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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 불어요! ㅣ 창비아동문고 224
이현 지음, 윤정주 그림 / 창비 / 2006년 5월
평점 :
이현 작가의 책을 뽑아 읽기 시작한다. <마음대로봇>이후 이 작가의 글들을 찬찬히 살펴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마음대로봇>을 읽으며 글 안에 주제의식이랄까, 아무튼 말하고자 하는 것을 잘 심어놓는 작가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 책은 오래전에 사놓기만 하고 읽지 않은 책인데(애들은 읽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다.) 다섯 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가의 첫 작품집이다.
현경과 상우 - '우리들의 움직이는 성'
잠깐 내 오래된 기억 속으로 발을 옮겼다. 내가 열 일곱이었던 봄날 저녁 그 애는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고등학생 모임이 끝나고 근처에서 저녁을 먹은 후 성당길을 올라가던 길이었다. 그 애가 잔뜩 긴장하고 용기를 쥐어짜내서 아주 조심스럽게 한 행동이었다는 건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애와 나 사이에는 우정으로 포장된 분홍빛 감정이 흐르고 있었는데 우리에겐 순수에 대한 강박이랄까, 그런 게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 애의 손은 내 어깨 위에서도 여전히 긴장을 풀지 않고 가늘게 떨고 있었지만 난 덜컥 겁이 났다. 난 손을 내려달라고 했고, 그 애는 무척 부끄러워했다. 열 일곱의 나에게 사랑은 낯설고 당황스러운 판타지였지만, 난 그 판타지가 깨어지지 않고 그대로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오직 순수의 판타지 세계 속에서.
그 후로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난 현경과 상우에게서 그 오래 전 나와 그 애를 본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공중산책 장면을 꿈꾸는 현경에게서, '종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이렌만 울렸다'는 그 느낌에서, '내가 모르는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알던 가면을 벗어던진 것 같기도' 한 상우의 얼굴에서. 어른들처럼 사랑을 나누기엔 우리가 너무 어리다는 자각, 낯선 두려움 그래서 서툴고 어리숙했지만 찬란하게 반짝이던 맨처음 사랑이 현경과 상우를 통해서 떠오른다.
'가슴에서 따뜻한 기운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상우의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그게 어른들이 말하는 우정인지, 애들이 말하는 사랑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우정이 뭔지 사랑이 뭔지 나도 잘 모른다. 그래도 내 마음을 상우에게 전하고 싶었다. 상우를 향해 피어오르는 마음이니까, 그게 무엇이든 상우에게 전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았다. ...........저무는 오후의 바람에 우수수수 소리를 내며 나무들이 한꺼번에 머리채를 흔들었다. 초록이 사방으로 눈부시게 흩날렸다. 상우와 나에게서 피어오르는 마음을 머금은 따뜻한 초록이었다.'
그렇구나, 그 시절의 사랑은 분홍이 아니라 초록이었구나. 어쩌면 분홍의 사랑은 여러 개일 수도 있지만 초록의 사랑은 단 한 번뿐이겠구나.
김희주 - '3일간'
이 리뷰를 쓰고 있을 때 TV에서 교사의 학생 폭행에 대한 뉴스가 나왔다. 놀이동산으로 소풍을 갔던 모양인데 집합시간에 늦은 아이를 교사가 '예닐곱 대 때렸을 뿐'이란다. 짤막한 뉴스만 보고 앞뒤 정황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게 교사가 꼭 매를 들어야할 상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친구들과 소풍온 놀이공원에서 '늦었다'는 이유 하나로 맞은 예닐곱 대의 매는 아이의 기억에서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 그게 마음이 아프다. 맞은 아이는 어떤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일까, 문득 걱정스러웠다. 부모의 사회적 지위가 높고 부유한 가정의 아이일까? 그렇다면 그래도 다행이다. 적어도 선생님이 학생의 가정형편에 따라 차별한다는 억울함과 분노는 느끼지 않을 테니까. 부유하지는 않더라도 부모가 아이에게 관심과 애정을 쏟고 있는 가정의 아이라도 그나마 괜찮겠다. 적어도 아이는 가정에서 또다른 힘을 얻거나 위로를 받을 수도 있을 테니까. 가장 좋지 않은 경우는 이 '3일간'이라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김희주 같은 상황의 아이일 때다.
