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좋았다. 부엌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아침을 준비하는 내마음을 설레게 했다. 이런 날 집을 나서지 않고 어찌 가만히 있으랴 싶었다. 갈 곳도 정해졌겠다, 집을 나서기만 하면 그 곳에야 시간이 알아서 데려다 줄 것이다.
비니가 잠 깨기를 기다렸다가 씻기고 밥먹이고, 옷갈아 입히고, 머리 빗기고... 외출을 위한 절차와 준비가 왜이리 복잡한지.. 자고 오는 여행준비를 하는 것도 아니건만..
지하철을 타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간송미술관까지 가는 길. 어른의 빠른 걸음으로 가면 10분,15분 정도나 걸릴까 하는 거리건만 비니걸음에 맞춰서 걷다보니 길이 한없이 늘어졌다. 중간중간 그야말로 '성북동 비둘기'들 구경도 하고 길에 한가득 내놓은 꽃들 구경도 하면서 드디어 간송미술관에 도착.
< 간 송 미 술 관 >
미술관 뜰로 들어서는 순간 코끝에 걸리는 풀과 흙내음. 아, 이 싱그런 내음 하나 만으로도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구나 했는데, 우리가 들어선 그 순간 미술관 한 켠 우리에 사는 공작새가 꼬리를 활짝 펼쳤다. 비니의 흥분.. "엄마, 짹짹, 엉덩이, 꼬리, 부채, 확~!" 이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그 흥분을 내게 전달하느라 열을 올렸다. 공작 우리 앞에 서서 한동안 공작의 화려한 꼬리털을 구경하고 공작우리 앞을 떠나려 하지 않는 비니를 살살 달래서 미술관 안으로 들어섰다.
전시 주제는 우암 송시열 탄신 사백주년기념 서화전. '진경문화의 뿌리를 마련해준 우암의 탄생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살던 시기에 제작됐던 그림과 글씨 및 그가 이룩한 이념기반 아래 그 제자인 삼연 김창흡의 제자 겸재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 중 일부를 한자리에 모아' 놓은 전시회였다. 오래된 그림들. 당시의 화가가 휘둘렀을 붓끝의 여운이 수백년의 시간을 건너 지금을 살고 있는 내 눈 앞에 펼쳐 보여진다는 사실에 숙연해졌다.
창강 조 속이라는 화가가 그린 고매서작 (故梅瑞鵲 ; 묵은 매화나무에 앉은 상서로운 까치)이라는 작품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매화나무 가지에 앉은 까치 한 마리의 자태가 사뭇 고독하면서도 도도한 듯하여 흔히 볼 수 있는 까치이건만 예사로이 보이지 않았다. 겸재 정 선의 박생연朴生淵 과 청풍계淸風溪는 그림 속에서 청아한 바람이라도 한 줄기 불어나올 듯, 요란스럽지 않게 고운 자태로 떨어지는 폭포의 정취와 거친 붓놀림으로 그려낸 장대한 나무들의 기상이 전해져왔다.
정유승의 <군원유희>라는 작품은 유쾌하다. 여덟마리의 원숭이가 서로 어울려 노는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머리를 긁고 있는 녀석도 있고, 남의 머리를 긁어주는 녀석도 있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장난감 같은 것을 갖고 노는 녀석들도 있다. 그 장난끼 가득한 모습들에서 다른 작품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밝음과 명랑함이 느껴져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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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강 조속의 <고매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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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의 전시를 보고 내가 가장 뼈저리게 느낀 점은 "내가 너무 아는 게 없다"는 점이다. 이제 마흔인데 왜 이리 모르는 것들 투성이일까.. 하고 자기연민과 패배주의에 빠질랑 말랑하다가 지금부터라도 하나씩 알아가자고 용기를 내보았다.
미술관 뜰은 너무 아름답다. 곳곳에 석탑과 불상들이 놓여있고, 커다란 나무 아래에 앉아 그 한적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누릴 수 있음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를 지키기 위해 사재를 털어 문화재를 수집하고 미술관을 설립한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흉상 앞에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득 담아 놓고 돌아섰다.
