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면의 역사 - 평평한 세계의 모든 것
B. W. 힉맨 지음, 박우정 옮김 / 소소의책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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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규모와 시각의 차이 때문에 평면을 '모호'하게 인지한다. 바다에서 배는 평평한 대양 위에 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는 곡선이지만 착각하여 평평하게 보일 뿐이다. 반면에 우주정거장에서지국의 둥근 모습을 바라보면 평면성이라는 개념은 모두 사라진다. - '당연한 듯 특별한 평평함의 세계' 중에서

 

 

평면의 실체를 파헤치다

 

책의 저자 B. W. 힉맨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의 역사학과와 서인도대학교의 명예교수이다. 역사와 지리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그는 서인도대학교의 모나 캠퍼스에서 교편을 잡으며 자메이카에서 약 30년간 살았다. 음식의 역사에 관심이 깊었던 그는 2008년에 <자메이카 음식 : 역사, 생물학, 문화>를 출간했고 이후에는 노예의 역사를 다룬 책을 썼다. 대표적인 저서로 <식량이 어떻게 역사를 만들었는가>(2012), <카리브 해의 역사>(2011) 등이 있다.

 

고대로부터 평면은 인간들에게 당연하고 필연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우리들은 평면이 지배하는 공간에 산다. 이를테면 평평한 종이, 평면 디스플레이, 평평한 바닥과 벽, 도로와 철도, 의자와 테이블 등 평면은 우리들이 살고있는 이 세상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일상생활 대부분은 평면 위에서 이루어지는데도 우리들은 왜 평면성의 진정한 가치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할까? 평면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것일까?

 

평면은 굴곡 없음, 수평, 예측성을 암시한다. 이러한 속성은 이동과 활동에 최적화된 것으로, 사회적, 경제적으로 효용성이 크다. 반면에 평면은 단조로움, 단일성, 부재, 결핍, 평범, 결함과 같은 뜻도 담고 있다. 흔히 우리는 흔히 평면적인 것보다 입체적인 것을 더 높게 평가한다. 평평한 풍경은 특징 없음, 지루함, 흥밋거리가 없음, 우울함으로 폄하되기 쉽다.

 

 

 

 

 

정말로 지구는 둥글까?

 

 

우주에서 바라보면 우리들이 살고있는 지구는 거의 완벽하게 둥근 구형球形이다. 하지만 이는 최근에 들어서 비로소 나타난 시각이다. 과거엔 두 다리를 닿고 있는 이 땅을 평평한 것으로 이해했다. 인도의 가장 오래된 경전 베다에 의하면, 우주는 본디 3 부분으로 구성된 통일체인데, 신이 지구, 우주, 하늘로 나누었다고 한다. 5~9세기 인도에서 편찬된 산스크리트어 문헌들은 지구를 달걀 모양의 우주 중심에 위치한 '평평한 원판'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들이 지구의 표면을 평평하다고 이해하면 어려운 질문에 마주치게 된다. 즉 지구는 어떻게 안정성을 유지했을까? 또 일출과 일몰, 별들의 움직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날씨가 맑은 날에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별들이 쏟아질 듯 밝게 빛나고 꽤 가까이 있는 듯하지만 그래도 닿을 수 없는 미지의 존재였다는 점이 한몫을 했다.

 

 

반면에 지평선에서 땅과 하늘이 만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이 착각이라는 것은 땅을 조금만 돌아다녀보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자 둥글게 펼쳐진 듯 보이는 창공과 근본적으로 평평해 보이는 땅 역시 착각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겨났다. 많은 문화에서 택한 해결책은 지구가 바다에 떠 있는 원반이고 단단한 반구로 덮여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었다. 이런 지구 중심 모형에서 평평한 땅은 안정적으로 고정되어 있고 천체들이 하늘을 가로질러 이동했다.

 

 

이 모형의 주된 목적은 진짜 미스터리인 지구와 하늘 간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 혹은 공간의 기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인지된 우주에 관한 수수께끼였다. 물질이 생기려면 창조 행위가 필요하지만 공간은 그냥 한없이 그 자리에 있다. 공간은 창조되어야 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기정사실로 취급된다. 이러한 이해는 평면 개념이 당연시되는 데 기여했다.

 

고대 중국의 우주관

 

개천설蓋天說~ 하늘이 '뒤집어놓은 그릇' 모양의 지구를 덮고 있으며, 땅은 '장기판처럼 사각형'

혼천설渾天說~ 하늘이 땅을 둘러싸고 일주운동을 하며, 땅은 구형

 

중세 시대 내내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된 우주론 문헌은 주로 유럽의 학자들과 성직자들만 보았고 지구가 네모라는 개념을 포함한 이론적 논쟁이 13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래서 자국어로 된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전 세계를 세 부분으로 나눈 평평한 원으로 상상했다. 이는 T-O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데, O안의 T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이 있고, 원의 바깥 띠는 바다였다. 이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계가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왜 평평하게 만들어야 할까?

 

 

농업은 토목공사에 크게 공헌을 했고 대개는 지역을 평평하게 만들었다. 농업은 또 삼림의 벌채를 유도하고 숲을 평평하게 만든 곳에 공터를 만들어냈다. 처음 농업이 등장한 지역은 작물 재배, 가축 사육, 그리고 도시화가 시작된 지역과 마찬가지로 숲이 울창했다. 또 불의 사용은 사냥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도록 숲이 덮힌 지역을 파괴, 그 자리에 탁 트인 초원이 들어서도록 만들었다.

