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이에 <한겨레> <조선일보>를 지목해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한 주된 이유는 1938년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물자절약 및 조선어 말살 차원에 있었다. 이는 폐간사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夙夜奮勵)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밝힌 데서도 <조선일보>가 무슨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폐간 보상금으로 <매일신보>와 총독부로부터 각각 20만원과 80만원을 받았다. 당시 일본군 전투기 한대가 10만원이었음을 보면 적지 않은 돈일 알 수 있다고 반박했다.


(53)

1942년 작성된 임시정부의 내부보고서는 미주 동포들이 보내주는 월 1,050달러의 지원금만으로는 300여 명으로 불어난 인원을 감당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간 줄곧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을 요구해온 중국 측은 한편으로는 재정지원 등을 내걸고 다른 쪽에서는 병사모집을 하는 광복군 지휘관에게 통행증을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1942 4월 임시정부는 광복군 통수권을 중국 측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 측도 광복군을 제대로 유지할 형편이 못 되자, 1943 2월 임시정부는 정식으로 군 지휘권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중국 측에 하기에 이르렀다.


(62-64)

영국 BBC 2002 3월 방송한 화제작으로 이 부대원들의 생생한 증언과 생체실험을 겪은 중국 현지 피해자들의 소송준비과정 등을 담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경악할 만한 부분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비견될 가공할 전쟁범죄를 저지른 731부대 요인들이 나치와는 달리 아직도 일본 정계 및 보건 의료계에서 버젓이 핵심세력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고바야시 로쿠조(일본 국립 방역연구소 소장), 나카구로 히데토시(국방의학대학 총장), 나이토 료이치(녹십자 회장), 기타노 마사지(녹십자 대표이사), 가수가 추이치(트리오-켄우드 회장), 요시무라 히사토(교토 의학대학 총장), 야마나카 모토키(오사카대 의과대학 총장), 오카마토 코조(교토대 의과대학 학장), 다나카 히데오(오사카대 의과대학 학장) 등이 문제의 인물들이다. 특히 731부대의 책임자였던 이시이 시로는 일본이 미군에 항복하자 부대에 남아 있던 포로들을 학살하고 실험용 쥐를 풀어 증거를 인멸했다고 한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뒤 미국이 탐내던 실험 관련 데이터를 넘기는 조건을 면책을 얻어냈다.


(149)

김구와 임시정부는 1943 6월경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에게 미영중소 연합국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을 알고, 장제스에게 접근했다. 1943 7 26일 장제스는 김구의 요청에 응해 한국 요인 6명을 비밀리에 공관으로 초빙했다. 참석자는 김구, 조소앙, 김규식, 이청천, 김원봉, 그리고 통역으로 참석한 안원생(안중근의 조카)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종전 후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고 국제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중국 측의 지지와 지원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바로 이 약속이 카이로회담에서 이행된 것이다.


(163)

역설이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가를 위한 희생자에 대한 예우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단일인종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은 정반대다. 그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이다. 이름이 높거나 세상의 관심을 끌 만한 계기가 있으면 모든 정성을 다 바치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누가 너더러 그렇게 하랬어?”라는 식이다. ‘한국인 징용자들의 비극이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67-168)

전쟁 당시 일본 야무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을 지냈던 요시다 세이지는 나는 한국인 종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던 그야말로 노예 사냥꾼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6,000명 정도를 직접 연행했다. 극비의 노무명령서에 따라,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여성 전원을 길로 끌어냈다. 도망치면 목검으로 때렸고 젊고 건강한 여성을 골라 트럭에 실었다. 안고 있던 아기를 잡아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 간 적도 있다. 비명을 지르는 젊은 어머니를 때려 쓰러뜨리고 2~3살의 어린이가 울면서 따라오면 애들을 내팽겨쳤다. 이렇게 모은 여성들을 화물열차와 관부연락선에 짐짝처럼 실어 시모노세키에 와 서부군 사령부에 인도하면 군용선박으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각지로 보내졌다. 종군 위안부를 포함해 강제연행 관련 공식기록이나 관계문서는 패전 직후 내무차관 통첩으로 모두 소각처분했다. 황군병사라면 (이런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전후에 누구 하나 종군 위안부 얘기를 하지 않는다.”


