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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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어느덧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이구나. 7권의 부제는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란다. 일제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이 다 억울하고 가슴 아픈 사건들이긴 한데, 간토대학살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아닌가 싶구나. 일본 도쿄와 그 주변 지역을 한자로 관동(關東)이라고 하는데 관동을 일본말로 간토라고 한단다. 그래서 간토대학살은 관동대학살이라고 해. 1923년 일어난 관동 대지진 이후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정부 지휘아래 자경단이 만들어지고 그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마구 죽인 사건을 이야기한단다. 7권의 이야기를 이 비극적인 사건으로 시작하였단다.

1920년대 중반이 되었는데,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략한지도 10년이 훌쩍 넘어서면서 독립의 희망은 점점 보이지 않던 시기였단다. 의열단원은 계속된 의거를 일으키면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단다. 1923년 김익상, 오성륜, 김상옥의 의거가 이어졌어. 하지만 그들의 단발성 폭력적 의거가 무슨 효과가 있냐고 목소리도 나왔는데, 이런 의열단의 흔들리는 입지를 굳게 세워준 이가 단재 신채호였단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으로 의열단에 힘을 실어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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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4)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한 무기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强盜) 일본의 통치의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약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 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우리 2000만 민중은 일치하여 폭력 파괴의 길을 매진해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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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반하여 일제 점령의 세월이 길어지다 보니 변절자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이광수와 최남선도 그 대열에 합류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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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최남선은 1928 10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으로 임명되었고, 12월에는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한국 최고의 단군 연구가이자 조선학의 제창자인 최남선이 식민사학의 총본산으로 들어갔으니 논란이 없을 리 만무했다. 정인보(1893~?)최남선이는 죽었다며 조문(弔文)을 썼으며, 일부 사람들은 종로의 명월관에 모여 굴건(屈巾), 제복(祭服) 차림으로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최남선 장례식을 지냈다. 최남선은 이후 일본에 가서 조선인 대학생의 학병을 권유하는가 하면 중추원 참의, 만주 건국대 교수, 만주 <만선일보> 고문 직책을 맡는 등 노골적인 친일 행각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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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똑똑한 친일파 양성을 위해 경성제국대학을 만들었단다. (1924 5) 이 대학을 통해서 친일세력을 길러내고자 했고, 일제 치하에서 출세하려는 자들은 경성제국대학을 목표로 했단다. 이런 경성제국대학이 해방 후 서울대가 되는데 연관성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서울대학교의 설립년도를 검색해보면 1946년으로 나오지만, 당시 경성제국대학을 포함하였다고 했거든.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은 광복 후 서울대 출신이라고들 했다고 하는데 그 연관성에 대해서는 쉽게 단절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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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공식적인 서울대학교사는 개교를 1946년으로 잡고 있지만 한편으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사>, <서울법대백년사>에서 볼 수 있듯이 경성제국대학을 그 뿌리로 간주하는 이중적 인식의 대학사를 가지고 있다. , 국립 서울대학교의 설립 주체는 명백히 대한민국 정부임에도 불구하고, 법학부와 의학부는 개별적인 단과대학사를 통해 경성제국대학을 그 모체로 간주하고 동문의 범위를 경성제국대학 출신자에게까지 확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립 서울대학교는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스스로의 대학 정체성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고찰을 가지지 못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울대학교가 그동안 이루어낸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대학 정체성의 반성 부재에서 비롯된 식민지적 엘리트 의식은 여전히 왜곡된 형태로 남아 서울대학교를 중심축으로 하는 현재의 대학교육 체제와 문화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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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0년대 국내 사회의 흐름을 좀 이야기해줄게. 1920년대에 전세계적으로 유행인 사회주의가 우리나라에도 유행했단다. 사회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등 단체가 만들어졌고, 당시 우리나라 공산주의자의 대표격인 박헌영의 인기도 높았대. 기독교가 점점 세를 확장해가면서 기독교와 사회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반기독교의 대립도 심화되었대. 1926 6 10일에는 조선의 부끄러운 마지막 왕 순종이 죽고 장례식이 있었단다. 이 때를 맞춰 좌우가 합작하여 다시 한번 독립 만세운동을 기획했으니 6.10 만세 운동이었단다.

우리나라 땅에 들어와 사는 일본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근대 문물들도 많이 들어오게 되었고, 돈 있는 친일파들 중심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대중화를 이루게 되었단다. 대표적으로 축음기가 유행하였고, 가수들도 인기를 끌었는데 <사의 찬미>를 부를 윤심덕이 당시를 대표하는 가수였단다. 신파극과 무성영화도 많이 인기를 끌었다는구나. 문학적인 측면에서 보면 1925 8월에는 KAPF라는 진보적 문학예술단체도 생겨났고, 1926 6월에는 <개벽>이라는 잡지가 창간되었고, 그 잡지에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저항시를 발표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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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141)

<개벽> 1926 6월호 발표된 이상화(1901~1943)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이다. 정끝별은 이 시의 매력은 굳세고 비장한 의지와 어우러진 섬세한 감각에 있다. 가르마 같은 논길, 입술을 다문 하늘과 들, 삼단 같은 머리를 감은 보리밭, 살진 젖가슴 같은 흙 등 빼앗긴 들을 온통 사랑스런 여성의 몸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니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 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관능적인 연애시의 옷을 입은 지극한 애국애족의 저항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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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가 영화 <아리랑>을 만들어 많은 사랑을 받았고, 백성들은 노래 아리랑을 부르며 나라 잃은 서글픔을 달랬단다. 나운규의 <아리랑>이 성공하면서 영화 산업의 붐을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일제 시대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참다 못한 소작농들이 소작쟁의를 일으키기도 했대. 1929년에는 423 , 1930년에는 716건의 쟁의가 일어났다고 하는구나.

