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끔 우리 남편을 “시체놀이 하는 리모콘 대마왕”이라고 부른다. 거의 매일 12시를 넘겨 귀가하고 가끔은 밤샘작업도 해야 하는 남편은 늘 피곤하다. 그래서인지 집에 들어오면 생각을 끄고 TV를 켠다. 그게 마치 세상을 사는 유일한 낙인 것처럼. 그런 남편의 모습에 때론 화가 나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그러다 슬며시 건강이 걱정스러워지기도 한다. 남편들이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 테지만, 가족을 생각하며 참고 살아가는 부분도 분명 많을 테지만, 아이들이 아빠의 정서적 부재상태에 익숙해진 채 자라나지 않게 마음을 써주었으면 하는 욕심 아닌 욕심을 부려보게 된다. 그런 생각에서 그림책 속에 드러나 있는 아빠들을 찾아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림책 속 아빠들은 현실세계의 아빠를 반영하는 동시에 아이들의 아빠에 대한 바람을 투영하고 있는 것 같다.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재력,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아빠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우리 교육현실이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져 있다는 반증이고 ‘교육’이라는 말이 흉하게 변색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제대로 돌아가는 바람직하고 건강한 사회라면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아빠의 관심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게 지극히 당연하니까. 그림책 속 아이들도 아빠의 관심을 애타게 기다리고 그리워하며 아빠의 사랑 속에서 신나게 놀고 싶어 한다. 그림책 속 아이들을 살펴보면 아이들이 아빠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아빠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꿈나라로 떠나버린 아빠들
아빠, 일어나세요 (에르하르트 디에틀 지음, 이진영 옮김, 문학동네어린이)는 우리의 일요일 아침 풍경과 너무 닮아있어서 읽으면서 웃음이 나왔다. 아빠는 느긋한 아침잠에 빠져 있는데 아빠와 놀고 싶은 아이는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간부터 아빠를 깨운다. 귀엽고 깜찍한 아이가 모든 방법을 총동원하는데도 아이에게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침대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걸 보면 이 아빠의 인내심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아빠를 깨워보겠다고 갖은 애를 쓰던 아이가 갑자기 사라지고 나서야 아이가 궁금해진 아빠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이를 찾아다닌다. 욕실에서 아이를 찾아낸 아빠는 이제 아이와 놀아줬을까? 천만에 말씀, 아빠는 아이를 안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 못 다 잔 잠을 청한다. 이 결말을 보는 순간, “음,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책이군.”하며 감탄할 뻔 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우리의 일요일 아침 풍경과 비슷하긴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1) 자는데 와서 아이가 법석을 떨어대면 우리집 남편은 짜증을 낸다는 점, 2) 법석을 떨던 아이가 갑자기 조용해지면 일어나기는커녕 오히려 평화로운 깊은 잠에 빠진다는 점, 3) 아빠가 더 자자고 꼬신다고 아이가 얌전히 아빠 옆에서 다시 잠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책은 잠꾸러기 아빠에 대한 아이의 최소한의 희망사항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 희망사항이 이 책을 유쾌하고 따뜻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 우리집 아이들이 이 책을 보고 즐거워했던 것도 이 책에서 아빠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아빠, 피곤해서 아무리 잠이 많이 쏟아진다고 하더라도 저를 방해꾼으로만 여기지 말고 아빠와 놀고 싶은 제 마음을 봐 주세요. 저를 잊어버릴 정도로 잠에만 빠져있진 말아주세요.’하는 간절한 메시지.