(200)

일본에 대해 너그럽고 싶은가? 한국의 반일감정을 경멸하고 싶은가? 역사를 알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 혹 오다가다 들은 게 있더라도 곧 잊어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선 일본에 대해 너그러울 수가 없다. 물론 오늘의 일본인은 가족끼리 때려죽인 오키나와 집단자결 사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러나 직접적인 책임만 없는 것일 뿐, 일본 정부와 우익의 교과서 왜곡에 침묵한다면 스스로 간접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상적 삶에선 지구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선량한 일본인들의 적극적인 양심회복운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다.


(236-237)

그러나 그 어느 쪽이건 한국이 미소 두 강대국이 그들 마음대로 갖고 노는 장난감과도 같은 비참한 운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작 분단되어야 할 나라는 전범국가인 일본이었건만,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이 분단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38도선에서의 미소 양국군의 한반도 분단 점령은 일본 분단 점령의 대용품이 되고 말았다.”


(248)

전후 연합군의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처벌받은 B, C급 전범 5,700여 명 가운데는 조선인 148명이 포함돼 있다. 그들 대부분(129)이 반강제적으로 동원된 포로감시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 5월 일본 육군은 말레이, 자바 등에서 펼친 남방작전에서 붙잡은 26만 명이 넘는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조선에서 3,000명의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계약기간이 2년이라는 점과 징병으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 지원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조선인들 중 129명이 포로학대를 이유로 전범처리됐고 23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일본은 겨우 7명이었는데도 말이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군인도 아닌 군무원 신분이었지만, 전범자로 처리된 비율은 악명높았던 일본 헌병의 처리 비율(4.3퍼센트)과 맞먹을 정도였다. 게다가 가시 노부스케 전 상공대신, 아베 겐키 전 내무대신 등 A급 전범 용의자들은 1948년께 일찌감치 석방됐고, 천황의 전쟁 책임은 불문에 붙인 점을 감안하면 전후 전쟁범죄재판은 한편의 거대한 사기극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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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6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지난 번 독서편지 때 이야기한 것처럼, 아빠가 여행길에 읽으려고 가져간 책들 중에 두 권밖에 읽지 못했다고 했잖아. 그 중에 하나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스페셜 컬렉션 시리즈 중에 <사랑을 배운다>라는 책이란다. 애거사 크리스티 컬렉션 시리즈는 모두 6권으로, 아빠는 그 전에 세 권을 읽고, 이번이 네 번째란다. 애거사 크리스티 컬렉션 시리즈는 추리 소설 작가로 유명한 애거사 크리스티가 또 다른 필명으로 쓴 비추리 소설들을 모은 시리즈란다.

지금까지 읽은 세 권 모두 재미있게 읽어서, <사랑을 배운다>라는 책도 기대를 하고 책을 폈는데, 이전에 읽은 책들보다는 재미가 별로더구나. 여행 중에 짬짬이 읽다 보니 이야기가 자꾸 끊겨서 그럴 수도 있고여행 중에 이 책의 제목을 본 너희들이 아빠, 사랑을 배우려고? 이렇게 질문을 던졌잖니사랑을 배운다고 잘 할 수 있겠니? ㅎㅎ 그런데 책제목은 왜 사랑을 배운다고 했을까? 그래서 원제를 찾아보니 <The Burden>으로 되어 있더구나. Burden는 짐, 부담뭐 이런 뜻을 알고 있는데옮긴이께서 한국어 제목을 좀더 낭만적으로 뽑으신 것 같구나. 참고로 이 작품은 1956년에 출간된 되었다고 하니, 소설을 읽을 때 그 머릿속에 시대적 배경도 넣어두고 읽어보면 좋겠구나.


1.

아서 프랭클린과 안젤라 프랭클린 부부에게는 아픔이 있었단다. 첫 아들 찰스가 어렸을 때 병으로 죽고 말았어. 이 충격으로 아서와 안젤라는 요양을 갔고, 그들의 어린 딸 로라는 집에서 유모와 하인들과 함께 있었단다. 당시 로라 나이 일곱 살인데 아서와 안젤라 부부가 로라도 같이 데리고 가지당시 영국의 귀족들은 그런 문화가 아니었나? 싶구나.