이 시절 전화도 어느 정도 대중화를 이루었다고 하는구나. 그러면서 전화를 이용한 범죄들도 성행했다. 그때도 보이스 피싱이 있었나 보구나. 스포츠 종목도 많이 유행했는데 축구도 유행을 했고, 당시에도 승부에 예민들 하셔서 심판의 판정에 시비가 붙어 응원단들이 패싸움을 하기도 했다는구나. 축구는 인기가 좋아서 대학에도 축구팀을 만들었는데, 국제대회에서 우승한 일본의 대학 축구팀이 우리나라에 와서 연희전문대학과 한판 벌였는데, 4 0을 지고 나서 부랴부랴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고 하는구나. 그때도 한일전은 질 수가 없지. 당시 이 경기를 본 백성들은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 나라 빼앗긴 설움을 잠시나마 잊지 않았을까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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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287)

1927년부터는 사학의 명문 연희전문과 보성전문의 맞대결이 연보전(훗날의 연고전)이 세인의 관심을 끌었으며 이후 정기전을 갖게 되었다. 1927 9월 상하이에서 열린 제8회 극동올림픽대회에서 필리핀을 누르고 우승한 일본 와세다대학 축구 팀이 경성에 들러 17일부터 19일까지 3차전을 갖기로 했다. 첫 경기 상대는 연희전문이었는데, 와세다대학 팀이 0 4로 대패하고 말았다. 크게 놀란 와세다대학 팀은 남은 경기 일정을 취소하고 도망치듯 일본으로 떠나고 말았다. 박경호, 김덕기는 이 같은 소식을 접한 국민은 잠시나마 피지배민족으로서의 설움을 잊을 수 있었다와세다 팀을 완전히 제압한 사실에 대해 국민들은 극동올림픽 쟁패전은 우리의 승리라고 외치고 승리감을 만끽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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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뿐만 아니라 야구도 인기가 있었어. 1922년 미국 프로야구올스타 팀이 서울에 방문했었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조선 대표와 시험도 했대. 23 3으로 미국 프로야구올스타 팀이 이기긴 했는데, 조선의 야구팀도 무려 3점이나 뽑았다니

….

그 밖에 모던 걸, 모던 보이가 유행하고 미용실이라는 것도 생겨나서 여자들도 단발 머리로 자르는 이들이 있었고, 남자들은 장발이 유행하기도 했대. 박가분이라는 화장품이 크게 인기를 얻었고, 다방과 카페도 유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나라는 점점 일본 식민지화가 되어 갔단다. 이대로 일본에 동화되어 하나가 되면 안될 텐데 말이야.


2.

한동안 뜸했던 의열단의 의거는 1926 12 28일 나석주 의거의 성공으로 건재함을 알렸어. 나석주는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었고, 일본 경찰과 총격전을 벌여 7명을 죽이고 자신도 죽고 말았단다. 장진홍이라는 분은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폭탄을 던져 터트렸고, 조명하라는 분은 타이완에서 육군대장을 독 묻은 칼로 공격했단다. 그 육군대장은 이 사건의 후유증으로 8개월 뒤에 죽었어. 안타까운 것은 조명하 의사가 그보다 먼저 사형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이 때 독립운동은 좌우의 합작 노력이 있었대. 그래서 만들어진 것인 1927 2 15일 결성된 신간회란다. 신간회는 민족주의, 사회주의를 모두 아우르는 단체였고, 신간회와 함께 여성단체인 근우회도 결성되었다고 하는구나.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이 우리나라 여고생을 희롱하고 모욕을 준 일이 있어났어. 이를 본 우리나라 남학생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싸우게 되었는데 집단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어. 이 일로 경찰서에 갔는데, 경찰은 무조건 우리나라 학생들한테 잘못을 빌라고 했대. 이 사건이 발단이 되어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는데 그것이 바로 1929 11 3일에 일어난 광주학생 항일운동이었단다. 이 운동은 전국의 학생들을 자극하여 1930 3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났단다. 이 날을 기념하여 11 3일을 학생의 날로 지정했단다. 아빠의 학창 시절 왜 학생의 날은 쉬지 않는 거냐고 투덜거렸던 것이 생각하는구나.

1926년 최현배를 중심으로 한글을 만든 날을 기념하여 가갸날을 지정했어. 당시에는 훈민정음 반포일이 정확히 몰라서 음력 9 29일로 했다는구나. 1928년에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던 광복 후인 1946년부터 10 9일을 한글날로 지정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단다. 한 동안 한글날에 쉬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는데, 다시 쉬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대충 여기까지가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의 이야기란다. 빼먹은 부분도 많은데, 늘 그렇듯이 이해 바라고이제 한국 근대사 산책은 3권이 남았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조선에서 먹고살 길이 없어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조건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늘 죽음의 공포와도 싸워야 했다.

