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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공책 ㅣ 도코노 이야기 2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부드러운 동양적 판타지, 요란스럽지 않고 고요하며 순수하고 따스하고 아련한 느낌을 주는 글이었다. 이 책을 나보다 앞서 읽은 딸은 글이 너무 ‘나긋나긋하다.’고 표현해서 내 공감을 얻었다.
소설의 앞부분을 읽을 때 내 머리 속에 그려지는 이미지들은 그림이 고운 순정만화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울과 소피가 공중산책을 하는 장면을 보는 느낌과 비슷했다. (공중 산책하는 장면이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조차도 어쩌면 그렇게 만화적이던지, 하긴 판타지니까....,하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어쩌면 일본은 판타지 영역마저도 이렇게 밝고 아기자기하고 공손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의 첫 부분, ‘어느 시대든 새로운 것은 배를 저어 나아가는 바다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이야기를 연다. 이 비유적 표현은 서서히 주변 열강들에게서 근대화를 강요받기 시작하는, 새로운 문이 열리고 있다는 기대와 함께 두려움과 불안이 공존하는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는 것인데, 소설에서 이러한 시대적 배경은 이야기를 끌고 가는 커다란 축이 되고 있다.
예를 들어 서로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두 사람, 전통 일본화에 염증을 느끼고 서양화를 공부하는 시나와 일본 전통 예술을 고수하는 불상을 조각하는 불사 에이케이는 개방과 전통이라는 양립되는 개념이 충돌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작중화자의 역할을 담당한 미네코는 “두 분 사이에 어떤 심오한 것이 오갔다”(p.56)고 하면서 그것이 “험악한 것이 아니라 정감 넘치는 진실한 것”(p.56)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작가는 개방화, 근대화의 거센 물결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밀려난 전통문화에 대한 안쓰러운 시선을 감추지 않는다. 이 시선은 마키무라 집안의 병약하고 아름다운 아가씨 사토코를 통해서 드러나는데 사토코는 전통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에이케이에 대한 사모의 시선을 거두지 않으며 종국엔 ‘마을을 지킨다.’는 가문의 사명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일에 절정의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전통에 대한 애정,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빠르게 잊혀져가는 정신적 가치들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부분이었다.
‘역사의 물결은 개인의 삶을 난폭하게 휘저으며 흘러간다.’ 라는 주제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어느 시대에도 혼란은 있었고, 세계는 늘 어딘가에서 이어져 있었네. 하지만 앞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의 혼란이 일어날 테지. 세계는 보다 가까워지고 보다 좁아지고 있어. 어딘가에서 태풍이 발생하면 바람을 피할 수 없게 돼. 세계는 일련탁생이 되어가고 있는 걸세“(p.87 一連托生 죽은 뒤에 극락정토에서 같은 연꽃 위에 다시 태어난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 선악이나 결과에 대한 예견에 관계없이 끝까지 행동과 운명을 함께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네이버 사전)라는 도코노 일족인 요타로의 말이라든가 청나라와의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아픔을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으로 대신하는 이케하타의 기행, 마지막 미네코가 전하는 에필로그 같은 부분 등이 그것이다.
역사의 거대한 힘 앞에 나약하고 무력한 개인의 가치와 꿈이 지켜지고 간직되었으면 하는 희망이 도코노 일족의 ‘넣을 수 있고 울릴 수 있는’ 판타지적 능력을 만들어 낸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네코는 “그분들이 저희들의 마음을 남겨줄 것이다. 저희들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지 깨달은 것입니다.”(P.273)라고 말한다. 도코노 일족의 그런 능력과 방법으로 개인의 가치와 꿈, 삶의 이유들이 지켜지고 따뜻한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일 게다. 그러나 내가 도코노 일족이 아닌 다음에야 그게 가능할까?
소설의 뒷부분은 다분히 최루적인 내용이고 감성을 자극하는 문체로 엮어진다. 너무 감상적이다, 하고 내 이성적 부분이 판결을 내리고, 이런 최루적인 감상에 대책 없이 빠져드는 건 유치한 일이라고 경고하는데도 불구하고 콧등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게다가 미네코는 미약하기 짝이 없는 개인의 힘으로 ‘만들어나갈 나라가 정말 있기는 할까요?’(P.280)라고 묻는다. 더 나아가 도코노 일족에게 ‘저희가 이 나라를 만들어갈 수 있을지, 그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인지’(P.281)를 물어보고 싶어 한다. 개인의 순수와 꿈이 존중되고 보호되는 나라를 만들어 가고 싶다는 간절한 희망의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지낸 날들 중에 지인의 첫 번째 기일이 있었다. 지인의 묘소 주변에는 한창 바쁜 여름날의 개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서 개미들은 무심하게 내딛는 우리의 발걸음에, 또는 의도적인 발짓에 희생되었다. 마치 인간 개인이 역사의 횡포에 희생되는 것처럼.
묘소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인간의 장례나 제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간만이 죽음을 기억하려 애를 쓴다. 이미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이들의 끝나버린 삶을 남아서 살아 있는 이들은 놓치지 않으려고 그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형식과 절차를 전통과 관습이라는 도구로 묶어 놓았다. 인간의 영혼만이 숭고한 것일까, 그렇다면 묘소 앞에서 희생된 그 개미들은? 인간만이 숭고한 영혼을 지녔기에 그래서 우리는 떠나버린 영혼까지도 정성을 기울여 보살피려는 것일까.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다보니 지인의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도코노 일족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런 절차와 형식을 통해 그 지인의 삶과 마음을 우리 마음의 서랍 안에 넣어두고 간직하며 오래도록 울릴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인간이란 ‘타인은 볼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절대로 볼 수 없는 존재’(P.181)이기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할 수 없고, 따라서 서로 타인의 기억 속에 저장되기를 본능적으로 간절히 소망하게 되는 건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은 도코노 일족의 “넣고 울리는” 능력과 비슷한 ‘기억’이라는 능력을 통해 따스한 연대를 이루고 서로를 지켜주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면에서 우리는 어느 정도 약간 씩은 도코노 일족의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 능력을 발휘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란 생각도 들었다.
판타지의 홍수 속에서 고요하고 부드러운 동양적 판타지를 만나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판타지 소설이지만 이 소설 안에는 맞서 싸워 이겨야할 괴물도 없고 목숨을 걸고 대항해야만 하는 악마적 존재도 없다. 그런 면에서 여성적 판타지라는 생각도 든다. 도코노 이야기 첫 번째인 <빛의 제국>과 <엔드 게임>을 주문해놓고 배송되어오기를 즐겁게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 오타 발견 : P.53 '어차피 나는 셋째 아들이라 가어을 이으려야 이를 수도 없지만.'
'이을 수도 없지만.’ 으로 교정해야 할 듯.
** 의문 ; ‘빵’이라든가 ‘홀’같은 외래어 등을 굵은 글씨로 인쇄해 놓았다. 아마도 외래어 표기를 가타가나로 표기하는 일본글을 옮기면서 그렇게 된 것 같은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