로라는 이웃집 존 교수님에 들렀다가 존 교수와 친구가 되었는데, 이 인연으로 로라는 어려운 일이 있거나 조언이 필요할 때 존 교수님을 찾아갔단다. 아서와 안젤라 부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얼마 안 가서 로라의 동생 셜리가 태어났단다. 셜리가 태어났을 때 로라는 심한 질투심을 느꼈어. 동생이 태어나게 되면 모든 아이들이 느끼는 그런 질투심이지. 로라는 셜리가 빨리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어느 날 로라의 바람대로 셜리가 천국에 갈 뻔했단다. 셜리를 보살피던 유모가 발작을 일으켰는데, 그 발작으로 집에 큰 화재가 일어났어이 때 로라가 불길에 뛰어들어 어린 셜리를 구해주었어. 그래서 셜리는 천국에 가지 않을 수 있었어. 이 일이 있고부터 로라는 셜리를 위한 삶을 살게 된단다. 로라도 어렸지만 셜리를 위해서 무엇이든 했단다.

몇 년이 지나고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그만 모두 돌아가셨단다. 그 때 로라 나이는 14, 셜리는 3살이었어. 이때부터 로라는 더욱 셜리를 보살피고 키우는 일에 전념했단다. 14살이면 무척 어린 나이인데, 로라는 셜리를 보살피고 집안 일도 도맡아 했단다. 유모의 도움이 있었지만, 셜리의 교육과 육아는 로라가 다 챙겼어.

시간이 흘러 로라가 결혼 적령기가 되어도 결혼도 안하고, 오직 셜리를 보호하는 일에서 신경을 썼어. 어느덧 셜리도 19살이 되었고, 사랑할 나이가 되었단다. 그런데 셜리는 첫눈에 반한 헨리라는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어. 로라는 셜리의 섣부른 결정에 반대했단다. 사랑이야 그렇게 쉽게 불타오를 수 있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헨리라는 남자가 꼭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았고영화 <겨울왕국>에서 안나가 첫눈에 반한 한스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그걸 반대하는 엘사가 생각나기도 했단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 돌아가시고 두 자매가 남은 것이 비슷한 상황이기도 하네. 다시 <사랑을 배운다>로 돌아 와서로라는 계속 반대를 했는데, 그 반대를 셜리를 불행하게 하고, 혹시 셜리에 대한 질투심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고, 결국은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단다.


2.

역시나 헨리는 그리 성실한 사람이 아니었어. 직장을 자주 바꾸고, 돈은 물쓰듯 하고 그로 인해 빚은 늘어만 갔어. 거기에 설상가상 바람까지 피워서 셜리는 무척 힘들어했단다. 그러던 중에 셜리는 리처드 와일딩이라는 유명한 여행가를 알게 되었는데, 리처드는 헨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단다. 다정다감하고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어. 셜리와 리처드는 서로 호감을 가졌단다.

그런데 헨리가 척수마비 병에 걸리고 말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는 않았지만, 평생 불구의 몸으로 침대에서만 지내야 했어. 헨리 같은 성격에 평생 침대에 누워 지내는 것을 참을 수 있을까? 가뜩이나 성격이 좋지 않았는데 헨리는 더욱 괴팍해지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했단다. 셜리는 아내로써 그런 헨리를 버릴 수 없었단다. 아내로써 헨리를 보호하는 것은 사랑을 떠나서 의무감이라고 생각했어. 착한 의무감이랄까.

헨리가 그냥 건강해서 계속 바람을 피우고 결국 이혼을 하게 되고 셜리도 다정다감한 리처드와 다시 사랑을 하게 되었다면 그나마 해피 엔딩이었을텐데헨리가 장애인이 되면서 의무감에 그를 보살피면서 지내야했어. 셜리가 도적적 의무를 버리지 않겠다고 하면 헨리가 늙어 죽을 때까지 말이야. 리처드도 그런 셜리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단다.

그런데 어느날 헨리는 실수로 약 과다 복용으로 그만 죽고 말았단다. 그 자리에 로라가 있었는데, 셜리를 위해 평생을 살아왔던 로라가 실수를 한 것이 맞을까? 아니라는 강한 의심이 들었지.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 헨리는 죽고 셜리는 혼자가 되었단다.


3.

