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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 생각하는 그림들
이주헌 지음 / 예담 / 2004년 12월
평점 :
절판
‘안목’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이라고 나와 있다. 또 ‘심미안’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은 ‘아름다움을 살펴보는 안목’ 또는 ‘아름다움과 추함을 분별하여 살피는 마음의 눈’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자주는 아니지만 어쩌다 가끔 미술작품이나 사진작품 같은 것들을 마주하게 되면 그 안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지 몰라 난감해질 때가 많다. 마치 눈 뜬 장님이 된 것처럼 그 앞에 멍하니 서서 그저 “참 잘 그렸다.”라는 말 한마디 외엔 딱히 떠오르는 구체적인 느낌이 없어서 당황하게 되곤 한다.
그래서 작품을 보는 안목이나 심미안이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만 뼈아프게 확인하게 되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런 눈을 가져봤으면, 하고 더욱 바라게 된다. 작품의 역사적 시대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나, 작가에 대한 정보, 수준 높은 미학 지식, 다양한 갈래의 예술사조에 대한 숙지, 색채와 형태에 대한 예민한 직관, 상징을 읽어내는 능력 등등을 갖추지 못했음을 자조自照하게 되는데, 결국 난 그림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 아닐까 의심하며 고민을 끝내곤 했다. (길게 고민해봤자 뾰족한 수가 없다.)
그래도 남은 아쉬움을 어쩌지 못하고는 가끔 미술관련 책을 읽는 걸로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그것도 너무 어려운 책은 읽어낼 자신이 없어 슬쩍슬쩍 피해가면서.
이 책 <생각하는 그림들 정>에서 저자는 미술에 관한 이론체계나 축적된 지식들을 배제하고 개별 작품에 대한 저자의 느낌과 이야기를 풀어낸다. 마치 “그런 거 몰라도 돼요.”하는 것 같다.
글머리에서 저자는 “비록 미술사적인 지식이나 정보를 체계적으로 얻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하더라도 구체적인 작품을 보고 즐기는 데는 만족스런 길잡이가 되도록 노력했다. 어찌 보면 큰 감동을 주는 작품 하나와 진지하게 만나는 것이 미술 전반에 관해 많은 지식을 얻는 것보다 나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마음의 부담을 덜어주는 친절한 가이드인가.
책읽기의 부담을 덜어내고 책장을 넘겨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살이는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그래서 그림 속에 담겨진 사람이나 풍경의 모습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는 작가의 말을 의지 삼아 용기를 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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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보다도 저자의 글이 먼저 마음에 와 닿는다. 이 사람, 그림 보는 재주와 글 쓰는 재주를 함께 가진 복 받은 사람이구나, 하는 부러움을 먼저 느꼈다. 볕이 잘 드는 넓고 시원한 창가에서 그림 하나를 펼쳐 놓고 고요히 들여다보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를 정도로 그림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가 자분자분하다.
그림 속으로 이렇게도 들어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엔 작품에 대한 설명이 너무 가볍고 시시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읽어갈수록 나도 이 남자처럼 그림 앞에 고요히 머물면서 조심스럽게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단 생각이 커져갔다. 내 소소한 일상, 내가 나누었던 사랑들, 내가 느꼈던 아픔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내가 마주한 그림 속에 투영되어 하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하는 바람까지 언감생심 품어가면서 말이다.
물론 미술 감상에 필요한 기본적이고도 핵심적인 지식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다보면 그림을 읽고 감상하는 데 그리 큰 지식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에게 예술 감상이란 저자의 말처럼 “나 자신을, 나 자신의 삶을 비춰보는 행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테니까.
화가의 의도나 전문적인 배경지식 같은 거 대충 덮어버리고 서툴게라도 그림과 가까이 하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심청이의 아비처럼 번쩍 눈을 뜰 수 있을까? 그림에 대한 문맹, 또는 난독증에서 벗어나 한 폭의 그림이 온전히 마음으로 젖어드는 그런 날을 맞이할 수 있을까?
이 책과 같은 시리즈로 <생각하는 그림들 오늘>이 있다. <정>보다 앞서 출판된 생각하는 그림들 시리즈의 첫 책이건만 어쩌다 보니 <정>부터 꺼내 읽게 되어 순서가 뒤바뀌었다. <오늘>에는 우리나라의 현대미술작품에 대한 이주헌 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그 이야기가 무척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