 

전반적으로 현대의 자본집약적 농업은 평평한 땅, 대규모 농장과 경지를 선호한다. 경작과 수확에 사용되는 고가의 대형 농기계들을 이런 환경에 도입했을 때 수익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계 최상의 커피는 가파른 비탈에서 자라지만 수확용 기계는 그런 지형에서 넘어져버리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기계를 값비싼 노동력의 대체품으로 생각하는 지역에서는 가파른 비탈보다 품질은 떨어지지만 상대적으로 평평하다는 이점이 있는 환경에서 커피를 재배한다.

 

 

이렇게 농업의 경제학평평한 부지에 대한 선호(특히 평지가 매우 넓을 때)와 대형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 농지를 만들고자 땅을 평평하게 만들려는 동기를 불러일으킨다. 쌀이나 밀, 그리고 옥수수 등 곡물 농사에서 현대식 농기구들은 변화 없는 평평함을 요구한다. 1900년경 증기기관을 농기계에 사용했을 때는 땅을 매끈하게 고르고 엔진이 평평하게 유지되도록 기계 앞쪽에 무거운 롤러를 부착했다. 이렇게 땅의 표면을 관리함으로써 자본주의에서 강조하는 최대의 수익을 내는 형태가 가능해진 것이다. 평평한 땅은 농업의 원자재인 셈이다. 그래서 농지의 평평함은 경제적 의사결정의 산물이다. 

전달하는 매체는 평평하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문자, 도형, 그림 등 수많은 형태의 표현에는 일반적으로 평평한 표면을 이용해왔음을 알 수 있다. 비록 평평하고 매끄러운 표면이라 할지라도 나무 몸통, 돌기둥 등은 비교적 관리가 어려웠다. 그리고 판독도 힘들었다. 또한 동굴의 벽면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휴대성이 보장되지 않았다. 그래서 쓰기와 읽기라는 측면에서 평평한 표면에 대한 수요는 증가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보존이라는 효율성을 감안할 때 가볍고 부피가 작은 표면이 당연히 필요했던 셈이다.

 

기원전 3000년 경, 고대 이집트에선 혁신적인 파피루스가 등장했다. 완벽하게 매끄러운 표면을 만들었고 보통 20장을 연결해 두루마리로 만들었다. 특히, 표준화된 너비와 품질로 만들어져서 평평하고 유연한 표면을 제공할 수 있었다. 문학적인 글을 쓰기엔 흰색과 노란색 파피루스가 선택되었고, 갈대 붓이나 펜으로 글을 썼다. 이후 두루마리의 경쟁자로 코덱스(책자본)가 등장했다. 낱장을 끈으로 묶어서 양면에 글을 쓰는 형태였다.

 

이후 기록의 도구로 종이가 발명되면서 대변혁이 일어난다. 종이는 기원전 200년 이전에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는데, 600년 경에는 나무껍질, 대나무, 등나무, 대마, 천 등으로 만든 종이가 흔히 사용되었지만 이 종이들은 모두 수작업으로 한 번에 한 장씩 만들어 펼친 뒤 햇볕에 말렸기 때문에 평평함의 정도가 균일하지 않고 다양했다. 중국의 이 발명품은 먼저 인근 국가인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었다. 800년 경에 종이 제조 기술이 서쪽 유라시아로 전파되기 시작됨으로써 양피지와 파피루스를 대체했다.  

 

데이터가 어떤 방식으로 저장되고 처리되고 전달되건, 우리가 이를 시각화하는 방법은 평평한 2차원의 표면 위 하나의 상으로 펼쳐진 세계의 평평한 이미지에 대한 해석과 여전히 연결된다. 인간의 시각 체계는 이미지의 깊이 단서를 이용해 구성 요소들의 공간적 배치를 구성하고 3차원 속성들을 인식하도록 발달했지만, 컴퓨터가 생성한 디스플레이를 모니터 화면으로 볼 때 관찰되는 왜곡이 어떤 경우에는 평평함의 단서로 설명될 수 있다.

 

 

평평함에 대한 이런 단서들이 나타나는 것은 모니터를 볼 때 초점거리가 고정되어 있고 머리 움직임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큰 평면 스크린의 몰입형 디스플레이로 보면 거리도 마찬가지로 과소평가된다. 이런 인식상의 문제가 있고 눈과 프레임에 해를 미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메시지이건 대개 그 전달 매체는 계속해서 평평한 표면이다. 

 

 

 

 

전자광학 디스플레이 장치들의 평면화

 

 

표면이 곡면이던 텔레비전과 거의 모든 전자광학 디스플레이 장치들이 1970년대 이후 빠른 속도로 평면화되어왔다. 이런 변화의 주된 원인은 얇고 가벼운 평판의 제작이 가능해져서 이동이 쉬워졌기 때문이다. 평판디스플레이는 휴대폰부터 랩톱, 디지털시계, 노트북컴퓨터, 디지털카메라, 태블릿에 이르기까지 많은 제품에서 볼 수 있고 광원이 음극선관에서 액정, 플라즈마, 유기재로 바뀌면서 계속 평평하게 유지되어왔다.

