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한국 사랑 대서사시
김동진 지음 / 참좋은친구 / 2019년 10월
평점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일제 시대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을 하시고, 자신의 모든 삶을 쏟아 부으셨단다. 그런데 그런 독립운동가들 중에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외국 사람이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신 고마운 분들이
있어.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분이 호머 헐버트가 아닐까 싶구나. 헐버트는
아빠가 책을 통해 간간히 만났고, 역사 관련 유튜브를 통해서 알게 되고 나서, 정말 대단한 분이고 존경할 만한 분이라고 생각했단다. 우리나라 독립과
우리나라를 제대로 알리는 데 평생을 노력하신 분이고, 나중에는 우리나라에 다시 오셔서 우리나라에서 돌아가시고, 그의 소원대로 우리나라에 묻히신 분…
그런 헐버트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책을 검색해 보았고, 그렇게 알게 된 책, 김동진
님의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라니!>라는 책을
읽었단다. 이 책을 읽고 깜짝 놀랐단다. 다른 역사서나 유튜브에서
단편적으로 접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셨고, 이런 분들을 학교에서 배우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미안함을 느꼈단다. 비록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지만, 헐버트만큼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서 일했고, 우리나라를 알리는데 진심이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싶구나.
지은이 김동진 님은 전문 작가가
아니시고, 제이피모건체이스은행 한국 회장을 역임했던 금융인이었다고 하는구나. 그런 그가 어떻게 헐버트에 관한 책을 쓸 수 있었을까. 김동진 님은
대학 시절에 헐버트의 <대한제국의 종말>이라는
책을 읽고 헐버트에 푹 빠지셨다고 하는구나. 그 이후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헐버트에 대한 연구를
하셨고, 헐버트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쓰신 책이 바로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라고 하는구나. 2010년에 헐버트의
첫 평전을 쓰고 2019년 그 이후 더 모은 헐버트의 자료를 추가하여 개정판을 쓰셨단다. 아빠가 읽은 것은 2019년 개정판이란다. 아빠가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신 할 건데, 그보다 너희들도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봤으면 좋겠구나. 헐버트의 삶을 통해서 여러 배울 점도 얻을 수 있고, 구한말부터 일제시대의 우리나라 역사 공부도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1.
헐버트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에서 태어났단다. 3남
3년 중에 차남이었어.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아버지의
권유로 1884년 조선에 선교사로 오기로 했어. 그런데 그가
오려고 하던 1884년 갑신 정변이 일어나서 일정이 연기되었고, 2년
뒤 1886년 조선에 첫 발을 디뎠단다. 서양인의 눈에 당시
서울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그가 어머니에게 남긴 편지가 있는데 상쾌하고 맑은 공기의 도시라고 몇 번씩
이야기를 했단다. 음… 오늘날 탁한 공기의 서울과는 무척
대조적이었구나. 그런데 그때보다 지금이 좋은 것은 그때 뱀이 많았다는 것. 아빠는 뱀이 너무 싫단다.
====================
(41-42)
헐버트
눈에 비친 서울은 자연의 상쾌함이 넘쳐나는 도시였다. 그는 어머니에게 보낸 첫 편지(1886년 7월 10일)에서 “서울은 쾌적한 도시입니다. 제가
얼마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잘 지내고 있는지를 알면 어머니는 안도하실 것입니다.”라고 썼다. 그는 또 신문 기고문에서, “서울은 높이 치솟은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원형극장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느낌이다. 산 정상을 따라 만들어진 서울의 성벽은 거리가 5~6마일 정도가 된다. 높이는 몇몇 곳에서는 2,000 피트도 더 된다. 도시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이 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맑고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라며 서울의 공기를 반복적으로 칭찬하였다. 서울에는 매가 머리 위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맴돌고, 밖에 나다니면서
정신을 못 차리다간 뱀이 목덜미에 떨어질 판이라고도 했다.
====================
…
헐버트는 언더우드의 집에서 머물면서
우리나라 최초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의 개교 준비를 했단다.
