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수 만세! ㅣ 힘찬문고 47
이현 지음, 오승민 그림 / 우리교육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깜짝 놀랐다. 이야기에서 화자역할을 담당하는 박혜수라는 5학년 짜리 여자아이가 자기 가족을 소개하는 도입부를 지나자마자 곧장 필리핀 영어연수를 두고 엄마와 티격태격하는 부분이 나오더니 곧장 아파트 17층 자기 집 베란다에서 떨어져 죽고 마는 것이다. 너무 충격적인 시작이라 가슴이 덜컹했다. 시작부터 이렇게 강하게 터뜨려놓고 이야기를 어떻게 수습할지 작가의 계획이 궁금해서 서둘러 읽기 시작했다.
혜수에겐 '장수'라는 고1짜리 오빠가 있다. 한 번도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에다가 모범생이다. 부모들에겐 이상적인 아들일지 몰라도 좀 갑갑한 캐릭터가 상상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제목이 '장수 만세!'니까 이 책은 일찍부터 추락사한 비운의 소녀 혜수의 이야기라기보다 오빠 '장수'에 대한 글이라는 건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혜수는 염라국 입국 심사과의 지밀 과장 앞으로 끌려간다. 그 곳에서 혜수는 자기가 아니라 오빠 장수가 자살로 생을 마감할 날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게다가 자살이 아니었다면 100살 가까이 오래도록 장수할 수명을 타고났는데 말이다. 혜수가 보기엔 아무 문제 없이,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생을 누리고 있는 오빠가 자살한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마침 한국전쟁때 죽어 떠돌던 '연화'라는 아이의 혼령의 도움을 받아 일주일의 시간을 얻게 된다. 일주일 안에 오빠가 자살하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데 혜수는 생령으로 떠돌고 연화의 혼령이 혜수의 몸에 들어가 생활하게 된다.
눈치챘겠지만 장수는 모든 부모들이 부러워할만한 모범생이지만 늘 쫓기듯 불안감에 젖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장수가 자기 속을 토해놓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가슴이 먹먹해오고 콧등이 시큰해졌다.
"아빠, 아빠 아들 박장수, 나도 잘난 놈이잖아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잖아. 잘나고 잘난 놈이었잖아요. 언제나, 계속, 잘난 놈이 되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잖아요. 하지만 끝나지 않잖아요. 대학에 간다고 끝날까요? 취직을 한다고 끝날까요? 돈을 많이 번다고 끝날까요? 난 싫어요. 너무 무서워요. 친구들이 친구로 보이지 않아요. 나는 뒤쫓는 괴물 같아요. 이런 기분, 더 이상은 못 견디겠어요."
언젠가 큰아이가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이 교육열이 뜨거운 다른 학교에 있을 때의 일이라고 했다. 의대를 목표로 하는 공부를 잘 하는 (사실 이 표현은 바른 표현이 아니다. 난 요즘 우리 아이들이 하는 게 공부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공부를 잘 하는'이 아니라 '성적을 잘 받는'이 더 맞는 표현인지도 모른다.) 아이가 있었는데 윤리였다나, 한자였다나.... 이른바 주요과목이 아닌 한 과목에서 시험을 망쳤단다. 애가 너무 충격을 받고 침울해있어서 선생님들이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건 너 의대가는데 반영되지 않는 과목이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오히려 위로했단다. 그런데 며칠 후 그 한 과목 성적을 비관해서 아이가 자살을 했다고. 그 선생님은 그 학교에서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을 많이 만났지만 자살을 하거나 정신질환에 걸리는 아이들도 많이 봤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아이는 일류대 많이 보내는 좋은 학교 말고 평범한 학교를 보내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자꾸 생각났다.
가끔 밤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학원차량들을 보곤 한다. 차 안에서도 공부를 하라는 건지 차 안에 환하게 불을 켜놓았는데, 어느 날 밤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서있다가 학원 버스에 타고 있는 한 아이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한 단정한 머리를 한 여자 아이였는데 창 밖을 내다 보고 있는 무심한 눈빛은 너무 지치고 고단해 보였다. 저래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지켜보고 있는 내가 더 걱정이 됐다.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은 듯한 눈빛에 지친 표정, 창백한 얼굴이 마치 유령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OECD국가중 청소년 자살률이 1위인 나라에서 살면서, 수재들이 모이는 카이스트의 학생들과 교수가 자살하는 걸 '그럴 수도 있다'는 듯 이야기하는 나라에서 살면서, 아이들의 행복을 지켜주고 싶다는 엄마들의 희망은 참 덧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들과 가장 가까이 있는 엄마라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못 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해줄 수 있는 것 아닐까. 또 학교 공부가 꼭 공부의 전부는 아니니까, 세상엔 아이들이 도전할 수 있는 다른 공부들이 얼마든지 많으니까 말이다. 엄마들이 변하면 어쩌면 세상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꿔본다.