'엄마는 재혼해서 연락도 잘 안 되고, 아빠는 예전에 막노동을 하다가 다쳐서 다리를 저는 모양입니다. 그 뒤로 사람이 엉망이 되어서 노숙자처럼 산다는군요. 가끔 술 취해서 얼굴이나 삐죽 내밀었다 또 사라지고....." 선생님은 이런 환경의 희주를 '얼굴에 그늘이 그득'하고 '눈빛은 삐딱하고, 도대체 어린애다운 얼굴이 아닌' 아이로 볼 뿐이다. 부모의 불화로 슬퍼하는 윤서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일년내내 윤서의 자리를 대신 맡아주었던 희주는 사라지고 문제아 희주만 있을 뿐이다. 윤서가 가출했을 때 모든 혐의는 매일 불화의 장면을 연출했던 윤서의 부모 대신 희주가 모두 뒤집어쓰고 담임에게 불려가 다리에 멍이 들도록 매를 맞는다.
사람이란 힘들고 복잡한 일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보다는 피하기가 더 쉽고, 내 탓이란 걸 인정하는 일에는 더디고, 자기합리화에 능란하다. 게다가 상대가 힘없고 약한 존재라면 잔인함까지도 쉽게 드러내보인다. 희주의 담임과 가출한 윤서의 부모는 모든 잘못을 희주에게 돌리고 자신의 무죄에 안심한다. 세상으로부터 외로운 희주, 친구인 윤서는 너무나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고, 영선은 사건에 휘말리는 고통을 너무 잘 알아서 쉽게 손을 내밀지 못한다.
"걔는, 자기 부모가 이혼하는 게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인 줄 아는 모양이더라. 흥! 징징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더는 못 참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애 집 부자잖아. 엄마 아빠 직업도 빵빵하고, 이혼했다고 설마 밥 굶겠니? 아니면 걔 엄마 아빠가 이혼햇다고 자식을 버리겠니? 뭐, 가출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 공주님께서는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정말이지 몰라도 너무 모르시더군. 고생 좀 하면 알게 될 거다 싶었지. 세상이 어떤 건지, 진짜 괴로운 게 어떤 건지..... 하긴 내 주제에 공주님의 슬픔을 어떻게 이해하겠어? 남의 집 더부살이만 하지 않게 해 준다면, 단돈 몇천 원 때문에 학교에서 눈칫밥 먹을 일만 없게 해 준다면, 그까짓 이혼? 난 상관없어!"
"그럼, 괜찮지. 난 박윤서가 아니잖아. 가출은 윤서가 하고, 매는 내가 맞는 거야. 애들도 다 나에 대해 수군거리지? 선생님은 물론이고 말이야. 난 날라리로 찍힌 채 중학교에 가게 되겠지. 애들 사이에서 별별 소문이 다 돌겠지, 그렇지? 이게 내가 맡은 역할이야. 인생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언제나 악역을 맡는 못생긴 배우인 셈이지. 난 잘 알아. 그리고 익숙해."
희주의 이런 말들이 아프다. 영선이는 "삼 일간,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이 모든 일을 지켜본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삼 년 동안 진실이라고 믿어 왔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버렸다."고 말한다. 그래, 우리는 진실을 지키는 것보다 허물어 버리는 걸 더 편안해 한다. 우리는 진실 앞에서 윤서처럼 아무 것도 모른 척 철없이 편하게 살아가거나 아니면 영선처럼 알고도 나서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 쉬우니까. 그럴 때마다 깊은 상처로 몸을 떠는 희주같은 아이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내게는 희주가 이 책에서 가장 아픈 아이였다.
박기삼 - '짜장면 불어요!'
무한긍정의 발랄하고 건강한 철가방 철학자 박기삼. 작가소개글에 '선생님은 세상 사람들 모두 제멋대로, 내키는 대로 살아가는 재미있는 세상을 꿈'꾼다고 나왔있는데 그렇다면 이현 작가의 이상형(?)은 박기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운칠기삼'의 세상이치로 따진다면 70%의 운은 물건너가고 기 30%만으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그야말로 불운의 19살 청소년이건만 청승을 떨고 비관을 해도 시원치않을 마당에 '왕자병'에 걸린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고는
"왕자병? 몰라. 뭐, 왕자도 괜찮겠지. 난 철가방 드는 나도 좋고, 왕자인 나도 좋고.... 또 뭐 다른 거 하게 되면 그런 나도 좋아할 거야. 난 내가, 너어어---무 좋아."