학교 문을 열고 나서 헐버트는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어. 자신이 좀더 훌륭한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는 조선의 말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금방 한글에 능숙해졌단다. 우리말이
익숙해지면서 고종과 친해지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
1888년 결혼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 곧바로 다시 돌아왔단다. 신혼 여행도 조선에서 하고,
신혼집도 서울 정동에 차렸단다. 결혼한 이후에는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열심히 공부를 하고 그렇게 조선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조선의 문제점도
알게 되었어. 조선의 근대화에 가장 큰 걸림돌은 청나라라고 생각했어.
그 밖에 당시 국내외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였고 이를 고종에게 조언해주시고 했어. 뿐만 아니라
이때부터 해외언론에 조선에 대한 내용을 기고하기 시작했단다. 그리고 한글로 된 제대로 된 교과서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도 헐버트가 만들었단다. 아빠가 예전에 다른 책 이야기하면 이야기했던 <사민필지>라는 책이란다.
그러니라 우리나라 근현대 최초의 교과서는 헐버트가 만든 <사민필지>라는 책이야.
====================
(59)
헐버트는
조선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제대로 볼 책이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하면서 자신이 직접 서양에서 가르치는 근대 서적을 출판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부모에게 보낸 편지(1890년 1월 27일)에서 “저는 조선인들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인들이
저를 붙들도록 하겠습니다.(I am going to make myself so valuable to
Koreans that they can afford to let me go.)”라면서 조선에 계속 남아 종교뿐만 아니라 역사, 지리, 정치경제, 국제법
등을 망라한 서양의 근대 서적을 조선 글자로 소개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더 나아가 “조선의 전설과 신화를 수집하고 있으며 앞으로 책을 낼 예정입니다. 조선어와
여타 언어 사이의 유사성도 연구하고 있습니다.”라며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영역에 도전하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쳤다. 뒤이어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선교사들이 성서 번역에만 관심이 있다면서 자신은 수학책도 소개하고
학교용 교과서 출판을 시도하겠다고 밝혔다. 헐버트의 이러한 결기는 조선이 근대국가가 되기를 바라는 진정성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사민필지>의 저술과 교과서 편찬 등의 결과물을 낳는다.
====================
<사민필지>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을까. 기본적으로 세계 지리에 관련된 내용인데, 그
외 각 나라의 사회상, 정치제도도 모두 담고 있어, 백과사전
사회 편이라고 해도 되지 않았을까 싶구나.
====================
(86)
<사민필지>는 단순한 세계지리 책이 아닌 각 나라의 사회제도를 폭넓게 담은 일반사회책이기도 하다. 헐버트는 서양에서 출판된 지리, 사회책을 바탕으로 자신의 사회과학
지식을 동원하여 <사민필지>를 저술하였다. <사민필지>는 머리말에 이어 태양계, 땅떵이(지구)를 설명하고, 이어서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순서로 각 대륙의 나라를 개별적으로 소개하였다. 각 나라 설명에서 조선인들의 상식이 미치지 못하는 종교, 군사력, 정치체계, 사회제도 등을 담았다.
헐버트는 각 나라의 정치체계를 설명하면서 정사를 임금이 마음대로 하는 나라와 백성의 주장을 존중하는 나라로 구분하였다. 미국은 대통령을 4년마다 선출하고,
국민 대표기관인 의회가 있고, 재판이 독립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기술하였다. 이 땅의 청년들에게 주권재민 사상을 심어주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여긴다. 헐버트는 또 각 나라를 4등급으로 분류하여 정치체계의 좋고 나쁨을 구분하였다. 1등급은 미국을 포함해 12개 나라이고, 러시아, 일본은 2등급에, 조선은 청나라와 함께 3등급에 분류되었다. 조선은 전제군주의 나라로 신분제가 있고, 한자를 힘써 공구부하고
유고만을 준행하며, 신앙의 자유가 없다고 기술하였다.
====================
…
헐버트가 한글을 금방 익힌 이후로는, 한글 예찬자가 되어서 여러 차례 한글의 우수함을 알렸단다. 우수할
뿐만 아니라 쉽게 배울 수 있어 자신의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쳤어.
