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2024년 여름호 - 통권 186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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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오늘날 우리는 총체적 난국에 살고 있단다. 현정권 들어서 하는 일들에 합리적으로 이해 가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구나. 그야말로 사고뭉치 정권이 아닌가 싶구나. 심지어 아빠가 해도 그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이런 정권이 우리나라 정권이라는 것이 창피할 따름이란다.

오늘 너희들에게 소개한 <녹색평론 2024년 여름호(186)>에서도 현 정권에 대해 이것저것 비판을 많이 하고, 방향도 제시해주려고 노력한단다. 하지만 쇠귀에 경읽기 일뿐이다. 무식한데 고집까지 센 경우가 가장 안 좋은 경우인데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매일 뉴스에서 보고 있단다. 젠장. 이번에 읽은 <녹색평론 2024년 여름호(186)>의 부제는 공공성 확보가 관건이다이란다. 최근 몇 달 동안 계속 이슈가 되고 있는 의대생 증가와 함께 의료공공성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다루고 있단다. 우리나라의 의사 수, 특히 공공의료의 의사수가 부족한 실정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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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굳이 의료제도가 상이한 다른 나라와 비교하지 않더라도, 한국 의사수가 비정상적으로 적다는 점은 한국 보건의료의 성장과정을 살펴보면 상식선에서 납득할 수 있다. 한국의 의대 정원은 1990년대 중반 의대가 9개가 마지막으로 신설되며 3,300여 명으로 늘었다가 의약분업의 여파로 2006 3,058명까지 줄어든 뒤 2024년까지 18년째 동결돼 있다. 그사이 보건의료분야의 규모는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2000년 한국의 경상의료비(총 의료비) 25 1,230억 원이고 GDP 대비 3.9%를 차지했다. 2022년 기준 경상의료비는 209 460억 원(잠정치), GDP 대비 9.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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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발췌한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최근 20여년 간 의사의 수입은 급속도로 늘었단다. 20여년 전에도 의사의 수입은 최상위에 위치하고 있었을 텐데 오늘날은 그보다 더 높은 위치에 놓여 있단다. 그렇다 보니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적성이고 뭐고 뒷전이고 돈 많이 벌 수 있는 의대를 목표로 하는 이들이 많단다. 들어보지 못한 이름의 의대를 떨어진 사람이 서울대 경영학과에 합격하는 상황이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들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것 같구나.

의대 정원을 늘린다는 것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많은 국민들이 공감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해. 그것은 국가 정책을 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렇다면 방법만 잘 잡는다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단다. 의사들이 그렇게까지 꽉 막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단다. 하지만 정부가 하는 방법을 보면, 무대뽀 정신인 것 같아. 의사들과 많은 대화를 하고, 양보할 것은 서로 조금씩 양보를 하고, 의대 증원을 하더라도 점진적으로 숫자를 늘리는 방안을 채택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정부는 무조건 내년부터 2000명 증원을 늘린다는 입장에서 한 발도 물러나지 않으니 협상이 제대로 되겠냐고.. 의사협회도 힘 대 힘으로 싸워보자면서 파업을 강행하고 있으니 죽어나는 것은 국민들뿐이잖니.