2000년에는 전 세계에 보급된 평판디스플레이 기기가 20억 개에 이르렀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이런 기기들이 제공하는 2차원의 이미지를 보면서 일상을 보낸다. 이렇게 평면화된 2차원의 가상 세계에 중독된 사람들이 받는 심리학적, 생리학적 영향은 파멸적일 수 있다. 일본에서 이런 중독자들은 히키코모리로 불리는데 보통 집, 혹은 심지어 자신의 침대를 떠나기 싫어하고 실제 세계보다 가상 세계를 더 좋아해서 때때로 굶어 죽거나 방치되거나 자살까지 이르는 젊은이들을 가리킨다. 이런 현상이 세계적으로 문제화될 소지도 충분히 엿보인다. 평평함이 만들어낸 몰가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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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징비록 - 역사가 던지는 뼈아픈 경고장
박종인 지음 / 와이즈맵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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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도자들이 한 행태를 저들 대한민국 지도자들이 버리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망한다. 찬란한 문화전통과 애민정신으로 무장한 성리철학과 슬기로운 성왕이 조선을 지배했는데, 그 조선이 망했다. 틀림없이 이유가 있을 것이다. 조선은, 1밀리미터도 오차가 없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망한 것이다. 두 번 망하지 않기 위해, 200년 아니 500년 전부터 이 나라 지도자들이 헛디딘 땅들을 찾아 징비를 해볼 작정이다. 미래를 위해서, 불쾌하기 짝이 없지만. - ''프롤로그' 중에서

 

 

 

 

대한민국을 징비하다

 

 

책의 저자 박종인은 1992년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주로 여행을 담당했다. 2015년부터 '박종인의 땅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역사 기행 기사를 연재하고 있다. 같은 제목으로 TV조선에 역사 기행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 잘못 기록된 역사를 땅에 남은 흔적을 통해 확인하는 TV 시리즈이다. 지은 책으로 역사 기행 <여행의 품격>과 글쓰기 가이드 <기자의 글쓰기>, 인물 기행 <한국의 고집쟁이들>, <행복한 고집쟁이들>, <골목길 근대사>(공저), 여행 에세이 <내가 만난 노자>, 인도 기행서 <나마스떼>, <우리는 천사의 눈물을 보았다>(공저)와 한국 여행 가이드북 <다섯 가지 지독한 여행 이야기> 등이 있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었는데, 제1부(운명의 1543년)에서는 당시의 조선과 일본은 다른 길을 걷고 있음을 비교한다. 즉 일본의 열다섯 살 어린 영주는 모든 재산을 털어서 서양의 우수한 무기 철포를 일본 전역에 보급하는 반면, 조선의 명종과 선조는 귀화한 왜인과 대마도주에 의해 제 발로 굴러들어온 총을 제작하기는커녕 창고에 처박아버리고 마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들에게 문호 개방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제2부(닫아버린 눈과 귀)에서는 어떻게 일본이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가는지를 소개하고, 이에 반해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매몰된 조선의 지배계층은 서원書院을 설립, 오히려 상공업商工業을 억압하고 과학을 무용화시키는지를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제3부(근대의 서막, 종말의 서막)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대처를 비교하면서 무기력하게 망해가는 대한제국의 말로를 보여준다. 

 

 

 

 

'눈 뜬 놈이 이긴다'

 

큰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선원만 100명이 넘었다. 생김새도 기이했고 말도 통하지 않았다. 동승했던 명나라 유생 오봉은 이들이 서남만인西南蠻人 상인들이라 했다. 이틀 뒤 도주 다네가시마 도키타카가 이들을 만났다. 이들 손에는 두세 자짜리 작대기가 들려 있었다. 작대기는 가운데가 뚫려 있었다. 바위 위에 술잔을 놓고 그 작대기에 눈을 대고 겨누니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소리가 나며 잔이 박살났다. 은으로 만든 산도 무너뜨리고 쇠로 만든 벽도 뚫을 것 같았다. 도키타카는 "보기 드문 보물이로다"라며 거금을 주고 두 자루를 사고 화약 제조법도 배워 가보로 삼았다. 열다섯 살이던 도키타카는 "모든 이가 원하는 것이니 내 어찌 이를 혼자 숨겨두겠는가"라며 기슈에 있는 승병 장군 스노기노보에게 보냈다. 한 자루는 대장장이인 야이타 킨베에게 하사해 역설계를 명했다.

 

이는 일본에서 벌어진 일이다. 1543년 9월 23일부터 며칠 동안 다네가시마에서 발생한 역사적 사실로 여기서 말하는 작대기는 100년 전 유럽에서 발명된 화승총, 아쿼버스였다. 41살의 대장장이 야이타는 철포를 분해, 자체 제작에 돌입했다. 하지만 나사가 문제였다. 이런 부품에 무지했던 터라 국산화의 길은 불가능했다. 이에 야이타는 자신의 외동딸을 포르투갈인 기술자에게 바치며 기술을 전수받았다. 일본의 첫 국제결혼 사례이다.  