====================
(77)
그는
또 “영국이나 미국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갈망했고, 식자들이
심혈을 기울였으나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글자 하나당 발음 하나의 과제가 이곳 조선에서 수백 년 동안 존재했다. 감히 말하건대 아이가 한글을 다 떼고 언어생활을 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영어 ‘e’하나의 발음과 용법의 규칙과 예외를 배우는 시간보다 적게 든다.”라고 조선어가 영어보다 우월함을 설파했다. 그는 이어서 “어떤 문장에 영국인들이 스무 단어를 써야 할 때 조선인들은 열세 단어만 쓰면 된다.”라고 조선어의 언어학적 우수성을 갈파하였다. 또한, 동사의 어형 변화 형태를 설명하면서 영어 ‘give’와 우리 말
‘주다’를 비교하였다. 그는
“’주’는 ‘준다’의 어근이며, ‘주게’는
미래시제의 어근이고, ‘주어’는 과거시제의 어근이다. 직설법 형태의 어미는 모두 ‘다’이지만
어간과 어미 사이의 음절 ‘난’이 들어가 ‘주난다’가 되고, 이를
‘준다’로 줄여서 말한다.”라고
풀이하여 언어학의 천재성을 과시했다.
====================
2.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아 갔단다. 이것은 고종 황제가 도장을 찍지 않았기 때문에 유효한 조약으로 볼 수 없었단다.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의 모국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의
정신을 위배했다고 주장했단다. 미국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어.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가 당시 미국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즈벨트에게 전달하려 했지만 미 정부는 무시하고
만나주지 않았단다. 미정부는 몰래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고 미국은 필리핀,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인정하기로 했거든.
헐버트는 <한국평론>이라는 월간지를 만들어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글들을 매달 실었어. 그리고 미국 <타임스>의 특파원으로서 조선 독립을 주장했다. 즉, 언론을 통해서 일본의 부당함을 알라고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단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한글의 우수성을 세상에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설화, 한국 시, 한국 소설, 판소리 등 한국 문학들도 외국에 소개를 하였단다. 또 하나 놀라온 것은 한국의 음악을 외국에 알리면서, 아리랑을 최초로
음계에 작성한 것도 바로 헐버트라고 하는구나. 정말 대단하신 분이네…
아리랑을 음계로 옮긴 것뿐만 아니라 아리랑을 소개하면서 우리나라의 음악성에 대해 칭찬을 했는데, 오늘날 K-pop의 유행을 예견한 것이라고 지은이는 이야기했단다. 아빠도
대략 공감한단다.
====================
(188-190)
헐버트는
대중음악의 대표 노래로 아리랑을 선택하였다. 그는 아리랑을 ‘현저히
빼어나고 듣기에도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노래’라면서, “조선인들에게
아리랑은 음식에서 쌀과 같은 존재이다.”라고 아리랑의 위치를 설정하였다. 그는 아리랑을 조선 음악의 최고봉으로 평가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주식인 쌀에 비유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아리랑에
대한 정서까지도 읽어냈다. 헐버트는 “아리랑은 1883년부터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리랑의
‘진짜 마지막 공연’은 까마득한 미래의 일로서 아마도 아리랑은
한민족의 영원한 노래가 될 것이다.”라고 아리랑의 미래를 예견하였다.
그는 아리랑 후렴구 노랫말은 서정시요, 교훈시요, 서사시라면서, “조선인들은 즉흥곡의 명수이다. 부르는 이들마다 노래가 다르다. 조선인들이 아리랑을 노래하면 바이런이나 워즈워스 같은 시인이 된다.”라고
조선인들의 예술적 끼를 칭송하였다. 조선 음악이 나라 밖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때 헐버트는 한민족의
음악적 재능을 세계에 설파하였던 것이다. 이는 우리 젊은이들이 오늘날 케이팝K-pop으로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을 한 세기도 전에 예견한 혜안이었다.
