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오로지는 사계절 저학년문고 41
임정자 지음, 박세연 그림 / 사계절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그 날 나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뜨거운 햇볕에 온 세상이 흐물흐물 녹아버릴 것 같고 길을 걸으면 숨이 턱턱 막혀오는 날이었다.  털털거리는 낡은 마을버스까지도 냉방시설이 잘 갖춰진 걸 감사하며 세상 참 좋아졌다고 흐뭇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사소하지만 즐거운 사실을 되새기며 무심히 버스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 여고에서 학생들이 나오고 있었다.  기말고사 기간이라 시험만 보고 학교가 일찍 끝났나 보구나, 참 힘들겠구나, 하고 처음엔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그 여학생들 모습이 어찌나 밝고 예뻐 보이는지 넋을 잃고 바라보게 되었다.  교복 스커트 밑으로 하얀 종아리가 눈부시게 빛나고, 시험공부에 찌들었을 텐데도 자체발광시스템이라도 갖춘 것처럼 이글거리는 보도 위에 발랄과 신선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한여름 뜨겁게 쨍쨍 내리꽂히는 햇빛보다도 그녀들은 정말 더 찬란한 듯했다.  그토록 찬란하고 신선한 자체발광 십대들이 하루 종일 공부, 공부, 오직 공부에만 매달려 칙칙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안타까웠다.

정신없이 바빠, 피곤해, 힘들어, 시간이 없어, 빨리빨리.... 우리 어른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들이다.  입에 그런 말들을 달고 살수록 더 유능하고 성공한 인물인 것 같고, 앞이 뻥 뚫린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처럼 빛의 속도로라도 내달릴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우린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야할 아이들에게도 경쟁을 요구하고 찬란한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공부에 올인하기를 강요하게 된다.  시간을 쪼개고 아껴서 남들보다 더 많이, 더 빨리, 그게 바로 요즘 우리 사회의 모토가 아니던가.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우리의 그런 현실이다.  물질적인 부와 경쟁에서의 승리, 사회적 성공 등등이 결코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에 집요하게 매달릴수록 우리는 삭막해지고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자원 확보, 개발과 편리 등의 이익을 얻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사람들의 이기심과 끝없는 욕심을 판타지 동화라는 얼개 안에 참 잘 담아낸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을 자원사냥꾼으로 만들어 자원도시에서 통제받으며 살게 하는 배후세력이 드러나지 않고, 문제의 해결이 버들어머니와 고향 버드나무 아래서 샘솟는 물과 같이 상징적인 인물과 도구에 의해 허무하게 해결되어 버리는 것,  주제의식이 강하게 드러나다 보니 어린이 독자들의 흥미를 끌기가 어렵지 않을까 하는 점이 좀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그 배후세력은 바로 우리 어른들이며, 아이들이 아이들다운 시간을 보내며 아이들답게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세상은 이제 꿈이며 상징과 기호로만 남은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읽으면서 미하엘 엔데의 <모모>가 떠오르기도 했다.  시간을 ‘잘’ 쓴다는 건 뭘까, 잘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삶일까,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가치는 무엇일까, 물질적인 풍요, 성공과 출세, 권력과 명예, 개발과 효율성 등이 행복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이 책 속에 둥둥 떠다니고 있다.  행복은 얻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가 이 책을 통해 아이들 마음에 새겨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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