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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같이 좋은 선물 -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이야기
박 불케리아 지음, 윤진호 정리 / 예담 / 2011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의 저자 박 볼케리아는 1972년 마리아수녀회에 입회하여 40년 가까이 부산 소년의 집 아이들을 돌보는 엄마 수녀이다. 또한, 1984년부터 지금까지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인 '알로이시오 관현악단'을 맡고 있다. 2011년부터는 소년의 집 모든 출신들의 관리와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저자의 구술을 원고로 정리한 윤진호 씨는 '말아톤', '마이 파더' 등의 시나리오를 쓴 작가이다. 현재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영화화하려고 준비 중에 있다.
10살에 어머니 손에 이끌려 영세를 받고 동네 친구들과 성당에서 성가대 활동을 했는데, 회비를 매월 꼬박 꼬박 거두자 돈에 부담을 느껴 성당에 발길을 끊고 있었다. 1960년대 촌동네에 살고있는 집안 형편으론 눈치가 보여서다. 태어나 고향인 경남 거창을 떠난 적이 없었던 저자는 22살에 경북 상주에 소재하는 '대한생사조선견직'에 취직했다. 이후 다니던 성당 사무실에 비치된 잡지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봉사하는 수녀회'라는 문구와 함께 '마리아수녀회'의 회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에 마음이 끌렸다.
1971년 여름 3일간의 휴가를 얻어 수녀회가 있는 부산 송도를 찾았다. 입회를 원한다면 면접후 한 달간 함께 생활을 해야한다고 했다. 다시 상주로 돌아가서 준비하여 한 달 뒤 정식면접을 신청했다. 여전히 면접대기자가 많았다. 최종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과 대면했다. 합격이었다. 6개월 진행된 면접에서 최종 12 명이 선택되었다. 직장을 사직하고 입회 허락을 받았다.
"이제 집에 가자......" (28 쪽)
부모님의 동의는 어려웠다. 결국 부모님 허락없이 수녀원에 입소했다. 한 달째 첫 면회에 아버지가 찾아 오셨다. 아버지는 집으로 가자고 말했지만 안된다고 부인하자 그냥 면회실을 떠났다. 지원기 1년, 청원기 1년, 수련기 2년을 거쳐야 정식 수녀가 된다. 입회하고 한달 쯤 지나자, 원장 수녀님이 아이를 돌보는 지원자를 찾았다. 손을 들어 자원했다. 거리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자기들만 사용하는 은어도 이해가 어려웠고 심지어 툭하면 이탈하곤 했다.
처음엔 미사 반주를 위해 합주부가 만들어졌다. 당장 아이들의 악기 지도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다. 이 때부터 안유경 선생님을 모셨다. 그녀는 당시 부산 시향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1979년 3월 미사 시간에 처음으로 현악기가 등장했다. 아직은 서툰 솜씨였지만 바이올린부터 베이스까지 현악기의 선율이 미사 시간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초기엔 중학생 중심의 현악합주단의 형태였다. 1996년 관악기를 포함하는 정식 관현악단이 되었다. 합주부는 미사 반주가 주목적이었기에 레슨도 주 1회 정도였다. 그런데도 합주부는 창단 2년 만인 1981년 전국학생음악경연대회에서 현악부 우수상을 받고, 개천예술제에서도 현악합주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1984년 초, 전임 수녀님이 필리핀으로 소임처가 발령나면서 얼떨결에 저자가 합주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미 340 명의 아이들을 맡고 있었기에 여간 부담스러운 게 아니었다. 1988년~1990년까지 내리 3년간 부산복지시설 음악 경연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자 이 대회가 없어지는 해프닝도 생겼다. 다른 팀들이 들러리만 선다고 불만을 표출했기 때문이다. 합주부의 변신이 요구되었다.
이쯤되니까, 베네수엘라의 '엘 시스테마'가 생각났다. 1975년, 총소리만 난무했던 어느 허름한 차고에 전과 5범 소년을 포함한 11명의 아이들이 모였다. 이들은 총 대신 악기를 손에 들고, 난생 처음 음악을 연주했다. 이 음악교실은 이후 베네수엘라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11명이었던 회원이 무려 30만 명에 이르렀다. 마약과 폭력으로 물들었던 거리의 아이들에게 새로운 오늘을 선물한 이 프로젝트의 이름이 바로 '엘 시스테마'였다. 국내에서 영화도 상영되었고, 금년 3월엔 예술의 전당에서 내한 공연도 했다.