조선에도 철포가 찾아왔었다. 일본보다 12년이나 늦은 1555년 5 월 21일, 비변사가 명종에게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대마도 사람 평장친은 동래에 와서 자기를 조선이 받아주면 총통 만드는 법을 전수하겠다고 하자 다음날 사간원이 명종에게 "총통을 주조해야 하는데 철재가 없으므로 버려둔 큰 종으로 총통을 주조하게 해 달라"고 건의했다. 삼 정승의 건의에도 불구하고 불교 신봉자인 명종은 딱 부러지게 "오래된 물건은 신령스러우니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건을 부수어서 쓰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답변했다. 당시는 왜구가 호남을 침탈한 '을묘왜변' 때였으므로 정말 한심한 나라의 지도자가 아닐 수 없다.

1589년 7월 1일, 대마도 사람들이 경복궁을 방문해 선조에게 조총을 바쳤다. '대마도주 평의지 등이 조총 수삼 정을 바친 것이다. 우리나라가 조총이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다' 그날 평의지는 공작새 한 마리도 선물했다. 조선 정부는 공작새는 남쪽 바다 섬에 풀어주고 조총은 무기고에 집어넣었다. 그 총으로 사격을 했고 분해를 했고 청소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냥, 아무도 모르게 무기고에 집어넣었다. 아이로니하게도 3년 뒤인 1592년 임진년, 도요토미의 조총 부대가 조선 땅을 일순간에 유린하고 말았다.

 

역사적으로 전쟁 발발 100년 전까지 조선은 무기 강국이었다. 화약도 만들고, 화기도 만들면서 왜구를 경계하는 그런 나라였다. 1479년 일본에 통신사를 보낼 때 기술 유출을 우려해 '화약 장인'의 동행을 금하기까지 했을 정도로 첨단 군사국가였다. 이후 조선은 무기에 대해 무관심했고, 반면 일본은 필요성을 절감했던 탓에 유럽으로부터 화약과 철포를 수입해 자제 제작함으로써 무장화까지 성공했던 것이다. 이런 차이는 결국 나라 지도자와 지배계층의 통찰력 부족 때문인 것이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은 임진왜란이라는 대형 전란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비리를 삼가하자는 가르침을 담았다. 물론 임진왜란 발발 당시 영의정이란는 직책을 맏았던 고위 관료 류성룡이기에 책임론에선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다시는 이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만큼은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이 명심하고 간직해야 할 점이라고 본다.

 

저자 박종인도 이런 점을 기저에 갈고 1543년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조선과 일본을 비교해 나간다. 한편, 유럽에서는 오랫동안 유럽인의 사고를 지배했던 천동설天動說이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지구가 움직인다는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1543년)라는 지동설地動說로 바뀌면서 대항해의 시대는 더욱 가속화됨으로써 일본에 도착한 포르투갈인은 최초로 일본에 총포를 제공한다. 당시 조선은 성리학이란 통치이론에 매몰된 왕과 지배계층의 사대주의 추구로 인해 단지 외국 문물을 '오랑캐의 것'으로 폄하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으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은가 말이다.

 

"비록 조총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찌 쏠 때마다 다 맞힐 수가 있겠습니까?"

 -신립

 

특히,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이라는 신립은 류성룡의 충고(조총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천혜의 요새인 문경 새재를 방치하고 충주 달천변 진흙탕에 배수진을 쳤다가 팔천 여명의 정예부대를 몰살시키고 자신도 탄금대에서 투신, 생을 마감했다. 탄금대에 세워진 그의 기념탑은 전승기념이 아닌 실패 기억탑인 셈이다. 지도자의 그릇된 판단자신은 물론이고 나라를 패망의 길로 이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전란으로 인해 풍전등화 위기에 처한 조선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이순신, 권율, 김시민 등의 군사 지도자와 의병 및 승병 등의 목숨을 건 항전 덕분에 결국 나라와 백성을 보전했지만 이 땅에서 벌어진 전쟁 탓에 국토와 민심은 황폐화되고 말았으며 이후에도 나라의 지도자와 지배계층이 크게 각성하지 못했기에 조선의 국운은 점점 쇠퇴해 마침내 대한제국의 말로라는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책을 마감하고 있다.         


황제라 친한 고종의 대한제국 때인 1902년 5월 30일 아침 경운궁 함녕전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다음날 아침 또 잔치가, 밤에 또 잔치가, 6월 1일 아침과 밤 또 잔치가 열렸다. 잔치는 6일, 18일에 또 열렸다. 19일 밤에는 제국 영빈관인 대관정(현 프라 자호텔 뒤편)에서 '각 공사, 영사와 신사를 청하여 기악으로 잔치를 벌였다' 궁궐 잔치에는 평양, 선천, 진주와 서울에서 무용과 음악을 맡은 기생 80명이 동원됐다. 매천 황현에 따르면 궁내부에서는 잔치를 위해 프랑스제 촛대와 밥그릇을 구입했다.

그 해 굶주린 경기도민들이 파주에 있는 인조릉 장릉 송림을 침범해 나무껍질을 모두 벗겼다. 왕릉을 지키던 병사들은 이를 막지 못했다. 송림 밑에서 쭈그리고 앉아 죽은 사람이 줄을 잇고 있었다.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식 공식 명칭은 '어극 40년 칭경예식稱慶禮式'이다. 11세에 왕위에 올라 40년이 된 것이다. 기념식은 10월 18일로 예정됐다. 하지만 여름부터 창궐한 콜레라가 전국을 휩쓸어서 행사는 거듭 연기됐고, 그해를 결국 넘겼다. 1902년 8월 10일, 칭경예식사무소가 의정부에 보낸 공문에는 칭경행사 비용이 100만 원으로 나와 있다. 당시 대한제국 총예산은 758만 5,877원(세출 기준)이었으니, 나랏돈 13.2%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 얼마나 황당한 낭비인가 말이다.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겠는가?

