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ㅣ 창비아동문고 219
유은실 지음, 권사우 그림 / 창비 / 2005년 1월
평점 :
책을 읽는다는 것. 어느 분 말씀처럼 책 읽기도 교육이 된 세상에서, 순수하게 마음을 쏟아 책을 읽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온갖 단체에서 추천도서목록이 발표되고, 하루가 멀다 하고 신간이 쏟아지고, 읽어야 할 책이 책장에 빼꼭하게 쌓여가는 요즘, 나의 마음과 책의 마음이 맞닿는 독서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 같다. 그 어떤 작은 의도도 숨어있지 않은 책 읽기, 갑자기 그게 참 그리워졌다.
<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유은실’이라는 작가를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낯가림이 심한 성격에 새로운 작가의 책에는 쉽게 손이 가지 않았던 탓이다. 그런데 낯선 작가의 책을 읽고 이만큼 뿌듯했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이 사람, 정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책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책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어깨에 팔을 두르는 순간, 잠자리에서 이불을 덮고 누웠을 때 곁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책이 노래를 불러주는 그 순간을 아는 사람.
비읍이가 도서관에서 처음으로 린드그렌 선생님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을 읽고난 후 ‘그 때 누가 와서 “이 책에서 어떤 점이 가장 좋았나요?”하고 물었다면 나는 아무 말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책에 빠지는 것‘이 뭔지 가슴과 머리로 깨달았다.’(p.16)고 말한다. '책에 빠지는 것‘을 경험한 사람은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비읍이는 린드그렌의 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풀어가고,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이해하며, 무엇보다 자신의 슬픔을 위로 받는다. 그래서 비읍이는 ’나도 가슴 깊은 곳에 쓸쓸함을 잔뜩 갖고 살았다. 하지만 이제는 별로 남아 있지 않다. 린드그렌 선생님의 이야기들이 그것들을 조금씩조금씩 갉아먹어 버렸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결심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쓸쓸함을 갉아먹는 린드그렌 책벌레를 엄마랑 지혜한테 옮기기로 말이다.‘(p.168)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서교육’이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 용어인지 잘 알 것 같았다. 책 읽기는 교육이 될 수 없다. 책 읽기는 가르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책 읽기는 나와 책이 마주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비읍이처럼 책에 푹 빠져드는 경험을 하고 나면 저절로 자꾸 다시 하고 싶어지는 즐거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쩌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에게서 책 읽기의 즐거움을 빼앗고 있는 건 아닐까. 넘쳐나는 책 속에서도 책과 만날 수 있는 여유를 잃어가는 요즘의 아이들이 떠오른다. 요즘 아이들은 무엇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고,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와 상처를 해결하고, 타인을 이해할까, 궁금하다.
아이들과 꼭 만나게 해주고 싶은 책이다. 그리고 나는 이 책 속 ‘그러게 언니’같은 사람이 되어주고 싶다. ‘언니’가 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 버렸지만, 그러게 아줌마나 그러게 할머니라도 괜찮을 것 같다.
린드그렌 선생님은 참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팬레터가 어디 있을까. 하지만 이 팬레터를 읽어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니 너무나 안타깝다. 내가 만약 린드그렌이라면 이 책으로 인해 인생이 천 배쯤은 더 행복해졌을 것 같다.
그리고 난 ‘유은실’이라는 작가를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더 이상 낯설지 않게 그녀의 책을 망설임 없이 뽑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참 행복했다. 그 행복함으로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다운 모든 책들과 그 책들을 써준 작가들에게 감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