10년이 지나고…. 루엘린이라는 유명한 전도사가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전도사 일을 그만 두고 어떤 섬에 요양을 지내러 왔단다. 그 섬에 자주 가는 식당에 혼자 술을 먹으러 오는 어떤 여자를 알게 되어 합석을 하게 되고 셜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고 그랬어. 루엘린은 그 섬에 유명한 여행작가 리처드 와일딩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게 되었는데, 루엘린이 식당에서 만났던 여자가 바로 리처드의 부인이었단다.

10년 전 헨리가 그렇게 죽고 나서, 셜리는 리처드와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그 삶이 그리 행복한 삶이 아니었단다. 헨리를 의무감으로 보살피고 있었는데, 헨리가 죽고 말아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 삶 자체가 지옥이고 괴로움이었지. 리처드와 로라가 노력했겠지만 셜리는 회복하지 못했어. 10년이 지난 후에도 말이야. 어느 날 셜리는 취한 상태로 길을 가다가 그만 트럭에 치여 죽고 말았단다. 루엘린은 셜리의 유품을 로라에게 전달하는 일을 도와주었어. 루엘린은 로라를 찾아왔는데, 그만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사랑이란 아무도 모르게 어디선가 불쑥 찾아오지. 루엘린과 로라는 셜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로나는 헨리의 죽음의 비밀도 이야기했단다.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고헨리가 이미 약을 먹을 알고 있었는데, 자신이 또 주었다고 말이야

셜리를 위해 한 행동이나 결과적으로 봤을 때 셜리를 한 행동이 아니었어. 헨리를 보살피는 것이 어찌되었든 셜리의 삶의 목표였으니 말이야. 그 이후 10여 년 삶은 포기한 듯 괴로워하다 결국 삶을 마감한 셜리로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로라는 셜리를 사랑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셜리를 행복하게만 했을까? 그건 의문점이 드는구나.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베풀 때 그것이 내 마음 편한 것만 생각하면 안되고,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한번쯤 생각해봐야겠구나.

그나저나 로라도 루엘린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의 사랑은 어떨까? 두 사람 모두 인생에서 이런 저런 경험을 겪고 사랑을 해봤을 테니 셜리와 헨리와 같은 어설픈 사랑은 아니겠지? 또 모르지.. 사랑이란 것에 정답도 없고, 나이고 없는데 갈피를 못 잡는 대명사인데


PS,

책의 첫 문장: 교회 안은 추웠다.

책의 끝 문장: 로라는 처음으로 사랑의 무게를 느끼고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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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이해
이혁진 지음 / 민음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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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지난 번에 너희들과 함께 했던 여행 동안 읽으려고 책 서너 권을 챙겼단다. 여행 중에는 재미있는 책을 가지고 가야 그나마 읽는다는 생각에 재미 있을 것 같은 책들로 챙겼단다. 그 중에 하나가 이혁진 님의 <사랑의 이해>라는 책이란다. <누운 배> <관리자들>이라는 책으로 팬이 된 이혁진 님의 또 다른 책이란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사랑의 이해>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졌더구나. 앞서 읽은 책들이 아빠의 취향이어서 <사랑의 이해>는 지은이 이름만 보고 샀단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랑에 관한 책이더구나. 두 쌍의 젊은이들이 나오면서 얽히서 설킨 사랑 이야기. 아빠 같은 아재가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는 소재이긴 하지만, 아빠가 로맨스 소설도 좋아하는 편이니까 소재는 뭐 나쁘지 않았어. 다만 전체적인 재미가 이전에 읽은 이혁진 님의 소설들보다는 좀 부족했단다. 책이라는 것이 사람의 취향마다 다르니까, 이전의 책들보다 아빠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구나. 세대 차이인지 모르겠지만, 약간은 공감하지 않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도 있고...

....


1.