책의 끝 문장: 1930년대에 일제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한국을 전시 체제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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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모든 것이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는 데 집중됐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던 만발한 꽃이나 잘 익은 과일들이 이젠 기쁨이 아니라 삶의 덧없음을 강조하는 데 이용됐다. 만발한 꽃은 곧 시들 듯, 우리도 곧 죽는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전형적인 소재가 정물화 속의 해골, 모래시계, 그리고 촛불일 것이다. 모래시계의 모래가 다 떨어지면 또 촛불이 다 타고 나면, 그 다음은 말 그대로 ()’만 남는 것 아닌가? 우리가 문리를 깨우치려고 붙잡고 씨름하던 ’, 그리고 과학 관련 도구들도 바니타스의 단골 소재였다. 파우스트가 책 더미에 둘러싸여 진리를 깨우친 뒤, 결국 삶의 허무에 슬퍼했듯, 책과 과학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모두 허무하다고 화가들은 그린다.


(80-81)

미술사가들에 따르면 로코코의 시작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죽음(1715)과 일치한다. 베르사유 공전의 장대하고 영웅적인 17세기의 바로크와 고전주의가 물러나고, 파리의 살롱을 중심으로 작고 예쁜 실내 장식 같은 예술들이 18세기 초엽부터 시작됐다. 절대 권력자의 독재에 질린 귀족들이 궁전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와 자신들의 고향인 파리로 돌아간 뒤, 궁전 예술과는 아주 다른 사적인 취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들을 좋아했는데, 이를 예술사에선 로코코라고 부른다.


(160)

마르크 샤갈(1887~1985)도 경계인이다. 그는 러시아계 유대인이다. 지금의 벨로루시공화국의 비텝스크에서 태어난 샤갈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자유시민으로 살지 못하고 일종의 불법체류자처럼 숨어 살았다. 당시 유대인은 러시아 시민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인도, 그렇다고 유대인도 아닌 그 사이 어디쯤에서 방황한 인물이다.

샤갈의 세상은 집시의 세상과 닮았다. 이성과 상식은 없고, 마법적인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결혼한 신랑 신부는 하늘을 날고, 동물의 머리를 한 신랑은 가냘픈 신부의 뺨에 입맞춘다. 집보다 닭이 더 크게 그려져 있고, 바이올린 연주자는 늘 지붕 위에 앉아 있다. , 황소, 양들은 사람의 가장 절친한 이웃인 듯 빠짐없이 등장하고, 이들이 사는 마을은 늘 축제로 흥청망청이다. 샤갈의 세상은 쿠스투리차의 영화처럼 카오스의 미학이 지배하고 있다.


(180)

19세기 말, 데카당스의 세련되고 퇴폐적인 기운이 가득한 도시, . 문학, 음악, 미술에서 세기 말 낭만주의의 정점에 있던 예술가 세 명이 바로 쇠락의 도시 빈에서 서로 이름을 떨친다. 아르투어 슈니츨러(1862~1931), 구스타프 말러(1860~1911), 그리고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가 바로 그들이다. 슈니츨러와 클림트는 동갑이고, 말라는 이들보다 두 살 위다. 말러는, 레퀴엠보다 더 비극적인 <교향곡 5>에서 잘 보여줬듯, 지독한 비관주의자다. 그의 검은 음악은 우리를 죽음의 고요 속으로 이끈다. 반면, 클림트는 생명이 넘치는 황금빛 회화로 우리를 에로스의 환희로 초대한다. 이 두 예술가의 사이에, 곧 죽음과 에로스 사이에 슈니츨러의 문학 세계가 걸쳐 있다.


(200)

1916년 스위스의 취리히. 모든 유럽이 전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을 때, 전쟁이 싫다는 이유로 몇몇의 삐딱한 젊은이들이 영세중립국 스위스의 이 도시로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규모의 학살 전쟁을 겪으며 이들은 우리 인류가 이룩한 모든 긍정적인 가치들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예술 운동을 전재한다. 소위 거부의 미학운동이라 하는 아방가드르 다다(Dada)’는 이렇게 전쟁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206-207)

어떻게나 악당이 실감 나게 연기를 해대는지, 주인공 배트맨의 존재는 잘 기억나지도 않고 조커의 인상만 강렬하게 남은 영화가 <배트맨>이기도 하다. 만약 조커 일당이 무고한 사람들만 죽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주인공인지 헷갈릴 정도로 캐릭터들 사이의 중심은 조커에게로 쏠려 있다. 조커 일당이 배트맨과 싸우는 방법도 아주 인상적이다. 배트맨은 첨단과학과 거대자본이 있어야만 소유할 수 있는 무기들을 지고 하늘을 날고 땅 위를 쏜살같이 달린다. 반면에, 악당들은 재래식 소총을 들고 맨몸으로 배트맨과 싸운다. 어찌 보면 요즘 세상과 참 많이 닮은 전투 장면이기도 하다.