이런 답답한 상황을 몇 달째 끌고 있고 계속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답답하구나. 그리고 의사수만 늘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 현재 의료시스템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는지도 의문이란다. 그들의 정책을 보면 의사수 늘리는 것만 혈안이 되어있지. 취약한 공공의료 분야에 대한 대책은 잘 보이지 않거든의사 수 늘려놓았더니 피부, 미용 분야의 의사수만 늘어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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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공공의료가 취약하다는 것은 전체 의료시스템의 취약성을 의미한다. 민간 의료기관은 공적 자원을 기대할 수 없어 생존을 위해서도 수익성에 기반한 경영전략을 펼 수밖에 없다. 수익성이 떨어지는 진료분야는 기피하거나 소극적이게 된다. 아무리 필수분야 진료기능이어도 기대수익이 약하면 투자하지 않는다. 중소 병원이나 사립대학 병원도 마찬가지이다. 수익성이 높은 분야에 우선적으로 투자해서 가능한 많은 이익을 내고자 한다. 진료기능이 편중될 수밖에 없거니와 의료내용이 적정선을 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비보험 분야의 확대 그리고 피부, 미용 분야로의 의사 쏠림 등은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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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기후 위기는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절로 느끼고 있단다. 그런데 이런 기후 변화는 더 많은 질병을 만들게 되고, 이로 인해 의료서비스에 있어서도 불평등을 만들어낼 거야. 같은 병에 걸려도 부자들은 살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은 죽을 수 있어. 국가의 의무로 공공의료 서비스의 확보는 절실하단다. 우리나라는 공공의료기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하는구나. 의사들도 돈 벌려고 사립종합병원으로 쏠리는 현상이 있고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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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기후위기는 건강위기이고 심각한 건강 불평등을 초래할 것이다. 홍수, 가뭄, 이상기온 등 극심한 기후변화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환경재난을 초래한다. 이로 인해 대응력이 부족한 취약 계층이 더 큰 피해를 입게 마련이다. 기후위기의 심화로 코로나 같은 전염병 재난은 반드시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의 의견이다. 복합적인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에서 의료의 준비는 중요한 분야의 하나이다. 이는 수익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인류의 안전을 위해 아주 시급한 과제이다. 의료분야 탄소 발생 감소를 위한 투자도 필요하다 지금의 조건에서는 진척이 어렵다. 의료공공성의 토대가 미약하여 이를 추진할 동력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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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수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문제인데, 정부는 이러한 현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고, 무작정 의사수만 늘리려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구나. 대화 좀 해라, 대화 좀

 

1.

부자 세금을 줄이는 정책을 시행해서 그런지 물가도 오르고 교통비도 계속 오르기만 한단다. 나라나 지방자치단체에서 유의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교통 요금의 인상이란다. 기후위기를 대처하기 위해서라도 대중 교통을 좀더 이용을 해야 하는데, 대중 교통 요금을 계속 올리다 보면 대중 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자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는 거지. 대중 교통은 어떻게 하면 수요를 늘릴 수 있다는 하는 정책을 고심해야 한다는 거야. 문제가 되면 그냥 무작정 교통 요금을 올리면 되는 것이라 아니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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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수요가 줄어드는 것은 둘째 치고, 서울시의 장래 교통정책은 대중교통의 수요를 늘리는 쪽으로 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사실이다. 요금을 올려 놓고 이용자가 줄지 않았어!”라고 환호성을 올릴 때 득은 버스를 운영하는 민간사업자와 보조금을 지급하는 서울시로 흘러가는 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부담은 더 커지고 기후위기 대응의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교통요금 인상이라는 것은 전형적으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현재의 부담을 차별적으로 분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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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과일 물가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고 있단다. 사과값이 전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이야기도 있단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단다. 하기야 괜히 뭔가 했다가 더 비싸지거나 다른 것마저 같이 비싸질 수 있으니 가만히 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드는구나. 그런데 이 사과값 상승이 단지 일이년 흉작 때문이 아니고, 기후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소리에 그렇겠구나, 생각이 들었어. 기후 변화가 그냥 온도 상승으로 우리사 살고 있는 곳이 더워진다고만 생각하면 큰 오산이란다.

바뀐 환경 때문에 먹거리가 바뀌고 동식물이 바뀌고 또는 사라지는 거야. 사과도 기후위기로 인해 산지가 점점 북상하고 있다는구나. 예전에는 대구에서 대부분을 생산했지만, 지금은 충주나 포천이 주요 산지가 되었대. 이러다가는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사과가 자라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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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금년 봄, 사과값이 상승하면서 드디어 기후변화 문제가 우리 생활 깊숙이 들어왔다. 하지만 일반 국민들은 이 문제가 기후변화라기보다는 단순한 농산물 유통의 문제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나라에서 사과 산지로 유명한 곳은 대구이다. 1897년 미국인 선교사들이 대구 주변에 사과나무를 심고 주민들에게 보급한 것이 대구 사과가 유명해지기 시작한 배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대구는 우리나라 사과 생산량의 80%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지후변화로 인해 대구지역 사과 생산량은 크게 줄었다. 최근에는 사과 산지가 북상하여 충주나 포천 지역이 주요 사과 산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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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녹색평론 2024년 여름호>에서는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며 적은 글이 실렸고, 무위당 장일순의 30주기 특집으로 그의 사상과 삶에 대한 글이 있고, 여섯 편의 서평이 실려 있단다. 녹색평론에서 소개해주는 처음 알게 된 책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번호에서는 아빠도 읽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도 소개되었더구나. 그 밖에 시도 실려 있는데, 아빠가 무서워하는 뱀에 관한 시 두 편이 실려 있는데 읽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더구나. 시골 전원 생활을 꿈꾸지만 저 뱀 때문에 생각을 접게 되는구나. 뱀에 관한 시 한 편을 소개해주면서 오늘 독서편지를 마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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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장석주

