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지금 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하는 5가지 습관
아타라시 마사미 지음, 이은희 옮김 / 이너북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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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행복한 인생을 향유하고 싶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단 한번 뿐인 인생은 스스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소위 '333 공식'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이 취업을 위해 노동시장에 나가서 3개월 안에, 현재 연봉보다 30% 인상된 조건으로, 3개사로부터 콜을 받는다면 상품성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사람은 1%도 채 안된다.

 

내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는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신이 인간에게 평등하게 부여한 것은 죽음과 시간이라고 한다. 돈 많고 실력있는 사람의 하루도 마찬가지로 24시간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시간의 활용은 자신의 습관에 의해 좌우된다. 이 소중한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개개인의 몫이다. 

 

"습관은 나무 껍질에 새겨놓은 문자 같아서

그 나무가 자라남에 따라 확대된다"

- 새뮤얼 스마일스

 

이 책의 저자 아타라시 마사미는 32살에 '45살 이전에 기업의 대표가 되자'라는 목표를 세운 뒤, 세부 계획을 수립 이를 차근차근 실천하여 42살에 존슨 앤 존슨 상무로 경력 입사하고 45살에 목표대로 이 회사 사장에 취임한 인물이다. 이 책의 핵심은 좋은 습관 5가지를 실천하여 좋은 결과를 만들자는 것이다.

 

습관 1 살아있는 목표를 세워라

습관 2 이기는 습관을 들여라

습관 3 장점과 친해져라

습관 4 기본을 연마하라

습관 5 항상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라

 

아이작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장면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평소 문제의식을 갖고 이를 꾸준히 관찰한 결과이다. 문제의식이 결여되었다면 이는 매너리즘에 빠졌기 때문이다. 문제의식을 향상시키려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냉철함, 신중한 분석태도, 자기 나름의 판단기준, 유연한 사고방식 등의 습관을 길들이도록 훈련하면 된다. 

 

"탈피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

- 니체

 

사고력의 배양을 위해서 학습하는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독서이다. 건강한 몸을 위해 우리는 밥을 먹는다. 독서는 건강한 정신을 위해 지식을 먹는 것이다. 편식이 건강을 해치듯이 다양한 분야의 독서가 이로운 법이다. 몸으로 배우는 교육은 훨씬 효과적이다. 예를 들어, 저자 강연회 또는 주제 토론 세미나 등에 참석한다면 지식이 더욱 설득력있게 다가올 것이다.

 

일일불독서日日不讀書 구중생형극口中生荊棘,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 

- 안중근

 

아무리 식견이 풍부해도 실천력이 중요하다. 노자의 도덕경에 '천리지행시어족하千里之行始於足下'란 구절이 있다.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의미이다. 자신이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목표를 미리 정하고 단계를 밟아 차근차근 나아가는 것이 올바른 자세이다. 이 때 목표는 현실적이어야 하고 숫자로 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정해진 목표는 메모해라. 

 

어느 조사에 따르면 이직 경험자 중 14%만이 '이직하기를 잘했다'고 응답했다. 굳이 이직을 원한다면 지위, 수입, 그리고 회사의 수준 등이 향상되는 발전적인 이직을 해야 한다. 기업가 정신을 확립하여 남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이기는 습관이다. 신발 세일즈맨 2명이 아프리카 오지로 출장을 떠났다. 한 명은 '현지인은 모두 맨발이므로 신발을 팔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냥 다음 비행기 편으로 돌아가겠다'는 반응이었고, 다른 한 명은 '신발을 팔 가능성이 무한대이므로 빨리 신발 5만 켤레를 보내라. 현지인 모두 맨발이다'라고 본사로 연락했다. 여기서 신발을 보내달라는 사람은 기업가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방이 자신을 얼마나 중요한 존재로 인식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집안이 가난해 교육을 못 받은 식료품 점원이 있었다. 그는 근무 중 주인의 눈치를 보며 몰래 법률 책으로 틈틈이 공부를 했다. 그가 바로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이다. 그는 자아실현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던 것이다. 미국의 심리학자 매슬로우 박사는 이를 인간의 욕구 5단계 중 가장 높은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설명했다.

 

중국 고대 역사서 '정관정요'에는 군주를 칭찬하려면 '60은 듣기 좋은 말을 하고, 나머지 40은 듣기 싫은 말을 하라'고 언급했다. 직장생활을 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개성이 강한 상사를 만나기도 한다. 이럴 경우 거북한 상사를 바꾸려고 애쓰지 말고 먼저 자신이 상대를 좋아하는 것이 요구된다. 미국의 정신교육학자 브로드벤트 박사도 상대에게 사랑받으려면 먼저 자신이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자동차 세일즈에 뛰어들어 첫해에 20대, 다음 해에 70대를 팔더니 이젠 한 해에 300대를 판매하는 베테랑 세일즈맨이 있다. 처음 세일즈를 시작할 때 매일 카탈로그와 명함을 들고 오전 20군데, 오후 30군데를 방문하며 다녔다고 한다. 그는 50장을 전부 뿌릴 때까지 결코 영업소로 퇴근하지 않는다는 기본을 지켰다. 이것이 그의 성공적인 영업비결이다. 

 

즐겁고 기쁜 상태에서 업무를 하면 능률이 올라간다. 반면에 미간을 찌푸려가며 심각하게 업무에 매달리면 능률이 오를리 없다. 그런데, 기분좋게 일하려해도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 때가 많다. 즐겁게 일하고 즐겁게 배우려면 스스로 여유로운 마음자세를 가지며, 긴장을 풀고, 회사업무 외의 자기 시간을 철저히 지켜야 할 것이다. 

 

인생을 살다보면 재난과 행운이 몇 번씩 찾아오게 마련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자세는 자신의 마음가짐과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행운은 노력하는 사람을 좋아하며 준비된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이다. 따라서, 행운이 자신에게 오도록 하려면 끊임없이 노력하는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운을 내 편으로 만들고, 운이 왔을 때는 용기를 갖고 이를 붙잡아라.

