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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 Philosophy + Film
이왕주 지음 / 효형출판 / 2005년 8월
평점 :
퓨전이 유행이다. 책에서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과학과 요리가 만나기도 하고, 예술과 역사가 만나기도 하며, 동화와 철학이 만나기도 한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도 이런 퓨전도서(이런 명칭이 있는지 모르겠지만)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영화를 통해서 철학을 이야기 하는.
대학시절 교양과목으로 철학개론 강의를 듣고, 몇 번 쯤 <인간본질에 관한 일곱가지 이론>이라든가 <소유냐 존재냐> <사랑의 기술> 등등의 철학 관련 책들을 읽었었다. 그런데 그 얄팍함이 어디가랴. 대학을 졸업하고 15년을 훌쩍 넘겨버린 시점에서 철학을 논하던 교수님의 카리스마 넘치던 강의도 친구들과 모여 앉아 강독했던 책들의 내용도 흐릿한 윤곽만 겨우겨우 막연하게 떠오를 뿐이다.
이제 한 번 덤벼볼까 하는 용기마저 꺾여버린 듯한 상황에서 "철학은 몰라도 영화얘기라면 혹시?"하며 겁도 없이 덥썩 잡은 책이다. 당연히 저자가 책을 통해서 말하는 철학에 관한 내용에 대해 반박하거나 이의를 제기할만큼의 철학지식을 가지지 못했으므로 이 리뷰는 극히 내 개인적인 느낌에 충실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저에 깔아둘 수밖에 없다.
내게 가장 크게 다가온 이 책의 장점은 내 일상의 삶에서 잠시 물러나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지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볼 기회를 주었다는 점이다. 내가 어떤 눈으로 타인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내가 나의 미래와 현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지.. 그리고 내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삶에 대한 나의 인식에서 잘못된 부분은 무엇인지.
내게 철학은 이론이었고, 철학자 그들만의 심오한 사상이었고, 삶과 동떨어진 난해함이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내 삶을 비추는 철학이라는 거울을 보게 된 느낌이 든다. 그런 느낌이 이 책을 쓴 저자가 철학을 솜씨좋게 풀어간 덕분인지, 아니면 더께더께 쌓인 나이만큼 내 삶의 품이 조금은 더 넓어진 덕분인지, 아니면 그 둘 다 때문인지 그건 모르겠다. 피타고라스의 '세 부류의 사람'에 대한 정의, 파이어아벤트의 왼손잡이의 예술에 대한 논의, 공자의 화이부동과 동이부화의 가르침, 하이데거가 말하는 '있음'과 '있는 것'의 차이, 니체의 춤과 망각과 기억, 실존에 대한 외침, 포스트모더니즘의 '바깥'과 유목민으로서의 자유로운 삶에 대한 주장... 이 책에 소개되는 철학적인 논의들이 내가 받아들일 수있는 만큼의 크기와 깊이로 다가오는 것이 기뻤다.
철학은 사람을 철들게 하는 학문일까? 나를 향한 시선과 타인과 세상을 향한 시선을 억지스럽지 않게 조율해주고 그리하여 나와 세상이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게 도와주는 그런 학문은 아닐까. 평범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저 너머까지 사고의 지평을 넓혀가는 어떤 특별한 사람들의 난해한 이야기가 아니라, 반복되는 일상으로 점점 근시안이 되어가는 나의 손을 잡아끌고 넓은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의 탁트인 시야를 경험하게 해주는 그런 것 말이다. 그래서 다시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더 넓어진 시각 안으로 내 삶과 세상을 넉넉하고 여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그런 것... 치열하게 살지만 너무 매이지 않게 해주는 어떤 것...
책이 나를 선동하고 좌지우지하려는 듯한 느낌의 자기계발서들보다 훨씬 더 사려깊고 지혜로운 책이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