아빠 두더지의 코고는 소리 (가노도 에이코 글, 사사키 요코 그림, 지경사)는 큰아이가 어렸을 때 구입했던 책이다. 『아빠, 일어나세요』가 아이가 아빠에게 자기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희망이 깔려있다면 『아빠 두더지의 코고는 소리』는 피곤한 몸으로도 최선을 다하려는 아빠와 그런 아빠의 일을 돕다가 아빠를 더 이해하게 되는 아기 두더지가 등장한다. 가족구성원들 간의 상호 이해라는 측면에서 『아빠, 일어나세요』보다 좀 더 진일보한 그림책이라고 할까. 부모가 아이들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일이야 부모의 당연한 의무이자 권리이며 기쁨이지만, 그래도 때로는 부모들도 아이들의 말 한마디에 속이 상하기도 하고 문득 인생이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효자가 되기를 바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은 부모입장도 헤아려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니까. 이 그림책에서 두더지 아빠는 땅속 굴을 파는 일을 한다. 다람쥐의 새집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특히나 동물들의 동면기가 가까워지면 더욱 바빠진다. 곰이나 뱀, 개구리들이 겨울잠을 잘 수 있도록 집을 만들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 두더지아빠에게는 다섯 명의 귀여운 장난꾸러기 아들들이 있다. 아빠가 일을 마치고 들어오면 아이들은 아빠에게 매달려 같이 놀아달라고 떼를 쓴다. 비행기놀이 해주세요, 기차놀이 해주세요... 하지만 그 때마다 아빠는 피곤을 이기지 못하고 드르렁 코를 골며 곯아떨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이 꼬마 두더지들이 기특하게도 아빠 일을 돕겠다며 따라나선다. 아빠 일을 도와주는 대신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비행기 놀이를 해달라는 조건을 붙이긴 하지만. 그 날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약속대로 아이들과 비행기 놀이를 시작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아빠는 여느 때처럼 잠으로 빠져들고 아이들은 아빠가 코를 골 때마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아빠의 등 위에서 저희들끼리 비행기 놀이를 한다. 그러나 열심히 아빠를 도와준 아기 두더지들도 피곤하긴 마찬가지라 어느새 코를 골며 잠이 들고 만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아빠 두더지와 아기 두더지들은 함께 코를 골며 꿈속에서 비행기 놀이도 하고 기차놀이도 한다.
아빠들이 아이들에게 위의 두 책 중 한 권을 골라 읽어줘야 한다면, 아마 이 책이 좀 더 읽어주기에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에게 왜 늘 아빠는 피곤에 절어서 축 늘어져 있는지를 이 그림책이 아빠 편에서 설명해주니까.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할 것 한 가지는 이 책 속 두더지 아빠는 바쁘고 힘들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아이들에게 표현해 주었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아빠가 왜 늘 지쳐있는지, 왜 집에선 잠만 자려고 하는지를 이해시키기는 쉽고도 간단하다. 아이들은 착하고 마음이 넓어서 기꺼이 자기 부모를 이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빠들의 피곤함이 아이와 아빠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엄마와 아내로서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뭐라 설명해주기가 참 어렵다. 아이는 아빠를 이해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아빠들은 어떤지, 아이들을 이해해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바쁜 아빠들
고릴라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장은수 옮김, 비룡소)는 아빠로부터 소외된 소녀 한나의 이 야기다. 내가 써놓고도 흠칫 놀랐다. ‘아빠로부터 소외’되었다니. 얼마나 끔찍한 말인가. 하지만 이 책 속에서의 한나와 아빠의 관계는 ‘소외’라는 말의 의미보다 더 끔찍할 만큼 아프게 다가온다. 그림책을 펼치다 한나의 아빠를 처음 본 순간 나는 ‘이 아빠, 죽은 사람 같구나.’했다. 차가운 푸른 공간 안에서 창백한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아 아이와 자기 사이에 철조망처럼 신문을 펼쳐든 그 모습은 생명의 불이 모두 사그라진 사람처럼 보인 것이다. 그에 비해서 ‘나는 아직 여기 살아 있어요.’하는 표시처럼 빨간 셔츠를 입은 한나는 아빠의 곁을 맴돌지만 결국 어두운 거실 한 구석에서 자기의 외로움을 TV로 달래는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아빠에게 자그마한 고릴라 인형을 선물 받은 생일날 한나에게 굉장한 일이 일어난다. 고릴라 인형이 커다란 진짜 고릴라가 되어 한나와 함께 동물원, 극장, 식당에도 가고 잔디밭에서 춤도 추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된 것이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자 고릴라는 한나에게 말한다. “한나야, 이제 돌아가야지? 내일 또 보자.”