장수의 친구 정태는 장수가 자살하려한다는 낌새를 알아채고 말한다.
"내가 그 사건을 겪으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어."
정태 오빠가 말했다. 오빠는 자꾸 발로 현관 계단을 픽픽 걷어 찼다.
"아무도 날 지켜 주지 않는다는 거야. 엄마도, 아빠도, 세상도. 엄마 아빠도 그저 불쌍한 사람들이지. 다들 속으로는 힘들고 나약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닌 척..... 그러니까 박장수."
정태 오빠가 우리 오빠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그래도 오빠가 고개를 들지 않자 얼굴을 잡고 들어 올려 눈을 맞추었다.
"박장수, 너 스스로 지켜. 무언가가 널 잡아먹지 못하도록 너 스스로 지켜. 알아들었어?"
그래, 어쩌면 아이들이 부모를 믿고 의지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기성세대의 한 사람이지만 어른의 세계엔 너무 많은 모순이 존재하고 무엇보다 변화를 일으킬만큼의 힘도 용기도 부족하다. 하지만 이것 또한 비겁한 변명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나는 순간이나마 죽고 싶다며 17층 아래를 내려다보았고, 오빠는 자살을 꿈꾸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성적표를 숨겨 놓고 영어 단어 시험에 백지를 내고 있다. 아빠는 가끔 차를 몰고 한강에 뛰어들고 싶다고 했고, 엄마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면 우리는 대체 왜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몹시 울고 싶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이 생각났다. 아무런 꿈도 없이 오로지 남들보다 높이 오르기 위해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고 짓밟혀가며 꿈틀거리는 애벌레들의 이야기 말이다. 맨 위에 오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 어리석은 애벌레들과 우리가 다른 점이 뭐란 말인가.
혜수는 자기 몸을 되찾게 된 후 그 지겹고 싫은 영어를 놓고 인도어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인도어를 배우면서 하는 생각들이 신선하다.
물론 인도어는 대학을 가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인도 인구는 무려 10억 명이 넘는다고 한다. 미국과 영국의 인구를 합친 다음 2를 곱하고도 남는 숫자다.
나마스떼.
피르밀렝게.
단야밧.
메라 남 혜수 헤.
압 쎄 바후뜨 밀까르 쿠씨 후이.
이런 것들이 내가 이미 익힌 말들이다. 뭔가 신비스러운 느낌을 주는 발음에다..... 글자의 모습도 멋스럽다. 인도 문자는 한 마디로..... 섹시하다.
그래, 얼마 전 티벳문자로 쓰인 책을 봤는데, 티벳글자들에선 바람이 불더라. 그러니까 난 인도 문자가 섹시하다는 거 믿는다. 인도어가 대학을 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대학가는데 필요한 공부들이 살아가는 데 꼭 도움이 된다고 볼 수도 없다. 어쩌면 아이들은 자기 삶에 꼭 필요하지도 않는 것들을 공부하느라 불필요하게 진을 빼고 있는 건지도. 그러니까 적어도 자기가 알고 싶은 걸 스스로 알아가려는 혜수가 더 현명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난 이 책을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읽었으면 좋겠다. 오늘 아침 막내와 어린이집 버스를 기다리며 서있는데, 할머니 한 분이 "큰애가 고3이라 고생이 많겠네.."하신다. "고생은요, 뭐..."했더니 "대학 보내야 되니까 고생이지.."하신다. "대학이야 가면 가는 거고, 못가면 못가는 거고, 그런거죠, 뭐... 꼭 갈 필요있나요?"했더니 '얘 뭐야?'하는 눈빛으로 놀라서 쳐다보신다. 막상 닥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대학을 가지 않고도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많을 거라고 믿고 있다. 세상은 저마다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거니까 모두의 길이 똑같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내가 너무 낙관적이고 낭만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아무튼 아이들이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장수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그걸 빌어주고 싶게 만드는 책이다. 그래, 장수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