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아주 어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오빠들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이웃집 언니들 때문이었는지, 만화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척 흥미로운 일로 일찌감치 각인되었던 모양이다.   내가 한글을 언제 떼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엄마와 버스를 타고 외할머니댁을 가면서 차창 밖으로 휙휙 스쳐지나가는 간판들을 줄줄 읽어대면 앉아 있던 아줌마나 아저씨들이 똑똑하다 귀엽다 하며 무릎에 앉히던 게 기억이 난다.  나보다 두어살 위였던 동네 언니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깍뚜기 공책에 '가나다라..' '가갸거겨고교..'등을 쓰기 연습할 때 같이 끼어서 글씨쓰기를 공부하기도 했으니 아마 대여섯살 무렵이 아니었나 싶다.  

아무튼 내 기억으로는 내가 한글의 조합과 그 음가에 대해 아직 익숙하지 않았을 때다.  그 때 엄마아빠를 졸라 10원인가 5원인가를 받았고, 그 돈으로 동네 만화가게에 위풍당당하게 들어섰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껏해야 지금 내 막내딸 또래였을 테니, 만화가게 아저씨도 어이가 없지 않았을까, 싶다.  어쨌든 그 날 내가 빼곡히 꽂혀있던 만화책들 중에 뽑아들었던 것은 <쌍무지개 뜨는 언덕>이라는 만화책이었다.  당연히, 내용은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그 제목이 확실한지도 잘 알 수가 없다.  신기하게도 만화 속의 깔끔하고 우아해보였던 2층집 계단이나, 머리를 귀부인처럼 올리고 긴 홈드레스(?)를 입고 있던 만화속 인물(아마도 엄마였겠지..)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을 뿐이다.    
(네이버에 검색했더니 1977년도에 제작된 영화라고 뜬다.  좀 더 검색해보니 이게 소설이 원작이었다. 일제시대에 탐정소설가로 이름을 날렸던 김내성이라는 작가가 쓴 청소년 소설이란다. 알라딘에서도 검색이 된다. 신기하군... )

그리고 띄엄띄엄 어떻게든 글자를 읽어서 만화의 재미 속에 빠져보려고 기를 쓰던 나 자신이 무엇보다 잘 기억난다.  그 만화를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그제서야 나는 한글의 닿소리와 홀소리의 조합과 음가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우리 한글의 문장어미, ~~어요, ~ㅂ니다'등과 조사들 '을, 를, 이, 가, 에게,,,'등등의 쓰임에 눈을 떴던 것 같다. 그 때 그 글자들을 터득하면서 기뻐했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나는 걸 보면 그게 내 최초의 배움의 환희가 아닌가 싶다.  

두번째로 기억이 나는 만화는 초등학생 때 읽었던 <바벨2세>던가,하는 만화책이다.  사막 한 가운데 바벨탑이 숨겨져 있고 검은 표범인가가 나오고, 로봇도 등장했던 것같다.  그 때 벌써 대학생이었던 오빠들까지도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놀랍게도, 알라딘에 혹시나 하고 검색해봤더니 아직도 출판되어 판매가 되고 있다.  몰랐었는데 요꼬야마 미쓰테루라는 유명한 만화가의 작품이란다.  이 만화에 대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뭔지 모를 고독감? 같은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아직도 판매가 되고 있다니,,  갑자기 다시 보고 싶다는 욕구가 스멀스멀 일기 시작한다.   

 