 

 

세 가지 사건

 

1543년 3월 21일, 유럽 - 지동설 발표

1543년 9월 25일, 일본 - 철포 수입

1543년 날짜 미상, 조선 - 서원 설립 

 

 

 

 

대한민국 징비의 열쇠

 

 

개방교류, 다양성대중의 각성. 이 네 가지 단어에 임하는 지도자의 자세가 한 나라 백성을 고난으로 이끌었고 한 나라 백성을 부강한 나라로 이끌었다. 유럽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게 서기 1543년에 벌어진 세 가지 사건과 21세기 대한민국을 연결하는 '징비懲毖의 열쇠'다. - '에필로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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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여섯 시까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선재 지음 / 팩토리나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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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란 무릇, 무엇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 내 것을 내어주고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더 높은 연봉을 얻기 위해, 인정을 받기 위해, 평판을 얻기 위해, 명예를 갖기 위해. 하지만 일하는 이유를 어떤 버전으로 갖다 붙인다고 해도 그 답은 결국 '나를 위해서'다. - '프롤로그' 중에서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

 

책의 저자 이선재는 스타트업 투자 회사에서 일하며, 뛰어난 역량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길을 직접 만들어가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이에 많은 영감과 동기부여를 받으며 일했다. 당장의 승진이나 이직이 아닌 10년, 30년, 50년 동안 고유한 경쟁력을 기르며 일할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해 고민했다. 취업, 승진, 연봉 외에도 우리가 일에 관해할 수 있는 이야기가, 할 수 있는 선택이, 해야 할 고민들이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브런치 연재, 주요 일간/주간지 칼럼 기고, 서울시 정책 관련 인터뷰어 활동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와 콘텐츠 기획을 꾸준히 해온 저자는, 일의 중심에 '나'를 두고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일과 삶에 대해 취재하고 다양한 사례와 관점을 정리했다. 현재는 독서모임 기반 커뮤니티 서비스 '트레바리'에서 서비스기획, 개선 업무를 맡고 있다.

 

 

 

 

미디어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액셀러레이터에 첫 직장을 잡은 저자는 이곳에서 2년 6개월 동안 많은 예비 창업자들을 만났다. 그가 하는 일의 성격이 '좋은 팀을 찾아내 투자를 하고, 투자한 팀이 성장할 수 있도록 다방면에서 지원하는' 것이었기에 말이다. 그들 대부분은 최고의 인재들이었고,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를 자유롭게 상상하고, 그 상상을 현실로 만들고자 분투중이었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좋은 회사'에 입사해서 자신의 내면에 살아서 꿈틀대는 능력을 연마하고 그 속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의 능력이 '좋은 회사'에 다닌다고 배양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라. 여기서 하고 싶은 얘기는 회사는 나의 '배'일 뿐이며, 언젠가는 배에서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미 내린 선택을 최고의 선택으로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실행하는 것뿐이겠지만, 이왕이면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그 기회와 마주칠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대로변 외에 작게 난 골목길이나 구석에도 흥미를 가질 필요가 있다. 꼭 길이 난 대로만, 눈앞에 보이는 대로만 길을 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커리어가 어떻게 풀릴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자신에게 보다 다양한 기회가 제공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오히려 회사에서 '나의 몫을 해내는 것'이 중요하므로 최선의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자기 자신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더라도 요구되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문제다. 반면에 에너지를 아껴가며 적당히 했더라도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면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회사에서 얼마만큼 최선을 다해야 할까?'가 아닐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문제없이 해내는 것은 '의무'이고, 그 후에 남는 에너지를 어디에 어떻게 쏟아부을지만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다. 그럼에도 여기저기 에너지를 배분하면 회사에서 대충 일하거나,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어떤 것도 우리의 커리어나 삶을 책임져주지 않는 시대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넓히기 위해 두루 노력하는 많은 시도들은 앞으로 더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이는 내 삶의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하고 쓸 것인가의 문제인 것이다. 누구나 모두 자신의 삶을 받치고 있는 여러 기둥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포기할지 먼저 정하라"

 

"저는 일단 기본적으로 제가 다니고 있는 회사를 되게 좋아해요. 정말 오래 다니고 싶고, 그리고 더 좋아지게 된 계기는 제가 지금 유튜브 하는 거를 회사 사람들이 다 알잖아요. 그거에 대해서 터치를 안 하시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주시니까 거기에서 애사심이 더 폭발하는 거죠. 유튜브를 안 좋게 생각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거는 네 일이니까 우리가 터치할 것이 아니다, 이렇게 나와주시니까 저도 감사한 마음에 더 열심히 일하고 싶어지고, 아무도 시키지 않는 야근을 하게 되고, 애사심이 더 높아진 것 같아요" - 한시연, '직장인 브이로그 맛집' 유튜브 채널 운영자

 

한시연 님은 유튜브를 하면서 오히려 회사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유튜브 채널이 아무리 커져도 회사는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고도 했다. 회사는 회사대로 다니면서, 퇴근 후 일상을 찍어 올리면 10만 명이 넘는 구동자들이 좋아해준다. 덤으로 이를 통해 부가적인 수익을 창출한다. 이야말로 꿩먹고 알먹고 아닌가 말이다.