 

시골집에서 혼자 살 때다.

 

어느 가을날 오후 현관문을 열었는데,

문 앞 데크에서

따스한 볕 아래 쉬던 뱀이 화들짝 놀라

긴 몸을 날려 달아났다.

 

느닷없는 이 사태에 내 심장 박동은 요동쳤다.

방심한 채 몸을 늘어뜨린 채 볕 쬐던

저 길다란 영혼도 또 얼마나 놀랐을까!

 

미안하구나, 뱀아

네 평화로운 오후를 내가 망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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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건강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까지 높았던 시절이 또 있었을까.

책의 끝 문장: 죽음의 폐허 위에 조금씩 퍼져가는 숲의 생기와 접속어들의 춤을 만물의 민주주의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고에너지, 고비용, 저효율의 의료산업 모델은 어떤 식으로든 폐기될 수밖에 없고, 자원을 덜 쓰면서 필요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의료공공성을 확보하는 일은 몹시 중요하다. 어디에서든 누구든 필수의료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일은 앞으로 날이 갈수록 절실하게 필요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여러 차원에서 실패하고 있는 상품들(의사, 약품, 기술)에 의존하는 시스템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환원주의적, 기계적인 세계관과 문화를 그대로 둔 채 공적인 개입과 비용을 늘리는 방식은 명백히 한계가 있다. 우리는 왜 질병의 결과와 비용을 국가가 감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원인을 제거하라고 정치에 요구하지 않는 것일까. 더 많은 병원 병원과 의사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그런 것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환경과 생활조건을 위해서는 왜 노력하지 않는가. - P3

미세먼지들이 자욱한 공기를 마시고, 미세플라스틱이 부유하는 물을 마시고, 항생제 투여된 고기를 먹고, 농약 묻은 야채를 먹고, 화약약품으로 숙성시킨 과일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내부로 집착된 시선을 지속한다. 살벌한 경쟁의 기업문화 속 스트레스가 만연한 직장을 다니고, 휴식하고 운동할 시간을 확보할 수 없는 365일 자영업장을 운영하면서, 사회적 불평등이 건강 불평등으로 가시화되는 상황에서도 몸 내부로 향하는 강력한 시선의 방향성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내부에서 다시 나누어진 부분의 내부를 바라보는 시선의 관성을 멈추지 못한다. 발암물질, 미세플라스틱이 이미 하이브리드된 몸인데, 의료는 자꾸 이 몸의 순수성을 말한다. 지금의 의료에서 몸과 몸 밖의 관계성은 무시된다. ‘관계’ 없는 의료가 지금의 의료를 특징짓는다. 그리고 어느 날 찾아간 병원에서 질책의 말을 듣는다. "이렇게 될 때까지 뭐 하셨어요." - P71

자연환경이 훼손된 곳에는 독성을 가진 식물이 곧잘 번식해서 풀을 먹이로 하는 가축들에 해를 끼치기도 하고, 농업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 위협이 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데 사실 이 식물들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근원을 제압해서 생태계가 스스로 재생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죠. 독(毒)이라는 개념은 생태적인 게 아닙니다. 문화적인 것이지요. 지구의 관점에서는 독(毒)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 P104

그리고 현재는 있는 줄도 몰랐던 정치행태를 이런 종류의 독재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민주주의’라는 현재 인류 최고의 시스템도 악착스런 인간의 탐욕에 대한 제대로의 제어장치는 제어장치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은 무척 변한 것 같아도 그 근본에서는 70년대와 그다지 많이 다르지 않아 보인다.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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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문규는 그제서야 친구의 지난날의 그림의 미완성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그 참뜻을 알 것 같았다. 그는 지난날의 친구와, 지난날의 친구의 그림이 가슴에 저리도록 그리웠다. 그러나 미완성을 완성시킬 수는 있어도 완성을 미완성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생명 있는 걸 생명 없이 할 순 있어도 이미 생명이 없어진 것에 생명을 줄 순 없는 것처럼. 문규는 친구의 완성된 그림을 갖고 싶지 않았고 친구를 만나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애써 그와 친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귀부인의 장막을 뚫을 필요도 없었다. 그는 쓸쓸하게 친구의 첫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화랑을 나왔다.

