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었다. 사실 회사에서 기분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은 별로 없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직원이 열명인 건축사무소다. 일주일에 사흘 이상 야근을 하건만, 월급은 무지하게 짜다. 나 하나 먹고 살기에는 모자라지 않지만, 처자식을 먹여살려야 하는 L이나 K를 보면 가슴이 짠해진다. 그 돈을 받고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기분이 나빴던 것은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이번달 여름 휴가비를 지급하지 않겠다는 소장의 말 때문이다. 우리 소장,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말들을 한다. 오늘 그 말도 매우 미안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했다. 최소한 뻔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뭐든지 결과를 놓고 판단해야 한다. 미안한 표정으로 사람을 죽이는 연쇄살인마는 그렇다면 나쁜 사람이 아닌 건가?
떠도는 소문이 맞다면 소장은 첩을 두고 있다. 첩에게 아파트를 사주고 각종 패물을 대느라 회사 이익을 빼돌리는 거다. 건축업계가 원래 착취가 일상화된 곳이라 해도, 1인당 2억이 넘는 매출을 올리는 회사에서 그 정도밖에 월급을 안준다는 건 너무한 것 같다. 내가 이런 불만을 표출하자 P가 이런다.
“그래도 다행이지 뭐. 첩이 둘이었으면 어쩔 뻔했어?”
그대로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퇴근길에 P와 소주를 한잔 했다. P는 나보다 나이가 두 살이나 많은데 아직 미혼이다. 외모도 그럭저럭 생긴 P가 왜 아직 결혼을 못한 건지는 모르지만, 그 박봉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게 어렵다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노무현의 연정 발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P의 질문에 난 모른다고 했다. P는 노무현을 싫어하고, 나에게 노무현 욕하는 데 동참해 주기를 요구하지만, 사실 난 정치에 관심이 없다. 난 P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다른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을 훔쳐보기 바빴다. 요즘은 청치마가 유행이다. 아슬아슬하게 짧은 청치마가.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들은 나 같은 건 좋아하지 않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까 새삼 그녀들과 같이 있는 남자애가 부럽고 얄미웠다. 소주 반병씩을 나누어 먹고 일어서려는데 P가 한병을 더 시킨다. 두잔을 더 마셨더니 취기가 올라온다. 503호 앞을 지나면서 혹시 그녀가 왔는지 창문을 흘깃 내다봤다. 불은 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