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모두 제대로 학교며 어린이집에 가기 시작한 달이다. 정신없던 겨울이 정리되는 느낌. 드디어 나만의 시간이 돌아왔구나, 하며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내 아들딸이지만, 엄마도 사람인지라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청소할 땐 청소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 빨래할 땐 빨래하는 데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밥을 먹을 땐 오직 먹는 일에만 충실할 수 있는 시간,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아무도 이 자리를 빼앗으려는 사람이 없다는 안도감에 기뻐할 수 있는 시간.. 사소하지만 소중한 시간이다. 그러니 내가 나만의 시간을 되찾았다고 기뻐하더라도 우리 아이들이 너무 섭섭해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3월이면 공식적으로는 봄인데, 겨울동안 읽겠다고 했던 <안나 카레니나>를 3월까지 끌고 왔다. <안나 카레니나>가 거장이 쓴 작품이라고 가장 잘 느낄 수 있었던 건 인물들의 마음을 미묘한 변화까지도 참 잘도 묘사했다는 점이다.
레빈은 결혼한 지 석 달째가 되었다.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한 걸음마다 예전에 했던 공상에 대한 환멸과 뜻밖의 새로운 매혹을 찾아냈다. 그는 행복했다. 그러나 가정생활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매순간 그는 자기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걸음마다 그는 호수 위를 미끄러져가는 작은 배의 매끄럽고 행복한 진행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사람이 자기가 직접 그 작은 배를 탔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기분을 경험했다. 말하자면 몸을 흔들리지 않게 하고 가만히 타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 어느 쪽을 향해서 갈 것인지를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발밑에는 물이 있고 그 위를 노저어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익숙하지 않은 손에는 그것이 몹시 아프다는 것, 그저 보고만 있을 때에는 손쉬운 것 같았지만 막상 자기가 해보니까 썩 즐겁기는 해도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레빈이 키티와 결혼한 후 자신이 막연하게 상상했던 것과 실제 결혼 생활이 다른 점을 기가막힌 비유를 써서 묘사한 구절이다. 결혼해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어느 정도씩은 다들 공감할 만한 이야기 아닌가? 레빈은 톨스토이 자신이 투사된 인물같았다.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염(?)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호감형이긴 하지만 너무 진지하고 반듯한 성격때문에 그다지 매력적이라고 말하긴 힘든. 그에 비해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격정적이고 파괴적이다. 하지만 두 사랑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생각된다. 사랑은 저마다의 빛깔로 수백수천의 난반사를 일으키니까. 사랑하면서 현명하기란 어렵고, 끝난 사랑은 미치도록 아프고, 지나간 사랑은 늘 저만치서 아름답게 손을 흔들어대니까.
<안나 카레니나>는 레빈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계속 제기한다. 그리고 그 물음에 대해 등장인물 전체가 반응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3권 마지막에 레빈에게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 사람은 레빈의 농장에서 일하는 표도르라는 농부였다.
"그야 사람은 각양각색이니까요. 어떤 사람은 그저 자기의 욕심만으로 살고 있고, 미티우하 같은 놈은 그런 치입니다만, 그저 제 배때기에다 처쟁이는 짓만 하고 있습죠. 그런데 포카느이치는 성실한 늙은이입죠. 그분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살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길래 하느님을 기억하고 있다는 거야? 어떻게 하면 영혼을 위해서 사는 거야?"레빈은 거의 외치듯이 말했다.
"뻔하잖아요. 진리에 의해서, 하느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뿐이에요. 사람은 각양각색이니까요. 이를테면 나리만 하더라도 사람을 모욕하는 짓은 하지 않으시니까 말예요..."
톨스토이에게 종교, 특히 기독교의 향이 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세 권에 걸쳐 진지하게 물어왔던 질문에 대해 작가가 보여주는 해답이 좀 실망스럽기는 했다. 난 교회도 권력이며 종교와 신앙은 별개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내가 성당에서 '냉담자'로 분류된지는 꽤 오래되었는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교인들의 방문, 전화, 초대에 선뜻 응하지 못하는 건, 내가 종교생활은 어떻게 할 수 있을지언정 신앙생활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내 아이들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라'고 이야기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일까.
또한 나는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지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면서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야 내 삶은, 내 온 삶은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할 것이다. 그리고 삶의 모든 순간은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지니게 되리라.
이 마지막 문장들을 씁쓰름하게 읽어야 했다. 지난 겨울에 보았던 영화 '톨스토이의 마지막 인생'이 함께 떠올라서 이 마지막 문장들 사이사이를 배회하게 만들었다. 톨스토이는 '나의 삶에 부여하는 의심할 나위 없는 선의 의미'를 정말 확신하며 눈감았을까. 부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영화와 소설 속에다 대고 작가에게 당신의 삶이 그랬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다고 여기면서도 100년도 전에 죽은 톨스토이의 마지막 숨이 확신 속에서 거두어졌을지 궁금했다.
봄기운이 스멀거리는 3월까지 <안나 카레니나>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 좀 무안했는데, 그러면서도 애써 아직 민들레를 못 봤으니 봄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정말로 민들레는 4월 6일이 되어서야 만났고, 난 봄이 오기 전에 <안나 카레니나>를 다 읽은 거라며 좋아했다. 그동안 <안나 카레니나>를 다 못 읽은 걸 알고 민들레가 내 눈에 띄지 않으려 조심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참 속이 깊은 민들레구나. 그래.. 민들레는 뿌리가 깊지.. ???? (뭐라는 거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신 기생뎐>을 다시 읽었다. 책읽기 모임때문에 읽었는데, 읽은 책을 다시 읽으면 또 다른 맛이 나는 것 같다. 같은 책을 읽고 읽고 또 읽고 하는 것도 좋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책욕심때문에 읽은 책을 다시 읽는 여유를 잃어버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