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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 따위는 없다 - 교양으로서의 동양철학
신메이 P 지음, 김은진 옮김 / 나나문고 / 2025년 7월
평점 :
이 책은 '철학 에세이'다. 나는 학자도 아니고 승려도 아니다. '한 사람의 백수가 동양철학을 이렇게 받아들였구나.'라고 생각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다! 내가 7명의 철학자들을 알게 되고, 어떻게 '허무감'을 극복했는지에 대해 읽어 보시기를! - '시작하는 말' 중에서

(사진, 책표지)
책의 저자 신메이 P는 동경대학 법학부를 졸업, 대형 IT기업에 입사해 해외 사업 관련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누볐지만 회사 일에 재능이 없음을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자 조용히 퇴사한 후 가고시마 현의 섬으로 이주해 교육사업을 벌였지만 이 또한 재능 없음으로 인해 퇴직하고 역전인생을 노리고 개그맨 콘테스트에 도전했지만 예선에서 탈락함에 따라 은퇴 백수로 히키코모리가 되어 동양철학을 만나 당시의 심정을 써 내려간 글들이 화제가 되어 책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총 여섯 개 장으로 구성된 책은 크게 인도편, 중국편, 일본편으로 나뉘어 붓다의 철학, 용수의 철학, 노자와 장자의 철학, 달마의 철학, 신란의 철학, 구카이의 철학을 소개하며 우리들에게 무아無我, 공空, 도道, 선禪, 타력他力, 밀교密敎 등에 관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붓다, 나를 찾는 여행을 떠나다
붓다의 집안은 왕가王家이며 붓자 자신은 왕자였다. 호화로운 성城 안에서의 생활에도 그는 '허무감'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안고 살아갔다. 붓다는 보통의 백수와는 달리 너무나 진지한 고민끝에 야밤에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성밖으로 가출家出, '나를 찾는 여행'을 시작했다.
당시의 인도 곳곳엔 수행자들로 넘쳐났다. 이들은 모두 '자아自我 찾기'의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사정없이 몸을 혹사시키면 진정한 나를 발견할 수 있다'는 풍조에 동참하고 잇었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한 붓다도 이런 유행에 동참했던 것이다. 수행의 내용은 이런 것들이었다.
'밤마디 뾰족한 가시 침상에서 잠들기'
'어마 무시하게 많은 양의 머리카락 쥐어뜯디'
'겁나게 긴 시간 숨 쉬지 않기'
연속된 고행은 6년간이 지속되었다. 하지만 붓다는 여전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진심을 다해 수행했음에도 말이다. 이에 '어쩌면 이런 일들이 아무 의미가 없는 건 아닐까?'란 생각이 들면서 더 좋은 방법에 대한 욕구가 생겼다. 그러나, 이미 붓다의 기력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극심한 단식 때문이었다.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만약 여기서 붓다가 죽음을 맞았다면 불교는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방에 사는 처자 수자타가 붓다에게 죽 한 그릇을 갖다 주었다. 과연 붓다는 이 죽을 먹을 것인가? 양자텍일의 상황에 놓였다. 죽을 먹는다면 지금까지의 고행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붓다는 죽을 먹음으로써 보게 될지도 모르는 새로운 경지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이다. 식후 최고의 컨디션으로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명상에 들었다. 마침내 해탈의 경지에 도달했다. 붓다가 찾은 답은 바로 '무아無我'였다. '나'라는 건 없다는 뜻이다.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
'나'란 그저 '망상'일 뿐이다.
사실상, 이 세계는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다.
자세히 관찰해 보면 알수 있다.
붓다는 인간이다. 어느 날, 한 청년이 갖자준 버섯 요리를 먹고난 후 식중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나이 80세, 많은 사람들이 붓다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제자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글로 적어 후대에 전했다. 바로 '경전'이다.
선禪, 언어를 초월하는 경지
'선禪'은 중국에서 태어난 불교로 '말을 버려라'고 가르친다. 즉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면 언어를 버리면 된다. 이를 '불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한다. 이는 논리보다는 감정을 중요시하는 스타일이다. 겉보기엔 조용하게 보일지 몰라도 내면에선 격렬한 싸움이 벌어진다. 그래서일까, 중국 '선'의 대가들은 꽤나 살벌한 모습이다.