(306)

연애소설 주에 토머스 하디의 <테스>만큼 인기가 높은 작품도 드물 것이다. 특히 여성 독자들에겐 더하다. 여성이 과거를 고백하는 게 과연 잘한 것인가 아닌가같은 소재는 우리처럼 가부장적인 사회에선 더욱 먹혀들었다. 테스는 잘 알려져 있듯이 그 과거를 고백한 대가로 인생을 망치는 순진한 처녀다. 이런 간단한 연애 이야기의 소설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문학적으로 승화된 언어 때문이지, 이야기의 독특함 때문은 아닌 듯하다. 특히 토머스 하디는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처럼 자연의 감정을 묘사하는 데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선배 워즈워스가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은 뛴다며 자연에서 희망을 찾았다면, 하디는 이와 반대로 고독을 맛본다. 하디의 자연에는 절망이 있다. 쓸쓸한 고독 속에 방황하는 농촌 사람들의 무너진 인생이 하디 소설의 테마다. <테스>는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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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1-16 0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도서가 소개되어 내 서재를 한참 둘러 보았어요. 이 도서를 찾으려고. 안타깝게도 없네요. 아마도 누군가에게 주었나 봅니다. 옛 일을 떠올리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bookholic 2024-01-16 23:30   좋아요 0 | URL
저는 최근에 친구의 추천으로 알게 된 책입니다.
소개된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아서, 궁금증 잔뜩 유발한 책이었습니다!!! ^^
따뜻한 하루 되세요~~~
 
런어웨이
장세아 지음 / 아프로스미디어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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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우연히 인터넷 서점에 평점이 좋은 책을 하나 읽었단다. 장세아 님의 <런어웨이>라는 소설이야. 인터넷 서점에서 지은이 장세아 님으로 검색을 해 보면 이 책 한 권만 조회가 되어 신인작가인가 싶었는데, 회사원으로 웹소설도 쓰고 북리뷰 채널을 운영하는 등 내력이 꽤 되시는 분인 것 같더구나. <런어웨이>는 책이 두껍지만 책장이 휙휙 넘어가는 것이 재미있구나. 다만 다른 소설에서 본 듯한 구성과 예상되는 결론이 다소 아쉬움이 있었단다. 그래도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가 된단다.


1.

, 그럼 책 이야기를 해볼게. 동거 중인 폭력적인 남자친구 현욱의 폭행에 참지 못하고 반격을 가하다 돌발적인 사고로 치명상을 입고 남자친구를 두고 도망친 재영. 어쩌면 남자친구가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어. 무작정 그곳을 떠나려고 기차를 탔는데, 기차에서 갓난 아기를 데리고 탄 같은 나이 또래의 여자를 만났단다. 갑부집 아들과 도둑 결혼을 한 후 아이까지 낳았는데, 그 남자한테 배신을 당해서 아이만 시댁에 맡기려고 하는 길이라고 했어. 그 사람 또한 처지가 만만치 않구나. 그런데 잠시 아이를 재영에게 맡기고 화장실에 간 그 여자가 사라져 버렸단다. 아기 옆에는 쪽지가 있었는데, 재영에게 아기를 시댁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의 내용이었어. 얼떨결에 재영은 아이를 맡을 수밖에 없었어.

재영은 아이를 데리고 그 여자가 적어 놓은 주소를 찾아갔는데, 그 집은 그냥 갑부집이 아닌 것 같았어. 누가 봐도 으리으리한 저택이었어. 재영은 자신이 아이를 데리고 온 사연을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재영을 형수님, 며느리라고 생각들 하고 있었어. 재영은 지금 이 곳을 나가면 마땅히 갈 곳도 없고 해서, 하루 이틀 머물 생각에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그냥 두었어.

그 저택의 가족구성원을 간단히 이야기해줄게. 그 저택의 주인과 관련된 사람은 두 사람인데 그 관계가 좀 복잡하단다. 집 나간 첫째 아들이 있는데, 그가 바로 재영이 데리고 온 아기의 아빠 되는 사람이란다. 첫째 아들이 집 나간 지 7년이 되었고, 한 번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연락도 안 된다고 했어. 그리고 재영이 데리고 온 아기의 할아버지 되는 최 회장님이 있는데, 최 회장님은 중풍에 걸려 말도 제대로 못하고 휠체어 생활을 하고 있었어. 재영을 스스럼 없이 진짜 형수님처럼 대해준 이가 있는데 둘째 아들 수현이 있었어. 그런데 수현은 최 회장님의 혼외자였단다. 엄마와 밖에서 따로 살다가 엄마가 죽고 나서 열 살 때 이 집에 들어온 거야. 그때 이복형이 잘 보살펴주어 그를 잘 따랐고, 수현의 우상이 되었어. 그런 수현은 성격이 밝고 싹싹해서 재영을 진짜 형수님처럼 스스럼 없이 대했단다.

재영이 그곳에 며칠 머무르기로 결정한 것은 수현의 이런 접대 때문이었을 거야. 7년 전 형이 집을 나간 이유는 형의 어머니가 충격적인 일로 돌아가신 이후라고 했어. 형의 어머니는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을 먹고 돌아가셨어.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그 음식을 만든 것도 실수인데, 하필 그때 비상약이 보이지 않아서 응급처지를 못했던 거야. 그 일이 있고 형이 집을 나가고 아직 한번도 집에 오지 않았다고 했어. 그 외에 이 저택에서는 최회장님의 수발을 들어지는 주는 사람들, 집안 일과 부엌 일을 하는 분들이 계셨어. 재영은 며칠 동안 그 집에 머무르면서 상황을 봐서 그 집에서 나오려고 했단다. 마음 바뀐 아기의 엄마가 찾아올 수도 있고, 집 나간 첫째 아들이 들어오기라고 하면 큰일 나니까 말이야.


