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에서 10까지 사랑의 편지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4
수지 모건스턴 지음, 이정임 옮김 / 비룡소 / 2002년 4월
절판


할머니는 뭘 물어 보는 법이 없었다. 무릇 나날이란, 으레 일어나야 할 일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질 따름이다. 사람은 누구나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뿐이다. 그 이상은 없다. 한데 갑자기 어네스트가 그 이상을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하긴 가끔은, 으레 일어나는 일들과 해야 하는 일들 이상의 사소한 무엇이라도 불러일으켜야만 할 때가 있는 법이다. -43쪽

어네스트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왠지 묘한 뿌듯함이 솟구쳤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불편함도 커갔다. 할머니와 제르멘 할머니는 말은 없었지만, 눈빛들만은 반짝거렸다. 바야흐로 호기심이, 눈에 불을 켜게 만드는 바로 그 삶의 활기가, 드디어 그들이 살고 있던 묘지 대기소로 스며들고 있는 것 같았다. 문이 열린 것이다. -53쪽

"평생을 너무 힘들게 살아오셨군요. 할머니."
"상처가 깊을수록, 할 말은 적어진단다."-64쪽

'한 번도'란 단어를 단 하나만이라도 지울 수 있게 된 날은 대단한 날이다. 그 '한 번도'를 적어도 세 개 이상 지우고, 대신 그 자리에 '처음으로'란 말을 쓸 수 있게 된다면 그 날은 세 곱절로 대단한 날이다. -71쪽

할머니는 전쟁과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아픔과 상실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다. 하지만 어쨌거나, 죽은 사람들을 날마다 조금씩 더 죽어가게 내버려두느니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게 백 번 낫다. 우리가 죽은 사람들을 기리며 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죽은 사람들을 살아 있게 한다. 결코 눈물방울이 그들을 살려 내는 건 아닐 것이다.
그건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실 살아 있는 사람들이지만 서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쿠스쿠스. 그건 참 멍청해 보인다. 하지만 쿠스쿠스는 어렴풋이나마 내게, 사람은 언제든지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부었다. 단, 거기엔 훌륭한 스승과 강한 의지가 필요할 것이다. 참으로 나는 그런 굳센 의지를 가지고 싶다. -73쪽

빅투와르가 병이 난 지도 벌써 일 주일이 지났다. 그 애가 없는 한, 어네스트도 반 쪽만 있을 뿐이었다. 어네스트는 둘이서 함께 쓰던 책상에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금이라도 쳐져 있기나 한 것처럼, 차마 그 이상을 넘을 수가 없었다. 마치 그 금이 빅투와르의 팔꿈치라도 되는 양, 그랬다가 행여 자기가 그리는 마음 속의 빅투와르를 으스러뜨리기라도 할까 봐. 그 앤 없었지만 어네스트에게는 그 애가 여전히, 엄연히, 커다랗게 존재하고 있었다. 텅 빈 구멍으로 말이다. 어네스트는 어떻게든 그 구멍에 빠지지 않으려고 에움길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돌아가려는 생각에만 너무 골똘해진 나머지 결국은 별수 없이 다시 또 그 구멍에 빠져들곤 했다. 수천 가지 말들을 그 애에게 하고 싶었고 그 애의 수천 가지 말들이며 몸짓들이 그리웠다. 그게 바로 휑하니 뚫린 구멍있고, 다할 것 같지 않는 허전함이었다. 학교가 알맹이가 빠져버린 빈 껍데기처럼 휑뎅그렁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 대신 한다지만, 없어선 안 될 사람이란 없다고들 하지만, 어네스트는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없어서는 안 될, 누구도 대신 해 줄 수 없는 존재들이다. 적어도 그 부모들에게 있어서는!' 어네스트는 어쩌다 자기의 생각이 부모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부모도 없으면서. 때때로 어네스트는 차라리 생각을 끊어 낼 수 있다면 싶었다. -140쪽

"아빤 제가 태어나자마자 사라졌어요. 할머니는 아무것도 말씀해 주지 않으세요. 그것마저도 비밀인가 봐요. 전 비밀이 싫어요! 사람은 누구나 서로 얘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뭐 저 혼자 숨바꼭질 놀이나 하자고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아니잖아요. 진실을 찾고 진실을 말해야지요. 큰 소리로 당당하게 말이에요!"-159쪽

"모든 사람을 다 좋아할 수는 없어.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행운인 줄이나 알아."-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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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4-30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72쪽!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제대로 마음껏 좋아해야겠어요.
섬사이님, 좋은 하루, 힘찬 한 주 시작하세요^^

섬사이 2007-04-30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배혜경님,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마음껏 좋아해줄까봐요. 배혜경님도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