라고 말하는 아이. 박기삼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통해 세상의 잘못된 시선을 보게 된다. 박기삼이 짜장면 배달 하나에도 튼튼하고 확실한 자기 철학을 갖는 열혈 청소년이기 때문이다. 박기삼의 철학에 따르면 짜장면과 철가방은 평등과 평화 그 자체다. 돈이 필요해서 철가방을 들기로 한 신입 용태는 처음에는 그런 박기삼의 이야기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이자 개풀 뜯어먹는 소리처럼 들리지만 점점 박기삼의 철학에 빠져들게 된다.
심술궂은 마법사의 못된 주문에 걸린 것처럼 모두들 공부,공부,공부에 매달려 있는 창백한 아이들에게 이런 박기삼의 철학은 어떨까.
"공부를 못하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무수히 많아. 철가방을 들 수도 있고, 춤추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집 짓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장사를 할 수도 있고, 요리사가 될 수도 있고, 백수가 될 수도 있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하지만 공부를 잘하면 딱 세 가지밖에 안 되잖아. 거기다 이 세 가지 직업을 가지게 되면 평생 공부를 해야 한다고. 너 공부하는 거 좋아하냐?"
"........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설마 너한테 딱 맞는 일이 없겠냐? 근데 뭘 하기 싫은 공부만 할 거라고 그렇게 바락바락 우기냐?"
어쩌면 우리가 공부에만 목을 매는 것은 우리에게 '철학'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철학, 나에 대한 자부심, 그런 것들은 다 어디다 팔아먹고 맹목적으로 앞을 향해서만 달리라고, 그 앞에 뭐가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을 하고 있는 걸까. 지금의 '나'를 긍정하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미래의 '나'를 만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박기삼은 나에게 왜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그렇게 없냐고 따져묻는 것 같았다. 전업주부, 세 아이의 엄마,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자부심을 갖고 살만한데 왜 자꾸 자기연민의 수렁 속에 빠지는 거냐고. 박기삼의 꿈 '개성 있는 인간 되기'를 내 아이들과 모두의 것으로 만들어주고 싶은 욕심도 꾸역꾸역 솟아난다. 불우한 환경, 점점 더 어두운 쪽으로 약자를 몰아가는 사회구조, 무한경쟁으로 내몰리는 현실, 그런 것 따위에 허물어지지 않고 무한긍정의 에너지로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지켜가는 박기삼 같은 캐릭터를 책 속에서만이라도 좀 더 많이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장동민 - '봄날에도 흰곰은 춥다'
이쯤까지 읽고나니 작가가 날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의 움직이는 성'에서 '봄날에도 흰곰은 춥다'까지 발랄과 우울의 기복이 롤로코스터 수준이다. 제목 속에 들어 있는 저 '춥다'라는 말은 정말 동민이에게 딱 어울렸다. 거기에 더 보태자면 '시리다'라는 말도 썩 어울릴 것이다. 가혹한 현실에 짓눌려 불안한 동심은 무겁고 처절하다.
태수는 그게 다 돈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장래 희망이 부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 써냈다가 선생님한테 되게 혼이 났다. 선생님은 그런 건 장래 희망이 아니라고 했다. 돈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거라고 했다.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단지 불편한 것일 뿐이라고도 했다. 그 얘기를 듣는데 어이가 없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문장들을 읽으며 선생님은 낭만의 세계에, 동민이와 태수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 산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생님은 살면서 돈 때문에 고아원에 맡겨져야 했던 과거가 없을 테니까. 돈 때문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야 했던 기억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노력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라거나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런 몽실몽실한 낭만적인 꿈이야기는 동민이나 태수 같은 아이에겐 절대 통하지 않을 이야기다. 태수를 통해서 아빠를 통해서 동민이가 알아가는 세상은 차갑고 막막하게 높다란 담벼락 같은 것이 아닐까.
집에 도착해서도 자꾸만 태수가 한 말이 떠올랐다. 아빠를 보면서 가끔 태수랑 비슷하다고 생각한 건 역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월급을 못 받아 본 사람들은 어딘가 좀 비슷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결국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내 모습이 아빠나 태수랑 비슷해질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역시 동민이보다 더 불쌍하게 다가오는 사람은 동민이의 아빠다. 아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 몸에 허연 파스를 잔뜩 붙인채 아구구구구구 앓는 소리를 내고 쉬는 날도 없이 일을 나가면서도 지하방에서 라면을 끓여먹어야 하는 모습 뿐이라면, 그러면서도 아들 앞에서는 힘센 척 강한 척해야 한다면 그 쓰리고 서러운 마음을 소주 말고 어디에서 위로받을까, 싶기도 하다.