2.

특별한 직업이 없어 보이는 수현은 재영을 따라 다니면서 쇼핑도 도와주고, 브런치도 같이 먹고 그랬어. 재영은 태어나서 처음 누려보는 생활을 며칠 하다 보니 자꾸 이곳에 머물고 싶은 위험한 생각이 들었단다. 재영은 일단 자신의 옛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핸드폰 속 사진을 지우고 있었는데, 언제 왔는지 수현이 그걸 보고 있네재영은 당황하며 어찌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수현이 사진 속 재영의 남자친구를 보면서 형은 여전하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 자신이 때려눕히고 온 남자친구인 현욱이 집 나간 이 집 큰 아들이라고? 재영은 잠시 당황하였지만, 침착하려고 노력했단다. 뭐야, 그 남친 새끼가 양다리였고, 아기까지 낳은 거야?

그러면서 누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은 아닌가, 생각했단다. 재영의 핸드폰으로 잘 지내냐는 안부 메시지를 받고 이런 생각은 더 심해졌단다. 이런 문자를 보낼 사람은 남자친구 밖에 없는데, 그렇다면 남자친구가 죽지 않은 건가? 그렇다면 최소한 자신은 살인자 혐의에서 벗어나게 되는 건가? 이런 저런 생각에 머리가 복잡해졌단다. 이제 어떻게 행동해야지? 근데 분명 피칠을 한 남자친구가 정신을 잃었는데재영은 떨리는 마음에 몰래 남자친구가 쓰러져 있던, 함께 동거하던 반지하집을 찾아가 보았단다. 뭐야.. 집이 아주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어. 남자친구도 사라지고 그 많던 피도 모두 깨끗하게

그런데 재영이 깜짝 놀랬단다. 수현이 그녀를 몰래 따라왔던 것이야. 재영은 깜짝 놀랐는데, 수현은 미안하다면서 재영을 따라 오면 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야기 안하고 따라온 것이라고 했어. 뭐야.. 점점 수현의 행동이 이상하잖아. 얼른 이 저택에서 탈출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때 또 새로운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단다. 최회장님의 수발을 들던 사람이 그만 두고 최효진이라는 사람이 새로 왔는데 바로 아기 엄마였단다. 이젠 앞뒤 보지 말고 무조건 이 집에서 도망가야 하는데, 이상한 것은 그 효진이라는 사람이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거야. 자신이 아기 엄마라는 사실도 이야기하지 않고, 재영을 보고도 처음 뵙겠다고 하고이건 또 무슨 꿍꿍이 속?


3.

자 이제부터 사람들 관계는 더 꼬이고 꼬인단다. 효진은 사실 이 저택에 오래 전에 머무른 적이 있었어. 효진의 엄마가 이 곳에서 머물면서 일하셨거든. 그러니까 효진은 어린 시절부터 수현과 그의 형, 그러니까 재영의 남자친구였던 현욱과 아는 사이였던 거야. 무척 친했던 것 같아. 이런 인연으로 효진은 나중에 커서도 최회장님을 보살펴 드렸던 거란다. 이 정도 사이였는데, 효진은 왜 아기를 재영에게 두고 간 것인가. 효진은 왜 모른 척 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처음부터 효진은 재영을 알고 접근한 것은 아닌가. 이 모든 시나리오는 누가 짠 것인가?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한 사람이 자꾸 의심이 된단다.

현욱이 집을 나간 이유, 현욱의 엄마가 알레르기 음식을 죽고 죽은 이유, 효진이 아이를 재영에게 맡긴 이유이 모든 일들은 결국 한 사람에 귀결이 되는데아빠가 이야기해준 이후 소설은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난단다. 아빠가 보통 스포일러 무시하고 결론까지 다 이야기를 해주긴 하는데, 이 소설은 여기까지 하고 스포일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밖에 이유도 있지만 말이야. 아무튼 지은이께서 소설의 결말을 깔끔하게 마무리 하신 것 같구나.

,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인생을 리셋할 수 있을까?”

책의 끝 문장: 어떤 인생은 새롭게 바뀌기도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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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이에 <한겨레> <조선일보>를 지목해 일제가 <조선일보>를 폐간한 주된 이유는 1938년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에 따른 물자절약 및 조선어 말살 차원에 있었다. 이는 폐간사에서 동아 신질서 건설의 성업을 성취하는 데 만의 일이라도 협력하고자 숙야분려(夙夜奮勵)한 것은 사회 일반이 주지하는 사실이라고 밝힌 데서도 <조선일보>가 무슨 항일을 해서 폐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선일보>는 폐간 보상금으로 <매일신보>와 총독부로부터 각각 20만원과 80만원을 받았다. 당시 일본군 전투기 한대가 10만원이었음을 보면 적지 않은 돈일 알 수 있다고 반박했다.


