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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정말 멋져 ㅣ 고 녀석 맛있겠다 시리즈 3
미야니시 타츠야 글.그림, 허경실 옮김 / 달리 / 2011년 6월
평점 :
미야니시 타츠야는 일곱 살 딸 아이의 완소작가다. 첫돌무렵 <누구 똥?>을 시작으로 줄줄이 미야니시 타츠야의 그림책을 섭렵(?)했는데, 특히 <고 녀석 맛있겠다>는 딸아이의 친구들에게까지 사랑을 받았고 남자 아이에게는 실패확률이 적은 선물 아이템으로 자주 이용되곤 했다.
미야니시 타츠야 그림책을 읽다보면 굵은 윤곽선의 단순한 그림, 강렬한 색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 많은 그림책 속에서라도 '저건 미야니시 타츠야의 그림책인 것 같은데?'하고 집어낼 수 있을 정도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약육강식, 먹이사슬의 잔인한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천적관계라고 할 수 있는 두 동물간에 흐르는 끈끈한 정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자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 주제의 대표작이 <고 녀석 맛있겠다>였고, <승냥이 구의 부끄러운 비밀>이나 <메리 크리스마스, 늑대아저씨!>도 그런 부류의 작품인데 '고 녀석 맛있겠다 시리즈'로 새로 출간된 세 권의 책도 역시나 같은 주제다.
(그러니까 내가 결국 시리즈의 책들을 모두 구입해서 소장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시리즈 네 권의 책에서 주인공은 모두 티라노사우르스다. 공룡계의 사나운 포식자라는 운명을 타고난 티라노사우르스는 나타났다하면 모두 달아나버리는 막강폭군이며 인간이 등장하기 전 공룡시대에서는 모르긴 몰라도 먹이사슬의 가장 윗부분을 차지했던 생물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책들은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자 티라노사우르스가 자기 삶에 완벽하게 만족하고 행복했을까? 하는 질문을 담고 있다.
포식자의 본성과 운명은 잡아먹힐 위험에 쫓기고 안절부절해야 하는 약자들 입장에서 보면 축복이다. 약자가 그런 포식자들의 운명을 동정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우주만큼 광대한 오지랖을 타고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티라노사우르스는 포식자의 운명의 이면인 외로움과 마주한다. 그리고 티라노사우르스의 그 외로운 이면을 어루만져주는 인물은 수장룡 엘라스모사우르스다. 엘라스모사우르스는 바다에 빠진 티라노사우르스를 구해주고 상처를 치료해주며 조개를 구해와 배고픔을 달래준다. 엘라스모사우르스의 친절에 마음이 따뜻해져오는 걸 느낀 티라노사우르스는 엘라스모사우르스에게 자신이 티라노라는 걸 숨기고 친구가 된다.
절친한 친구가 된 엘라스모사우르스와 티라노사우르스는 매일 바닷가에서 만나 우정을 다져간다. 엘라스모사우르스의 꼬리를 잡고 얕은 바다를 산책하거나 혹은 엘라스모사우르스를 업고 육지구경을 다니기도 하면서 말이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별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에서 목소리를 맞춰 노래를 부르는 듯한 그림은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따뜻해지게 만든다.
하지만 티라노사우르스라면 몰라도 엘라스모사우르스는 바닷속 난폭한 공룡에게 언제라도 공격당할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공룡이다. 엘라스모사우르스에게 줄 빨간 열매를 가득 따서 바닷가로 찾아간 날, 결국 티라노사우르스는 눈 앞에서 가라앉고 있는 엘라스모사우르스를 보게 된다. 티라노사우르스가 구하러 바닷속으로 뛰어들었지만 엘라스모사우르스는 이미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엘라스모사우르스를 품에 안고 나오는 티라노사우르스의 눈에서 분노와 슬픔이 담긴 눈물이 쏟아지고, 엘라스모사우르스의 마지막을 지키며 티라노사우르스는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려고 한다.
하지만 엘라스모사우르스는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한다.
"넌, 친절하고 상냥한 내 단 하나뿐인 친구야. 넌 정말 멋져."
이러니 어른들까지 감동할 수밖에. 70년대 신파극을 보거나 서툰 초짜 작가가 쓴 촌스러운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그림책으로 맛보는 비극의 카타르시스는 꽤 신선하다. 그림책이라는 매체, 공룡이라는 유아적 캐릭터가 아니었다면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그림책이라서 어른들도 마음을 놓고(또는 열고) 복고적 신파의 비극적 카타르시스 속으로 풍덩 빠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암튼 난 이 시리즈 책 네 권을 나란히 꽂아놓고 뿌듯해한다.
불편한 점이 없는 건 아니다. 앞부분에서 언급했듯이 티라노사우르스는 폭군이며 최고권력의 상징이다. 그런 티라노사우르스의 착하고 따뜻한 이면은 그렇다치고 선한 의지를 가진 누군가에 의해서 폭군적 성향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현실에서 폭군적 성향은 강화되기는 쉬워도 그렇게 쉽게 변화되는 게 아니며, 그래서 이 그림책이 낭만이며 꿈에 가깝다는 사실이 슬프고 불편하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꿈 없이 살아가라고 할 수는 없는 일. 쉽지는 않아도 현실세계의 티라노사우르스들을 변화시키는 일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노력해왔으므로 한편으로는 조금 불편함이 있더라도 이 그림책의 낭만을 아이에게 읽어주는 게 더 좋겠다 싶다. 이 세상 티라노사우르스들이 빨간 열매를 주식으로 삼는 그 날을 꿈꾸며 말이다. (그게 가능하겠냐구! 29만원이 전재산인 그 티라노사우르스를 생각하면 고개가 저절로 절레절레.... 난 이 그림책을 좀 더 자주 많이 읽어야 할까 보다...)
사족//
이 그림책에 등장하는 엘라스모사우르스는 그렇게 순한 공룡은 아니었던 듯..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판 도마뱀’이라는 뜻으로 백악기의 대표적인 수장룡이다. 수장룡 중에서 몸과 목이 가장 길다. 목의 길이는 몸 길이의 반이 넘는 8m이고, 목뼈는 자그마치 75개나 되어 목만 봤을 때는 마치 뱀 같다. 목은 매우 유연해 어떤 방향이든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 긴 목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으려고 수면 가까이 날아다니는 익룡을 잡아먹었을 것이다. 머리는 몸에 비해 매우 작고, 입에는 날카로운 이빨이 줄지어 나 있다. 이 이빨로 물고기, 오징어, 암모나이트, 그 밖에 작은 어룡들을 잡아먹었다.' 라고 나온다.
아이한테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해둬야 할 듯. 이 그림책 덕분에 엘라스모사우르스를 무지 착한 공룡으로 알고 있으니 말이다. 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