 

한시연~ 외국계 기업 근무/(6시 이후) 직장인 유튜브 채널 운영

김가영~ 교육콘텐츠 기업 근무/(6시 이후) 펍 '취향로3가' 운영

신원섭~ 국내기업 시스템개발팀 근무/(6시 이후) 소설가

조송재~ 금융회사 마케팅팀 근무/(6시 이후) 커뮤니티 '해라! 클래스' 운영

백영선~ 대학 겸임교수/(6시 이후) 커뮤니티 '낯선대학' 운영

이승희~ IT회사 마케팅팀 근무/(6시 이후) 독립출찬, 커뮤니티 활동

배희열~ 협동조합 근무/(6시 이후0 화가, 캘리그라퍼

김수진~ 초등학교 교사/(6시 이후0 젠더 교육 연구회 '아웃박스' 활동

박상현~ 작가 겸 칼럼니스트/(6시 이후) 번역가, 강연자 등으로 활동

 

 

 

 

책은 총 아홉 명의 오후 6시 이후의 삶을  보여준다. 즉 이들은 유튜브 채널의 운영, 펍 운영, 소설가, 커뮤니티 운영, 독립출판, 화가(캘리그라퍼), 젠더 교육 연구회 활동, 번역가(강연자)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이드 프로젝트나 딴짓을 벌인다고 남들로부터 눈치를 받을까 걱정하지 말자. 이제 시대가 변했다. 자신의 윤택한 삶을 위해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싶다면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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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통령 : 역사의 기초를 다진 위대한 리더들 미국을 만든 사람들 1
한솔교육연구모임 지음 / 솔과나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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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떻게 하면 세상을 통합적으로 바라보는 통찰력 있는 교육이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한솔교육연구모임이 탄생했다. 연구모임을 이루는 각 분야 전문가들은 지적 호기심이 강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20여 년간 이상 각국의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등 주로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부분을 선별해 가르쳤고, 해당 교육을 받은 이들은 현재 각 분야에서 꼭 필요한 인재로 성장해 있다.

 

한솔교육연구모임은 그동안 축적된 교육 내용이 지식정보사회인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이라는 판단 아래, 대표저자 한솔을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물을 정리해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는데, 가장 먼저 준비한 시리즈는 '미국'이다. 지난 세기를 비롯해 21세기 역시 미국이 주도권을 지닐 것이 분명하고, 미국적 가치가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총 7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세계통찰-미국>의 첫 번째 도서로 미국 건국 초기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부터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프랭클린 루스벨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까지 대통령들의 행보를 다룬다. 이들을 통해 미국이 강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이유와 세계 정세를 동시에 돌아보고 있다.

 

 

각 장의 첫 페이지에는 해당 대통령 재임 기간 연표를 수록해 세계의 주요 사건들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본문의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사진 자료가 풍부하게 담겨 있으며, [들여다보기] 코너로 대통령들이 추진한 정책의 배경이나 평소에 보여준 행적,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해당 인물을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17세기 초, 박해에 시달리던 영국의 청교도인들이 아메리카 땅으로 건너왔다. 이들은 신대륙을 개척하고, 영국의 무리한 세금 징수와 식민화를 독립전쟁으로 막아내며, 미합중국이라는 신생독립국을 세웠다. 영국 국왕의 압제에 맞서 독립전쟁을 일으킨 미국인들은 왕을 대신하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고자 했고, 그것이 국민이 직접 뽑은 대표인 대통령이다. 미국은 세계 최초로 대통령제를 만든 나라인 것이다.

 

지금껏 미국의 대통령제는 독재 논란을 만들지 않고 모범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이는 거쳐간 여러 대통령이 민주주의국가를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덕분인 것이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은 높은 도덕성과 능력 검증을 받아야 했다. 언론은 후보자의 일생과 걸어온 길을 낱낱이 파헤치며 자격 여부를 검증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능력과 도덕성을 갖춘 후보가 대통령에 오를 수 있었다. 1789년에 취임한 미국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부터 한국전쟁 당시 대통령이 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까지, 이들이 이끄는 미국은 150년 정도의 짧은 시간에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같은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후보자의 높은 도덕성과 능력 검증을 제대로 거치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현재 친북 좌파정책을 펼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의 자질 검증 시 우리 언론들은 애초에 유력한 당선인으로 여기고 여기에다 줄을 대려고만 노력했지 제대로 검증 역할을 했던가 말이다. 현재 수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우려하고 있는데, 이는 일부 여권 정치인들과 편향된 언론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책을 통해 세계에 변화를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들에 미국 대통령의 행보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이룬 독립혁명은 프랑스혁명의 성공에 영향을 주었다. 토머스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매입,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의 분열을 막기 위해 치른 남북전쟁,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파나마운하 건설, 우드로 윌슨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결정,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경제 대공황 극복,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한국전쟁 정전협정 추진 등도 미국을 넘어서 세계의 흐름을 좌우하는 사건들이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버지니아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이복형제들과의 갈등으로 인해 심하게 고통받았다. 즉 그의 어머니는 이복형제들로선 계모였던 것이다. 11살 때 아버지가 죽자 교육조차 받지 못했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그는 독학으로 측량기술을 배워 측량기사로 활동했다. 이 일로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던 게 나중에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27살에, 그는 인생 전환점을 맞이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여섯 번째로 부자인 버지니아의 유지 마사 커티스와 결혼, 아내의 경제적 지원에 힘입어 정치계에 투신했다. 때마침 보스턴차사건이 발발하면서 식민지 대표들은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사령관으로 임명, 영국과의 무력전쟁을 치르려고 했다. 하지만 식민지인 상당수는 영국인이었기에 조국에 대해 총을 들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이에 전쟁 초기 워싱턴의 군대는 오합지졸에 불과해 최정예인 영국군과의 대결에서 번번히 패했다.