(53)

1942년 작성된 임시정부의 내부보고서는 미주 동포들이 보내주는 월 1,050달러의 지원금만으로는 300여 명으로 불어난 인원을 감당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간 줄곧 광복군에 대한 통수권을 요구해온 중국 측은 한편으로는 재정지원 등을 내걸고 다른 쪽에서는 병사모집을 하는 광복군 지휘관에게 통행증을 내주지 않는 방식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결국 1942 4월 임시정부는 광복군 통수권을 중국 측에 넘겨주고 말았다. 그러나 중국 측도 광복군을 제대로 유지할 형편이 못 되자, 1943 2월 임시정부는 정식으로 군 지휘권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중국 측에 하기에 이르렀다.


(62-64)

영국 BBC 2002 3월 방송한 화제작으로 이 부대원들의 생생한 증언과 생체실험을 겪은 중국 현지 피해자들의 소송준비과정 등을 담았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경악할 만한 부분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비견될 가공할 전쟁범죄를 저지른 731부대 요인들이 나치와는 달리 아직도 일본 정계 및 보건 의료계에서 버젓이 핵심세력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고바야시 로쿠조(일본 국립 방역연구소 소장), 나카구로 히데토시(국방의학대학 총장), 나이토 료이치(녹십자 회장), 기타노 마사지(녹십자 대표이사), 가수가 추이치(트리오-켄우드 회장), 요시무라 히사토(교토 의학대학 총장), 야마나카 모토키(오사카대 의과대학 총장), 오카마토 코조(교토대 의과대학 학장), 다나카 히데오(오사카대 의과대학 학장) 등이 문제의 인물들이다. 특히 731부대의 책임자였던 이시이 시로는 일본이 미군에 항복하자 부대에 남아 있던 포로들을 학살하고 실험용 쥐를 풀어 증거를 인멸했다고 한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을 내린 뒤 미국이 탐내던 실험 관련 데이터를 넘기는 조건을 면책을 얻어냈다.


(149)

김구와 임시정부는 1943 6월경 루스벨트 대통령이 장제스에게 미영중소 연합국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을 알고, 장제스에게 접근했다. 1943 7 26일 장제스는 김구의 요청에 응해 한국 요인 6명을 비밀리에 공관으로 초빙했다. 참석자는 김구, 조소앙, 김규식, 이청천, 김원봉, 그리고 통역으로 참석한 안원생(안중근의 조카) 등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구는 종전 후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고 국제공동관리의 신탁통치를 반대하며 중국 측의 지지와 지원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고, 바로 이 약속이 카이로회담에서 이행된 것이다.


(163)

역설이다. 다인종 다민족 국가인 미국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해 국가를 위한 희생자에 대한 예우에 전력을 기울이지만, 단일인종 단일민족 국가인 한국은 정반대다. 그저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식이다. 이름이 높거나 세상의 관심을 끌 만한 계기가 있으면 모든 정성을 다 바치는 것처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엔 누가 너더러 그렇게 하랬어?”라는 식이다. ‘한국인 징용자들의 비극이 과거 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67-168)

전쟁 당시 일본 야무구치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을 지냈던 요시다 세이지는 나는 한국인 종군 위안부를 강제연행했던 그야말로 노예 사냥꾼이었다며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6,000명 정도를 직접 연행했다. 극비의 노무명령서에 따라, 마을에 도착하면 우선 여성 전원을 길로 끌어냈다. 도망치면 목검으로 때렸고 젊고 건강한 여성을 골라 트럭에 실었다. 안고 있던 아기를 잡아떼어 놓고 억지로 끌고 간 적도 있다. 비명을 지르는 젊은 어머니를 때려 쓰러뜨리고 2~3살의 어린이가 울면서 따라오면 애들을 내팽겨쳤다. 이렇게 모은 여성들을 화물열차와 관부연락선에 짐짝처럼 실어 시모노세키에 와 서부군 사령부에 인도하면 군용선박으로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각지로 보내졌다. 종군 위안부를 포함해 강제연행 관련 공식기록이나 관계문서는 패전 직후 내무차관 통첩으로 모두 소각처분했다. 황군병사라면 (이런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전후에 누구 하나 종군 위안부 얘기를 하지 않는다.”


(200)

일본에 대해 너그럽고 싶은가? 한국의 반일감정을 경멸하고 싶은가? 역사를 알려고 들지 말아야 한다. 혹 오다가다 들은 게 있더라도 곧 잊어야 한다. 역사를 제대로 알고선 일본에 대해 너그러울 수가 없다. 물론 오늘의 일본인은 가족끼리 때려죽인 오키나와 집단자결 사건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 그러나 직접적인 책임만 없는 것일 뿐, 일본 정부와 우익의 교과서 왜곡에 침묵한다면 스스로 간접적인 책임을 지겠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상적 삶에선 지구상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선량한 일본인들의 적극적인 양심회복운동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전개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들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다.


(236-237)

그러나 그 어느 쪽이건 한국이 미소 두 강대국이 그들 마음대로 갖고 노는 장난감과도 같은 비참한 운명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작 분단되어야 할 나라는 전범국가인 일본이었건만,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이 분단되는 기막힌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부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38도선에서의 미소 양국군의 한반도 분단 점령은 일본 분단 점령의 대용품이 되고 말았다.”