====================
….
한국의 다섯 가지 위대한 발명품이라면서
외국 언론에 소개했는데, 그 다섯 가지는 거북선, 금속활자, 현수교, 폭발탄, 그리고
한글이었어. 특히, 거북선은 모형 제작까지 하여 소개를 했다는구나. 한국의 역사도 정리하여 <한국사>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우리나라의 온전한 통사를 저술한
첫 번째 책이라고 하는구나. <한국사>는 단군부터
고종까지의 역사를 저술했대.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 책이
무려 800쪽이 넘는다는구나. 정말 정성을 들여 썼다는 것이
느껴지는구나.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보니 이 책의 영문판, 한글판
모두 구입할 수 있더구나. 그 책의 내용이 어떨지 무척 궁금하구나. 기회
되면 꼭 한번 읽어봐야겠구나.
…
헐버트는 우리나라를 제대로 알리는
데도 힘썼단다. 그리피스라는 사람이 <은둔의 나라, 조선>이라는 책을 썼는데, 이
책에 나온 여러 오류를 지적하였대. 특히 일본인이 쓴 글로 바탕으로 안 좋게 쓴 부분들이 많아서 그리피스에게
강력하게 항의를 했다는구나.
====================
(219-220)
헐버트는
미국인 그리피스가 1882년에 쓴 책 <은둔의 나나(Hermit Nation)>에 대해서도 강한 이의를 제기했다. 이
책은 서양에서 조선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책으로 헐버트도 조선에 오기 전에 이 책으로 조선을 공부하였다. 그런데
헐버트가 조선에 와 보니 이 책에 오류가 너무 많았다. 헐버트는 회고록에서 그리피스가 조선에 와 보지도
않고 일본인이 쓴 글만 읽고 책을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또 은둔을 뜻하는 ‘hermit’이라는 단어도 오늘날의 한국인을 표현하기에 부적합하다면서 “한국인들은
그저 편안하게 은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 새로운 문물을 도입하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리피스가 미국의 한 잡지에 한국에 대해 글을 기고하며 <한국, 난쟁이 제국(Korea,
the Pigmy Empire)>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기고문 내용도 백제를 ‘히악시(hiaksi)’라고 하는 등 오류가 넘쳐났다. 헐버트는 분노를 제어할 수 없었다. 그는 <한국평곤> 1902년
7월호에 그리피스 기고문에 대한 반박의 글을 실어 “’pigmy’라는 단어는 아프리카의
왜소한 흑인종을 가리킨다. 미국인들이 이 기고문을 읽으면 한국인을 미개한 열등 민족으로 인식할 것이
뻔하다.”라며 그리피스에게 한국에 관한 글을 쓰려면 제발 한국에 직접 와서 보고 쓰라고 호소하였다. 1904년 런던의 한 수도원 행사에서 헐버트는 그리피스와 직접 맞닥트리기도 했다. 그리피스가 “일본과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은 행복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라고 친일 연설을 하자 헐버트는 그리피스에게 다가가 “어디
두고 보자”라며 대판 설전을 벌였다고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밝혔다.
====================
….
앞서 이야기했듯이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에 대해 주장했는데 그것을 <대한제국의 종말>이라는
책을 통해서 지적했단다. 이 책은 일본의 부당성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국 미국의 친일정책도 강하게 비판했어. 이 책은 외국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고, 일본은 이 책을 사들여
불태워버리기도 했다는구나. 구린 것이 있는 거지.
====================
(226)
헐버트는 <대한제국의 종말>에서
1905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며 일본의 침략주의를 고발하였다.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모국 미국의 친일정책을 비난하는 용기를 보여 주었다. 그는 을사늑약 당시 미국의 처신에 대해
“한국에 어려움이 닥치니 미국이 제일 먼저 한국을 저버렸다. 그것도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인사말도 없이(When the pinch
came we were the first to desert her, and that in the most contemptuous way,
without even say good-bye.)”라고 공사관을 맨 먼저 철수한 미국을 맹비난하였다.
