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분들 서재에 놀러갔다가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면, '나도 영화를 꼭 한 편 봐야지!'하고 생각했다가 늘 흐지부지되곤 했다. 내 하루의 일상 중 한 켠의 시간을 - 그것도 나 편한대로의 아무 때나가 아니라 영화상영시간과 극장까지의 거리를 고려한 - 잘 떼어내어 마련해 두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영화보러 혼자 극장에 가는 것이 아직 어색한 나는 누군가와 영화 취향과 시간을 맞추어야 하는데, 그것도 꽤 번거롭고 귀찮았다.

얼마 전 순오기 님 서재에 놀러갔다가 영화 관련 이벤트 페이퍼와 맞닥뜨렸다. 오~ 이런, 순오기님은 작년 한 해동안 자그마치 29편의 영화를 보셨던 것이다. 한 달에 약 2.4편의 영화를 보셨다는 건데 나와는 너무 대조적인 숫자였다. 나는, 글쎄 제대로 극장에서 본 영화는 기억이 가물가물...  극장에 가서 제대로 자리잡고 앉아 누구에게도 방해받는 일 없이 온전히 스크린에 몰두하면서 영화를 보고 싶다고 하면서도 늘 마음 뿐, 한심하게도 늘 어영부영 흐지부지 움직이지 않고 지냈던 거라는 반성이 밀려들었다.  

이럴 땐 '일은 저지르고 보자!'라는 게 명언일 수 있는 경우다. 그래서 충동적으로(이렇게 오랫동안 묵힌 충동도 흔치 않겠지만) 씨네 큐브에서 상영중인 '시리어스 맨'을 예매했다. 도서관에서 같이 모임을 하고 있는 엄마들에게 문자를 돌리니까 두 명이 같이 가겠다고 손을 들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을 가지고 그동안 내가 뭐한 거지?)

아침 일찍부터 잔눈이 흩뿌리던 1월 11일, 아이들을 각자 가야할 곳으로 보내놓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5호선 광화문역 6번 출구로 나와 잠시 방향을 잃고 헤매었으나(내가 길치,방향치라는 증거상황은 자주 나타난다) 무사히 그 작고 조용한 극장에 도착, 상영 시작 5분 전 쯤 2관 43번 좌석에 앉을 수 있었다.   

왜 '시리어스 맨'을 골랐어? 하고 묻는다면 영화 포스터 속 "좀 더 심플하게 살 순 없을까?"라는 질문이 나 자신에게 자주 묻던 것이라서 혹시 영화를 보며 그 대답에 대한 힌트라도 반짝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기도 했고, 또 왜 유명한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명하다는 코엔 형제의 작품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터라 이 영화를 통해 코엔형제와 인사를 나누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남편이 즐겨보는 영화정보프로그램을 같이 보다가 이 영화에 대한 소개를 본 적이 있는데 주인공 남자의 표정이 일상 속 사람들의 것과 많이 닮았다고나 할까, 그렇게 비장하지도 비통하지도 않게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짜증은 나지만 견딜 수밖에 없는 그런 거.   

네이버 지식백과에 따르면 블랙코미디의 정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나 사건을 통해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의 하위 장르. 냉소적이며 음울하고 때로는 공포스러운 유머 감각에 기초하고 있다.'고 나온다. 그러니 블랙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웃음이 빵! 터지는 일을 기대하는 건 애초부터 무리다.  게다가 이 영화는 도무지 계획대로 되지 않는 예측불가능한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 신날 일이 뭐람. 주인공 래리가 칠판 한가득 삶의 불확실성에 대해 수학적 증명까지 풀어놓는데 감히 반박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적어도 나는 못한다. 수학이라면 머리에 쥐가 나는 사람이라.)   

이런 메시지는 영화의 맨처음에 프롤로그처럼 붙은 에피소드에서부터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눈 내리는 밤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마차 바퀴가 빠져버려 쩔쩔매던 한 남자가 마침 지나가던 오래 전 알던 늙은 랍비를 우연히 만나 그 랍비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그 사실을 아내에게 얘기하자 아내는 그 랍비가 이미 죽은 사람이라며 이는 '신의 저주'라고 단정짓는다. 남자의 초대로 랍비는 그 눈 내리는 밤에 남자의 집에 들르지만 남자의 아내가 얼음송곳으로 랍비의 가슴을 찌른다. '선행을 하면 복을 받는다'거나 '은혜는 꼭 갚아야 한다'거나 하는 법칙이 산산조각나는 것이다.  늙은 랍비는 그 부부에게 분노하고 저주를 퍼부었을까?  랍비는 "정말 대단한 아내를 두었군." 하며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가슴에 얼음송곳이 박힌채로 눈 내리는 밤 속으로 걸어나갈 뿐이다. 도움을 받았던 남자의 아내는 죄책감에 괴로워했을까? 아니다. 악령을 물리쳤다면서 문을 쾅 닫아버릴 뿐이다.  영화 앞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 에피소드는 이 영화 전체에 대한 요약적 암시였다.