(248)

전후 연합군의 군사법정에서 포로학대 등의 혐의로 처벌받은 B, C급 전범 5,700여 명 가운데는 조선인 148명이 포함돼 있다. 그들 대부분(129)이 반강제적으로 동원된 포로감시원이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2 5월 일본 육군은 말레이, 자바 등에서 펼친 남방작전에서 붙잡은 26만 명이 넘는 연합군 포로들을 감시하기 위해 조선에서 3,000명의 포로감시원을 모집했다. 계약기간이 2년이라는 점과 징병으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점이 주요 지원 이유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이 조선인들 중 129명이 포로학대를 이유로 전범처리됐고 23명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일본은 겨우 7명이었는데도 말이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군인도 아닌 군무원 신분이었지만, 전범자로 처리된 비율은 악명높았던 일본 헌병의 처리 비율(4.3퍼센트)과 맞먹을 정도였다. 게다가 가시 노부스케 전 상공대신, 아베 겐키 전 내무대신 등 A급 전범 용의자들은 1948년께 일찌감치 석방됐고, 천황의 전쟁 책임은 불문에 붙인 점을 감안하면 전후 전쟁범죄재판은 한편의 거대한 사기극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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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배운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6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5년 5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지난 번 독서편지 때 이야기한 것처럼, 아빠가 여행길에 읽으려고 가져간 책들 중에 두 권밖에 읽지 못했다고 했잖아. 그 중에 하나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스페셜 컬렉션 시리즈 중에 <사랑을 배운다>라는 책이란다. 애거사 크리스티 컬렉션 시리즈는 모두 6권으로, 아빠는 그 전에 세 권을 읽고, 이번이 네 번째란다. 애거사 크리스티 컬렉션 시리즈는 추리 소설 작가로 유명한 애거사 크리스티가 또 다른 필명으로 쓴 비추리 소설들을 모은 시리즈란다.

지금까지 읽은 세 권 모두 재미있게 읽어서, <사랑을 배운다>라는 책도 기대를 하고 책을 폈는데, 이전에 읽은 책들보다는 재미가 별로더구나. 여행 중에 짬짬이 읽다 보니 이야기가 자꾸 끊겨서 그럴 수도 있고여행 중에 이 책의 제목을 본 너희들이 아빠, 사랑을 배우려고? 이렇게 질문을 던졌잖니사랑을 배운다고 잘 할 수 있겠니? ㅎㅎ 그런데 책제목은 왜 사랑을 배운다고 했을까? 그래서 원제를 찾아보니 <The Burden>으로 되어 있더구나. Burden는 짐, 부담뭐 이런 뜻을 알고 있는데옮긴이께서 한국어 제목을 좀더 낭만적으로 뽑으신 것 같구나. 참고로 이 작품은 1956년에 출간된 되었다고 하니, 소설을 읽을 때 그 머릿속에 시대적 배경도 넣어두고 읽어보면 좋겠구나.


1.

아서 프랭클린과 안젤라 프랭클린 부부에게는 아픔이 있었단다. 첫 아들 찰스가 어렸을 때 병으로 죽고 말았어. 이 충격으로 아서와 안젤라는 요양을 갔고, 그들의 어린 딸 로라는 집에서 유모와 하인들과 함께 있었단다. 당시 로라 나이 일곱 살인데 아서와 안젤라 부부가 로라도 같이 데리고 가지당시 영국의 귀족들은 그런 문화가 아니었나? 싶구나.

로라는 이웃집 존 교수님에 들렀다가 존 교수와 친구가 되었는데, 이 인연으로 로라는 어려운 일이 있거나 조언이 필요할 때 존 교수님을 찾아갔단다. 아서와 안젤라 부부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고, 얼마 안 가서 로라의 동생 셜리가 태어났단다. 셜리가 태어났을 때 로라는 심한 질투심을 느꼈어. 동생이 태어나게 되면 모든 아이들이 느끼는 그런 질투심이지. 로라는 셜리가 빨리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어느 날 로라의 바람대로 셜리가 천국에 갈 뻔했단다. 셜리를 보살피던 유모가 발작을 일으켰는데, 그 발작으로 집에 큰 화재가 일어났어이 때 로라가 불길에 뛰어들어 어린 셜리를 구해주었어. 그래서 셜리는 천국에 가지 않을 수 있었어. 이 일이 있고부터 로라는 셜리를 위한 삶을 살게 된단다. 로라도 어렸지만 셜리를 위해서 무엇이든 했단다.

몇 년이 지나고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그만 모두 돌아가셨단다. 그 때 로라 나이는 14, 셜리는 3살이었어. 이때부터 로라는 더욱 셜리를 보살피고 키우는 일에 전념했단다. 14살이면 무척 어린 나이인데, 로라는 셜리를 보살피고 집안 일도 도맡아 했단다. 유모의 도움이 있었지만, 셜리의 교육과 육아는 로라가 다 챙겼어.

