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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6년 8월
평점 :
나는 이 문장을 가리켰어, 존재.
그는 이 문장을 가리켰어, 무.
나는 이 문장을 가리켰어, 존재.
아무도 이 문장을 가리키지는 않았지, 당신을 사랑해요.
그 주위에는 길이 없었어. 우리는 그것을 기어올라 넘을 수도 없었고,
끝이 나올 때까지 걸어갈 수도 없었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우는 데 한평생이 걸렸다니 한스럽구나.
작가가 시도한 기발한 발상의 타이포그래피, 이야기의 전개 방식, 중간중간에 끼워넣은 사진들.. 에 대한 논의는 미루어두기로 하자. 중요한 건 내 느낌이니까.
아홉살 소년 오스카는 아빠를 잃은 상실감과 슬픔, 정신적 충격을 감당해내기 어렵다. 그래서 오스카는 평범한 사람들이 잠드는 데 걸리는 평균시간 7분을 넘겨도 잠이 들지 못하고 끊임없이 발명을 한다. 9.11 테러로 숨진 아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아홉살 아이의 상상력이 만드는 "새모이로 만든 옷"과 같은 발명들이다. 스티븐 호킹 박사에게 편지를 쓰고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스크랩하고 기록해둔다.
오스카의 할아버지 토마스는 2차세계대전 당시에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여자와 그 여자 뱃속에 잉태된 아이를 잃었다. 비행기에서 퍼붓는 폭격 한 가운데 있었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갈기 갈기 찢겨지는 모습을 지켜봐야했다. 오스카의 할아버지 토마스는 오스카와 똑같이 상실감과 슬픔, 정신적 충격을 감당하며 살아야했다. 말을 잃는 방법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떠나는 방법으로, 현실에서 도피하는 방법으로.
오스카의 할머니 슈미츠, 할아버지가 사랑했던 애나라는 여자의 동생.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이 너무 어렵고 힘들다. 할머니 또한 상실의 상처를 안고 있는 까닭이다.
책을 읽으며 내 안에 계속 떠오르는 감정은 연민이었다. 9.11테러나 2차세계대전이나 그런 것들은 모두 우리가 원하지 않은데도 불어닥친 폭풍이나 토네이도, 또는 쓰나미다. 어떤 사람들은 그 와중에서도 잘 견디며 자기의 삶을 굳건하게 지켜낼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휘청대고 삶 자체가 모두 어긋나버리게 된다. 어찌해 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힘과 마주쳤을 때 내 주변의 사람들과 나누는 따뜻한 정과 사랑이 변형되지 않고 남아있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불가항력의 세계 앞에 한없이 작고 연약해서 상처나고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연민이 솟게 하는 책이었다.
책에 실린 사진들은 주로 오스카가 모아둔 사진이거나 할아버지의 사진기를 이용해 찍은 사진들이다. 한페이지에 한 줄의 글이 있는 부분은 말을 할 수 없는 오스카의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방법으로 쓰는 노트다. 이런 장치들을 통해서 나는 이 책의 독자가 아니라 이 책의 이야기 속에 포함된 인물이 되어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오스카는 내게 사진을 보여주고, 오스카의 할아버지는 내게 자기의 노트를 내미는 것이다. 다른 책들에서는 하기 어려운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야기의 전개방식은 다소 복잡하다. 오스카의 이야기였다가 할아버지의 편지나 할머니의 편지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얽히고 설켜서 하나의 가닥을 쫓아 다른 가닥을 붙잡아야 했다. 그러나 책 속에서 몇 차례 반복되던 질문.
"왜 누구나 사랑을 나눌까?"
왜 누구나 사랑을 나눌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별로 생각해보질 않았었다. 왜 사랑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사랑이 내게 늘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도 아니었는데, 이 책에서처럼 불가항력의 폭풍이 한 번 휩쓸고 지나가면 잃어버릴 지도 모르는 사랑인데, 아니 불가항력의 힘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이 가진 나약함 때문에 놓쳐버릴 수도 있을 만큼 부숴지기 쉬운 사랑인데, 그리고는 상실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왜 누구나 사랑을 나눌까?
어느 날 갑자기 부숴지고 잃어버릴 수도 있는 사랑이기에 지금의 사랑을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래서 오스카의 할머니는,
너에게 지금까지 전하려 했던 모든 이야기의 요점은 바로 이것이란다, 오스카.
그 말은 언제나 해야 해.
사랑한다.
고 말한다.
그러니 나는 오스카처럼 자기의 존재이유(레종 데르트)를 비틀즈나 엄마를 행복하게 하고 보호해 주는 것이나 할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이나 비밀의 자물쇠를 찾는 일에 두면서 자기자신에게는 상처를 내는 일을 멈춰야 할 것이다. 상실의 상처를 회복하고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일, 그래서 지금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그리고 열심히 사랑하는 일을 레종 데르트로 삼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 말했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언젠가 다시 한 번 더 읽어봐야 할 책이다. 이제 이 책의 독특한 이야기 방식에 익숙해졌으니 다음에 읽을 땐 이 책의 이야기 방식을 좀 더 잘 따라가서 새로운 보물을 발견할 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에 새겨진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지, 그건 아직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