 

1778년, 프랑스가 영국에 선전포고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을 위해 참전을 선언했다. 게다가 평소 영국과 관계가 불편했던 네덜란드와 스페인도 워싱턴에게 차관 제공을 약속하며 힘을 보탰다. 프랑스 명장 로상보 장군의 요청에 따라 프랑스 루이 16세가 6만 파운드 금화를 보내옴에 따라 이 돈으로 병사들의 밀린 봉급을 해결했다. 이에 사기가 한껏 오른 대륙군과 프랑스군은 영국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1789년, 새로운 헌법에 따라 총선이 실시되어 국회가 구성되었고, 역사적인 초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선거 결과 워싱턴은 앞으로 영원히 깨지지 않을 100퍼센트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그는 나라를 함께 이끌 각료를 뽑을 때 혈연, 지연이 아닌 철저한 늘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했으며, 남부와 북부 출신을 골고루 뽑아 기용했다.

 

신생 독립국 미합중국의 탄생을 지켜본 프랑스인들은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 장기간 왕의 독재에 시달렸던 프랑스인들은 미국 독립을 계기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지니게 되었다. 1789년, 마침내 프랑스에서도 민중 봉기가 일어나면서 독재자 루이 16세를 권좌에서 끌어내라는 프랑스대혁명이 발발했다. 과거 루이 16세의 도움을 받았던 워싱턴은 프랑스 문제에 개입 않기로 결정했다. 결국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이후 워싱턴의 고립주의는 미국의 대외 정책으로 자리잡았다.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이 된 그는 두 번째 임기를 반년가량 남겨 놓은 상태에서 3선에 나서지 않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가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1797년 후임 존 애덤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고향 버지니아로 귀향했다. 농장 일에 매진하던 그는 1798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임박해지자 다시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그는 "내 몸에 남아 있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조국을 위해 바치겠다"는 말로써 진정한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1799년,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위대한 대통령은 1달러 지폐에 초상화로 남아 있다.

 

 

우리들이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제대로 꿰어야 옷맵씨가 뒤틀리지 않고 단정해 보인다. 내가 워싱턴을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잔여 임기가 남았는데도 퇴임을 미리 결정, 독재의 길을 스스로 차단함으로써 미국 정치사에 첫 단추를 잘 꿰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전쟁 시의 일화에 의하면 총사령관 신분임에도 진흙탕물에서 몸소 참호를 파는 솔선수범과 나라를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의 몸을 바치겠다는 진정한 애국심을 보여주었다.

 

익히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벚나무 일화정직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미국의 정치인들에겐 정직은 도덕성의 잣대이다. 반면에 우리의 고위 공직자와 그 가족들의 거짓말 논쟁으로 대한민국이 아직까지도 시끄럽다. 대한민국의 선현들도 이런 가르침을 자주 해왔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패거리 정치를 앞세워 '거짓 지키기'에 올인하는 어리석은 대통령과 정치인들이 있는 한 나라의 미래는 어둡기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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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없는 조직 - 심리적 안정감은 어떻게 조직의 학습, 혁신, 성장을 일으키는가
에이미 에드먼슨 지음, 최윤영 옮김 / 다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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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직의 '심리적 안정감'을 집중적으로 탐구한 25년의 결정체다. 두려움이 어떻게 창의성과 팀워크를 갉아먹는지, 또 조직의 약점이 어떻게 '심리적 안정감'으로 극복될 수 있는지, 이 모든 방법을 한 권에 담았다. 직장에서 조직을 이끌고 있는가? 그렇다면 이 책이야말로 당신이 가장 빨리 읽어야 할 최고의 리더십 지침서다. - 다니엘 핑크

 

 

두려움이 사라지면 구성원의 능력치는 최대로 치솟는다

 

이 책의 저자 에이미 에드먼슨하버드 경영대학원 종신교수이자 세계가 인정하는 최고의 리더십 구루로 2017년 경영학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싱커스50 '최고의 학자상'을 수상했고, 동명의 재단이 꼽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에 2011년부터 지금까지 이름을 올리고 있다. 1996년부터 하버드에서 리더십과 팀 조성, 의사결정과 조직 학습 분야를 가르치고 있으며, 25년 동안 '심리적 안정감'을 연구해 전 세계 경영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그가 밝힌 '심리적 안정감'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오늘날의 기업 경영 환경에서 조직의 생산성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가장 효과적인 비법으로 평가받으며, 2018년 경영 분야 최고의 석학에게 수여하는 '수만트라 고살상', 2006년 경영학회 주관 '쿤밍상', 2004년 '액센추어상' 등을 휩쓸었다. 학계에 입문하기 전 전설적인 미래학자 버크민스터 풀러 밑에서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리더의 역할'을 연구했고, 세계적인 경영 컨설턴트 래리 윌슨과 함께 '학습과 혁신을 바탕으로 한 성장하는 조직'을 분석했다. 국내에 소개된 저서로는 <티밍>, <익스트림 티밍> 등이 있다.