시간이 흘러 로라가 결혼 적령기가 되어도 결혼도 안하고, 오직 셜리를 보호하는 일에서 신경을 썼어. 어느덧 셜리도 19살이 되었고, 사랑할 나이가 되었단다. 그런데 셜리는 첫눈에 반한 헨리라는 남자와 결혼하겠다고 했어. 로라는 셜리의 섣부른 결정에 반대했단다. 사랑이야 그렇게 쉽게 불타오를 수 있지만, 결혼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헨리라는 남자가 꼭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았고영화 <겨울왕국>에서 안나가 첫눈에 반한 한스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그걸 반대하는 엘사가 생각나기도 했단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 돌아가시고 두 자매가 남은 것이 비슷한 상황이기도 하네. 다시 <사랑을 배운다>로 돌아 와서로라는 계속 반대를 했는데, 그 반대를 셜리를 불행하게 하고, 혹시 셜리에 대한 질투심은 아닌가 생각하게 되고, 결국은 결혼을 허락하게 되었단다.


2.

역시나 헨리는 그리 성실한 사람이 아니었어. 직장을 자주 바꾸고, 돈은 물쓰듯 하고 그로 인해 빚은 늘어만 갔어. 거기에 설상가상 바람까지 피워서 셜리는 무척 힘들어했단다. 그러던 중에 셜리는 리처드 와일딩이라는 유명한 여행가를 알게 되었는데, 리처드는 헨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단다. 다정다감하고 친절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어. 셜리와 리처드는 서로 호감을 가졌단다.

그런데 헨리가 척수마비 병에 걸리고 말았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지는 않았지만, 평생 불구의 몸으로 침대에서만 지내야 했어. 헨리 같은 성격에 평생 침대에 누워 지내는 것을 참을 수 있을까? 가뜩이나 성격이 좋지 않았는데 헨리는 더욱 괴팍해지고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못했단다. 셜리는 아내로써 그런 헨리를 버릴 수 없었단다. 아내로써 헨리를 보호하는 것은 사랑을 떠나서 의무감이라고 생각했어. 착한 의무감이랄까.

헨리가 그냥 건강해서 계속 바람을 피우고 결국 이혼을 하게 되고 셜리도 다정다감한 리처드와 다시 사랑을 하게 되었다면 그나마 해피 엔딩이었을텐데헨리가 장애인이 되면서 의무감에 그를 보살피면서 지내야했어. 셜리가 도적적 의무를 버리지 않겠다고 하면 헨리가 늙어 죽을 때까지 말이야. 리처드도 그런 셜리를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단다.

그런데 어느날 헨리는 실수로 약 과다 복용으로 그만 죽고 말았단다. 그 자리에 로라가 있었는데, 셜리를 위해 평생을 살아왔던 로라가 실수를 한 것이 맞을까? 아니라는 강한 의심이 들었지.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 헨리는 죽고 셜리는 혼자가 되었단다.


3.

10년이 지나고…. 루엘린이라는 유명한 전도사가 건강에 문제가 생겨서 전도사 일을 그만 두고 어떤 섬에 요양을 지내러 왔단다. 그 섬에 자주 가는 식당에 혼자 술을 먹으러 오는 어떤 여자를 알게 되어 합석을 하게 되고 셜리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고 그랬어. 루엘린은 그 섬에 유명한 여행작가 리처드 와일딩이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보게 되었는데, 루엘린이 식당에서 만났던 여자가 바로 리처드의 부인이었단다.

10년 전 헨리가 그렇게 죽고 나서, 셜리는 리처드와 결혼을 하게 되었지만, 그 삶이 그리 행복한 삶이 아니었단다. 헨리를 의무감으로 보살피고 있었는데, 헨리가 죽고 말아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 삶 자체가 지옥이고 괴로움이었지. 리처드와 로라가 노력했겠지만 셜리는 회복하지 못했어. 10년이 지난 후에도 말이야. 어느 날 셜리는 취한 상태로 길을 가다가 그만 트럭에 치여 죽고 말았단다. 루엘린은 셜리의 유품을 로라에게 전달하는 일을 도와주었어. 루엘린은 로라를 찾아왔는데, 그만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사랑이란 아무도 모르게 어디선가 불쑥 찾아오지. 루엘린과 로라는 셜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로나는 헨리의 죽음의 비밀도 이야기했단다.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고헨리가 이미 약을 먹을 알고 있었는데, 자신이 또 주었다고 말이야

셜리를 위해 한 행동이나 결과적으로 봤을 때 셜리를 한 행동이 아니었어. 헨리를 보살피는 것이 어찌되었든 셜리의 삶의 목표였으니 말이야. 그 이후 10여 년 삶은 포기한 듯 괴로워하다 결국 삶을 마감한 셜리로라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로라는 셜리를 사랑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셜리를 행복하게만 했을까? 그건 의문점이 드는구나.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베풀 때 그것이 내 마음 편한 것만 생각하면 안되고,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한번쯤 생각해봐야겠구나.

그나저나 로라도 루엘린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는데, 그들의 사랑은 어떨까? 두 사람 모두 인생에서 이런 저런 경험을 겪고 사랑을 해봤을 테니 셜리와 헨리와 같은 어설픈 사랑은 아니겠지? 또 모르지.. 사랑이란 것에 정답도 없고, 나이고 없는데 갈피를 못 잡는 대명사인데


PS,

책의 첫 문장: 교회 안은 추웠다.

책의 끝 문장: 로라는 처음으로 사랑의 무게를 느끼고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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