다음 날 아침, 아빠에게 고릴라 이야기를 하러 뛰어 갔더니 어라, 아빠가 변했다. 한나처럼 빨간 셔츠를 입고는 한나를 ‘귀염둥이’라고 부르며 함께 동물원에 가자고 한다. 아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아빠 바지의 뒷주머니에 꽂힌 바나나가 그 힌트가 되지 않을까? 예전에 어디선가 앤서니 브라운에게 바나나는 ‘동심’ 또는 ‘상상력’의 상징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다면 우리 아빠들에게 필요한 것도 얼마간의 동심, 약간의 상상력이 아닐까. 그것이 창백한 푸른빛의 아빠를 생동감 있는 빨간 티셔츠의 젊고 활기찬 아빠로 변신시키는 비밀이 아닐까. 아빠들이여, 젊은 오빠로 되돌아가고 싶은가. 그렇다면 앤서니 브라운의 마법의 바나나를 꼭 챙기시길 부탁드린다.
아빠는 언제와(낸 그레고리 글, 캐디 맥도날드 덴톤 그림, 임정원 옮김, 파란하늘)에도 한나처럼 빨간 옷을 입은 엠버라는 소녀가 나온다. 표지의 파르스름한 배경 속에서 엠버는 새빨간 코트를 입고 한 손으로 머리를 괸 채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는데 어쩐지 『고릴라』의 한나와 닮아있다. 자칫하면 아이들에게 아빠는 차갑고 냉정한 사람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경고인 것처럼 보였다. 다행인 것은 엠버가 한나에 비해 좀 더 밝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엠버는 ‘거의 날아가는’ 것처럼 그네를 탈 수 있고, 그림 그리기와 그림책 읽기를 좋아하고, 신발끈을 혼자서 맬 수도 있고, 눈 속에서 미끄럼타기도 잘 한다. 여러 가지로 유능하고 활달한 엠버는 경쾌한 빨간 코트와 이미지가 딱 떨어지게 잘 맞는다.
그런 엠버에게 나쁜 일이 하나 있다면 아빠가 엠버를 데리러 유치원에 늦게 오는 것이다. 강당복도에 앉아서 코트 단추를 목까지 꼭꼭 채우고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게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빠는 좀처럼 오지 않는다. ‘기다림’이라는 거, 어른들에게도 참 힘든 일인데 4시부터 7시까지 장장 세 시간 동안의 기다림은 어린 엠버에게 너무나 가혹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기다림’이 힘든 건 기다리는 시간 동안의 지루함이나 따분함 때문이 아니다. 기다림의 시간은 유난히 더디 흐르게 마련이고, 그래서 평상시의 시간보다 몇 배는 더 길게 늘어져 버린 그 심리적 시간동안 내가 ‘기다림’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용無用의 존재라는 느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버린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유기되어 버린 듯한 슬픔, 그리고 날 그렇게 버려둔 사람에 대한 미움까지 고스란히 견뎌야 한다는 것이 기다림이 어렵고 힘든 이유일 것이다. 기다림의 인내를 배우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즐기는(?) 법을 배우기엔 앰버는 너무 어린 나이가 아닌가.
그러나 우리 똑똑한 엠버는 금세 기다림의 방법 한 가지를 터득한다. 그건 ‘상상하기’다. 엠버는 상상 속에서 하늘을 날아 아빠를 홀로 달에 남겨둔다. 그러고는 늘 바쁘다, 힘들다, 피곤하다, 하면서 곁에 있는 ‘아주 중요한 사람’을 잊어버리곤 하는 세상의 아빠들에게 어서 빨리 ‘아주 중요한 사람’에게 돌아가라는 강한 메시지를 담은 사랑스런 퍼포먼스를 벌인다. 그동안 아빠는 달에서 ‘홀로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적막하고 외로운 일인지를 배우는 상상상이다.