 

인생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장거리 마라톤이다. 좋은 습관을 기르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는 배우 바람직하다. 더욱 바람직한 것은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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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같이 좋은 선물 -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이야기
박 불케리아 지음, 윤진호 정리 / 예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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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 박 볼케리아는 1972년 마리아수녀회에 입회하여 40년 가까이 부산 소년의 집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 수녀이다. 또한, 1984년부터 지금까지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인 '알로이시오 관현악단'을 맡고 있다. 2011년부터는 소년의 집 모든 출신들의 관리와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저자의 구술을 원고로 정리한 윤진호 씨는 '말아톤', '마이 파더' 등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이다. 현재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영화화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10살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영세를 받고 동네 친구들과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했는데, 회비를 매월 꼬박 꼬박 거두자 돈에 부담을 느껴 성당에 발길을 끊고 있었다. 1960년대 촌동네에 살고있는 집안 형편으론 눈치가 보여서다. 태어나 고향인 경남 거창을 떠난 적이 없었던 저자는 22살에 경북 상주에 소재하는 '대한생사조선견직'에 취직했다. 이후 다니던 성당 사무실에 비치된 잡지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수녀회'라는 문구와 함께 '마리아수녀회'의 회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에 마음이 끌렸다.

 

1971년 여름 3일간의 휴가를 얻어 수녀회가 있는 부산 송도를 찾았다. 입회를 원한다면 면접후 한 달간 함께 생활을 해야한다고 했다. 다시 상주로 돌아가서 준비하여 한 달 뒤 정식면접을 신청했다. 여전히 면접대기자가 많았다. 최종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과 대면했다. 합격이었다. 6개월 진행된 면접에서 최종 12 명이 선택되었다. 직장을 사직하고 입회 허락을 받았다.

 

"이제 집에 가자......" (28 쪽)

 

부모님의 동의는 어려웠다. 결국 부모님 허락없이 수녀원에 입소했다. 한 달째 첫 면회에 아버지가 찾아 오셨다. 아버지는 집으로 가자고 말했지만 안된다고 부인하자 그냥 면회실을 떠났다. 지원기 1년, 청원기 1년, 수련기 2년을 거쳐야 정식 수녀가 된다. 입회하고 한달 쯤 지나자, 원장 수녀님이 아이를 돌보는 지원자를 찾았다. 손을 들어 자원했다. 거리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자기들만 사용하는 은어도 이해가 어려웠고 심지어 툭하면 이탈하곤 했다.

 

처음엔 미사 반주를 위해 합주부가 만들어졌다. 당장 아이들의 악기 지도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다. 이 때부터 안유경 선생님을 모셨다. 그녀는 당시 부산 시향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1979년 3월 미사 시간에 처음으로 현악기가 등장했다. 아직은 서툰 솜씨였지만 바이올린부터 베이스까지 현악기의 선율이 미사 시간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초기엔 중학생 중심의 현악합주단의 형태였다. 1996년 관악기를 포함하는 정식 관현악단이 되었다. 합주부는 미사 반주가 주목적이었기에 레슨도 주 1회 정도였다. 그런데도 합주부는 창단 2년 만인 1981년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현악부 우수상을 받고, 개천예술제에서도 현악합주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1984년 초, 전임 수녀님이 필리핀으로 소임처가 발령나면서 얼떨결에 저자가 합주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미 340 명의 아이들을 맡고 있었기에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1988년~1990년까지 내리 3년간 부산복지시설 음악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자 이 대회가 없어지는 해프닝도 생겼다. 다른 팀들이 들러리만 선다고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합주부의 변신이 요구되었다.

 

이쯤되니까,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가 생각났다. 1975년, 총소리만 난무했던 어느 허름한 차고에 전과 5범 소년을 포함한 11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이들은 총 대신 악기를 손에 들고, 난생 처음 음악을 연주했다. 이 음악교실은 이후 베네수엘라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11명이었던 회원이 무려 30만 명에 이르렀다. 마약과 폭력으로 물들었던 거리의 아이들에게 새로운 오늘을 선물한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바로 '엘 시스테마'였다. 국내에서 영화도 상영되었고, 금년 3월엔 예술의 전당에서 내한 공연도 했다.

 



 
1991년 자선연주회를 시작했다. 부산 소년의 집의 정신적 지주격인 소 신부님이 루게릭 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신부님이 수녀회에 실내수영장 건축이라는 숙제를 주었다. 재원 확보를 위한 아이디어가 바로 자선연주회였다. 전문 공연 기획사의 도움을 받아 연주회 장소의 대관부터 팜플릿 제작까지 기획사에서 진행하는 일을 보면서 하나씩 일들을 배워 나갔다. 

 

후원자를 모집하는 공연이므로 레퍼토리를 늘려야 했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모짜르트의 세레나데 중 13번, 슈베르트의 군대행진곡, 비제의 카르멘 서곡 등을 준비했다. 연습 시간이 배 이상으로 늘자, 중도에 탈락하는 중학생의 자리는 졸업생이 대신했다. 티겟판매는 수녀들의 몫이었다. 막상 공연일이 다가오자 불안하여 관람석 빈자리는 학생들이 채운다는 계획까지 짰다.1991년 6월 9일, 우려와 달리 시민회관 대강당은 대만원이었다. 소 신부님은 필리핀에 계셔서 공연 참관을 하지 못했다.

 

1992년 3월 16일, 소 신부님은 선종하셨다. 신부님은 1957년 사제 서품을 받고 부산 송도에서 보육원으로 출발하여 이후 부산 소년의 집, 부산 구호병원, 부산 마리아구호소, 서울 은평 마을사업, 서울 소년의 집, 서울 도티기념병원 등을 일구어 냈다. 1985년부터는 필리핀을 시작으로 멕시코, 콰테말라, 브라질 등 해외 구호 사업에도 나섰다.

