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까지만 해도 여름날 장마비처럼 비가 거하게도 내리더니
오늘 눈발이 날린다.
커다란 베란다 창너머에 이제 막 노란 산수유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그 사이사이로 하얗고 여린 눈발이 놀자는 듯 희롱한다.
화단 흙을 헤치고 뾰족 돋아난 히야신스의 새싹이 얼지나 않을까 걱정스럽다.
저 뻗은 길 옆 담벼락에 나란히 서있는 매화나무 열그루.
곧 뻥하고 터질 듯한 뻥튀기처럼, 하얀 팦콘알들처럼,
꽃봉오리들이 잔뜩 부풀어 올랐는데
바람에 눈발에 다 떨어져버리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지난 해 봄, 저녁에 설거지를 끝내고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 온다는 핑계로
뿌연 보라빛 어둠 속으로 걸어나가면
봄날, 활짝 핀 매화나무 열그루 아래를 지날 때
은은하게 풍겨오는 꽃향기란..
이래서 꽃향기에 취한다는 말이 나오는 거구나 하며 얼마나 황홀했던지.
화려한 벚꽃과는 다르게 정결하고 다소곳하고 수줍어 숨은 듯한 매화는
옛 선비들의 마음을 사로잡고도 남을만한 매력이 있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 길에 매화나무 아래에서
늑장을 부리며 일부러 걸음을 늦추곤 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내가 얼른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과 남편을 지우고
매화나무 아래서 그윽한 시간을 갖는다고 큰 잘못은 아니라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멈춰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했었다.
흩어져 떨어지는 가녀린 눈발에라도 행여 매화꽃봉오리가 다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건 지난해 봄에 누렸던 그 짧은 정취가 그립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길가 돌틈에 피어 있는 민들레를 만날 날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있다.
그 강하고 끈질긴 생명력 앞에 설 때마다 얼마나 숙연해지고 감격하게 되는지,
그 작고 동그란 노란 꽃이 어찌나 사랑스럽고 예뻐보이는지..
대학 시절에도 캠퍼스 안에서 민들레를 만나면 그 앞에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있곤 했다.
그런데 봄이 오는 길목에서 흩날리고 있는 저 눈들을 어떻게 하면 좋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