앰버가 입고 있는 생생한 빨간빛의 코트와는 대조적으로 아빠가 입은 회색 코트와 바지, 검정 구두는 아빠가 얼마나 삭막한 잿빛 세계에서 살아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니 앰버가 아빠에게 가르쳐주려는 것은 단지 기다림만이 아니라 따스한 사랑과 관심이 살아 있는 생생한 감정의 세계까지도 포함된 건 아닐까? 그렇게 부모와 자식이 서로의 뺨을 부비고, 입을 맞추며, 미소를 나누고, 서로의 가슴에 사랑을 흘려보내는 시간이 앰버는 그리운 것일 터이다.
바쁜 아빠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전업주부인 나도 그림책 속 앰버의 아빠처럼 잿빛 옷을 온몸과 마음에 휘감은 채로 아이를 대한 적이 많으니까. 어른이란 게 그런가 보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합리화에 너무 능수능란한 나머지 쉽게 인정하고 고치려하질 않으니 말이다. 세상이 잿빛으로 보이는 건 내가 잿빛이기 때문일 것이다. 온 세상 모든 엄마와 아빠들이 내 마음, 내 웃음, 내 다정한 눈빛을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잊는 법 없이 살아가기를 빈다.
아빠는 괴로워
아빠는 하나 아기는 열(베네딕트 게티에 지음, 조소정 옮김, 베틀북)어쩌다 아기 열을 아빠 혼자 키우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설정 자체에서 고달픔이 배어나오는 그림책이다. 열 명이나 되는 개구쟁이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워야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굵은 윤곽선에 서툴게 칠한 그림이지만 지칠 줄 모르는 장난기를 지닌 아이들 하나하나의 모습이 참 잘 드러난다. 집안일과 가족들 뒷바라지에 지친 주부들이 혼자만의 조용한 시간을 꿈꾸듯이 이 그림책 속 아빠도 열 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돌보면서 집과 회사를 오가야 하는 지친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아이들을 재워놓고 저녁마다 아이들 몰래 배를 만드는 아빠에게 나는 어느새 감정이입을 하고 우리 아이들은 다소 엽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재미있어 한다.
배를 완성한 아빠는 아이들을 할머니에게 부탁하고 혼자서 여행을 떠난다. 고요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아빠의 모습은 그야말로 평화롭다. 그동안의 고단함을 씻어내는 열흘간의 단잠에서 깨어나 아빠가 한 일은? ‘그릇도 열 개, 스푼도 열 개’의 아침을 차린 일. 갑자기 고요한 평화가 허전함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아기 양육이 주는 피곤함, 어려움, 스트레스...하지만 그 모든 걸 넘어서는 아기들에 대한 부모들의 사랑이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럽고 행복한 일이다. 이 책이 기분 좋은 이유는 바로 그 당연한 진실 때문이 아닐까. 게다가 아이양육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엄마가 아니라 아빠라는 설정이 산뜻하고 참신하게 다가오기 때문에 그림책을 읽어주는 엄마는 약간의 고소함(?)을 느끼며 더 즐거울 수 있다.