 

(163)

여보, 당신 이까짓 아파트 하나 샀다고 우리가 무슨 갑부라도 된 줄 알아요. 내가 집에서 살림이나 하게. 아직 멀었어요. 철이 사립 국민학교 치다꺼리도 치다꺼리지만, 철이라고 만날 국민학교만 다니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아유 말도 말아요. 그뿐이면 또 좋게요. 과외 공부 안 시키우? 아이를 낳아놓기만 하면 뭘 해요. 사람 노릇을 시켜야지. 사람 노릇 시키려면 돈이 무진장 드는 거라구요.”

 

(181-182)

생활 양식은 서구화의 첨단을 가고 있는데 의식은 아직도 고전적인 걸 미덕으로 치는 걸 너희들은 조금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니? 과거의 생활양식 속에서도 부부란 끊임없이 서로의 존재와 애정을 확인하면서 살아야 했어. 아내는 옷 수발, 음식 장만 등으로 자기 존재와 애정 표현을 했고, 남편은 돈벌이와 바깥세상의 온갖 거친 일로부터 아내를 보호하는 걸로 그 일을 했지만 지금 그런 분업의 한계가 모호해진 이상 어쩌겠니? 입으로도 해야지 입 뒀다 뭐 하니? 너희들도 열쇠 부부의 비극이 더 심각해지기 전에 내 방법 써먹어라.”

 

(264)

젊은이나 어린이들과의 이런 언어의 불통에는 편리하게도 세대차이라는 방패막이가 있어 열등감까지는 안 느껴도 된다. 그러나 우리 나이나 우리보다 얼마 젊지 않은 사람들의 말귀를 못 알아들은 척까지 해야 되지 이 아니 서글픈 노릇인가. 그런 못 알아들을 말 중 외국에서 오래 살아온 친구들이 흔히 쓰는, 그쪽의 관용어에다 토씨나 접속사만 우리말로 하는 경우는 대강 넘겨짚어 알아듣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는 그 물 건너온 티 좀 작작 내라고 핀잔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상대방이 상당한 지석인이어서 유창하게 논리적인 우리말 중 못 알아들을 말이 섞이면 적어도그게 사람 이름인자, 사람이라면 음악간가 문학간가 과학잔가? 또는 실재하는 사람인가 작중 인물인가, 아니면 새로운 주의나 경향, 사조(思潮)의 이름인가쯤은 짐작할 수 있어야 로미오는 읽었는데 줄리엣은 못 읽었다는 식의 실수를 안 할 수가 있다. 또 상대방을 함부로 높이 평가해 그런 학구적 상상력만 동원할 것도 아니다. 그가 한참 도취해서 찬양하는 게 내가 모르는 예술가가 아니라 내가 못 가본 술집 이름일 수도 있고 상품의 라벨일 수도 있다.

 

(285-286)

실례가 안 된다면 궁합을 보아드리기 전에 궁합의 유래부터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예로부터 궁합이란 원치 않는 청혼을 거절하기 위한 방편으로 생겨났다고 전해지죠. 그건 다 아는 얘기고 오늘날까지 궁합이란 게 소멸하지 않고 날로 발전해온 과정 역시 남녀 간에 있어선 거의 영혼의 문제인 일방적인 사랑의 소멸과, 거기 따른 편리한 거절의 필요성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게 나의 현장 체험인데요. 선생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321)

부인, 그래서 나쁠 것도 없잖습니까. 전 지금 오래간만에 행복합니다. 가슴이 소년처럼 울렁입니다. 늙어도 행복할 권리만은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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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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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터넷 서점 신간 코너에서 알게 된 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책을 읽었단다. 유명한 평론가의 추천작, 출판사들의 러브콜을 받은 작품, 영화 제작사와 거액 계약 등 이 소설을 홍보하는 수식어들이 많았단다. 약간은 과도해 보이는 홍보가 붙은 소설들은 간혹 큰 실망을 주는 경우가 많아서 아빠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책을 펼쳤단다.