 

1993년 제 3회 자선연주회는 두 달 보름에 걸쳐 서울, 부산, 창원, 진주, 대구 등 무려 5개 도시를 돌며 연주했다. 당초 대구는 계획에 없었는데, 진주 행사가 끝난 후 우리를 후원하는 자매님이 대구 MBC 편성국장님을 소개하면서 성사되었다. 대구 행사에서 효성여자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역임한 홍춘성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1994년 홍춘성 교수님이 지도하는 대구여성가톨릭합창단과 부산 소년의 집 합주부와 협연을 가졌다. 이듬 해에는 부산에서 동일한 형식으로 연주했다. 두 공연을 통해 얻은 수익금에 사비를 보태어 관악기 2 관씩 구매했다. 드디어 합주부가 관현악단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부산로터리클럽 제 3660지구로부터 현악기 40여 점을 기증받기도 했다.

 



 

1999년 3월 초, MBC 이채훈 PD 한테서 연락이 왔다. 부산에 연주하러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이 가는데, 부산 소년의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그리고 사라 장이 합주를 원하는 악보를 보내왔다. 아이들은 처음 해보는 곡이라 어렵다고 투덜댔다. 이 사실을 전하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곡을 알려 달래서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마이 웨이', 그리고 노사연의 '만남'을 선택했다. 드디어 사라 장이 MBC '생방송 화제집중'팀과 함께 학교로 왔다. 열렬한 환호속에 체육관에서 합주부와 함께 세 곡을 연주했다. 사라 장의 아버지의 즉석 제안으로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이 곡들을 사라 장과 함께 연주했다. 이런 인연으로 예술의 전당(2000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2001,2002년)에서 공연을 가지면서 아이들은 한 단계 더 성장했다.

 

2004년 멕시코 공연 일정이 잡혔다. 8월 18일 출국하여 9월 3일 입국하는 스케쥴이었다. 인솔자를 포함하여 총 125 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이동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통령궁 공연을 포함하여 총 다섯 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멕시코 일정 중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 버스 한 대가 고장이 나서 악기며 짐을 모두 다른 버스로 옮겨야 하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무사히 일정을 마쳤다.

 

마에스트로 정명훈 선생님이 우리 합주부를 위해 지휘봉을 잡은 것은 2007년 기금마련음악회였다. 그렇지만 그 인연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가 내한 공연 뒤 서울 소년의 집 합주반 아이들에게 마스터 클래스를 해준다며 부산에서도 참여하면 좋겠다고 연락와서 첼로 파트 4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적이 있다. 이 공연은 CMI에서 기획했는데, 이 회사의 대표가 바로 정명훈 선생님의 큰 형인 정명근 사장이었다.

 

그 해 8월 20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년의 집 기금마련연주회를 가졌다. 1부는 정명훈 선생님의 지휘로 베토벤의 고향곡 '운명'을, 2부는 정명훈 선생님의 아들인 정민 씨가 지휘를 맡고 정명훈 선생님은 피아노를 첼리스트 송영훈 씨와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 씨와 함께 베토벤의 '3중 협주곡 Op.56'을 연주했다. 이들 부자와의 인연은 2010년 카네기홀 공연으로 이어졌다.

 

2010년 2월 8일 저녁 8시 비행기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현지시간으로 8일 저녁 8시 조금 못 되어 뉴욕 JFK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재학생 42 명, 졸업생 54 명, 객원 연주자 15 명, 수녀 5 명, 사무실 직원 5 명 등 123 명의 대이동이었다. 도착하여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19기 졸업생 성철이가 유럽에서 날라왔던 것이다. 그는 바이올린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는데 한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동유럽에서 공부하다 지금은 벨기에의 한 교향악단에 단원으로 활동 중이란다.

 

뉴욕의 겨울이 유명한 것은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 때문이었다. 바로 폭설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이미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도로에는 차도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침이 들어 눈이 잦아들었지만 당장 내일이 공연인데 당사자인 우리도 우리도 움직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관객들이 찾아 오는데 불편한 것 같아 큰 걱정이었다. 오후가 되자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센트랄파크에 놀러갔다. 누군가 눈뭉치를 만들어 던지자 우리 일행은 삽시간에 눈싸움으로 번졌다.

 

2010년 2월 11일 카네기홀 공연이다. 하늘은 새파랗고 날씨는 따뜻했다. 나들이에 무척 좋은 봄 날씨였다. 어제만 해도 카네기홀까지 가는 길이 걱정이었는데 딴 나라 이야기 같았다. 오후 3시부터 리허설을 가졌다. 주어진 시간에서 단 1분만 초과해도 추가비용을 받을 정도로 엄격하다. 공연 전 호른을 부는 준호가 마우스피스를 조이는 나사를 분실하여 이를 찾느라고 한바탕 해프닝을 벌였다.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며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윤진호 작가님이 이번에 함께 동행했는데

리허설하는 모습을 캠코더로 담다가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 (265 쪽)

 

공연장을 찾은 분들은 대개 근거리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그들의 미국인 지인들 같았다. 알로이시오 신부님 가족 중에는 누님과 그 자녀들이 찾아왔다. 서울 도티기념병원을 기증하신 도티 씨 가족도 항공편이 없어 참석을 못했다. 꼭 참석해야 할 분들이 폭설오 인해 참석하지 못해서 정말 아쉬웠다.

 

정민 씨가 지휘를 맡았다. 첫 곡은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서곡이었다. 1부는 베르디의 특집 같았다. 2부의 연주곡은 차이콥스키 고향곡 5번이었다. 안단테로 시작한 1악장부터 장엄하고 화려한 4악장 피날레까지 거침없이 연주했다. 관객들이 기립했다. 터져나오는 함성, '브라보! 브라보!'로 장내는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수녀님들의 눈시울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출처:Joins.com

 

1960년대 부산의 거리는 넝마를 줍거나 구걸을 하거나 병들어 떠도는 고아들 천지였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소년의 집을 짓고 학교를 세워 제대로 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쳤다. 축구부, 육상부, 스키부 등을 만든 것도 모두 자립심 강한 동량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합주부를 지도하시는 안유경 선생님은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셨다. 재단에서 운영하는 여러 시설의 피고용인들을 채용할 때 '아이들 중심'이라는 원칙에 충실했기에 종교를 따지지 않았다. 의료진의 선발도 개원 당시 다른 곳보다 더 많은 급여를 지급하면서 실력있는 의사와 직원을 채용했다.