1991년 자선연주회를 시작했다. 부산 소년의 집의 정신적 지주격인 소 신부님이 루게릭 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신부님이 수녀회에 실내수영장 건축이라는 숙제를 주었다. 재원 확보를 위한 아이디어가 바로 자선연주회였다. 전문 공연 기획사의 도움을 받아 연주회 장소의 대관부터 팜플릿 제작까지 기획사에서 진행하는 일을 보면서 하나씩 일들을 배워 나갔다.
후원자를 모집하는 공연이므로 레퍼토리를 늘려야 했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 모짜르트의 세레나데 중 13번, 슈베르트의 군대행진곡, 비제의 카르멘 서곡 등을 준비했다. 연습 시간이 배 이상으로 늘자, 중도에 탈락하는 중학생의 자리는 졸업생이 대신했다. 티겟판매는 수녀들의 몫이었다. 막상 공연일이 다가오자 불안하여 관람석 빈자리는 학생들이 채운다는 계획까지 짰다.1991년 6월 9일, 우려와 달리 시민회관 대강당은 대만원이었다. 소 신부님은 필리핀에 계셔서 공연 참관을 하지 못했다.
1992년 3월 16일, 소 신부님은 선종하셨다. 신부님은 1957년 사제 서품을 받고 부산 송도에서 보육원으로 출발하여 이후 부산 소년의 집, 부산 구호병원, 부산 마리아구호소, 서울 은평 마을사업, 서울 소년의 집, 서울 도티기념병원 등을 일구어 냈다. 1985년부터는 필리핀을 시작으로 멕시코, 콰테말라, 브라질 등 해외 구호 사업에도 나섰다.
1993년 제 3회 자선연주회는 두 달 보름에 걸쳐 서울, 부산, 창원, 진주, 대구 등 무려 5개 도시를 돌며 연주했다. 당초 대구는 계획에 없었는데, 진주 행사가 끝난 후 우리를 후원하는 자매님이 대구 MBC 편성국장님을 소개하면서 성사되었다. 대구 행사에서 효성여자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역임한 홍춘성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1994년 홍춘성 교수님이 지도하는 대구여성가톨릭합창단과 부산 소년의 집 합주부와 협연을 가졌다. 이듬 해에는 부산에서 동일한 형식으로 연주했다. 두 공연을 통해 얻은 수익금에 사비를 보태어 관악기 2 관씩 구매했다. 드디어 합주부가 관현악단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부산로터리클럽 제 3660지구로부터 현악기 40여 점을 기증받기도 했다.
1999년 3월 초, MBC 이채훈 PD 한테서 연락이 왔다. 부산에 연주하러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이 가는데, 부산 소년의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그리고 사라 장이 합주를 원하는 악보를 보내왔다. 아이들은 처음 해보는 곡이라 어렵다고 투덜댔다. 이 사실을 전하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곡을 알려 달래서 바흐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마이 웨이', 그리고 노사연의 '만남'을 선택했다. 드디어 사라 장이 MBC '생방송 화제집중'팀과 함께 학교로 왔다. 열렬한 환호속에 체육관에서 합주부와 함께 세 곡을 연주했다. 사라 장의 아버지의 즉석 제안으로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이 곡들을 사라 장과 함께 연주했다. 이런 인연으로 예술의 전당(2000년), 세종문화회관 대강당(2001,2002년)에서 공연을 가지면서 아이들은 한 단계 더 성장했다.
2004년 멕시코 공연 일정이 잡혔다. 8월 18일 출국하여 9월 3일 입국하는 스케쥴이었다. 인솔자를 포함하여 총 125 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이동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대통령궁 공연을 포함하여 총 다섯 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멕시코 일정 중 장대같은 비가 쏟아지는 날 버스 한 대가 고장이 나서 악기며 짐을 모두 다른 버스로 옮겨야 하는 해프닝을 겪으면서 무사히 일정을 마쳤다.
마에스트로 정명훈 선생님이 우리 합주부를 위해 지휘봉을 잡은 것은 2007년 기금마련음악회였다. 그렇지만 그 인연은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2년 첼리스트 미샤 마이스키가 내한 공연 뒤 서울 소년의 집 합주반 아이들에게 마스터 클래스를 해준다며 부산에서도 참여하면 좋겠다고 연락와서 첼로 파트 4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적이 있다. 이 공연은 CMI에서 기획했는데, 이 회사의 대표가 바로 정명훈 선생님의 큰 형인 정명근 사장이었다.
