받아서 갔다. 그렇게 두통씩 받아갔다. 그런 양아치 같은 짓을 여러 번 했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안 드는 건 100미터 떨어진 곳에 공중 화장실이 있는데 벤치 바로 옆 풀숲에서 오줌을 갈긴다. 매일 그런다. 날이 따뜻해지거나 여름이면 오줌 지린내가 아주 심하게 난다. 안하무인인 것이다. 늘 맨발로 운동을 하는데 운동을 하다가 물을 머리에 뿌리고 가래까지 늘 뱉는다. 카악 퉷. 마스크는 전혀 하지 않고 2021년 겨울이 오기까지 그랬다. 코로나가 오기 전에도 늘 그랬지만 코로나가 온 이후에는 거기에서 오직 한 명, 그 어르신만 마스크를 하지 않았다. 노인인데 근육이 좋고 덩치가 있으면 걸음걸이가 다른 어르신들과 다르다. 양팔을 조금 벌리고 거만하게 걷는다. 그런 걸음걸이가 있다. 아무튼 자신의 집인 양 그렇게 마스크도 없이 운동을 하고, 누군가와 시비가 붙거나 자신이 타고 온 자전거를 세우다가 자신의 힘에 자기가 넘어졌을 때에도 어딘가를 향해 욕을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니까 땅이 이래서 자전거를 세우다가 넘어졌다는 것이다. 땅은 평평하고 아무 잘못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어르신이 보이지 않은 지 몇 개월째다. 겨울부터 보이지 않는다. 매일 나오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나오지 않게 되었다. 운동중독 어르신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매일 다니는 길목이 꿈속에도 나타나고 나는 그 거리를 걷고 있다. 꿈속에서 매일 다니는 길목은 현실과 조금 달라 보였다. 나는 지금보다 어렸고 길목의 길은 더 길고 더 넓고 더 재미있었다. 같은 길목이지만 꿈속에는 현실보다 소거되어 있는 부분도 많았다. 낯설지 않은데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나는 어릴 때 이 길목을 매일 걸어 다녔다. 꿈인데 냄새까지 났다. 길목의 냄새, 추억이라 불리는 오래된 냄새가 길목에서 폴폴 풍긴다. 코로나 시기에 달리진 나의 생활 반경의 풍경을 묘하자면 그렇다.


모든 것이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곳, 그것이 지금 내가 있는 이곳, 코로나 시기의 지금, 현재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면 우리는 대체로 잊어버리고 그것이 올바른 흐름이지만 코로나 초기를 생각해보면 모두가 우왕좌왕했다. 백화점에서 직원이 마스크를 쓰고 고객을 응대한다고 손님을 무시하는 행위라며 컴플레인을 걸기도 했고, 편의점에서 마스크를 써 달라는 소리에, 또는 12시 넘어 편의점 내에서 먹는 행위가 안 된다는 말에 아르바이트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우유나 물건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초기의 마스크 대란은 어떠한가. 마스크를 구입하려고 민증을 들고 약국 앞에 줄을 서기도 했다. 약국은 미어터졌고 약국과 손님 사이에서 언성이 높아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나는 줄 서는 것이 싫어서 한 번도 약국 앞에서 줄을 서있지 않았다. 코로나가 덮치기 전에 초미세먼지 때문에 94 마스크 두 박스를 구입해 놓았다. 그래서 걱정이 덜 했다. 그랬는데 마스크를 하지 않으면 다닐 수 없고, 어딘가에도 마스크 없이는 들어가지 못하는 첫 시행이 시작되었다. 동네의 독거노인분들이 약국에서 줄을 서지 못해 마스크를 구입하지 못하고 있어서 거기에 다 나눠주고 나니까 정작 내가 해야 할 마스크가 없었다. 그때 그 계기로 일하러 나가지 않고 그냥 일주일 정도 집구석에서 소파와 한 몸이 된 적도 있었다.