====================
….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간 사람들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 이렇게
학교에서 배웠던 기억이 있단다. 사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아서 인터넷에서 좀 찾아봤단다. 암튼 우리나라 세 사람만 학교에서 배웠던 것 같은데, 당시 헐버트도
고종의 특사 자격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을 했단다. 그는 거기서 세계 각국 언론사를 통해 우리나라의
독립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이 약탈해간 문화재에 대해서 맹비난했단다. 일본이 경천사 십층 석탑을
약탈해갔는데 그것을 알게 된 헐버트가 그것을 국제 여론전을 펼친 것이란다. 이것은 헐버트뿐만 아니라
베델이라는 사람도 함께 동참하여 여론전을 펼쳤어. 결국 일본은 그것을 돌려주겠다고 했고, 1918년에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
(276)
<재팬크로니클>이 석탑 약탈을 공식화했음에도 다나까는 계속 버티며 석탑을 돌려주지 않았다. 헐버트는 국제 여론에 호소하기로 마음먹었다. 헐버트는 만국평화회의가
열린 헤이그에서도 석탁 약탈 사실을 폭로하였다. 1907년 7월 10일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연설을 하며 경천사 십층석탑 약탈 사건을 예로 들었다. <만국평화회의보>가 헐버트의 주장을 보도하자 <뉴욕포스트>등 국제적인 신문들이 이를 받아 대서특필하였다. <뉴욕타임스>도 헐버트 회견 시가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베델도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계속적으로 일본에 석탑 반환을 촉구하였다. 석탑 약탈에 대한 비난 여론이 국제적으로
들끓자 당황한 일본 외교관들이 석탑을 한국에 돌려줄 것을 본국에 건의하기까지 했다. 일본은 1918년에 가서야 석탑을 돌려주었다. 두 외국인 헐버트와 베델이
이 문제를 국제여론전으로 몰고 감으로써 결국 석탑이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돌아온 석탑은 조선총독부
창고에서 뒹굴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5년 용산 국립중앙박물과 개관과 함께 지금의 자리에 세워졌다. 헐버트가 현장에 가서 사진으로 증거를 남기지 않았다면 경천사 십층석탑은 아마도 우리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현장 사진 증거가 없었다면 일본이 과연 약탈을 인정했겠는가?
헐버트가 희망한대로 언젠가 석탑이 원래 자리인 경천사에 원형대로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
…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특사 사건은
후폭풍이 거셌단다.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폐위시키고 순종을 황제 자리에 앉혔단다. 그리고 궐석재판을 열어 이상설에게 사형을, 이미 순국한 이준과 이위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어. 그리고 헐버트에게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단다.
3.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국내로
들어오지 못한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언론을 통해 조선의 독립과 일본의 만행을 계속 고발했단다. 친일
미국인들이 있는데 그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어.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스티븐슨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아빠가 몇 번 이야기를 해 준 사람이란다. 우리나라 장명환
의사와 전명운 의사가 동시에 저격하여 사망했던 그 사람… 스티븐슨이 헐버트와 논쟁을 벌인 이력이 있어서
스티븐슨이 죽고 나서 헐버트는 신변 위협을 당하기도 했대.
한국을 떠난 지 2년인 1909년 가을. 헐버트는
유럽과 시베리아를 거쳐 압록강을 건너 서울에 다시 돌아왔단다. 일본의 철저한 감시 속에 두 달 가량
서울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가 머물고 있는 동안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일이 있었어. 그래서 헐버트가 그 일의 배후라는 소문도 돌았다는구나. 감시가 심해서
국내에서 특별한 활동을 못했던 헐버트는 두 달 뒤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단다. 미국에 가서도 여전히
계속 미국 정부 특히 루즈벨트 대통령을 비판했단다. 을사늑약에 대해 미국의 책임이 크다고 말이야.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결국 죽기 전에 을사늑약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는구나.
…
헐버트는 미국에 머물면서 1919년 3.1운동의 소식을 들었어. 3.1운동을 3.1혁명이라고 하면서 비폭력 시위를 한 한민족의 숭고한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는구나.