그 해 8월 20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년의 집 기금마련연주회를 가졌다. 1부는 정명훈 선생님의 지휘로 베토벤의 고향곡 '운명'을, 2부는 정명훈 선생님의 아들인 정민 씨가 지휘를 맡고 정명훈 선생님은 피아노를 첼리스트 송영훈 씨와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 씨와 함께 베토벤의 '3중 협주곡 Op.56'을 연주했다. 이들 부자와의 인연은 2010년 카네기홀 공연으로 이어졌다.
2010년 2월 8일 저녁 8시 비행기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현지시간으로 8일 저녁 8시 조금 못 되어 뉴욕 JFK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재학생 42 명, 졸업생 54 명, 객원 연주자 15 명, 수녀 5 명, 사무실 직원 5 명 등 123 명의 대이동이었다. 도착하여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19기 졸업생 성철이가 유럽에서 날라왔던 것이다. 그는 바이올린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는데 한국에서 학업을 마치고 동유럽에서 공부하다 지금은 벨기에의 한 교향악단에 단원으로 활동 중이란다.
뉴욕의 겨울이 유명한 것은 잊지 않고 찾아오는 손님 때문이었다. 바로 폭설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이미 온 세상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도로에는 차도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아침이 들어 눈이 잦아들었지만 당장 내일이 공연인데 당사자인 우리도 우리도 움직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관객들이 찾아 오는데 불편한 것 같아 큰 걱정이었다. 오후가 되자 다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센트랄파크에 놀러갔다. 누군가 눈뭉치를 만들어 던지자 우리 일행은 삽시간에 눈싸움으로 번졌다.
2010년 2월 11일 카네기홀 공연이다. 하늘은 새파랗고 날씨는 따뜻했다. 나들이에 무척 좋은 봄 날씨였다. 어제만 해도 카네기홀까지 가는 길이 걱정이었는데 딴 나라 이야기 같았다. 오후 3시부터 리허설을 가졌다. 주어진 시간에서 단 1분만 초과해도 추가비용을 받을 정도로 엄격하다. 공연 전 호른을 부는 준호가 마우스피스를 조이는 나사를 분실하여 이를 찾느라고 한바탕 해프닝을 벌였다.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다며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윤진호 작가님이 이번에 함께 동행했는데
리허설하는 모습을 캠코더로 담다가 쫓겨날 뻔하기도 했다" (265 쪽)
공연장을 찾은 분들은 대개 근거리에 거주하는 한인들과 그들의 미국인 지인들 같았다. 알로이시오 신부님 가족 중에는 누님과 그 자녀들이 찾아왔다. 서울 도티기념병원을 기증하신 도티 씨 가족도 항공편이 없어 참석을 못했다. 꼭 참석해야 할 분들이 폭설오 인해 참석하지 못해서 정말 아쉬웠다.
정민 씨가 지휘를 맡았다. 첫 곡은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서곡이었다. 1부는 베르디의 특집 같았다. 2부의 연주곡은 차이콥스키 고향곡 5번이었다. 안단테로 시작한 1악장부터 장엄하고 화려한 4악장 피날레까지 거침없이 연주했다. 관객들이 기립했다. 터져나오는 함성, '브라보! 브라보!'로 장내는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수녀님들의 눈시울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 출처:Joins.com
1960년대 부산의 거리는 넝마를 줍거나 구걸을 하거나 병들어 떠도는 고아들 천지였다. 이런 아이들을 위해 소년의 집을 짓고 학교를 세워 제대로 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기술을 가르쳤다. 축구부, 육상부, 스키부 등을 만든 것도 모두 자립심 강한 동량으로 만들기 위한 의도였다. 창단 때부터 지금까지 우리 합주부를 지도하시는 안유경 선생님은 불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하셨다. 재단에서 운영하는 여러 시설의 피고용인들을 채용할 때 '아이들 중심'이라는 원칙에 충실했기에 종교를 따지지 않았다. 의료진의 선발도 개원 당시 다른 곳보다 더 많은 급여를 지급하면서 실력있는 의사와 직원을 채용했다.
올해 초, 대우증권에서 보내온 초청장
고故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과의 만남은 평범한 20대 직장녀를 수도자의 길로 걷게 만든 계기였다. 아이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기 위해 부모님의 반대를 뿌리치고 '엄마 수녀'의 길을 선택한 박 볼케리아 수녀는 부산 소년의 집 오케스트라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요즈음 조그마한 텃밭에 감자, 고구마, 무우, 배추, 생강, 벼 등 다양한 작물을 키우다보니 수녀님들 사이에는 농사 전문가 대접을 받는다. 오늘도 텃밭을 가꾸며 아이들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마음엔 이들이 인생 최고의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