어떻든 그런 우주의 시간 같은 흐름을 거쳐 지금 평온한 시기에 이르렀다. 어제까지의 풍요로움이 오늘 한순간에 먼지가 되어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절망에 빠져 허덕이게 된다. 연애시대 은호의 말처럼 고요한 물과도 같은 일상에 작은 파문이라고 일라치면 우리는 쉽게 허덕인다. 우리 인생은 너무 약하여 금방 부서지는 장난감과 같다. 우리는 이를 2년이나 직접 경험했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처음이라 힘들어서 질 수 있지만 내일이 되어 다시 오늘을 맞이하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한 발 나아가 있다. 인생이란 꼭 이기기 위해 치열하기보다 덜 지기 위해 일상 하나하가 소중하게 쌓인 것일지도 모른다. 최선을 다 하지 않아도 된다 뭐 어때. 하는데 까지 열심히 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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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환이 부른 ‘너였다면'을 들어보면 ‘다 사랑에 빠지면 행복한 거라니 누가 그래’라는 가사가 있다. 노래는 사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반짝반짝 예쁜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알게 되고 나서 오는 고통에 대해서 말한다. 다른 곳만 보는 너에게, 너도 나만큼 혼자 부서져 본다면 내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이런 망가져가는 나의 마음을 너는 도대체 알기나 할까, 가슴이 터질 것처럼 날 가득 채운 통증이 미친 소리 같지만, 이 통증이 너를 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 라디오에 이제 시집을 가야 할 것 같은데 연애도 한 번 못해보고 너무 우울하다. 결혼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연애할 수 있을까. 같은 사연이 왔다. 사랑이 예쁘고, 아름답고, 서로가 하나가 되어 천년만년 행복하다는 건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학습 때문이다. 사랑이란 늘 반짝이고 아름답다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도종환 시인의 [가구]라는 시를 보면 그게 인간의, 부부의, 중년의 사랑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하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아프고 고통스럽다. 그리고 사랑을 하게 되면서 두렵다. 이 사랑이 언제 끝이 날지, 이 행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우리는 그 끝이 두렵고 무섭다.


사랑을 하는 게 그렇게 쉽지 않다. 사랑이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와 같아서 잡았다 싶으면 사라지고 만다. 사연을 보낸 사람은 이미 결혼이라는 결말을 생각하고 나서 사랑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사랑이 깨지는 것이 너무 무서워 연애를 할 생각을 못한다. 마음보다 머리가 먼저 생각을 해버린다. 완전한 사랑을 해야만 결혼을 할 것 같아서다.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동화, 영화, 티브이에서 줄곧 사랑이란 그런 것이라고 불명확하고 모호한 사랑에 대한 정의를 해버렸다.


하지만 불완전하고 불안한 사랑도 사랑이다. 사람이 완벽하지 않고 완전하지 않은데 그런 사람이 하는 사랑인데 완전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쩌면 불안한 사랑을 통해 나 자신과 상대방을 좀 더 알아가는 과정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엽편소설 형식으로 쓰는 소설 속 주인공 기철이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산다. 기철이는 어릴 때 자신을 떠나버린 어머니 때문에 늘 혼자라 외롭다. 혼자가 되는 게 무섭도록 싫다. 하지만 이제 고등학생이 되어버린 기철이가 혼자가 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에게 기철이는 자신의 모든 사랑을 줬지만 엄마는 어머니라고 부르기도 전에 자신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버리고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20대에 사랑을 해보니 에너지 소모만 너무 심했다. 취업을 위해 공부에 몰두했고, 30대에 취업한 회사에서 위로 오르기 위해 조직에 충성을 다 했고, 어영부영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루고 40대에는 그저 가정을 위해서 또 조직에 충성을 다 했고, 가족이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일요일 하루 쉬며 조직에 충성을 다 했다. 조직이 1위였다. 꿈? 꿈같은 거 없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사실 꿈이라는 거 뭔지도 모른다. 조직을 위해 충성을 하고 앞만 보며 달리면 인생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몇십 년이 흘러서 보니 답답하기만 하고 주위를 보니 사람도 없다. 조직에서 인정받고 앞만 보며 달려서 남들보다 먼저 도착하면 여유가 생길 줄 알았는데, 그랬는데 자식들은 전혀 대화가 되지 않고, 저녁시간에 잠시 이야기하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자식들은 자기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무엇에도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나이 들어 운동을 해도 쉽게 지치고 힘들기만 했다. 과연 나는 무엇 때문에 인생을 이리도 열심히 살아온 것일까.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있지 않았다. 그때 문득 알게 되었다. 주위에 가득 도사리고 있는 것이 허무라는 것을. 모든 것을 혼자서 해야 했고, 해결해야 했다. 이거 하나 막고 나면 저기서 두 개가 터졌다. 시간을 쪼개 여기저기 다니면서 터진 곳을 막고 나면 내 몸이 부서졌다. 다음 날 눈을 뜨면 또 비슷한 하루가 반복되었다. 잘해도 내 탓, 못해도 내 탓인 것이다.


