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아침부터 날씨가 구질구질하다.  아이 데리고 외출하기엔 그리 좋은 날씨가 아니다.  그래도 어쩐지 '꼭‘ 참석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 게으름 떨었다간 내 마음 속 누군가가 “요놈~~!!!”하고 호통을 칠 것 같은 조바심으로 서둘러 준비했다.  비가 오더라도 책엄책아 바로 코앞에 있는 정류장까지 데려다줄 버스가 있으니, 괜히 날씨 핑계대지 말자고 스스로를 독려하면서 강의 끝나고 나면 유빈이랑 같이 먹을 도시락까지 챙겼다.  그런데 전화..  우리 큰딸이었다.  “엄마, 책상 위에 과학 파일 놓고 왔는데, 그것 좀 갖다 주면 안돼?  오늘 선생님이 검사하신다고 그러셔서..”  에궁, 오늘 호나우딩유가 학교에 온다고 좀 들떠 있더니만.... 큰딸 학교까지 들렀다 가려면 책엄책아 코앞까지 가는 버스는 포기하고 마을버스를 타고 좀 빙 돌아야 한다.  유빈이를 조금 더 재촉해서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다행히 비는 오는 듯 안 오는 듯, 애매모호하게 내려주고 있었다.

학교 후문에서 첫째 시간이 끝나길 기다리고 서 있다가 파일을 전해주고 돌아서는데, 택시가 와서 선다.  오호,, 이건 하늘의 계시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유빈이랑 택시에 올라탔다.  기본요금으로 책엄책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강의를 하는 2층으로 올라갔는데, 어라 오늘은 책장들이 싹 치워져 있고, 앉을 의자도 없고, 가운데가 훵하니 비어 있다.  연극놀이에 관한 강의를 한다더니 역시 준비가 다르구나, 했다. 

사다리연극놀이연구소에서 나오신 김 선 선생님 작고, 마르고, 선한 눈웃음을 가진 분이셨는데 마이크도 없이 강의를 진행하셨다.  그냥 듣는 강의가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강의를 하실 거라는 말씀에 무난하고 평범한 강의는 아니겠구나하는 걱정과 불안에 살짝 긴장했다.  그런데 어라? 이거 참 재미있다.  30명 가까이 되는 엄마들이 빙 둘러서서 ‘눈 맞은’ 사람끼리 자리를 바꾸는 게임으로 출발한 강의는 둘씩 짝지어 내 얼굴 앞에서 움직이는 상대방의 손바닥을 따라 움직이는 가상최면놀이(놀이제목은 내 맘대로다), 둘둘 말은 신문지를 가지고 상상력을 동원해서 사물의 변형성을 끌어내야 하는 초간단 마임 놀이(둘둘 만 신문지 하나를 가지고 다 큰 어른들에게서 서른 개가량의 상상이 나올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다!!!)를 지나 동화의 두 장면을 골라 정지동작으로 표현한 다음 동화의 제목을 알아맞히는 놀이까지, 이 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놀이체험에 쏙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끝 부분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행복한 왕자’로 연극놀이를 했다.  행복한 왕자 동상 제막식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되어보기도 했고, 둘 씩 짝을 지어 한 사람을 행복한 왕자 동상이, 다른 한 사람은 제비가 되기도 했으며, 맨 마지막엔 세 팀으로 나누어 행복한 왕자들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짤막한 연극 한 편을 공연(?)하기도 했다. 

강의를 따라가다 보니 서로의 생각과 상상들이 한데 어우러져서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연극은 서로에게 자극이 될 뿐 아니라 일종의 감정적인 카타르시스 효과까지 내는 것 같았다.  이를테면 난 행복한 왕자가 어떤 사람일지 잘 생각해보지 않았었는데, 행복한 왕자가 생전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아도 될 만큼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말에 ‘참 무미건조한 삶을 살았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행복한 왕자의 도움을 받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도움을 받은 후에 행복했을까, 하는 의문 역시 이 연극놀이 이전엔 별로 생각해보지 않은 부분이었다. 

놀이연극은 그런 면에서 느낌을 구체화하고 생각을 확장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효과가 큰 것 같았다.  아줌마들이 이 정도의 신선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아이들은 어떨까, 궁금했다.  아이들은 더 신나고 재미있게 참여하고 거침없이 자기의 내면을 쏟아내고 다시 채우는 경지에 더 빨리 도달하지 않을까.  함께 연극에 참여하는 다른 아이들과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고 조율하고 합의점을 찾아가는 미덕을 배우지 않을까.  서로 다른 빛깔로 점점이 찍어 놓은 물방울무늬 같던 아이들이 한데 섞이고 어울리는 다양한 빛의 스펙트럼을 만드는 즐거움과, 여럿이 함께 가는 길에선 때론 내 주장과 의견을 스스로 꺾고 욕심을 덜어내야 할 때도 있다는 삶의 지혜를 얻지 않을까.

강의가 끝날 무렵엔 엄마들 모두 아쉬워했다.  내 아이들을 연극놀이에 참여시키고 싶은 욕심이 마음속에서 스멀거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엄마들이 오늘 연극놀이의 맛을 알았으니 관장님을 잡고 조르지 않을까? 책엄책아의 김소희 관장님의 고민이 하나 더 늘게 될 듯...^^

집에 돌아오면서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연극놀이가 유아나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지나야 하는 청소년들에게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집에서 내가 유빈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연극놀이 비슷한 것이라도 뭐 좀 없을까 싶기도 하고, 첫째 유진이랑 둘째 명보는 이런 것도 모른 채 너무 자라버려서 참 안됐다는 생각도 들고, 오늘 날씨도 나쁘고 가는 길에 유진이 학교에도 들러야 했고 아침에 유빈이가 짜증을 좀 부렸는데도 게으름 떨지 않고 택시를 타고서라도 도서관에 가서 착한 학생이 되어 앉아 있었던 나 자신이 참 성실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칭찬도 해주고.. 

다음 주는 전래놀이에 대한 강의다.  무보수에 노동시간이 엄청 길고 스트레스 강도도 세지만, 엄마라는 직업(?), 참 좋은 직업인 것 같다.  아이와 함께 나도 계속 자랄 수 있으니까.

    ***  참고도서
  유아를 위한 연극 놀이 (김 선 외 지음/ 창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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