, 그러면 <사랑의 이해>를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이야기는 은행에서 일어났단다. 주인공 하상수 계장은 계약직으로 텔러로 일하는 안수영을 좋아했어. 얼마 전에 하상수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면서 첫 데이트를 했고, 두 번째 약속을 정했단다. 그런데 두 번째 약속이 있던 날, 갑자기 바쁜 일이 생기고 그날 따라 핸드폰은 고장이고그래서 약속 장소에 늦게 나갔는데, 이미 수영은 자리를 떠난 이후였단다. ,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겠지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 수영은 상수에게 냉담하게 굴었단다. 상수는 미안하다고 몇 번씩 이야기를 했지만 용서를 받지 못했어. 그런 와중에 수영은 은행경비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종현과 썸을 타게 된단다. 수영은 상수와 몇 번의 어긋남이 있고, 종현의 대시로 인해 종현과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어. 젊을 때이니 이런 사랑도 해보고 저런 사랑도 해보고 그래야겠지. 하지만 상수의 이야기를 좀더 들어봐 주었어도 좋았을 것 같은데

그런데 어느날 박미경이라는 사람이 은행으로 전배를 왔어. 미경은 상수의 대학 후배였고 상수를 대놓고 좋아했단다. 미경의 적극적인 대시에 몇 번 만난 상수. 미경도 여자 친구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러자, 미경의 배경도 보이기 시작했단다. 미경은 은행의 정직원이고, 부잣집 딸이었어상수가 미경과 사귀기로 결정한 데는 그런 배경이 없었다고는 말 못했을 거야. 그런데 사랑이라는 것이 뭐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지

종현은 은행경비원으로 근무하면서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단다. 그런데 경찰 공무원 시험을 아쉬운 점수차로 떨어지고 말았어. 이에 수영은 자신 때문이라고 자책했단다. 종현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은근히 수영을 멀리하려는 것 같았어. 시골에 계신 아버지가 막노동을 하다가 크게 다치셔서 경제활동을 못한다고 하셨어. 그래서 자신의 은행경비원으로 생계가 어려워, 지방의 호텔에서 일하기로 했다면서 시골로 내려간다고 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영과 일부러 멀어지려는 의도 같았단다. 그러나 종현도 수영을 사랑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인지 얼마 못 가 다시 은행 경비원으로 일했고, 둘은 돈도 아낄 겸 동거를 하기 시작했단다. 수영은 이번에는 종현이 경찰 공무원에 꼭 합격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열심히 했어.

한편 상수와 미경도 같이 살기 시작했단다. 미경은 상수를 사촌 오빠와 아버지에게 소개 시켜주는 등 적극적이었어. 상수는 미경의 아버지가 불편하면서도 잘 보여야겠다는 나름 예의를 차리면서 술자리도 함께 했는데, 미경의 아버지는 상수를 못마땅해하는 것 같았단다. 아무래도 사람 자체보다 배경이 더 크게 보이겠지. 상수도 그리 넉넉한 집안이 아니었거든.

….

1년이 또 지나고 종현은 또 경찰공무원 시험에 떨어졌단다. 수영과 종현의 사이는 급격히 안 좋아졌어. 사실 수영도 경찰공무원에 합격한 종현의 미래의 모습도 사귀게 된 이유 중에 하나였던 것 같거든남녀 간의 사랑, 특히 결혼을 전재로 하는 사랑에 사람 자체만을 사랑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구나. 상수는 미경과 사귀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알 수 없는 벽을 보는 듯했어. 살아온 배경이 너무 달라서 오는 그 차이가 계속 불편했어. 결국 수영과 종현, 상수와 미경은 모두 헤어져서 다들 혼자가 되었단다.

이 시점에 수영이 다시 상수와 만나 잘 되는 것도 이상하고, 지은이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소설은 몇 년 뒤 상수와 수영이 우연히 만나 안부를 묻고 헤어지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단다. 아빠가 이 책도 읽은 오래 되어 잘못된 기억으로 쓴 부분도 있을지 모르니 양해 바란다.


2.

앞서 이야기했지만, 이혁진 님의 다른 소설들에 비해 아빠 취향이 아니었어. 그리고 또 하나 이질감을 느낀 것은 소설 속에 직원들 사이에 나눈 대화들이란다. 너무 서로 막말을 하는 듯했어. 성추행에 가까운 말들도 던지곤 하는데, 요즘 대부분의 회사에서는 그렇지 않을 텐데 말이야. 그것이 좀 부자연스러웠단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가 있다고 했잖아. 소설을 아주 재미있게 읽지는 않아서 그 드라마도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유튜브 등에 한두 시간으로 간추린 영상이 있으면 1.5배속으로 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함 찾아봐야겠다.