완전한 삶을 추구하지만 불완전한 인간에게 완전한 삶은 없다. 인간은 언젠가부터 사랑을 잃고 산다. 아이에게는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보지도 않고 사랑이란 나와 먼 어떤 무형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족끼리는 뽀뽀하는 거 아니야. 같은 말을 많이 듣게 된다. 불완전하고 불안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사랑하자. 두렵고 무섭지만, 그래서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워 나의 이런 미친 날들이 너의 하루가 되길 바란다고 해도 사랑하자. 사랑 없이 삶을 보낸다면 남는 건 허무뿐이다. 허무는 어둠보다 깜깜하고 바위보다 무거워서 허무가 짙어지면 방에서 꼼짝하지 않고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반짝이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퇴색되고 아픈 사랑도 있다.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너였다면 어땠을 것 같을까.



https://youtu.be/bkEpWA-4FfU  정승환 - 너였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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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랑이 위로를 부를 때 그 첫 시작의 인트로 연주가 마음을 건드린다. 기타 소리가 이렇게 듣기 좋은 건 그렇게 흔한 건 아니다. 우리는 흔히 기타에 기대를 하기 때문에 기타 연주가 흐르면 으레 기타의 선율이 하나의 노래가 된다는 것을 그동안 익혀왔다. 하지만 대체로 기타는 노래를 부르는데 옵서버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래서 록 음악에서 우리는 기타 연주에 뼈져 들기도 한다. 그러나 김사랑의 위로 첫 부분의 기타는 흠칫 하기에 충분하다.


김사랑은 어쩌면 이 천재라는 타이틀이 더 날아오를 수 있는 발목을 잡았을지도 모른다. 김사랑은 천재라는 수식어 때문인지 대중가수의 길보다는 아티스트의 길을 먼저 걸었다. 자신이 하고 싶고 담고 싶은 음악을 3집까지 작업을 했다. 하지만 '나는 18살이다'의 첫 앨범에 있는 노래들처럼 대중과 평단을 동시에 사로잡는 음악은 아니었다. 실험적인 음악이라는 건 예술가로서는 칭찬받아야 할 부분이지만 대중의 마음은 움직이게 하기 어렵다.


가수를 30년 한다고 가정했을 때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 음악을, 그러니까 아티스트의 길보다는 대중가요를 먼저 히트를 시킨 다음 서서히 예술가의 길로 걸어가는 것이 싱어송라이터의 바람직한 가수의 길일지도 모른다. 그런 가수를 범대중적 아티스트라고 부른다. 범대중적 아티스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데 대중에 따라오는 것을 말한다. 대중가수는 이 반대로 철자하게 대중이 원하는 음악을 하는 가수다. 아이돌 소속사에 속한 가수들이나 대형 기획사의 가수들을 말한다. 김사랑이 그 당시에 ‘그래 결정했어!’처럼 다른 길을 걸었다고 해서 지금 서태지처럼 되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신승훈도, 김건모도 이승환도 대중가수의 길을 먼저 닦아 놓은 다음 자신의 원하는 음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니체가 말하는 가치 전환을 이루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3집의 위로는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3집의 음악은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는 여백의 소리가 채워졌다. 2집에 비해 차분하게 돌아왔다(고는 하지만 2집의 음악이 시끄럽다기보다 실험적인 음악에 가깝다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는 2집의 '무제'처럼 강렬한 음악이 좋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나에게는 히데의 zirch 앨범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모호하고 강하면서 랩 메틀의 매력에 푹 빠져들 수 있었다. 3집의 '히스테리'의 드럼 소리도 개인적으로는 몹시 좋다. 분명한 건 김사랑의 위로는 지금 들어도, 아니 지금 들으면 적잖은 위로가 되는 노래다. 밤꽃 냄새 같은 것이다. 밤꽃 냄새는 기묘하게도 여름이 되면 더 이상 나지 않는다. 그리고 한창인 오뉴월에도 낮에는 밤꽃 냄새가 나지 않는다. 밤에만 냄새가 나지만 모든 밤에 다 나지는 않는다. 어쩐지 습기가 많고 공기의 밀도가 높은 밤에 밤꽃 냄새는 그 향이 짙어진다. 김사랑의 위로가 딱 그렇다. 매년 찾아와서 짧은 밤동안 냄새를 풍기듯이 김시랑의 위로는 세상에 나온 뒤로 어느 순간, 어느 시점에 듣게 된다. 그리고 끝없이 그 추억의 끝을 잡고 한없이 들어가게 만든다. 떠난 것도 단 한번 남겨진 옛 추억도 너의 마지막 선물이라 날 위로해,라고 노래를 부른다.