쉿쉿! (김춘효 지음, 백은희 그림, 비룡소)에서도 아빠의 고생담이 펼쳐진다. 엄마가 아파 몸져누운 날, 아빠는 집에서 밀린 집안일을 한다. 그림책 분위기 상 엄마가 며칠 동안 집안일을 못한 것 같고, 아마도 휴일인 어느 날 밀린 집안일을 아빠가 하는 중인 것 같다. 그림책을 펼치면 오른쪽 면에는 심심한 아이의 방에서 일어나는 일이, 왼쪽 면에는 글과 함께 집안일을 수행중인 아빠의 그림이 작게 나온다. 아이에게 아빠는 자꾸 “쉿,쉿!”하며 조용히 하라는데 아이의 인형들이 하나씩 뛰어나와 놀자고 하며 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는다. 심심한 아이의 상상놀이겠지만, 서툰 집안일을 해내느라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을 아빠에게는 아이를 이해해줄만한 여유가 없다. 그래도 이 아빠, 세탁기도 돌릴 줄 모르는 우리 남편에 비해서는 참 꼼꼼하고 능숙한 편이다. 설거지와 빨래는 물론이고 소파 밑까지 구석구석 청소도 열심히 한다. 아이 방에서 황소까지 튀어나오는 지경에 이르자 아이와 아빠의 팽팽한 대립구조가 펼쳐진다. 마침내 아빠의 입에선 “조용히 하랬잖아!”하는 고함이 터져 나오고 아이와 아빠는 같이 바닥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같이 그림책을 보던 유빈이는 아빠와 아이의 점층적인 대립구도를 내내 불안해하더니 아빠와 아이가 함께 울음을 터뜨리는 부분에서 웃음이 터진다. 긴장이 말끔히 해소되는 개운함을 맛보는 듯하다.
아빠는 아이를 이해하기로 한 걸까? 아이랑 같이 실컷 울고 난 아빠는 아이와 이불 속에 들어가 웃기 시작한다. 그런데 내 마음 속엔 또 다른 걱정이 싹튼다. ‘어? 그럼 하다 만 집안일은 언제 할 건데?’ 하는.
『아빠는 하나 아기는 열』도 『쉿,쉿!』도 집안일에 무심한 아빠들에게 가사와 육아의 어려움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진 책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보다는 우리가 꿈꾸는 행복의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보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직장일과 집안일로 지치고 힘들 때에도 결국 우리가 돌아와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자리는 우리의 가정이고 아이들 곁이라는, 이 뻔하고 간단한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주지시켜 주는 것 같다. 어쨌든 아이들은 우리 부모들이 ‘견디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 아닌가.
우리가 꿈꾸는 아빠
『코끼리 아빠다!』 (마이클 그레니엣 그림, 김정화 옮김, 파랑새)는 판타지다. 폴란드 출신 작가이면서 일본그림책 상을 받은 다소 특이한(?) 이력의 작가는 크레파스로 대충 칠한 듯 거칠 느낌의 그림으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코끼리를 갖고 싶어 하는 유치원생 딸 키아라를 위해 스스로를 코끼리로 변신시키는 이야기는 이 세상 아이들에게 얼마나 감동적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앞에서 이야기한 다른 아빠들에 대한 책과는 다르게 이 책의 아빠는 생동감 있고 아이들의 세계와 아주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코끼리가 있으면 우리 키아라가 좋아서 폴짝폴짝 뛰겠지?’하며 생각에 잠긴 아빠의 모습은 어쩐지 아이보다도 더 철없어 보이기도 한다. 커다란 코끼리가 가져다 준 의문의 상자를 받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알약과 연고들을 이용해 코끼리로 변신한 아빠. 코끼리가 되어 유치원으로 아이를 데리러 간 아빠를 키아라는 기뻐하며 반겨 준다.
그런데 이 책의 마지막, 키아라가 코끼리 아빠의 등에 올라타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장난감 가게 앞에서 말한다. “있잖아, 저 사자, 코끼리 아빠랑 친구하면 좋을 것 같지 않아?” 이 책을 읽어주던 나는, 내가 사자가 되어야 하나, 하고 순간 고민했다. 작가는 키아라의 저 말 한 마디로 이 책을 아이에게 읽어주는 모든 어른들을 코끼리 아빠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는 것이다. 코끼리 아빠의 세계는 아이의 동심과 하나가 되는 세계가 아닐까. 그게 가능한 건지는 몰라도 아이와 놀 때만큼은 아이 수준으로 내려가 함께 즐기고 노는 아빠들의 모습은 행복하고 멋져 보인다.