 


올해 초, 대우증권에서 보내온 초청장



 

고故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과의 만남은 평범한 20대 직장녀를 수도자의 길로 걷게 만든 계기였다. 아이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기 위해 부모님의 반대를 뿌리치고 '엄마 수녀'의 길을 선택한 박 볼케리아 수녀는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요즈음 조그마한 텃밭에 감자, 고구마, 무우, 배추, 생강, 벼 등 다양한 작물을 키우다보니 수녀님들 사이에는 농사 전문가 대접을 받는다. 오늘도 텃밭을 가꾸며 아이들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엔 이들이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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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 3세 대해부 - 매경 기자들이 현장에서 전하는 주요 그룹 오너 3세 이야기
매일경제 산업부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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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업의 발전사를 돌이켜보면 세대별로 특징이 나타난다. 창업세대인 재계 1세대는 '맨땅에 박치기'격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삼성그룹의 이병철 회장과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이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이 땅에 설탕, 섬유 등의 공장을 세우고 이후 반도체 공장까지 만든 삼성그룹, 헝그리 정신과 불굴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중화학 공업의 기틀을 마련한 현대그룹 모두 우리나라 재계의 대부인 셈이다.

 



 

삼성 이건희 회장, 현대자동차 정몽구 회장으로 대변되는 재계 2세대는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경제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공을 세웠다. 세계 1등 품목이 대거 양산되고 그들의 화두는 '글로벌'이었다. 재계 1세대들은 근검, 절약으로 대변되는 헝그리 정신으로 한국 경제의 초석을 다졌다면, 2세대들은 뛰어난 경영전략으로 글로벌 기업과 한 판 승부를 벌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3세대가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이다. 기업인으로서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아 유능한 경영자가 되는 것은 물론, 노블리세 오블리주로서의 사회적 역할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예전에는 선두를 추격하는 추격자(Fast Follower)였으나 이젠 선두주자(Leader)의 입장으로 변모했다. 예로부터 '부자 3대 가지 않는다'는 말처럼 부를 유지, 계승하는 것이 어렵다. 이들 3세 중 가장 활발한 인물의 활약상을 살펴 보도록 하자.

 







  

삼성그룹은 한국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글로벌 기업이다. 유럽여행을 하다보면 여기저기에서 삼성 로고의 간판을 만난다. 삼성은 일제시대인 1938년 대구에서 창업자 호암 이병철 회장이 삼성상회를 설립하면서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던 소년이 2010년 12월 그룹 사장단 인사에서 마침내 사장으로 승진했다.

 

1968년 생인 이재용 사장은 경복고등학교 재학시 모범학생으로 통했다.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마을버스를 타고 통학하며 학생회장을 맡을 만큼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다. 대학에서는 경영학이 아닌 인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여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4년 내내 할아버지 이병철 회장이 삼성 초기에 사용하던 낡은 갈색가방을 들고 다닌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검소한 생활습관을 읽을 수 있다.

 

"키가 크고 한류스타처럼 잘생겼으나 전혀 위엄을 부리지 않는다.

생각이 유연하고 젠틀맨으로 사람들에게 호감을 준다"

<닛케이비즈니스, 2011년 1월 3일자> 중에서

 

이 사장은 2008년 삼성 비자금 특검시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브라질, 러시아, 인도, 독립국가연합, 미국, 일본, 유럽 등지의 주요시장을 다니며 거래선과의 폭 넓은 교류를 가졌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앨 고어 전 미 부통령, 콜린 파월 전 미 국무장관 등 미국 정계의 주요 인사들과도 각종 모임을 통해 인연을 맺었다.

 

그의 사무실에는 삼국지의 명장면인 '삼고초려' 그림이 걸려 있다. 이 그림엔 좋은 인재를 널리 구하라는 메세지가 담겨 있다. 고 이병철 회장의 인재 욕심은 재계에서 이미 유명했다. '인재중시'경영은 이건희 회장을 거쳐 3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우수한 인재를 중시하고 이런 인재를 불러 모아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승부하겠다는 삼성 오너가의 경영철학인 셈이다.

 

한편, 그는 오래 전부터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왔다. 2007년에는 두 차례 서울 영등포역 인근 쪽방촌에 두움을 주고, 2005년에는 마리아수녀회에서 운영하는 '부산 소년의 집'이 예산부족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월급에서 일정액을 떼어내 사비로 매달 낡은 PC 10대를 교체해 주었다. 기부 습관이 몸에 밴 그는 2010년 12월 승진한 임원들의 명의로 정신지체인을 위한 지역사회재활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글로벌시장에서 존경받는 기업으로 잘 키울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2011년 4월 12일, 한복 디자이너 이모 씨가 한복을 입고 신라호텔의 부페 식당을 찾았다가 입장을 거절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언론과 네티즌들은 이에 대해 집중포격을 가했다. 그러자, 이부진 사장은 직접 이모 씨를 찾아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이후 네티즌들 사이에는 호텔 직원의 미숙한 대응을 대표이사가 나서서 직접 사과하고 사태가 수습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2010년 12월 3일, 삼성그룹 사장단 인사 발표를 보고 출입기자들 사이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이건희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가 부사장을 건너 뛰고 사장으로 승진했기 때문이다. 삼성의 인사 스타일에서 이런 파격 승진이 없었다. 뿐만아니라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 사장과 삼성물산 상사 부문 고문도 겸하는 인사발령이었다.

 

"이부진 사장은 어렸을 때부터 꼼꼼하고 똑 부러졌다.