https://youtu.be/Jjzu6739OoU <= 클릭


기억해 들뜬 밤을 지새우며

떠난 너와 나의 축제

그 밤 어두운 물결 위를 비추던

불빛만이 내게 남은 마지막 추억

나에게만 멈춰 있던 기억에

더는 보지 못할 니 모습들만

이별을 강요해

떠난 것도 단 한번 남겨진 옛 추억도

너의 마지막 선물이라

날 위로해


아직 난 늘 같은 시간 속에

머문 널 보내지 못해

그 밤 어두운 물결 위를 비추던

불빛만이 내게 남은 마지막 추억

나에게만 멈춰 있던 기억에

더는 보지 못할 니 모습들만

이별을 강요해

떠난 것도 단 한번 남겨진 옛 추억도

너의 마지막 선물이라

날 위로해


이미 널 닮아 버린 나

아직 니가 필요해

이렇게 기도해

너의 마음속엔 없는 바다에

넌 왜 넌 왜

이별을 강요해

떠난 것도 단 한번 남겨진 옛 추억도

너의 마지막 선물이라

날 위로해

너에게 난 편치 못할

병이라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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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깅을 하다가 한 부부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지요. 부부가 폰을 들여다보며 정답게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어요. 우리는 거울을 통해 앞모습은 자주 보지만 자신의 뒷모습은 거의 보지 않잖아요. 그런데 부부의 뒷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사랑’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오전에 라디오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초등학교 1학년 여동생과 3학년 오빠가 등교를 하는데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어요. 장난을 치느라 제대로 걷지도 않고 티격태격하는 거예요. 그런데 손을 놓지 않고 있었어요. 아마 엄마가 오빠에게 동생 손을 꼭 잡고 학교에 가야 한다,라고 한 것 같았어요. 그 뒷모습이 짠 하면서 아름답게 보이더라는 겁니다.


사진가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유진 스미스의 가장 유명한 사진 중에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진이 있어요. 유진 스미스는 정신질환으로 힘들어했지요. 보도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는데 오키나와에서는 취재 중에 일본군의 탄환이 머리에 박혀 죽을 뻔하기도 했어요. 그는 완벽한 사진을 출력하기 위해 히스테리가 갈수록 심해집니다. 그럴수록 사진은 엄청난 사실을 말하게 되었어요. 그랬던 그에게 아이들이 둘 있었는데 어느 날 자신의 아이들이 손을 잡고 저 빛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셔터를 눌러요. 너무나 아름다운 사진이 탄생하게 됩니다. 아이들의 순수한 모습과 아름다움이 뭔가 벅찬 희망을 나타내는 것 같아요.


이후 이 사진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줬어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첫 영화 ‘환상의 빛’에서도 주인공 유미코의 아이들이 동굴을 빠져나가는 장면이 있는데 유진 스미스의 천국으로 가는 길을 오마주 했어요. 그 장면은 실로 너무나 아름다워서 몇 번이나 돌려서 보게 되었어요.


그 장면은 유미코의 일상을 말하며, 이쿠오의 부재가 존재를 증명하는 시간을 매일 가지는 유미코는 알 수 없는 결락을 치유하는 것이 이 보잘것없는 일상이라는 걸, 아이들이라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피가 낭자했던 이정재와 황정민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서도 잘 나와요.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하드보일드 액션 영화인데 빛을 아주 잘 다룬 영화였어요. 초반 황정민의 노을이 지는 장면도 너무 아름답게 표현이 되었지요. 그 장면은 그래픽 없이 노을이 질 때 촬영을 하니 만약 그날 원하는 프레임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다음 날로 넘어가야 하는 장면이에요. 그리고 멋진 장면들이, 마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장면들이 빛의 아름다움으로 잘 표현이 되었어요.


이 영화에서도 저 빛을 향해, 비록 어둠보다 작은 빛이지만 그곳으로 걸어가는 유민이의 뒷모습을 보며 희망을 품게 되는 거 같아요.