이번 여행에서 배운 것 하나. 여행 중에 책 욕심은 부리면 안되겠더구나. 우리 집에서 자주 타는 교통편에서 책 읽는 것은 집중이 잘 되는 편인데, 낯선 곳에서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곳을 달리는 기차 안에서 책에 눈을 두기가 쉽지 않더구나. 바깥 경치가 더 좋은 책이었어. 가지고 간 책이 4권인데, 2권을 겨우 읽었구나. ㅎ 

나머지 한 권도 곧 이야기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부지점장은 파란색 플러스 펜으로 상수의 셔츠 주머니 아래를 찔렀다.

책의 끝 문장: 가는 빗방울이 우산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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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
한창훈 지음, 한단하 그림 / 한겨레출판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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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 소개해 줄 책은 한창훈 님의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라는 책이란다. 몇 년 전에 사 두었다가 이제서야 읽었단다. 이 책은 얇고 우화풍 소설이라서 금방 읽을 수 있겠다고 생각해서, 자투리로 읽을 시간이 생기면 읽으려고 사 두고도 한참 읽지 않은 것이야. 아무튼, 아빠가 자투리 시간이 생겨서 이 책을 후다닥 읽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읽은 것이란다.

지은이 한창훈 님의 작품은 처음 읽는 것인데, 지은이 소개를 보니 <홍합>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더구나. 이 책을 이 분이 쓴 거구나. 지은이 한창훈 님께서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를 쓰게 된 이유를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작가가 20대일 때 우연히 본 신문칼럼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아빠도 좋아하는 <녹색평론> 김종철 님의 <단 하나의 법조문만 있는 나라>라는 글이라고 하더구나. 그 글이 좋아서 가위로 오려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계속 읽으셨대

남대서양 화산섬 트리스탄 다 쿠냐 섬의 이야기였대. 그 글을 읽은 지 20여 년이 지나고 우화풍 소설을 의뢰 받은 지은이는 그 글이 떠올라서 소설로 쓰신 것이 <그 나라로 간 사람들>이라는 단편이라고 하는구나. 아빠가 읽은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는 연작 소설집로 단편 소설이 5개가 실려있긴 한데, 하나의 장편 소설로 봐도 좋을 것 같았어. 연작 소설이라고 한 것처럼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이 서로 연결되어 있거든


1.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맞아 우연히 섬에 정착한 사람들.. 그곳에서 작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간단다.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섬에 사람들이 더 모이고, 그들은 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회의를 통해 단 하나의 법을 만들었단다. ‘어느 누구도 다른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가 그 법이란다. 이 법대로 그 섬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다 보니 모두나 평등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어. 늘 행복하다 보니 행복이 일상이 되었고,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행복하겠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지. 그래서 행복이라는 말을 모르고, 책 제목처럼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가 되었어.

그런 섬이 화산 폭발 우려가 있어서 대피를 해야 한다고 했어. 그래서 섬 사람들은 섬을 떠나 본토로 당분간 이주하게 되었지. 섬에서 살던 방식과 본토에서 살던 방식이 다르긴 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원칙을 지키면서 때론 본토 사람들의 방식을 따르면서 살아갔단다. 그러면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이야기해준단다.

우화풍 소설을 의도적으로 쓴 것이라 그런지 등장인물들이 너무 착한 사람들뿐인 것 같구나. 단 하나의 법 조항으로 사는 섬이 실제 있다고 하고 그를 모티브로 쓰긴 했지만, 사람 사는 사회에 갈등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이 또한 아빠가 이 속세에서 살다 보니 생긴 편견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이 책은 우화풍이라서 교육적인 면도 있고 하지만, 약간은 뻔한 우화 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단다. 그래서 적극 추천까지는 안 할 것 같아.

오늘은 책도 얇으니, 편지도 짧게 마칠게.


PS,

책의 첫 문장: 어제 완성한 망루가 오늘 아침 풍랑에 넘어졌습니다.