음주 운전을 한 날도 그랬던 거다. 한겨울에 빈손으로 집에 들어가야 하는 흰곰은 꽤 많이 추웠던 거다. 추워져서 소주를 마셨던 거다. 두 달 동안 일이 없어 놀면서도 그랬던 거다. 엄마도 식당에 가고, 나도 학교에 가고, 흰곰 혼자 추워져서 소주를 마셨던 거다. 우워, 우워, 울고 싶어 소주를 마셨던 거다.
겨우 5학년 12살짜리 남자 아이가 울며 소주를 마시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이해한다. 그리곤 자기도 우워,우워, 흰곰처럼 울고 싶단다. 이 봄이 춥단다. 이불을 뒤집어 쓰고 소리죽여 우는 동민이가 눈앞에 그려져서 문득 이 봄날 저 밝은 햇살까지도 시리다.
이민규 - '지구는 잘 있지?'
2045년이라는 해를 다시 만났다. <마음대로봇>의 시대적 배경이 2045년이었는데 같은 배경을 두고 작가는 이렇게 다른 글을 썼구나, 싶다. 미래를 배경으로 할 때 2045년은 작가에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걸까?
지구는 망가질 때로 망가져 선택된 지구인들은 우주선 노아크 호를 타고 탈출한다. 하지만 그 탈출에는 짙은 음모의 냄새가 난다. 몇몇 탈출을 주도한 사람들 외에 우주선 노아크 호에 탑승한 대다수 사람들은 기억 제어 기술에 의해 기억을 통제당한다. 그래서 민규의 경우 항상 오늘이 2045년 11월 25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친구 동석이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혼란에 겪게 되고 결국엔 모든 사실을 알아버리고 만다.
지구 탈출에 합류하지 못하고 남은 가족들과 친구들 걱정에 마음이 무겁고 슬프지만 사람들은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를 쓴다.
샴 아저씨는 사람을 믿어야 한다고 했어. 모든 고통은 사람에게서 나오지만, 고통을 이겨 내는 힘 역시 사람에게서 나오는 거래. 그래도 무섭기만 해.
그러나 우리는 너무 우리를 믿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미 판도라의 상자는 열려버렸는데, 그 안에 남아 있는 희망을 하나 부여잡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모양새는 어쩐지 불편하다. 그래도 희망 하나라도 끈질기게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게 맞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남아있는 그 희망 하나도 너무 소홀히 하는 때가 많으니까. 너무 쉽게 이야기하고, 너무 쉽게 기만하고, 너무 쉽게 바꾸고, 너무 쉽게 믿고, 너무 쉽게 과장해서 떠받들다가 너무 쉽게 버리고 너무 쉽게 이루려하니까.
작가는 우주선 안에서 사람들이 모여 마음을 나누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사람들 하나하나가 저마다 꿈이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걸 부각시킨다. 김소위 아저씨와 율리안네의 사랑이라든가 샴 아저씨에게 요가를 배우는 타이나, 그런 타이나를 좋아하는 민규, 그런 민규는 중국인 과학자 차오 아줌마에게서 천체관측을 배우고, 또 차오아줌마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꿈을 실행에 옮기는 것 같은 모습들 말이다.
그 어느 누구도, 그 어느 하루도, 다 소중한 거야. 그 무엇을 위해서라도 한 사람이라도, 단 하루라도 희생되어서는 안 되는 거지.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과 전 인류를 희생시키는 건 똑같은 고통인지도 몰라.
원전문제며 이상기후며 워낙 어수선하고 뒤숭숭한 시절이라서 그런지 어쩌면 미래엔 이 이야기가 현실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비참한 미래를 막기 위한 경고로 들리기도 한다. 이런 슬픈 희망 이야기를 우리와 우리 후대가 써내려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싶다는 욕심을 채우려다 보니 길고 지루한 리뷰가 되어버렸다. 현경과 상우, 김희주, 박기삼, 장동민과 태수, 이민규, 그 모두를 안아주고 토닥여주고 싶은 마음을 이 리뷰로라도 대신하고 나니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자, 이제 <장수만세!>를 읽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