달마대사는 인도인으로 붓다 탄생으로부터 약 1천년 후의 인물이다. 심하게 말이 없는 타입인 달마에게 인생 전환점이 찾아온다. 스승이 달마에게 '너, 중국에 가서 불교를 좀 알리고 오너라'라는 미션을 부여햇던 것이다. 이를 흔히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으로 표현한다.
말을 전혀 하지 않는 타입인 달마는 어떻게 불교를 전할 수 있을까? 달마는 운이 좋은 행운아였다.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곧 바로 중국 황제 양무제梁武帝를 만나게 되는데, 더구나 이 황제는 불교의 광팬이었다. 당시 중국은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위험지역이라 황제가 만나고 싶다고 전령을 보낸 것은 안전 보증수표였던 셈이다.
(양무제) 지금껏 1천개의 절을 지었으니 이담에 복을 받는 게 맞지?
(달마) 못 받습니다.
(양무제) 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가요?
(달마) 그런 건 없다
(양무제) 헐, 그럼 당신은 뭐야?
(달마) 모른다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원만하지 못했지만, 양무제는 '선禪'을 알리고 싶어서 달마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그런데, 달마의 행동은 정상적인 궤도를 한참 벗어났던 것이다. 달마는 동굴 속으로 들어가서 벽을 바라보고 9년간이나 앉아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면벽수행面壁修行'이다. 이에 감동한 중국 승려 혜가가 찾아와서 제자로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달마는 단칼에 '거절한다' 혜가의 끈기도 만만치 않았다. 혜가는 자신의 한쪽 팔을 베어 버리면서 자신의 확고한 결심을 밝혔다. 마침내 제자로 받아들인다. 이후 '선禪'은 중국에 퍼지게 되었다.바로 '선문답禪問答'이다.
일본 승려 '신란親鸞'의 철학
신란은 800년 전 헤이안 시대의 일본 스님이다. 사실 불교엔 수많은 종파宗派가 있다. 그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을 만들었다. 어떤 방법으로 '공空'의 경지에 이르는가? 걸어서? 전철을 타고? 비행기 타고? 사실, 그런 수준은 아니다.
신란의 철학은 아주 급진적이면서도 독특했다. '공空'이 오히려 다가온다는 거다. 신란은 불교계의 최고 이단아로 지목받는다. 그럼에도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 신란은 서민적인 동네 할아버지의 모습이기에 그렇다. 사진을 보면 그의 목둘레엔 목도리가 감싸고 있을음을 보여준다. 비록 춥더라도 대부분의 스님은 추운 법당에 홀로 앉아 경전을 외우거나 명상을 하지만 그는 방한용 의복을 입고 있다. 이런 친근감이 그의 매력인 듯 싶다.

(사진, 신란)
목도리가 따뜻해 보이는 검은 (가사의) 중
이놈의 설법이 천하제일
- 잇큐 소준
신란은 교토 태생의 엘리트 계층이었다. 불교계의 정점인 '히에이산比叡山'에서 기거, 9살 때 이곳에서 가장 훌륭한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이곳은 그야말로 부패의 온상이었던 것이다. 정치권력과 밀착해 있었으며, 스님들 또한 돈과 직위를 둘러싼 분쟁과 다툼에 매몰된 상황이었다. 신란이 살았던 '헤이안시대 말기'의 교토는 일본 역사상 가장 최악의 시대였다. 전쟁, 감염병, 대기근, 대진진, 대화재 등 모든 재앙이 발생했다.
수많은 시체들로 인해 악취가 넘치는 지옥 같은 세상에서 수많은 대중들이 고통받고 있는데, 태평하게 산속에서 살고 있는 신란은 자신의 모습을 고뇌했다. 불교의 존재 이유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인데, 이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기에 그는 히에이산을 떠나 마을로 내려가기로 결심햇다. 29살 봄날이었다.
당시의 불교는 일반 서민들에겐 매우 어려웠다. 서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식량이었다. 좌선, 명상 이 따위들은 일번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힘들었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자신의 무력함에 절망한다. 끊임없는 고민 끝에 그는 지금까지의 불교를 뒤집어엎을 만한 '타력他力'의 철학에 도달한다. 즉 깨달을 수 없음을 인정할 때, '공空'이 이쪽을 향해 다가와 준다는 것이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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