지은이는 셸리 리드라고 하는 사람인데 대학교에서 30년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뒤늦게 처음 쓴 소설이 바로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책이라고 해.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제목은 아빠와 비슷한 세대들에게는 브레드 피드의 리즈 시절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구나. 이 소설은 그 영화와는 전혀 상관없는 소설이란다. 그런데 왜 소설의 제목을 <흐르는 강물처럼>이라고 지었을까? 소설 속 주인공의 대사에서 따온 듯싶구나. 장애물이 나타난다고 해서 멈추거나 피하지 않는 강물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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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윌이 이곳을 떠나 어디로 간다 한들 세스 같은 사람이 없겠는가? 어디로 간들 세스처럼 분노로 가득한 사람, 피부색이 어둡다는 이유만으로 괴롭히려는 사람이 없겠는가? 윌은 도망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살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 방법은 그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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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다 읽은 날 우리 가족이 함께 외식을 했어. 그 식사자리에서 아빠가 이 책의 줄거리를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너희들과 엄마 모두 무척 재미있다고 했었잖니. 그때 바로 너희들에게 독서편지를 썼어야 했는데, 밀린 독서편지를 차례대로 쓰다 보니 읽은 지 꽤 지났구나. 그 때 이야기해준 것을 잊지 말고 다시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메모를 해 둔 것과 아직 남아 있는 기억을 잘 떠올리면서 다시 한번 이야기를 시작해볼게.

 

1.

소설은 1948년 콜로라도 거니스 강 주변 아이올라라는 시골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단다. 주인공은 열일곱 살 빅토리아. 빅토리아가 열두 살 때, 어머니와 큰 오빠와 이모가 외출했다가 그만 교통사고로 모두 돌아가셨단다. 그 이후 집안일은 빅토리아가 다 해야 했어. 집에는 아버지와 망나니 동생 세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불구자가 되어 하루 종일 휠체어에서 지내는 이모부가 있었어. 빅토리아는 이런 남자 셋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지냈어. 그런 빅토리아를 공감해주는 어머니도 없었고, 자신에게 잘 대해주던 큰 오빠 캘러머스도 이 세상에 없었어. 식구들이 있었지만 빅토리아는 늘 외로웠지. 아버지는 복숭아 과수원을 하셨어. 빅토리아는 집안일뿐만 아니라 복숭아 과수원에서 농장일도 도왔단다. 그야말로 착한 딸이었단다.

그 날도 술에 취한 동생 세스를 찾으러 가던 길이었어. 길을 묻는 낯선 이방인 윌슨 문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 빅토리아는 윌슨과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단다. 술 취한 세스를 부축해서 데리고 가던 빅토리아가 넘어져 발목을 다치게 되었어. 그때 윌슨이 갑자기 나타나서 빅토리아를 안아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단다. 빅토리아는 더욱 가슴이 뛰었겠지. 하지만 이런 윌슨의 행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세스는 윌슨을 공격했고,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기 직전 아버지가 농장에서 돌아오셔서 윌슨은 무사히 돌아갔단다. 사실 윌슨은 아메리칸 원주민, 인디언이었단다. 세스는 윌슨을 인디언이라면서 업신여기고 욕을 했어. 심지어 윌슨이 현상수배자라면서 그를 잡겠다고 큰 소리를 쳤단다. 하지만 빅토리아는 그날 아침과 저녁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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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그날 아침 우리 농가를 나설 때만 해도 나는 그저 평범한 소녀였다. 내 안에 어떤 새로운 지도가 펼쳐졌는지 그때는 몰랐지만 집으로 돌아가던 나는 이제 비범한 소녀가 되었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언젠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처럼 탐험가들이 끝없이 펼쳐진 바다에서 저 멀리 신비로운 해변의 존재를 보았을 때 이런 기분을 느꼈을까. 내 안에 갑작스럽게 마젤란이 등장했지만, 나는 아직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나는 윌의 넓은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윌이 어디서, 누구에게서 왔을지, 떠돌이라면 한곳에 오래 머무르는 것일지 궁금해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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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빅토리아는 아픈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윌슨이 머물고 있는 여관을 찾아갔단다. 그런데 여관에 가보니 윌슨이 인디언이라고 내쫓았다고 하더구나. 빅토리아에게는 그렇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여관 주인이었는데 말이야. 우여곡절 끝에 빅토리아는 윌슨을 다시 만나게 되었고, 그날 이후 그들은 비밀 사랑을 하기 시작했단다. 어느날 세스가 빅토리아의 비밀 사랑을 눈치챈 것 같았어.