세번째 만화가 초등학교 6학년 때쯤 만난 <캔디캔디>다.  그야말로 나의 사춘기를 열어준 만화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캔디는 지금까지 만났던 다른 만화책들과는 달랐다.  지금 생각하면 신파인 부분이 없지 않고 유치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 당시 사춘기 소녀였던 나로서는 캔디를 거의 우상화했을 뿐 아니라, 견디기 힘든 사랑과 온갖 역경을 이기고 다시 밝게 일어서는 캔디를 내 인생의 본보기로 삼을 만큼 절대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엄마나 오빠들이 순순히 캔디를 사줬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혹시 내가 학교에 가거나 집에 없을 때, 엄마와 오빠들도 캔디를 즐겨 읽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전권을 모두 갖고 있었는데, 오빠들의 여자친구들이 빌려달라며 한 권 두 권 가져가고는 반납하지 않는 바람에 이제 단 한 권도 내 곁에 남아 있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림책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동화책들도 조악했다.  청소년들이 읽을만한 책들은 더더욱 가뭄에 콩나듯했던 것 같다.  그림책과 동화책은 우리를 유년시대에 붙들어두려고 한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감성이나 관심사도 변하기 마련인데, 당시만 해도 그림책과 동화책들은 우리를 반공방첩 정신이 투철하고 말 잘듣는 착하고 바른 어린이 쯤으로 고정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 같다.  삐라를 주워서 파출소에 갖다주며 영웅심리를 맛보거나 하교길에 애국가가 울려퍼지면 나름 비장한 기분으로 멈춰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학급회의 시간에도 늘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치며, 6월이면 반공포스터 대회에 전교생이 참여하던, 네모지고 견고한 시대였으니. 

그래서였을거다.  만화책은 나에게 어른의 세계, 또는 유년 너머의 뭔가 아프고 애틋한 세계를 살짝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매체였던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어떨까...  만화도 거의 학습이 주를 이룬 지금, 아이들은 행복할까?  어릴 때 읽었던 <꺼벙이>라든가 <도깨비 감투>같은, 만화책이 아이들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요즘 아이들도 애매한 문학의 세계보다 좀 더 구체적이고 실감나고 재미있는 만화 속 세계에서 유년 너머의 세계를 엿보고 있을까.. 

큰아이 유진이는 초등학교 3학년 무렵에 <밍크>라는 만화잡지를 구독해서 읽었다. 지금도 유진이나 명보가 읽고 싶다고 하는 만화책이 있으면 조금씩 사주는 편이다.  그래서, 초밥왕이나 원피스, 데스노트, 궁, 하백의 신부, 펭귄혁명 등등의 만화책을 소장중이다.  

만화는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만화는 독서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일까..  
한겨레 신문에는 박재동의 손바닥 아트가 실린다.  언젠가 느티나무 도서관 그림이 실렸다.  박재동씨는 그 그림 밑에 아이들과 어른들이 바닥에 앉거나 누워서 편안하게 만화책을 읽고 있는 도서관의 모습에서 천국의 모습을 보았다고 썼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 이 페이퍼는 나의 사심이 잔뜩 묻어있다. (어떤 페이퍼라고 안 그러겠습니까..) 
다음 주에 도서관 모임에 만화에 대한 짧은 글을 써가려고 하는데,,,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서 다른 분들의 의견을 참고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제발 도와주세요.... 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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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0-1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이사를 가서 전학도 갔고, 엄마는 늘 바쁘고, 언니들은 나랑 놀아주지 않고, 심심해할 나에게 엄마가 헌책방에서 보물섬 세 권을 사주셨어요. 그게 시작이었어요. 그 다음부터는 50원 100원씩 들고 가서 만화방에 가서 서식(?)했지요. 처음 본 책은 김동화의 '아카시아'였구요. 그 다음에 황미나의 '주의 어린양 아뉴스데이'였지요. 신일숙의 '사랑의 아테네'도 그때 읽었어요. 주로 순정만화를 읽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홉살 짜리가 이해하긴 힘들었을 것도 같지만 무척 재밌어 했어요. 10살 때부터는 신일숙의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읽었구요.^^
만화만 읽고 다른 책을 도통 읽지 않는다면 아쉽지만, 그래도 아무 책도 안 읽는 것보다는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만화가 주는 환상의 힘이 무척 큰 것 같아요. 울 엄니는 나를 만화의 세계로 인도한 것을 한때 후회하셨지만, 지금은 뭐 그런 말씀 하실 때는 아니지요.^^;;;