====================
(342-343)
헐버트는 3.1혁명을 어떻게 정의하였을까.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발행되던 <미주 한국평론> 1919년 10월호에 <제1차
세계 대전과 한국(Korea’s Part in the War)>를 기고하였다. 헐버트는 이 글에서 “인류애가 고상함이나 영웅주의에 묻힌다면 이는
인류에 대한 모반이다. 3.1혁명은 ‘신의 손(hand of God)’이 작용한 것이며 한국의 독립은 천부적 권리이다.”라고
천명했다. 그는 또 이듬해 1월 <국제관계>지에 기고한
<일본과 한국(Japan in Korea)>에서, 일본과 한국의 반목은 일본이 역사적으로 한국의 군사력을 얕보는 데서 기인한다고 진단하였다. 이어서 한민족은 3.1만세항쟁에서 원한과 증오를 표출하는 대신, ‘자유를 달라(We must and shall be free)’고만
외쳤다면서 3.1혁명의 비폭력 정신을 평가하였다. 이는 한민족의
문명 수준을 말해 준다고 덧붙였다. 헐버트는 1949년 7월 죽음을 앞두고 가진 언론 회견에서는 3.1혁명을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숭고한 정신문화적 가치라고 정의하였다.
====================
3.1 운동 이후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있었는데, 헐버트는 여운형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는 등 여전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을 하셨어. 그 이후에도 계속 여러 언론을 통해 한국에 대한 글들을 기고했다는구나. 세월이 흘러 1940년대가 되었고,
헐버트의 나이도 80대가 되었어. 80대 나이에도
한국에 관한 글은 계속 기고했대. 헐버트가 자신의 모교에 남긴 신상기록부를 보면 그가 한 평생 우리나라와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 노력했음을 할 수 있었단다.
====================
(364)
2004년 다트머스대학을 방문하여
헐버트 기록을 추적하던 중 헐버트가 졸업 45주년을 앞두고 모교에 제출한 ‘졸업 후 신상기록부’가 눈에 들어왔다. 헐버트가 70을 바라보며 친필로 작성한 자신의 삶의 흔적이었다. 필기체로 휘갈겨 쓴 기록부를 세세히 읽다가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다. 헐버트는
신상기록부 ‘나의 일생(My Life Story)>란에
자신과 한민족의 관계를 정의하는 글을 남겼다:
“나는 천팔백만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이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의 한민족에 대한 충심은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여긴다.”
원문 : I have been fighting for the rights and liberties of 18,000,000
people whose love I hold as my most precious possession and whatever the
outcome I dream that loyalty to such a cause is worthwhile.
====================
…
그리고 드디어 광복… 멀리서나마 헐버트는 얼마나 기뻐했을까. 헐버트는 1949년 7월 29일 40년 만에 다시 우리나라에 왔단다. 얼마나 감회가 새로웠을까. 다시 온 한국에서 더 많은 시간을 가졌더라면 좋았겠지만, 우리나라에
온지 일주일 만에 그만 노환으로 돌아가시고 말았단다. 그리고 그의 생전 소원대로 우리나라에 묻히셨다고
하는구나.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가면 그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고 하는구나.
…
누가 다른 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헌신적인 노력을 할 수 있을까. 정말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라고 생각한단다. 지은이 김동진 님이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헐버트를 평가하는 글이 있는데, 그
글로 오늘 독서 편지를 마치련다.
====================
(421)
헐버트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진정한 세계주의자이자 영원한 한민족주의자였다. 그는 “한민족은 두뇌가 우수하고, 독창성이 뛰어나다. 교육유전자가 남달라 성공 잠재력이 무한하다. 위기가 닥치면 단결하여
나라를 지켜 내는 끈기와 생존력을 지녔다.”라며 한민족의 우월성을 논리적으로 풀이하였다. 헐버트는 또 생을 마감하면서, 한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빼어난 민족이라고
증언하며 한글 등 다섯 가지 예를 들었다. 헐버트야말로 그 누구보다도 한민족의 미래 가치를 확신한 참
한민족주의자였다.