사리판단이 분명하고 스마트하기 때문에 사업도 잘할 것이다" (40 쪽)

 

1970년 생인 이부진 사장은 연세대학교 아동학과를 졸업했다. 대원외국어고등학교에 재학시에도 조용하고 검소한 여학생이었다. 아동, 복지, 문화 등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의 전공도 아동학이다. 1995년 삼성복지재단 기획지원팀에 입사하여 1998년 6월부터 1년간 삼성일본 본사담당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그해 8월 당시 평사원인 임우재 씨(현, 삼성전기 전무)와의 결혼으로 세인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호텔신라와의 인연은 2001년에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 전사기획 담당부장으로 입사했다. 그녀의 부임이후 호텔신라는 긴장감과 더불어 변화가 시작되었다. 호텔신라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경쟁사인 워커힐호텔에 직접 투숙까지 하면서 참고사항을 점검했다. 업무의 시스템화를 시도했고, 2006년에는 호텔 로비와 레스토랑, 연회장 등을 리모델링했다. 2년에 걸친 꼼꼼한 공사로 호텔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3~6 층에 신설된 '라이프스타일존'은 호평이었다.

 

이 사장이 언론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것은 2009년 9월 삼성에버랜드가 당시 호텔신라 이 전무를 자사 경영전략담당으로 영입했다고 발표하면서부터이다. 경영상태가 좋지 않은 에버랜드의 경영정상화를 위한 것이었다. 주력사업인 테마파크의 경우 2005년 입장객 865만 명을 정점으로 제자리걸음을 해왔다.

 

이 사장은 철저한 현장주의자이다. 모든 것을 본인의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린다. 일에대한 욕삼과 승부욕이 강하다는 것이 업계의 평판이다. 에버랜드의 명물인 사파리 스페셜 투어도 직접 체험한 결과, 차량 보호망의 색깔이 은색이어서 승객이 바깥을 관망할 때 눈부심 현상이 나타나는 점을 파악하고 현재의 암녹색으로 변경했다.

 

2010년 11월 루이비통 브랜드를 인천공항 신라면세점에 유치했다. 3년에 걸친 롯데면세점과의 유치 경쟁에서 이긴 것이다. 루이비통의 아르노 회장이 직접 방한하여 롯데와 신라 모두 면담한 뒤 결정을 내렸는데, 루이비통이 공항 면세점에 입점한 것은 신라면세점이 세계 최초라고 한다. 호텔신라의 매출이 4,200억 원(2002년)에서 1조 4,000억 원(2010년)으로 증가했고, 이 중 면세점 매출이 전체 매출의 81%를 차지하는데 이는 세계 7위 수준의 면세점 매출이다. 이만하면 경영능력을 인정받을만하다. 이미 신세계와 한솔이 분리되었던 것처럼, 이부진 사장도 계열분리의 길을 걷게될지 재계의 관심이 쏠린다.

 



 

 

1973년 생인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은 서울예술고등학교와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했다. 일찌기 패션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하여 기획담당을 하며 제일모직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켰다. '갤럭시'나 '로가디스' 등 신사복 의존도가 높은 패션사업 구조에 손을 댔다. 2003년 여성복 브랜드 '구호(KUHO)' 인수를 시작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새로 구성하고, 빈폴도 글로벌 브랜드화 전략에 착수했다.

 

2010년 초 이 부사장은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의 이사회 멤버로 선정되었고, 그 해 가을에 열린 '2010 F/W 뉴욕컬렉션'기간 중에는 '헥사 바이 구호(Hexa by Kuho)'라는 라벨로 구호의 첫 해외컬렉션을 선보였다. 2005년부터는 삼성패션 디자인펀드를 설립하여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한국 디자이너를 발굴, 후원하고 있다.

 



 김연아 평창 프리젠테이션에서, 의상은 '구호' 제품임 

 

그녀가 합류하고 제일모직은 질과 양 모든 면에서 크게 성장했다. 매출이 2조 원(2002년)에서 5조 원(2010년)을 돌파했고, 패션사업부의 매출도 8,100억 원(2002년)에서 1조 3,000억 원(2010년)으로 증가했다. 2009년부터는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의 경영도 챙기고 있다. 제일기획이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그녀를 기획담당 전무로 영입했었다.

 

2010년 말 부사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케미컬과 전자재료 사업까지 챙기기 시작했다. 그녀가 즐겨 찾는 곳은 R&D센터에 있는 컬러랩(Color Lab)이다. 2005년에 설립된 컬러랩은 글로벌 업체의 다양한 컬러 요구에 부응할 목적이었다. 노하우가 축적되어 흰색만해도 현재 2천여 종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이다. 디자인과 컬러의 조화로 시너지를 극대화하자는 것이다.

 

"디자인 역량이 소재사업의 미래를 좌우한다.

최첨단 IT제품의 경쟁력에서 컬러디자인을 빼놓을 수 없다"

(56 쪽)

 

 


올 초 현대차 판매촉진대회에 참석한 정의선 부회장.


 
 



1970년 생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정몽구 회장의 1남 3녀 중 막내이다. 휘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할아버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권유로 1995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샌프란시스코대 MBA과정 중 현 배우자인 삼표회장의 장녀 정지선과 인연을 맺었다. 1997년 8월 MBA를 마치고 일본 이토추상사에서 근무하다가 1999년 말 현대차 자재본부 구매실장(이사대우)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상하 가리지 않고 직원들과 잘 어울려 평이 좋았다.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려 폭탄주도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 시합을 벌인 적도 있다"(66 쪽)

 

그의 진가는 2000년대 중반부터다. 상무(2001), 전무(2002), 부사장(2003) 등으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입사 6년 만인 2005년에 기아차 사장으로 승진했다. 일단 맡겨보고 자질을 검증하는 현대그룹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그는 '디자인 경영'을 선언하며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로 꼽히는 피터 슈라이어를 기아차 디자인 담당 부사장으로 전격 영입했다. 이를 발판으로 적자인 기아차를 흑자로 전환시키더니 2010년엔 사상 최대의 실적을 달성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날지 주목된다. 

