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었다.  얼마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이고, 한 2년 전에 신간평가단 활동을 할 무렵 읽고 싶은 추천 신간으로 올린 적이 있던 책이고(아쉽게도 선정되지는 않았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현 작가의 책이다.  이 작가가 얼마나 솔직하고 섬세하게 아이들의 세계를, 그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지를 알기 때문에 다소 도발적으로 보이는 제목이 오히려 기대감을 부추겼던 것으로 기억된다. 

 

 

몇 주 전에 구립도서관 3층 서가의 책꽂이 사이를 산책하듯, 책등에 적힌 제목들을 눈으로 더듬으며 걷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아, 그래, 이 책이 있었지..  다시 만난 반가움에 덥썩 꺼냈다. 책표지 가운데가 껶였었는지 하얗게 금이 간 걸로 봐서 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던 걸까? 아니면 험하게 책을 다루는 누군가에게 걸렸던 걸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처음 든 생각은 이 책이 왜 뜨지 않았을까, 였다.적어도 김려령의 『완득이』만큼은 떠야 마땅한 책인데 말이다. 구립도서관 홈페이지에 가서 검색해보니 이 책의 대출횟수는 고작 13번. 완득이를 검색해보니 도서관에 점자책으로 두 권, 그냥 글책으로 두 권이 있었는데, 두 권의 글책의 대출횟수가 각각 133회, 222회다. 아마도 마케팅의 차이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깝다!'라는 기분이 밀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세속적인 발언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누군가 나서서 이 책을 가지고 청춘 드라마나 영화로 제작하겠다고 나선다고 한다면 나는 "음, 그 책은 그럴만 하지."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만큼 캐릭터들도 강하고, 이야기도 탄탄하고, 우리가 사는 이 사회의 구석구석을 잘도 그려냈으며 그리고 무척 재미있다.

 

책을 읽고 리뷰를 쓸 때, 글쓰는 재주가 없는 나는 처절한 무력감을 느낄 때가 있다.  주로 너무 좋은 책을 읽었을 때 더 그렇다. 작품 자체가 그냥 막 좋은데 그걸 일일이 말로 혹은 글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아무런 의미 없는 짓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도 뭐라도 써보려고 했다가 결국 아무 것도 못 쓰고 넘어간 책들이 있다. 근데, 이 책이 그랬다. 리뷰를 쓰려고 했다가 포기하고 페이퍼로 돌렸다.  (2년 전에 서평도서로 선정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인가!)

 

페이퍼로 돌리고도 한참을 헤맸고 지금도 헤매고 있다.  책은 두 번 읽었고, 밑줄긋기는 알라딘 밑줄긋기로 감당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 따로 한글파일에 12쪽에 걸쳐 컴 자판을 두들겨 댔다. 그러고도 아예 한 권을 통째로 필사 해버릴까, 생각했다. 마음에 와 닿는 몇 줄의 문장이 아니라 마음에 와닿는 복잡하고 디테일한 상황과 사건들이 대부분이라 '밑줄 긋기'의 형식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책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얘기하든 그건, 이 책의 아주 작은 부분이 될 것이다.

 

'전두환'으로 시작되는 열일곱 나금영의 남자들 이야기는 '강동원'으로 끝을 맺지만 사실 제목 '오, 나의 남자들!'과는 달리 꼭 '남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전두환'과 '강동원' 사이에는 160의 단신에 고운 미성을 가진 좋은 친구 '최강태진'과 동성애자 한상진 선생님, 고리타분 갑갑한 전교 1등의 선우완 오빠, 육사입학의 과업을 짊어진 금영의 오빠 나금호, 찌질하고도 찌질하고 다시 찌질한 오정우, 아버지 나성웅, 그리고 위험한 변 모씨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가장 부러웠던 건 금영, 마루, 현지, 최강태진 4사람이 보여주는 '친구 사이'다. '친구란 어때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이 네 사람은 정말 환상적인 최고의 친구들이다. 금영이네 집이 운영하는 '한마음 노래방'에서 자주 의기투합하는 이 네 명의 아이들은 나름 확고한 노래방 예술철학을 가졌고 10대의 모든 혼란과 방황과 의문과 갈등을 노래방에 쏟아버리곤 한다. 십대 그 빛나는 시기에 이런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면 '산다는 것은 어쩌면, 뒤미처 무언가를 깨닫고 그로 인해 조금씩 외로워지는 것'(275쪽)이라고 해도 평생이 든든할 것이다.