책의 끝 문장: 웃음소리가 바깥까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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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9)

나혜석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1021년 최초의 개인전을 가진 화가로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중요하게 자리매김되고 있다. 또 그녀는 한국 근대 문화사에서 최초의 여류소설가 역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안숙원은 그의 소설 <경희>는 한국 현대문학사상 최초의 페미니즘 텍스트라고 평가하면서 이 소설에 나타난 신여성론은 동시대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맞겨룰 만한 담론으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나혜석은 여성도 사람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여성 계몽적 시 <노라>를 발표, 1920년대 계몽주의 문학의 중요 작가로 재평가 받고 있다. 이상경은 나혜석은 자유연애주의자가 아니라 자기 성취를 추구하며 온몸으로 계몽주의 사상을 밀고 나갔던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46)

대부분의 사람들이 박인덕을 비난했지만, 윤치호는 박인덕을 옹호했다. 그는 1931 10 26일자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로, 나는 수많은 젊은 남자들이 자기 아내와 이혼하는 것과 똑같이 그녀 역시 남편과 이혼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그런 남자들 중에는 더 매력적인 여자와 결혼하길 바라는 것 말고 어떤 이유도 없는 자들이 많다. 이들 무정한 젊은 남자들은 비난하지 않고 그저 박인덕만 욕하고 온갖 험담을 늘어놓는 것은 여성은 영원히 남성의 노예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93-94)

마찬가지로 일제는 조선의 라디오를 황국신민화 사업에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는 본격적으로 방송을 국민동원과 전시선전의 도구로 삼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는 황국신민화, 내선일체, 일본어 상용 등의 명분을 내걸어 우리말 뉴스방송에서도 일본어 혼용을 강요하였고, ‘궁성요배(宮城遙拜)의 시간이니 심전개발(心田開發)’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토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나중엔 일본군이 되어 천황폐하를 위해 싸우다가 백골이 되어 호국신사에 봉안되는 것이 효도의 길이라는 노래 아들의 혈서를 당대의 인기 가수 백년설이 매일 방송하느라고 2개월간 방송국에 통근했다.”


(114)

1930년대 조선의 중상류층은 행여 뒤처질세라 서양 냄새를 피우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서양화가 곧 계급이요 교양의 척도이자 상징이었다. 1930 11 <매일신보>가 여러 차례에 걸쳐 그런 경향을 지적하고 나선 게 흥미롭다.

11 23일자에 따르면, “서양류의 가수는 성악가라 하여 숭상하고 우리 조선의 고유한 가수는 광대라 하여 천시하고 멸시함은 무슨 까닭인고? 물론 이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동기가 있겠으나 도대체 남의 것이라면 좋으나 그르나 귀하에 여기고 우리의 것이라면 덮어 놓고 천하게 여기는 과도기에 처한 조선의 사회적 결함과 일반 가수의 인격적 저하(低下)가 그 주요한 원인이 된 것은 묻지 않아도 알 일이니 조선의 가수가 결코 본시부터 천한 것은 아니었다.”


(126)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는 이 노래의 가사에 의심을 품고 레코드사 사장 이하 관련자들을 불렀다. 경찰이 문제 삼은 건 삼백연 원안풍은 노적봉 밑에라는 구절이었다. 손목인의 회고에 따르면, “사장 이하 관련자들은 원안풍은원한 품은아니라 원안풍은이라고 극구 해명하고 사정하여 간신히 무마는 되었지만, 솔직히 말해 목포의 눈물삼백연 원안풍삼백 년 원한 품은이라는 뜻으로 우리 민족의 설움과 일제에 대한 겨레의 분노를 노래한 것이다. ‘목포의 눈물’ SP는 이 사건을 겪으면서 더욱 잘 팔려 나갔다.


(160)

일제강점기의 대중가요에 대해 민족의 정서를 황폐화시키고 시적 표현을 왜곡시켰다거나 유행 창가 전반의 의식세계는 결국 식민지배에의 봉사로 귀결되었다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나라 잃은 식민지 민중에게 슬픔을 벗어나라고 주문하는 건 오늘의 관점에서 본 무리한 요구가 아닌가 싶다. 때론 슬픔도 힘이 되는 게 아닐까? 게다가 슬픈 노래가 나라 찾고 경제발전 이룬 뒤에도 계속되는 걸 보면, 이는 좀 더 정교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는 걸 말해주는 거라고 볼 수 있다.