지루하다 못해 지겨운 일상을 견디는, 아니 그런 일상에 질질 끌려가는 듯한 래리는 적어도 자기의 삶을 이해해보려고 애를 쓴다. 변호사의 자문을 구하고, 지혜롭다는 랍비를 찾아가고, 자기 아내와 사랑에 빠진 친구를 만나고, 하다못해 묘한 성적 매력을 내뿜는 이웃집 여자를 찾아가 위안을 받으려고도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방법들이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그는 뼛 속까지 '시리어스 맨'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말하는 우리 인생의 해법은 뭘까. 해법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지루하고 제멋대로인 삶을 어떻게 하면 좀 더 힘들지 않게 견딜 수 있을까. 우리는 래리가 칠판 가득 풀어놓는 숫자와 공식들처럼 삶이 맞아떨어지기를 바라는 - 비록 그것이 불확실성의 법칙이라고 할지라도 불확실성까지도 법칙으로 이해할 수 있게 - '시리어스 맨'들인데 인생은 도무지 '시리어스'하지 못하게 우리를 농락하려 드니 말이다. 영화가 시작될 때 스크린 위에 뜬 자막은 문장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삶을 이해할 수 없다면 연민하라', '그냥 받아들여라', 뭐 그 비슷한 내용이었다. 그리고 정말 만나기 힘든 가장 지혜롭다는 랍비 마르샥이 성인식을 마친 래리의 아들에게 들려준 말은 'Somebody to Love'라는 제목의 팝송가사.  

인생이 그래도 덜 힘들게 흘러가도록 하려면 그냥 받아들이며 연민하고 사랑하라는 뜻일까. 담배를 권하는 의사와 커피에 대고 가래가 잔뜩 낀 기침을 하는 비서와, 이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토네이도까지도. (코엔형제는 결코 그 토네이도를 피할 수 있도록 지하대피소의 문을 따주지 않고 아내와의 불화, 아들의 성인식, 교수로서의 평생재직권까지도 해결되어 한숨 돌리고 있는 주인공 래리를 밖으로 불러내기까지 한다. 물론 불안의 요소가 곳곳에 아직 남아있지만 간신히 제자리를 찾은 듯한 래리의 삶은 마구 뒤엉켜질 운명인 것이다.) 

동행했던 두 엄마는 옆자리에서 연거푸 하품을 했다. 전날 세 시간밖에 못 잤는데도 난 신기하게도 하품이 나진 않았다. 재미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흥미롭긴 했으니까. 영화가 끝나고 나와서 "뭐, 저런 영화가 다 있나"했다는 사람에게 웃으며 "코엔 형제가 대단하긴 하네. 삶이 지루하고 따분하고 지겹다는 것에 대해 온몸으로 반응하게 했잖아."했더니 기가 막히다는 듯 따라 웃는다. 같이 간 두 사람이 너무 지루해한 것 같아서 같이 가자고 했던 게 미안해졌다.  

코엔형제, 은근 매력이 느껴진다.  

일행과 헤어지고나서 도서관에 볼 일이 있어 왕십리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왔다. 눈이다. 아침부터 잔눈이 뿌리다 말다 하더니 이제 꽤 굵은 눈발이 촘촘하게 내리고 있었다. 겨울, 눈이 내리는 날엔 요한 파헬벨의 캐논을 듣고 싶어진다. 가방에서 MP3를 꺼내 파헬벨의 캐논만 반복되게 해놓고 도서관까지 걸었다. 춥지만 그래도 바람이 조금 더 불어서 눈송이들이 춤을 추듯 휘날리며 떨어져야 캐논의 분위기랑 더 잘 어울리겠지만 아쉬운대로 눈 내리는 겨울 풍경을 즐겼다.   

예측불가능한 삶은 곳곳에 이런 작은 행운을 숨겨놓기도 하나보다.  도서관 전면의 커다란 유리창이 그대로 눈 내리는 풍경을 담은 커다란 액자가 되어 눈을 홀렸다.   

아직 '토네이도'는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볼 수 없는 건지도 모르고. 아마 닥치고 나서야 "으악~!내 인생을 토네이도가 엉망진창으로 휘젓고 지나가 버렸어!"하고 깨닫게 될 확률이 99.99%쯤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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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1-12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섬사이님도 올해는 영화를 많이 보시겠군요.^^
저도 아이 키우는 10년은 영화관 출입 꿈도 못 꿨어요.
그야말로 잃어버린 10년을 이제야 보상받는 거죠.ㅋㅋ
우리 집에서 걸어다닐 거리에 영화관이 생긴 2007년엔 45편을 보고 25편의 리뷰를 썼었죠. 우리동네 영화관 홈페이지에요.
누군가와 시간 맞추는 게 번거로워서 맘 내키고 시간되면 심야도 잘 갑니다.^^

순오기 2011-01-12 21:12   좋아요 0 | URL
아~ 제목이 저장된 시간으로 돼 있어요.^^

섬사이 2011-01-13 07:33   좋아요 0 | URL
아이쿠,제가 임시저장하기를 누른다고 하고는,
페이퍼 쓰다가 급하게 나가느라고 턱 하니 글을 올려놓았네요.
ㅠ.ㅠ

hnine 2011-01-13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 소개하는 것을 저도 보면서 관심 영화로 찍어놓았었어요. 저도 나름 시리어스맨 (우먼?) 인지라...ㅋㅋ 그런데 이 동네에서는 상영하는 것을 못봤네요.
캐논이란 말 자체가 반복한다는 뜻이라지요? 그 캐논을 계속 반복해서 들으시며 걸으셨군요. 저도 그럼 지금 리뷰 쓰면서 오랜만에 캐논을 반복해서 들어봐야겠어요.

섬사이 2011-01-14 08:06   좋아요 0 | URL
눈이 내리고 있으면 그 곡을 찾아 듣고 싶어지더라구요.
때마침 가방 안에 mp3를 챙겨 넣고 나와서 다행이었지요.
이 영화, 씨네큐브에서만 상영하고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그것도 오전 11시에 딱 한 번.
씨네큐브에서도 어젠가로 상영종료되었을 것 같은데...

2011-01-13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13 1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