이는 일탈이 줄 수 없는 일상의 편안함과 재미는 없을지라도 그 안에 미미하나마 깔려 있는 사랑을 말하는 거 같아요. 미미하지만 흔들면 위로 떠올라 존재를 알려주는, 그래서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뒷모습을 보면 애틋하며 아름답게 보이는지도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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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어제에 이어지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좀비와 뱀파이어에 이어지는 이야기. 이번에 나온 베트맨에 대한 말들이 많았다. 이전에 이미 다 했잖아, 조커보다 덜 하잖아, 전하려는 게 뭐야. 같은 말들이 흘러넘쳤다. 나는 이번 베트맨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건 바로 ‘복수’ 때문이다.


복수.

복수를 검색하면 복수 차는 게 제일 먼저 검색이 되고 둘 이상의 수도 검색이 된다. 여기서의 복수는 ‘가해자에 대해 똑같은 방법으로 해를 돌려주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는 그동안 영화에서 또는 현실에서 같은 방법으로 복수를 하는 건 법으로 허용이 되지 않는 행위이며 그렇게 복수를 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없고, 복수를 위해 살아온 삶을 보상받는 것도 아니라고 머리로 훈련을 받았고 눈으로 교육을 받았다. 복수는 안 되는 것, 나쁜 것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도 복수를 하는 내용의 영화는 끝이 미저러블 하게 끝나거나 호러블 하게 끝날 뿐인 영화가 다수였다.


왜냐하면 복수로 가해자를 처벌하는 건 법의 허용 범위를 벗어나며 내가 다시 가해자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사회적 눈높이를 법이 따라오지 못한다는 걸 안다. 이은해의 경우를 봐도 그렇지만 우리의 생각과 법적으로 처벌하는 과정이 전혀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다. 한 어린이 집에서 고작 3, 4살짜리 아이가 김치를 못 먹어서 먹다가 뱉어냈는데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의 뺨을 있는 힘껏 때려서 아이가 날아갔다. 그리고 아이는 곧바로 일어나서 토해낸 김치를 치웠다. 그리고 그 옆에 네 명의 다른 어린이들이 몸을 웅크리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앉아 있는 모습을 우리는 봤다. 아이가 날아갔다. 맞아서. 그것도 어린이집 교사라는 인간에게.


이럴 때 모든 사람은, 대부분의 부모는 분노 때문에 눈앞에 가물거릴 것이다. 똑같이 해야 한다고 모두가 한 목소리로 말을 한다. 하지만 법은 어떤가. 법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며 바리케이드를 친다. 사람들은 댓글에서, 내가 부모라면 그 여자의 집으로 가서... 같은 울분에 찬 댓글을 달았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복수는 좋지 못한 것, 안 좋은 것으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는 기묘하게도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영화 속에서, 티브이에서 그런 훈련을 뇌를 통해서 하게 된다. 그래서 현실에서 복수하고 싶지만 선뜻 나서지 못한다. 우리는 나쁜 것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다. 욕심이 나쁜 건 아니다. 욕심이 있어야 재능을 키워 자산이라고 불리는 재산이나 자신의 능력을 불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장관 후보자들의 문제점이 하나씩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네트워크가 있어서 자식들이 전부, 군대부터 대학교까지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이 되었다. 서민들은 치킨 주문해서 딸려 오는 음료 때문에 서로 죽지 못해 싸우고 난리도 아니다. 오늘을 견디기 위해 어떻게든 아등바등거리지만 저들은, 욕심으로 잔뜩 배부른 저들은 자기네들끼리 이미 모든 줄이 연결되어 있어서 우리와는 다른 세상에서 넥타이를 매고 하루하루 즐겁게 생활하고 있었다.


영화 더 배트멘에서 거짓말을 하면 죽는다. 거짓말을 한 시장이나 청장은 빌런에 의해 죽고 만다. 사실 이 영화에서 빌런의 개념은 모호하다. 그리고 빌런이 나쁜 거라지만 그간 현실에서 욕심이 많은 사람들과 법이 적용되는 허용범위를 보면 빌런의 편에 서고 싶다. 주인공이 복수를 하면 안 되지만 빌런은 복수를 해도 영화에서는 설득이 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빌런이며 복수를 한다면 더없이 우리가 바라는 인물일지도 모른다.