 

그는 조직에 심리적 안정감을 구축하기 위한 세 가지 구체적인 지침을 소개한다. 업무를 바라보는 틀을 새롭게 짜는 1단계(토대 만들기), 리더가 겸손함과 적극적 질문을 무기로 구성원에서 다가가는 방식인 2단계(참여 유도하기), 진심으로 실패를 축하해줄 용기를 갖는 3단계(생산적으로 반응하기)를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조직에 체계화해야 누구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직으로 만들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심리적 안정감''인간관계의 위험으로부터 근무 환경이 안전하다고 믿는 마음'이라고 정의했다. 어떤 의견을 말해도 무시당하지 않고 질책당하거나 징계받지 않는다면, 즉 구성원 모두가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면 동료들의 눈치 따윈 보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질문, 우려 사항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다. 심리적 안정감은 구성원이 서로를 신뢰하고 존중하며 자기 생각을 솔직하게 나눌 때야 비로소 생긴다.

 

심리적 안정감이 흐르는 조직에서는 크리스티나가 경험한 것처럼 '아주 짧지만 결정적인 침묵의 순간'이 발생하지 않는다. 대신 누구나 주저 없이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귀 기울이며 각종 문제나 실수에도 쉽게 대처한다. 또 이러한 과정을 내부 발전의 계기로 삼기도 한다.

 

 

심리적 안정감을 구축하는 방법

 

1단계(토대 만들기)

2단계(참여 유도하기) 

3단계(생산적으로 반응하기)

 



구글 X의 CEO이자 문샷 프로젝트의 수장인 아스트로 텔러는 2016년 테드 강연에서 '안전한 실패 전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그렇다고 무작정 빨리 실패하라고 소리치며 재촉해서는 안 됩니다. 직원들이 반발하죠. 또 걱정합니다. '실패하면 나는 어떻게 될까? 사람들이 비웃지는 않을까? 해고될까?' 대담하고 거시적인 동시에 위험이 도사리는 프로젝트에 직원들을 참여시키면서 가장 중요한 문제부터 해결하도록 독려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저항하지 않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것입니다. 구글 X에서 소위 안전한 실패를 보장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입니다.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아이디어는 증거가 확실해지면 곧바로 싹을 자릅니다. 그래야 보너스를 받으니까요. 동료들의 칭찬은 물론이고요. 더구나 상사들은 잘했다며 하이파이브를 하고 안아줍니다. 실패의 결과로 승진도 하죠. 이처럼 프로젝트를 중도 해체한 경우에는 팀원이 두 명이든 서른 명이든 모두에게 보너스를 지급합니다"

 

 

실패의 3가지 유형

 

예방가능한 실패

복합적실패

창조적실패

 



'교차판매 스캔들' 이 터지기 일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 가장 승승장구하던 웰스파고, 직원들은 목표달성을 위해서 불법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즉 위에선 윤리적으로 행동하라고 경고했지만 그들은 월급을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웰스파고 사태는 단순히 누구 하나의 잘못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다. 즉 불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고는 도저히 달성할 수 없는 목표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웰스파고의 직원들은 반대가 용납되지 않는 환경에서 근무했고, 경영진은 그런 그들에게 오직 하나의 메시지만 주입했다. '팔아라, 못 팔면 해고다!'

심리적 안정감을 경험하는 최고의 방법은 이미 그 안정감이 실재하는 것처럼 행동해보는 것이다.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지켜보라. 주위의 환경은 이전보다 훨씬 더 안전하고 에너지 넘치는 곳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리더십은 비단 조직의 최상위층만이 가져야 할 덕목이 아니다. 능동적으로 일하려는 모든 직위의 구성원이 갖춰야 할 필수 요소다. 리더십의 핵심은 혼자서는 성취할 수 없는 목표를 서로의 노력으로 함께 이뤄가는 데 있다. 구성원 개개인이 자신의 역량과 기술을 바탕으로 업무에 최대한 매진하도록 돕는 일이다. 침묵을 지키는 대신 솔직하게 표현하고, 두려움을 갖는 대신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하는 것, 이 책이 전하는 바는 오늘날 모든 조직의 구성원에게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심리적으로 안전한 근무 여건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아주 강력한 효력을 지닌 표현 몇 가지를 소개해본다.

"잘 모르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해요"
"제가 실수했군요"
"죄송합니다"

위 표현은 모두 자신의 취약함을 드러낸다. 스스로 실수를 범할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걸 인정하면서 주변 동료에게 비슷한 생각과 태도를 취하도록 여지를 제공할 수 있다. 스스로 가면을 벗어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도록 돕는 방법이다. 이 같은 표현은 비록 완전한 수준은 아닐지라도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고 있듯이 행동하는 걸 의미한다. 때로는 대인관계 위험을 줄이기 위해 어느 정도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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