 

그의 누나 셋은 현대차의 경영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이것도 현대가의 전통이다. 단지 사위들이 계열사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장녀 정성이의 남편인 맏사위 선두훈은 선병원 이사장으로 딴 길을 가고 있다. 둘째 사위 정태영은 종로학원 정경진 회장의 장남인데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의 대표이사 사장이다. 제일 왕성한 활동을 하며 정몽구 회장의 신임이 두텁다. 셋째 사위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사장은 현대모비스에 입사하여 현대하이스코로 근무지를 옮겨 영업본부장 시절 1조 원대를 맴돌던 매출을 2조 3천억 원으로 끌어올린 입지전적 인물이다.

 



 

 프로야구 두산 베어즈의 구단주인 박정원 회장

 

1962년 생인 두산건설 박정원 회장은 두산가 4세 중 맏형이다. 두산그룹은 올해로 창립 115년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이다. 구 한말 종로에서 '박승직상점'이라는 포목점을 시작으로 OB맥주, 코카콜라, 코닥, 3M 등 외국기업의 국내 비즈니스를 도맡았던 대표적인 소비재 기업이었다. 변신의 움직임이 일었다. 1995년 두산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당시 맥주가 하이트의 추격에 직면하여 적자가 엄청나게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영등포 공장과 을지로 본사 사옥의 매각이 단행되었다.

 

박회장은 어릴 적부터 경영수업을 착실하게 밟아왔다. 고려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90년 두산산업 뉴옥지사에 입사했다. 이후 도쿄지사를 거쳐 미국 보스톤대 MBA를 마치고 일본 기린맥주에 취업했다. 창업주 박승직은 1930년대 소화기린맥주의 주주로 참여하고 있었다. 소화기린맥주는 기린맥주의 한국 현지 생산공장이었다. 2년 후 그는 OB맥주로 복귀했다.

 

"남의 집 밥을 먹어봐야 내 것을 잘 알 수 있고, 경영인으로서의 자질을 갖출 수 있다"

 - 창업주 박승직 경영철학

 

1968년 생인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은 유명 탈렌트 고현정과의 결혼으로 한 때 세인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 그의 어머니 이명희 회장은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막내딸이다. 그는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과 경복고등학교 동기동창이다. 미국 브라운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신세계 전략기획, 기획조정실 상무, 경영지원실 등 컨트롤타워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2010년 총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승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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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신세계 이명희 회장, 정용진 부회장, 정유경 부사장.




 

2011년 3월 18일 주총에서 신세계는 백화점과 이마트가 별도법인으로 분리되었다. 재계에서는 정부회장과 동생 정유경이 각각 나눠 가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는 성격이 소탈하다. 트위터 매니아인 그는 트위터로 고객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자유롭게 의사소통을 한다. 최근의 이마트 피자 논쟁의 무대가 바로 트위터였다.

 

"가식적이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줘 사람을 끄는 친근한 매력이 있다"(208 쪽)

 

경영 감각이 날카롭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현장경영'에 나서고 있다. 이마트와 백화점 매장에 직접 나가 상품과 고객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이마트의 자체 브랜드인 PL 상품에 대한 관심도가 매우 높다. 아직은 어머니로부터 경영독립을 하지 못했지만 멘토인 구학서 회장과 어머니로부터 그동안 많은 경영수업을 받았기에 조만간 경영권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 책에는 범현대가를 포함하여 모두 17개 그룹 50여 명의 리더들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회사의 역사가 제일 오랜 두산의 경우는 이미 4세가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반면, SK그룹의 경우는 아직 2세 경영 체제임을 알 수 있다. 역사가 짧은 탓인지 SK그룹은 신성장동력이 없어서 미래가 불안하다는 증권가의 루머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국내 재벌의 가계도가 잘 정리되어 큰 도움이 되었다. 호불호好不好가 있기 마련인데 경영자의 좋은 면만 부각시켜 형평성을 잃은 것이 옥의 티 같아 다소 아쉬웠다. 혹자는 물려받은 부富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처음부터 색안경을 끼고 재벌가문을 비난하기도 한다. 하필 왜 그들이 기업을 경영하는지 그점에 대해선 나 역시도 불만이다. 주식회사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부를 승계하고 더 나은 발전을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은 공부로 유창한 외국어를 구사하는 등 글로벌 정신을 갖추었고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는 점을 낮게 평가해서는 안되겠다. 아무튼 한국의 기업이 3대를 넘어 100대까지 이어져 세계 기업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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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6-28 0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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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스케치 - MBC 헬기기장과 함께하는 특별한 비행
정갑표 지음 / 제이앤씨커뮤니티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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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성장해서 사회로 진출하면 부모님으로부터 '한 우물을 파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이 책의 저자인 정갑표 MBC 방송 취재용 헬리콥터의 기장도 조종사로서 한 우물을 파고 있다. 그의 이력을 보면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공군의 헬기인 블랙호크의 비행대대장으로 근무중 우연히 MBC TV 자막에 나온 조종사 채용 공고를 보고서 밑지는 셈치고 지원했다가 덜컥 합격하여 근무지를 공군에서 방송국으로 옮긴 인물이다.







MBC 헬기는 전국을 누비고 다니며 시청자들에게 보다 더 사실적이고 생생한 현장 화면을 제공하도록 조력자로서의 일에 충실해왔다. 10여 년간의 비행업무 수행중 그가 겪게된 여러가지 이야기를 우린 이 책에서 만나게 된다. 김수환 추기경, 가수왕 조용필,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 산악인 엄홍길 등의 저명인사와의 만남, 태풍이 휩쓸고 간 수해 현장의 취재기, 터널공사 반대를 시위 중인 지율스님과 천성산의 취재비행 등이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다.