지금 현재 장관 후보자들을 보라. 거짓말을 뻔뻔하게도 늘어놓으면서도 떳떳하다고 한다. 주문했는데 뭐가 들어있니 안 들어있니, 같은 문제 때문에 아등바등거리는 서민들이 보기에 저들은 욕심에 눈이 멀어 다 가졌음에도 관료에 오르려고 거짓말을 일삼는다. 저런 자들이 또 권력을 잡아서 어떤 거짓말을 할지 무섭다. 저들의 거짓말은 우리의 거짓말과 단위가 달라서, 금방 밝혀지는 우리의 거짓말과는 달리 제대로 밝혀지지도 않는다.


어제 좀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현재 미국에서는 실제로 좀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 작년부터 각종 영상으로 올라오더니 공영 티브이, 공중파, 그리고 다큐멘터리에서도 취재를 하면서 대대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곳이 필라델피아의 캔싱턴이다. 이 도시는 그야말로 좀비처럼 일상이 완전히 망가진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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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는 태생부터 아픔이 많은 도시인데 어쩌면 그 망령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현재 캔싱턴에는 700명에 달하는 심각한 약물중독자가 모든 생활을 팽개치고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 현재는 경찰들도 단속을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버려 제재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전 세계의 약쟁이들이 이 도시로 흘러 들어와 일반 시민들은 매일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시에서는 시장이 나서서 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전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일 년에 수백억이 이들의 재활치료 프로그램에 사용되고 있지만 아무런 진척이 없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길목에서도 팔에 바늘을 꽂아서 약을 하고, 차가 움직여도 아랑곳하지 않고 길거리에서 허우적거리며 서 있다. 그들은 약물의 심각한 중독으로 뇌의 기능이 망가지면서 방향감각이나 여타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신체조건이 망가졌다.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거짓말 때문이다. 이들이 하는 약물은 합성 약물인데 원래는 수술 마취용으로 만들어진 약물이었다. 실제 마약보다 몇십 배는 강력한 약물로 아주 극소량으로 수술할 때 의사가 사용해야 하는데 제약회사와 정부, 그 위에 도사리고 있는 재력가와 권력자들이 남용할 경우의 문제점을 숨기고 오직 장점만을 피력하며 시장에 허용을 해버렸다. 그 결과로 약을 하려는 사람들이 미국 전역에서, 또 전 세계에서 캔싱턴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이 하는 약물은 놀랍게도 10달러 정도로 아주 저렴하다. 어떤 보급책은 무료로 약물을 나눠주고 있다. 무료로 몇 번 맞다 보면 약을 찾게 되고 그러면 돈을 내야 한다. 만 이천 원 정도로 약물을 구입할 수 있으니 천국을 맛보는 약을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약을 하는 본인들의 문제도 있겠지만 권력자와 재력가들의 거짓말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망가졌다.


이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0여 년 전 정부가 허가를 했고 장점만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이 구입해서 집집마다 틀었던 가습기가 그렇다. 독극물에 달하는 독성물질이 들어 있었다는 것이 여기저기 과학적, 의학적으로 밝혀졌지만 10년이 지나는 동안 아직도 누구 하나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이 없다. 무려 10년이다. 그동안 그 당시 뱃속의 아이는 태어났지만 한창 뛰어다녀야 할 초6 정도의 나이에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집에만 있어야 했다. 그들은 청문회 같은 곳에 나와서 늘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라며 고개를 숙였다. 이런 말은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다는 말과 같다. 콕 집어 그 회사의 사장이 책임이니까 책임을 지겠다, 같은 말을 하고 책임을 져야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 뒤에서 이를 허가해준 정부기관의 공직자들도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닌가. 이들도 책임을 져야 할 것이지만 전혀 책임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들의 거짓말은 우리가 하는 거짓말과는 다르다. 그것을 우리가 인식하지 않으면 시스템에 먹히고 만다. 시스템이란 하루키의 말처럼 인간이 만들어 놓은 편리한 프로그램이지만 그것에 인간이 먹히게 되면 영혼을 가진 우리는 망가지고 만다.


더 배트맨에서 파괴되어 계엄령이 내려진 고담시에서 당선된 시장은 이렇게 말한다. 제도를 믿을 수 있게, 공직자를 믿을 수 있게 만들겠다. 과연 가능한 일일까. 법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그들은 수많은 거짓말과 거짓으로 보이지 않는 죄를 지으며 바이러스처럼 퍼트리고 있다.  정치인이 자신의 언어가 없다면 그 정치인이 몸담고 있는 정당, 도시, 그리고 그 도시에 사는 국민은 시스템에 점점 도살당하고 만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그들을 제대로 감시를 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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