놀이터의 왕 (필리스 레이놀즈 네일러 지음, 놀라 링그터 멀론 그림, 보물창고)의 아빠는 등장하는 방법부터가 심상치 않다. 다른 아빠들과는 달리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거나 세차를 하고 있다. 가정 안에서 ‘일’하고 있는 아빠. 그림책에서도 찾아보기 쉽지 않은 아빠의 모습이다.
‘새미’라는 아이는 ‘놀이터의 왕’이라고 불린다. 놀이터에 온 친구들을 괴롭혀 주기가 취미이자 특기인 새미 때문에 케빈은 하루하루가 괴롭다. 용감해지기 위해 배트맨 팬티에 스파이더맨 티셔츠에 말굽 장식의 청바지를 입어도 새미는 두려운 존재다.
놀이터에 놀러나갔던 아들 케빈이 새미의 협박에 기운이 쭉 빠진 채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아빠에게 새미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고자질을 하고 있는 거다. 아빠가 나서서 새미를 혼내달라고 은근히 바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내가 그림책 속 아빠의 입장이라면 어떨까. 금방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놀이터로 달려가 새미라는 아이에게 발끈,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등장부터 포스가 남달랐던 이 아빠는 아이의 말을 귀담아 들어준 뒤에 새미의 협박이 실현 불가능한 협박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해준다.
아이 스스로 문제를 극복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애정 가득한 관심을 보이며 도와주는 다정한 아빠는 아이 뿐만이 아니라 엄마 입장에서도 바라는 아빠의 모습이다. 특히 아들에 있어서는 엄마의 힘만으로는 2% 부족한 뭔가가 있는데, 아들과 통하는 남성성을 지닌 아빠의 도움이 절실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아 빠는 어디쯤 왔을까? (고우리 지음, 문학동네어린이)에는 퇴근길에 아이스크림을 사가지고 오실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막내 아이가 서 너 살 무렵에 좋아했던 책인데,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의 상상 속에 등장하는 그림책 속 아빠의 모습에 아이도 나도 반했었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 중에 하나인 아이스크림. 골라먹는 재미가 있다는 말이 나올만큼 그 종류도 다양해졌다. 어쩌다 아이들을 데리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르면 무슨 맛을 고를까 고민하는 아이들의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표정이 얼마나 깜찍하고 귀여운지 모른다.
아이들의 그 깊은 고민을 이 책은 즐겁게 해결해 준다. 갖가지 아이스크림을 층층이 높이 쌓은 콘을 들고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집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아빠의 모습. 무너져 내릴 것처럼 휘청거리는 아이스크림. 이 책을 펴서 들여다보던 우리 막내는 아이스크림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보며 어떤 아이스크림이 맛있을까, 고민하기도 한다. 고민 끝에 “엄마, 난 이 아이스크림 먹을 거야.”하며 그림 속 아이스크림을 먹는 시늉을 하고는 행복하게 웃음 짓기도 한다.
드디어 아이가 애타게 기다리던 집으로 돌아온 아빠. 딩동~하고 초인종을 울렸는데, 아빠의 손에는 작은 아이스크림 가게 종이가방이 하나 있을 뿐이다. 아빠를 기다리던 아이는 잠들어 버렸다. 아이가 깨어나면 아빠가 사온 아이스크림이 자기가 상상했던 그 아이스크림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러나 이 책의 마지막 식탁에 가족이 모여 앉아 단란하게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그림이 있다. 안심이다. 현실의 아빠가 상상 속 아빠보다 좀 못해도 너그럽게 이해해주는 아이들이라 참 다행이다. 내가 엄마라는 걸, 내가 아빠라는 걸 즐기며 살려고 노력하다보면 조금은 좋은 아빠, 좋은 엄마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