1973년 2월 초,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약 150 명의 무리 속에 섞여 서울 대방동 공군사관학교 정문에서 성무대 언덕을 넘기 시작했다. 여느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처럼 처음 생각했던 그는 이게 아니구나를 직감했다. 사관학교도 엄연한 군대였기에 겨울 새벽 6시에 울려 퍼지는 기상나팔 소리를 시작으로 뛰고, 뒹굴고, 얻어맞으며 계속되는 훈련 속에서 그는 서서히 군인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빨간마후라의 조종사가 되기엔 아직도 미흡한 '메추리'였다. 전체 동기생 중 고등비행과정을 수료한 숫자는 40%가 채 되지 않았다. 고등비행훈련을 모두 마치고 전투 비행단으로의 배치를 앞둔 어느 날, 그는 훈련 비행단으로 차출되었다. 공군본부로부터 향후 예상되는 고가의 헬기와 수송기의 도입과 관련하여 헬기와 수송기에도 고등비행수료자를 보내라는 지시에 따라 4명이 차출되었던 것이다.



1995년 겨울, 대한민국 공군의 최신예 헬기인 블랙호크 비행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야간비행을 마치고 텅빈 관사로 들어가 무료함을 달래려고 TV를 켰다.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가족들 모두 수원에 있었다. 혼자서 텅빈 집에 들어가는 기분은 바로 공허함과 외로움이다.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데 조종사 채용에 관한 전화번호가 잠시 보였다 사라졌다. 다음 날 대대 아침 브리핑 후, 신기하게도 그 전화번호가 생각나서 재미삼아 대대장실 전화 버튼을 눌렀다.



"이거 미리 다 정해놓고 형식적으로 선발하는 척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실력이 있다면 한 번 도전해 보시죠?"

(26 쪽)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강남에 심었던 귤이 기후와 풍토가 다른 강북에 옮겨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이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안영이 초나라에 사자로 파견되었다. 당시 안영은 똑똑하다고 다른 나라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그는 체구가 왜소하고 얼굴이 거무스레했다. 방자한 초나라 왕이 그를 업신여겨 수모를 주려고 작정하고서 미리 짠 각본대로 한 사람을 꽁꽁 묶어 일부러 자신과 안영이 있는 장소를 지나가도록 했다.



"이 제나라 사람은 도적의 혐의가 있습니다", "제나라 사람들은 도적질을 잘하는 모양이오?"

"제가 듣기로 강남 일대의 귤은 향기롭고 달지만, 강북에다 옮겨 심으면 쓰고 덟은 탱자가 된다고 하더군요.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환경이 이유입니다! 지금 제나라 사람이 제나라에서는 도적질하지 않다가 초나라에 와서 도적이 되었으니, 이게 바로 환경 때문이 아니겠습니까?"(28 쪽)



1996년 5월 2일, 기장으로 최종 합격했다는 소식과 함께 MBC는 최선의 배려차원에서 '부장대우'라는 간부 직급을 부여했다. 그의 심정은 귤화위지였다. 방송사 헬기가 하는 일은 다양하다. 공중취재, 스포츠 중계,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제작, 교양프로그램 등 여러 장르에 활용된다. 요즈음 조종사가 전문직종으로 인식되어 젊은이들이 선호한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조종사와는 달리 방송국의 조종사는 저공에서 방송업무를 수행하는 등 위험에 노출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조종사이면서 동시에 방송인이 되어야 하는 특징이 있다.



MBC는 민영도 공영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의 소유구조로 운영되고 있다. 그래서 MBC만이 가지는 프로그램 제작의 장단점이 있다. MBC는 본디 부산의 한 개인의 소유였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KBS에 귀속되었다가 전두환 대통령의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방송문화진흥회'가 소유하게 되었다. 한편, '방문진'의 이사진이 대통령과 국회, 야당과 여당에서 지명하는 저명인사들이 월급을 받는 임기직 이사로 구성되는 독특한 지배구조이다.



1995년 4월 어느 날, 김수환 추기경을 독도까지 모시라는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 용산기지를 출발하여 약 1시간 10분 정도 지나 독도 동도의 중앙 헬기장에 착륙했다. 헬기 승무원 모두를 불러 기념촬영을 제의했다. 독도일정을 마치고 잠시 울릉도 해군기지에 들렀다. 이곳에서 추기경은 천주교 신자인 그를 불러 강복을 주셨다.







2003년 7월 30일 잠실경기장 옆 둔치 헬기장에서 가수 조용필 일행을 태워 속초 음악제 현장으로 비행했다. 발 아래로 청평유원지가 내려보이고 잠시 후 춘천을 지나 설악산 대청봉이 보이자 "야!"하고 감탄사를 날린다. 고도를 7천피트로 올려 내설악을 가로질러 속초로 향하는 빠른 항로를 택했다. 예정시간보다 빨라서 설악산 중청봉 옆 헬기장에 잠시 내려 경관을 감상하도록 배려했다.



2011년 3월 11일, 제주공항에서 산악인 엄홍길 씨를 헬기에 탑승시켰다. MBC창사 50주년 기념 특별프로그램으로 '엄홍길 바다로 가다'를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이틀간 돌고래 무리를 찾다 모슬포 해안에서 이들을 발견하고 촬영에 들어갔다. 제주 돌고래의 정식명은 '남방 큰돌고래'이다. 인도양과 서태평양의 열대와 온대 해역의 얕은 바다에 분포하는데, 한국에선 제주연안에서만 발견된다. 모슬포나 협제 등 제주서남부지역에서는 이들을 '수애기', 성산포와 김녕 등 동북부지역에서는 '감새기'라고 부른다.







대형화재, 산불, 태풍, 장마로 인해 수해 등 긴급재난이 발생하면 이를 취재키 위해 헬기는 위험을 무릎쓰고 현장으로 날라간다. 2003년 태풍 매미의 피해상황을 촬영하기 위해 수마가 할퀴고 간 경상도 남부지역의 비참한 모습을 영상으로 보도국에 전송했다. 또한 2004년 3월 100년 만의 폭설, 2010년 1월 41년 만의 수도권 폭설, 2005년 강원도 폭설, 2006년 10월 서해대교 대형 교통사고, 2010년 4월 천안함 침몰 등 크고 작은 취재 비행을 통해 정말 힘든 일임을 느끼게 한다.







