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지리산..


오래 전에 눈 덮힌 겨울 지리산을 올랐었다.  아이젠을 부착하고 눈이 얼은 길을 콩콩 찍으며 오르는 산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침낭이며 쌀, 김치, 열량을 보충하기 위한 비상식품, 버너와 코펠 등등 이것저것 싸넣은 베낭은 어깨를 짓눌렀다.
낑낑대며 산을 오르다 보면 덥고 땀이 났다.  겨울 산행이라고 입고 온 파카를 벗어 배낭에 구겨 넣어야 했다.
그러다가도 잠시 쉬려고 바위턱에라고 걸터앉아 있으려면 땀이 식으며 으스스한 한기가 느껴져 구겨 넣었던 파카를 꺼내어 주섬주섬 다시 입어야 했다.  
(삶의 뜨겁고 차가움, 적응은 우리 몫이었다.)


서서히 지쳐갔다. 
산을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산장까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어보면 다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돼요.  힘내세요." 했다.
얼마 후, 난 그게 선의의 하얀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10분 정도면 더 올라가면 돼요, 라는 말은 한 시간이 지나도 되풀이 되었다. 
(삶은 그렇게 희망에 속으면서 지속되고 완성되는 것인지도.)


산행에 익숙한 분들이 나를 재촉했다.  그분들 걸음을 좇아가려니 조바심이 났고, 걸음은 더 엉기는 것 같았다.
결국, 위험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먼저 가세요, 제가 뒤쫓아 갈게요, 하며 제발 먼저 가주시길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내 페이스를 찾은 산행은 어렵지 않았다. 
난 꾸준히 내 페이스를 유지하며 산을 올랐고 처음처럼 지치지도 않았다. 
상당히 뒤쳐질 거라 생각했지만, 난 느린 내 페이스를 유지하는 대신에 중간에 자주 쉬지 않아도 괜찮았기 때문에 앞서 가는 분들의 뒤를 많이 뒤쳐지지 않고 좇아갈 수 있었다. 
(삶은 타인의 걸음, 타인의 속도로 걸을 수 없다. )


장터목 산장에 이르렀을 땐 이미 저녁, 겨울 산이라 해가 금방 저물었다. 
산장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너무 사람이 많았다.
우리 일행 일곱명 중에 텐트를 가져온 사람은 딱 한 명이었다. 
다들 산장에 들어가 잘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텐트를 큰 것으로 준비하지 않았었다.
고작 2인용 텐트 하나가 일곱명이 누울 수 있는 우리의 유일한 잠자리였다.
하얗게 쌓인 눈밭에 텐트를 세웠다. 
각자의 침낭을 꺼내어 모로 누웠다. 좁은 자리를 효과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다같이 머리를 맞대고 눕지도 못하고 내 머리 앞뒤로 옆에 누운 사람의 발이 놓여져야 했다.  물론 내 발도 누군가의 머리 옆에 놓여있어서, 아무리 침낭 속의 발이라고는 하지만 혹시라도 옆에서 자는 사람의 머리를 발로 차는 일이 벌어질까봐 무척 신경이 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텐트 안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일곱 명의 들숨 날숨의 위력은 생각보다 커서 금세 텐트 안의 공기가 탁해졌고, 텐트 벽엔 물방울이 맺혀 흘러내렸다.
우리들의 칼잠은 더욱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일곱명 모두가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눈 덮힌 산에 세운 텐트 안이 전혀 춥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오니 벗어놓은 등산화가 꽁꽁 얼어 있었다.
서로 까칠해진 얼굴을 마주하고 웃으며 버너에 신발을 녹였다.   
(함께 하는 삶은 나를 숨막히게 하고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따뜻하고, 우리를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정상에 올랐다가 하산하는 길, 일행 중 한 명이 탈이 났다.
다른 한 분이 병이 난 분의 배낭까지 짊어졌고 또 다른 두 분이 부축했다.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겨우 지탱하며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면서 발을 딛었다.
내가 겨울 산행이 처음이라는 걸, 다른 일행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난 그만큼 배려를 받았었다.
그래서 나는 병이 난 그 분이 그렇게 힘들고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내가 다른 분들에게 폐가 될까만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무능과 의지박약은 다른 이의 삶을 방해할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내 삶까지도 약하고 결핍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


무사히 산을 다 내려오고 나자 안도감이 밀려왔다.
다시는 고생하며 산에 오르지 않으리라는 심술과 내가 저 산 속으로 걸어들어가 정상에서 하늘과 고사목과 산 아래 물결치는 구름안개를 모두 보고 왔다는 자부심이 뒤엉켰다.
그러나 가지 않으면 평생 모를 일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이 내가 가서 낯선 것들과 부딪쳐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낯선 것들과 부딪쳐 나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내가 나를 알 수 있고, 세상을 알게 될테니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07-07-15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리산 몇 번 갔었더랬지요. 대학교 4학년때 처음 단체로 갔었는데, 장터목 산장,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산에 오른 다음날 다리에 느껴지는 그 뻐근함을 느껴보고 싶어요. 그런데 요즘은 산에 올랐다 와도 다리가 뻐근하지 않더군요. 나이가 들면 여자도 남성호르몬 분비가 증가해서 그렇다나 흑 흑...

섬사이 2007-07-15 17:46   좋아요 0 | URL
등산을 즐기시나봐요. 산에 자주 오르는 사람들은 역시 다리가 튼튼하더라구요. 저는 산에 조금만 올라도 장딴지가 땡기고 허벅지가 뻐근해져와요.(운동부족을 뼈저리게 느껴요) 남성호르몬 분비와 상관없던데요.^^ 님이 건강하다는 증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