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읽기의 혁명 - 개정판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손석춘님은 기자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분이다. 신문지면을 통해 올곧은 목소리를 내는 것 이외에도 책과 강연을 통해서 언론개혁의 필요성과 진보의 가치를 역설하고 계시다. 우리 대학생들이 가장 좋아하는 언론인으로 손석춘님을 뽑은 설문조사를 보니 이 땅에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 (손석춘 52.2%, 엄기영 16%, 정연주 6%, 오연호 6%... 조갑제는 5.4%, 도대체 누가?)는 생각이 든다.


손석춘님의 저작들 중 명저로 뽑히는 <신문읽기의 혁명> 개정판을 읽었다. 변화된 환경에 맞게 예로 든 기사가 최근 걸로 대폭 바뀌었지만, 책에 담긴 문제의식은 여전했다. 책을 읽다보니 7년 전 초판을 읽을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신문은 다 똑같다면서 집에서 보던 조선일보만 읽어오던 난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독자들은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신문에 의한 세뇌 가능성 운운에 불쾌감을 표시한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바보냐?” 하지만 세뇌를 당하는 건 그가 바보라서가 아니다. 매일같이 바위를 때리는 물줄기가 바위를 뚫는 것처럼, 신문에 의해 매일매일 주입되는 사상은 독자의 머리를 지배한다. 신문 사설에서 본 것을 자기 의견인 것처럼 포장해 술자리에서 떠드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들이 신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조선일보만 보는 친척 한분은 아직도 노무현을 빨갱이라고 믿고 있으며, 반북의식이 그 누구보다 투철하다. 친일파 청산을 “과거를 들쑤셔서 뭐하냐”고 반대하는 걸 보면 영락없이 조선일보다. 그러니 “20년간 조선일보만 봐왔다”는 건 결코 자랑이 아니며, 오히려 “신문한테 속아 살았다”는 고백일 수 있다.


지난 1월 여야합의로 통과된 신문법에 대해 조선일보는 헌법소원 신청을 청구하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 “신문의 자유는 발행인에게 있으며, 그 핵심은 경향 보호에 있다” 발행인의 언론 자유는 고용된 기자들의 언론자유보다 우위에 있다는 논리다. 조선일보 기자들이 “신문의 자유가 발행인의 자유라면 기자는 월급을 받고 그 대가로 사주의 의견을 대신 전달하는 메신저란 말인가”라고 반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이지만, 그들이 지금까지는 메신저가 아니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제대로 된 기자가 열명만 있었어도, 불편부당을 사시로 내건 조선일보에서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2002년 대선날)같은 편파적인 사설은 나오기 힘들지 않았을까. 신문이 언제나 사실만 전달한다고 믿는 분들은 이 책을 읽으시라. 같은 사실이 보는 시각에 의해 어떻게 둔갑하는지를 원없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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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런스 2005-09-06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은 면만 보면서 말한다. 하물며.. 거대 언론이야 오죽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