====================
PS,
책의 첫 문장: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한국과 일본은 ‘한일의정서’에 서명하였다.
책의 끝 문장: 그리하여 한민족이 세계 속에 우뚝 서리라는 헐버트의
꿈을 꽃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헐버트는 영어에서 학생들이 ‘f’와 ‘r’, ‘v’, ‘th’ 등의 발음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발견했다. ‘will not’을 ‘willot’으로 발음하는 등 연어 발음에서도 어려움이 나타났다. 헐버트는 학생들이 장치 국제무대에서 영어를 원활하게 구사해야한다면서 발음 교정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문장 암송이 영어 공부의 첩경이라며, 학생들이 문장을 완전히 암송해야만 집에 갈 수 있게 했다. 학생들은 한문 서예를 공부해서인지 펜으로 영어 쓰기는 아주 잘했다. 일부 학생은 심지어 자신보다 더 잘 썼다고 회고했다. - P47
헐버트는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으로 사실상 주권을 잃지 을사늑약 다음 해인 1906년 <대한제국의 종말(The passing of Korea)>에서 ‘한국의 살길은 교육뿐’이라면서 한국인들에게 교육에 전념하여 힘을 기르기를 호소하였다. 그는 "한국인들은 미개해서 자치 능력이 없다고 국제적으로 떠들고 다니는 일본인들의 멸시를 상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라며 한국인들에게 교육을 통해 일본을 따라잡고,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를 바랐다. 그는 또 미국에게 조미수호통상조약 정신을 위배했다며 지금이라도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한국에 교육 투자를 강화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면서 "교육에 대한 투자에서 가장 크게 효과를 낼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다. 이 말은 한국인들의 깊숙이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다."라며 한민족의 성공 잠재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 P127
"만약 조선이 한글 창제 직후부터, 과도한 지적 부담을 주고, 시간을 낭비하고, 반상제도를 고착시키고, 편견을 추구기고, 게으름을 조장하는 한자를 내던져 버리고 자신들이 모든 소리글자 체계인 한글을 받아들였더라면 조선에게는 ‘무한한 축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허물을 고치는데 너무 늦다는 법은 없다. 이제라도 한글을 써야 한다." 헐버트는 또 1896년 10월 <조선소식>에 "나는 영국인들이 라틴어를 버린 것처럼 조선인들도 결국 한자를 버리리라 믿는다."라고 하여 이미 백 년도 훨씬 전에 한글 전용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전용하고 한자가 보완적 기능을 하는 현실을 보면서 헐버트의 예지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P150
헐버트는 책을 마치며 한민족에세는 참으로 감동의 글을 남겼다. 그는 "예언자 흉내를 내는 것은 역사가의 본분이 아니며, 역사가는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예단하려 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한민족이 장차 경이적인 역사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희망하는 예단은 허용돼야 한다."라고 하여 한민족이 세계 속에 우뚝 서리라고 예언하였다. 헐버트가 한민족 역사를 15년 동안 천작하며 내린 한민족의 잠재력에 대한 확신이자 결론이지 않은가.215 - P215
헤이그 특사 파견 사건은 나라의 운명은 물론이고 고종 황제와 특사들 개인의 운명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을 묻는다면서 7월 20일 고종을 황제 자리에서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 자리에 앉혔다. 7월 24일에는 소위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내정까지 공식적으로 접수하고, 대한제국 군대도 해산시켰다. 헐버트는 특사증을 발급한 고종 황제가 퇴위 되어 더 이상 특사 자격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1919년 미국 의회에 제출한 ‘한국 독립 호소문’에서, 일본이 고종 황제를 재빨리 퇴위시킨 것은 자신이 고종 황제의 특사로 조약상대국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친서를 무효화시키기 위한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고 밝혔다. 일제는 궐석재판을 열어 정사인 이상설에게는 사형을, 이미 서거한 이준과 이위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하였다. 헐버트도 일제의 위협에 한국에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 P3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