섬사이 2009-10-11 14:07   좋아요 0 | URL
아뉴스데이, 중학생땐가 고등학생땐가, 시험 끝나고 올캐언니랑 빌려다가 눈물 질질짜며 읽었던 만화에요. ㅎㅎ 굳바이 미스터 블랙도 재미있게 읽었었는데.. ^^
다른 엄마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만화가 독서의 호흡을 짧게 해서 나중에 좀 길고 지루하다 싶은 책들을 아이들이 읽을 수 없도록 만든다고 하는 분들이 많아요.
'읽는다'는 행위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나오는 말일 수 있는데, '읽는다'는 행위 뒤에 오는 '느낌'과 '여운', 그리고 '생각의 되새김질'이라고나 할까,,, 하는 것들에 초점을 맞춘다면 만화가 가진 힘도 만만치 않을 거란 생각이 들거든요. 물론 만화에서도 거르는 작업이 필요하겠지만요..
이렇게 긴 댓글을 달아주시다니 감격이어요.. 고맙습니다. 마노아님.

다락방 2009-10-12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학교때였어요. 옆집애가 저와 동갑이란걸 알고 급친해지면서 그 친구의 집을 수시로 놀러갔는데요. 세상에, 거기엔 제가 집에서 읽었던 모든 책들이 만화책들로 있더라구요. 아마 어린이용 만화전집, 이런거 같았어요. 로미오와 줄리엣도, 춘희도, 잔다르크도 거기 다 있었어요. 물론 제가 저희집에 가지고 있는 글만 써진 책과는 겹치는 것도 겹치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완전 심봤다의 기분이었달까요. 근데 그 친구는 그 책을 읽지 않았고, 저는 저희집에 있는 책은 다 읽은 상황이라 매일 그 집에 가서 그 만화책을 읽었거든요. 세권씩 빌려오기도 하구요. 아마 백권 셋트였던 것 같은데, 잔다르크 같은 건 그 만화로 본게 훨씬 좋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좀 성인물(?)스럽지 않았나 싶기도 한데, 전 정말 흠뻑 빠져서 그 친구 집에 있는 그 만화책들을 다 읽었거든요. 하루는 제 친구가 친구어머님께 혼나더군요. 왜 너 보라고 사준건데 니 친구가 다 읽고 너는 읽지를 않는거냐, 하면서요. 살살 눈치 봐가며 빌렸어야 했는데 저는 그래도 꿋꿋하게 다 읽었어요.

음, 독서의 호흡을 짧게 해서 나중에 좀 긴 책들을 읽을 수 없도록 만든다고 하는 말도 일리는 있는 것 같지만 저는 독서를 전혀 하지 않는 것 보다는 만화책을 읽는쪽이 훨씬 낫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아예 독서를 안할지도 모르는데 어릴때부터 만화가 악영향을 미칠까봐 꺼려한다면 지레짐작 미리부터 겁먹는 것 같은데요. 잔다르크를 모르는 것 보다는 만화를 읽고 잔다르크를 아는쪽이 훨씬 낫지 않을까요?

섬사이 2009-10-13 06:45   좋아요 0 | URL
1. 페이퍼인가 댓글인가 헛갈릴 정도로 길고 정성스러운 댓글에 감동..
2. 어릴 때 그런 옆집 친구가 있었다니!! 다락방님은 참 복도 많구나,, 하는 부러움.
3. 엄마에게 혼나는 다락방님 옆집 친구에 대한 동정과 연민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했던 다락방님께 박수. 짝짝짝짝!!!
5. 역시! 마노아님이나 다락방님처럼 책도 많이 읽고 글도 잘 쓰는 분들은 만화에 히스테리를 일으키지 않고 당당하구나, 하는 기쁨.
6. 도서관 모임에 써갈 숙제(?)에 탄력이 붙을 것만 같은 예감.
7. 마노아님과 다락방님 두 분이 옆에 있었다면 와락 끌어안고 볼에 뽀뽀해주고 싶다는 주책성 충동.
8. 그래서 이 모든 것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고맙습니다" ^^

정말 고맙습니다. 다락방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