< 최순우 옛집 >
최순우 옛집을 찾아 나섰다. 오던 길을 되짚어 가다 보면 등촌칼국수집이 나오는데 그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최순우 옛집이 눈에 들어온다.
대문까지 올라가는 높다란 계단. 대문 위에 걸린 '최순우 옛집'이라는 현판. 계단에 비니를 앉혀놓고 사진 한 장을 찍고 계단을 올라 대문을 들어서는 순간, "아..."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시끄럽게 차들이 오고가는 큰 길을 잠시 벗어나 이 최순우 옛집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마치 설화 속의 나무꾼이 파랑새를 쫓아, 또는 떠내려오는 복숭아를 건져내다가 문득 신선계에 들어선 듯한 그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
우리나라 고유의 미학을 예찬하던 분의 집답게 어쩌면 그렇게 단아하고 소박하고 조촐하며 편안하던지. 비니는 툇마루에 누워 기와지붕 선을 따라 오려진 하늘을 바라보고, 나는 기와 틈틈이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난 한무더기의 노란 들꽃까지도 감탄하며 바라보았고, 지니는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수없이 내뱉는다.
사는 것까진 바라지 않더라도 이런 집에서 푸른 새벽 날이 밝아오는 것과 휘엉청 달이 떠오르는 것을 고요히 앉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집 뒷뜰에 놓인 달항아리.. 최순우님이 하얀 백자를 꺼내놓고 그 백자에 달이 비치는 모습을 사랑했다던ㅡ, 그 달항아리 백자가 정말 뒷뜰에 놓여있었다. 보고 싶다. 나도 그 백자 달항아리에 달빛이 어리는 모습을.
2시에 강연이 있고 그 강연이 끝나면 간송미술관의 출입금지 지역의 문화재를 답사하는 기회가 주어진다고 했다. 아쉽게도 너무나 혈기왕성한 비니 덕에 그 시간까지 머무는 것이 여의치 않아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라는 최순우님의 책을 사들고 옛집을 나섰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는 오래 전에 사서 아직 간직하고 있는데, <나는 내것이 아름답다>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바람에 내 것이 되질 못했다. 이 기회에 최순우 옛집 방문 기념 스탬프까지 꽝 찍어 왔다.
기회가 되시면 꼭 한 번씩 가보시기를.. 보여지기 위해 만들어진 민속촌이나 한옥마을과는 다른 정취와 감동을 맛볼 수 있으리라 장담하노니.. 두어시간 머물다 왔을 뿐인데도 평생 잊혀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운 집이다. 아직도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이 그 집으로 달려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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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대학로 무슨 문화 축제 어쩌구..뭐 그런 거였는데... 고즈넉한 옛집에 머물다가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축제 마당 가운데에 서고 보니 잠시 아득해지는 기분.
그래서였는지 마로니에 공원에서 벌어진 행사를 눈여겨 보지도 못하고, 지니만 자그마한 판넬에다 뭔가를 그리는 이벤트에 참가하고는 그냥 돌아왔다.
거리 공연이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랐건만, 야외무대에선 S여대 학생들과 즉석에서 올라온 청년들의 미팅을 주선하는 행사가 진행중이었다. 커플을 짜고, 짜여진 커플들끼리 춤 경연을 벌이고,,
한 쪽에선 유니셰프 등등의 사회단체에서 봉사하는 청년들이 후원모금을 하고 있었다. 지니와 뽀가 지들 용돈을 모아 매달 유니셰프에 적은 액수지만 정기적인 기부를 하고 있어서 관심있게 보려했지만 후원모금행사의 분위기가 너무 지나쳐서 그냥 돌아나왔다.
집에 돌아오니 다섯시가 넘어 있었다. 비니는 말할 것도 없고 나와 지니도 지쳐서 있는 반찬으로 대충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서 벌러덩 누워버렸다.
놀라운 건, 그 와중에도 알라딘 서재는 열어봤다는 것. 서재중독이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