(179)

이효석은 조선일보사가 발생한 <조선문학독본>(1938 12월호)에 쓴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에서 가을 낙엽을 태우는 냄새에서 갓 볶음 커피 냄새가 난다라고 썼다. 이에 대해 이영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 구절을 읽으면서 정말 커피 냄새가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한 줄 알았다. 1970년대만 해도 원두커피를 갈아서 끓어주는 커피 전문점들이 없었고, 다방은 미성년자가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갓 볶은 커피 냄새가 뭔지 알게 된 지금 생각하면 웬걸, 낙엽 태우는 냄새와 비슷도 하지 않다. 그러고 보면 이효석은 커피 냄새를 잘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구태여 익숙하지도 않은 커피 냄새를 들먹인 것은 분명 커피라는 말이 주는 문화적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


(224)

1920년대 말부터 유행한 남성의 장발에 가해진 탄압은 한 사나이의 운명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1937 3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일하던 박정희가 교사 일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가게 된 계기에 장발이 관련돼 있다는 게 흥미롭다. 교사 생활 3년째 되던 1939년 가을 연구수업 시찰차 나왔던 일본이 시학(오늘날 장학사)과 교장이 술자리에서 박정희의 장발을 문제 삼자 박정희는 이에 반발, 술잔을 던지는 등 소동을 벌인 후 사표를 냈다는 것이다. 당시 교사들은 머리를 박박 깎게 되어 있었으나, 박정희만은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먼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된 뒤에 장발을 혹독하게 탄압하게 된다.


(262-263)

위생에 대한 문화적 차이도 있었다. 일본인들의 기준에선 조선인들이 목욕을 잘 하지 않는 게 야만이었겠지만, 조선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엔 일본의 목욕문화가 야만이었다. 한국 최초의 대중목욕탕은 1905년 서울 서린동 근방에 등장했지만, 여럿이 벌가벗고 목욕을 한다는 것이 익숙지 않은 문화적 저항 때문에 사람이 오질 않아 곧 문을 닫고 말았다. 대중목욕탕에 익숙해질 때까진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다. 왕실에서도 1919년에서야 목욕실을 두었고, 대중목욕탕은 1920년대에서야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266)

쥐잡기운동, 빈대잡기운동, 기생충 박멸운동 등도 병행되었으며, 이는 1930년대에도 지속되었다. 아마도 가장 괴로운 건 빈대의 습격이 아니었을까? 이상은 1936년에 발표한 소설 <날개>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빈대가 무엇보다도 싫었다. 그러나 내 방에서도 겨울에도 몇 마리의 빈대가 끊이지 않고 나왔다. 내게 근심이 있었다면 오직 이 빈대를 미워하는 근심일 것이다. 나는 빈대에게 물려서 가려운 자리를 피가 나도록 긁었다.”


(281)

해마다 화려해지는 유흥가의 축하연 덕분에 크리스마스 이브는 일 년 중 가장 퇴폐적인 밤이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총독부는 유흥업소의 크리스마스 축하연을 전면 금지했다. 그러나 맘먹고 놀겠다는 데야 어디 빠져나갈 길이 없겠는가.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 유흥가는 생뚱맞게 국위선양 기념회’ ‘남경 함락 축하 만찬회’ ‘황국 전승 대연회현수막을 갈아 달고 축하연의 전통을 이어갔다. 크리스마스가 상업적으로 왜곡된 것은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 직전인 12 16일이 200~400페센트씩 지급되는 연말보너스 받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월급쟁이들은 12월 봉급까지 더해 평상시 월급의 3~5배까지 두툼한 월급봉투를 받았다. 오랜만에 두툼해진 월급쟁이의 호주머니를 털기에 크리스마스 이브 축하연만큼 그럴듯한 명분이 없었다.”


(312)

권투의 인기도 그러했을진대 축구의 경우엔 더 말해 무엇하랴.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일제 치하에서의 축구는 카타르시스였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공격을 표현함으로써 분노의 감정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트는 이런 과정을 정화 또는 카타르시스라고 하였다. 프로이트의 카타르시스 이론은 우리는 내부에 공격적 에너지의 저장소를 항상 지니고 있다고 가정한다. 늘 발산시켜버려야 할 공격성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축구를 통해 그 공격성을 발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한국인들의 억눌린 상태는 해방이 되었다고 일시에 해소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들에겐 또 다른 종류의 억압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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