한편, 독도 국제요트경기, 춘천마라톤, 동아 국제마라톤 등의 비행 촬영을 통해 시청자들이 편안하게 TV를 통해 멋진 영상과 함께 스포츠를 즐길 수 있고 그리고 드라마 주몽, 드라마 선덕여왕 등의 촬영 현장을 보니 드라마 명장면의 탄생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헬기가 드라마 PD에게도 꼭 필요한 장비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종사 생활이 어떠한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얼마나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지 미처 생각도 못하고 사관생도의 제복과 빨간마후라의 동경만으로 성무대 언덕을 넘어설 때부터 지금의 MBC 취재헬기 기장에 이르기까지 그의 비행일기는 흥미와 재미를 뛰어넘어 헬기 비행의 상식까지 알게 해준다. 아울러, 독서하는 내내 방송에 종사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고를 한꺼번에 이해할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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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해도 괜찮아
강성찬 지음 / 일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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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프로복싱이 전성이던 때가 있었다. 빅게임이 있는 날이면 다방 문 앞에 TV 중계방송 안내 표지판을 붙였을 정도였다. 동료들과 함께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옛날이 생각난다. 1970년대엔 유독 실력있는 복서들이 많았다. 그러나, 요즘엔 좋은 복서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매맞으며 돈벌지 않아도 되는 시절임을 대변하는 현상인 듯하다. 

 

그런데, 얼마 전 여성복서가 세계 5대 기구 통합 챔피언에 등극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눈에 띄었다. 남성들도 회피하는 스포츠 종목이 프로복싱이라고 한다. 예쁘장하게 얼굴을 가꾸어야 할 젊은 여성이 복싱이라니, 정말 인생에는 단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다.

 

"사람은 자기가 읽는 것으로 만들어진다"

- 마르틴 발저    

 

그렇다고 인생이 그냥 살아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이란 자신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자신은 이에 대한 답을 만들어가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왕 사는 것이라면 '살아지는' 수동적인 삶보다 '살아가는' 능동적인 삶의 자세가 좋지 않겠는가. 저자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 출신으로 책과의 만남을 계기로 밤낮으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독서를 통해 그는 인생화두를 잡고 있었다.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

(21 쪽)

 

그의 첫도전은 IBM 입사였다. 지방대학 출신이라는 불리한 스펙을 안고 있었기에 IBM이라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엔 너무나 높고 단단한 철옹성 처럼 보였다. 간절함이란 커다란 바위도 뚫고 무쇠도 녹이는 강렬한 힘이다. 그는 불리한 스펙에 굴하지 않고 회사로 찾아가 응시서류를 받아 들었지만 자기소개서에 단 한 줄도 채울 수가 없었다.

 

'본인의 주위나 학교, 세상을 위해 혁신한, 창의적 사례가 있는가?'

'21세기 세계화에 대비하려고 본인 자신을 세계화하려 노력한 사례가 있는가?'

(28 쪽)

 

2007년 새해가 코 앞에 다가온 즈음, 포항의 호미곶 일출을 보려고 그는 부산에서 약 120 킬로미터의 행군을 시작했다. 그의 계획에 힘을 보태기 위해 아버지도 동참했다. 붉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그는 다짐했다.

 

'올해는 반드시 IBM에 간다'

 

1박 2일 과정의 '웃음치료사', 2박 3일 간의 '대학생 리더십 아카데미', 토익의 고득점, 3박 4일 간의 카이스트 국제 대학생 컨퍼런스 등 다양한 스펙을 쌓으면서 IBM 자기소개서를 채우기 시작했다. 2007년 하반기, 이력서는 초라하지만 자기소개서는 열정으로 가득 채웠다.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면접까지 잘 치루었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는 순간 그는 무척 행복했다.

 

열정 하나로 입사했지만 언젠가부터 그의 열정이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겨우 몇 달을 지났을 뿐이었다. 프랭크 베트거의 <실패에서 성공으로>에서 언급되는 '카네기 코스'가 국내에도 교육과정이 있었다. 조금씩 열정을 회복하던 중 우연히 구본형 소장의 강연을 듣고서 새로운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구본형 소장은 IBM에서 20년 가까이 근무한 후 독립하여 1인 기업가로 성공했다. 2009년 새해가 밝아오자 그는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직장인이라는 길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내가 하는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미야모토 무사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20대'와 관련된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얻은 게 별로 없었다. 그래서, 전라남도 광양시에 소재한 무등암을 찾았다. 책 50여 권을 싸 들고 입산한 셈이었다. 이제껏 독서하며 '무엇을', '어떻게'만을 고민했을 뿐 '왜?'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파헤치지 않고 지내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갈 때가 왔다. 여행은 아시아와 중동을 거쳐 아프리카로, 유럽을 거쳐 남북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어졌다. 여행기간 중 많은 젊은이를 만났다. 한결같이 세상의 고민을 안고 살고 있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 가는 길은 스페인의 북서부 대서양 변에 위치한 산티아고로 예수의 제자 야곱이 복음을 전하려고 이 길을 걸었던 데에서 유래한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야곱의 묘를 참배하려고 산티아고로 향한다. 과거 이 길은 목숨을 걸 정도로 위험했지만 지금은 '노란 화살표'를 따라가면 된다.

 












 

벽안의 스님 현각, 그는 예일대와 하버드 대학원을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런데, 숭산 스님과의 첫 만남에서 그에게 던진 "너는 누구냐?"란 단 하나의 질문 때문에 그는 출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당시 현각은 자신의 이름은 어쩌구, 좋아하는 사람은 저쩌구 등을 늘어 놓았다. 그러자 숭산 스님이 버럭 소리 질렀다.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현각은 순간 큰 충격을 받았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네가 누구인지, 그것을 공부해라. 그것만 공부해라"

(158 쪽)

 

 

산티아고에 도착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모든 것이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깨달았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도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저자가 겪어야만 했던 방황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한 노력 과정의 하나였다. 자신만을 위한 정답을 찾고자 노력하지 않았다면 방황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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