 

노래방에 대한 우리의 세계관은 완벽하게 일치했으며 더할 수 없이 확고했다.  실력 있는 반주자와 신이 내린 목소리가 어우러진 전문가의 음악이 실용이라면, 노래방의 음악이야말로 예술 그 자체다. 잡음 섞인 반주에 불안한 음정으로 질러 대는 그 노래야 말로 100퍼센트 순수한 예술인 것이다. 남에게 들려주기 위한 실용적 음악이 아니라 오직 내 안의 나를 위한 진정한 예술이라고나 할까. (14쪽)

 

이 문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음, 이 책이 별 다섯개 그 이상의 청소년 책으로 오래도록 기억되겠구나, 라는 걸 알았다. 노래방은 금영이 선우완과 헤어지기로 결심하게 만드는 결정적 장소이기도 하고, 금영이 저녁 8시 이후의 세계에 눈을 뜨고 혹독한 통과의례를 치루게 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금영이 '"서경 생과고의 명예를 드높이'려는 교장의 원대한 포부에 따라, 말하자면 스카우트된 학생'이며 강동원과 근접한 외모를 가진 선우완과 헤어지기로 결심한 이유는 이렇다.

 

노래방까지 함께 왔으니 할 만큼 했다. 내가 곡 번호를 외우지 못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노래방에서 팝송을 부르는 사람이라면, 헤어질 명분으로 충분하다. (146쪽)

 

 그리고 그걸 아무 말 없이 지지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마을버스를 타자마자 현지, 마루, 태진이에게 문자를 날렸다. 현지와 마루는 앞다투어 전화를 걸어와서 왜냐고 물었다.

 "노래방에서 팝송을 부르더라니까."

 그 말 한마디에 현지와 마루는 나의 결단을 지지해 주었다. 아, 난 정말이지 친구 복이 있다. 예술적 동반자들과는 영혼이 통한다. (148쪽)

 

그러나 씩씩하고 발랄해 보이는 이 아이들, 현지, 마루, 태진이에게도 자기만의 상처들이 있다. 금영이가 '한마음 노래방'의 8시 이후의 세계를 알고 부모님에 대한 배신감과 실망으로 아파하며 방황할 때 마루는 택시를 타고 달려와 금영을 다독이며

 

"좋아. 우정의 총량은 비밀의 총량과 같다! 감추고 싶은 치부라면 효과는 두 배! 이 언니도 한 건 털어놓으마.. (227쪽)

 

라며 자기의 상처와 치부를 다 내놓는다. 마루의 충고는 금영이가 자신이 받은 상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모든 걸 용서하는 건 아니지만, 용서할 수 없다고 해서 모든 걸 부정하고 싶진 않다.'(290쪽)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에는 변 모씨의 활약(?)이 있기도 했지만. 현지도 어두웠던 자신의 치명적 과거를 털어놓으며 괴로워한다. 그 모든 걸 아이들은 다 나누고 이해하고 '그래도 친구'라며 흔들리지 않는다.

 

뭐, 어떻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건 현지를 이루고 있는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고, 그것이 설사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 해도 나는 내 친구 백현지를 좋아하니까. (201쪽)

 

이 책은 이 네 명의 단단한 우정을 토대로 학교와 가정과 사회의 다양한 모습들을 그려나간다. 아버지 나성웅과 아들 나금호가 보여주는 세대갈등, 기성세대의 이중성과 위선, 한상진 선생님을 중심으로 아이들과 학교 선생님들이 보여주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 찌질하고 치졸하고 비겁한 인간 군상, 위험한 사회, 무심한 공권력, 외모지상주의, 학력차별,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이겨내는, 아니 견뎌내고 이루는 성장.

 

내가 여기에 뭐라고 쓰던 이 책의 아주 작은 부분이 될 거라는 짐작이 맞았다. 이 책을 제대로 그릴 수 없어서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냥 좁은 여백으로 12쪽, 밑줄긋기 파일을 열고 그걸 읽으며 만족하는 게 나의 최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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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4-01-16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궁금해요. 저도 도서관가서 찾아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