그리고 얼마 후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은 윌슨밤마다 빅토리아는 윌슨을 찾아 이곳 저곳 찾아 다녔어. 그런데 며칠 뒤 마을 외곽에서 윌슨은 피부가 벗겨진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단다. 빅토리아는 울분을 토했어. 세스가 윌슨을 잡아 죽이겠다고 큰소리 친 것도 기억이 났어. 세스가 윌슨을 죽였을 것이라 생각했단다. 빅토리아는 슬퍼할 시간도 없었어. 빅토리아는 임신을 했어.

 

2.

집에서 점점 불어나는 배를 숨기면서 집안일을 했단다. 하지만 점점 불어나는 배를 숨길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 빅토리아는 아버지한테 편지를 남기고 가출했단다. 윌슨과 함께 지냈던 깊은 산속의 산막에 가서 지냈어. 그런 산속에서 혼자 지내는 것은 무척 무서웠단다. 특히 밤에 산짐승이 들어올까, 아니면 낯선 이라도 나타나면 어찌할까…. 비상식량과 텃밭에서 나는 작물로 간신히 끼니만 때웠어. 그리고 몇 달이 지나고 혼자서 아기를 낳았단다.

힘들게 아기를 낳고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영혼이 된 윌슨이 보살펴주었는지 빅토리아는 몸도 회복하고 아이도 잘 자랐어. 아이의 이름은 블루라고 지었단다. 몇 주가 지나고 먹을 것이 다 떨어져서 그곳을 떠나기로 했단다. 다시 마을로 돌아오다가 우연히 소풍 나온 가족을 보았어. 젊은 부부와 블루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데리고 소풍을 온 거야. 순간적으로 빅토리아는 블루를 저 부부가 키우면 잘 키워 줄 거라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그들이 주차해 놓은 자동차 뒷좌석에 블루를 내려놓고 도망쳤단다. 슬픔과 죄책감과 안도감을 가득 안은 채 달렸단다.

그리고 자신의 이웃집 루비앨리스 집에 노크를 했단다. 루비앨리스는 노파이신데, 예전에 마을 사람들 몰래 윌슨을 숨겨주기도 하셨어. 빅토리아는 루비앨리스의 보살핌 속에 며칠 동안 지내니 몸이 회복되었어. 그리고 집에 갔어. 아무도 없었어. 한 동안 비어 있는 집처럼 보였단다. 빅토리아 방만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어. 저녁이 되자 아버지가 농장에서 돌아오셨어. 빅토리아를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셨단다. 마치 늘 빅토리아가 집에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그런데 집에 세스와 이모부가 안 계셨는데 그것을 물어볼 수도 없었단다. 그 후 며칠 동안 아버지와 몇 마디 나눈 것이 전부였단다.

아버지가 피를 토하는 등 깊은 기침을 계속 하셨어. 큰 병에 걸리신 듯했어. 1949년 가을 아버지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단다. 장례식에 오신 보안관 아저씨를 통해서 빅토리아가 집을 가난 이후 일을 들을 수 있었어. 빅토리아가 사라지고 아버지는 거의 매일 빅토리아를 찾으러 돌아다니셨다고 했어. 아버지는 세스와 이모부 때문에 빅토리아가 집 나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세스를 보안관 아저씨에게 신고해서 세스를 마을에서 쫓아내 버렸고, 이모부는 이모부의 엄마에게 보내버렸단다. 이런 아버지의 속마음을 이제서야 알게 된 빅토리아는 후회를 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버렸구나. 아버지가 병이 생긴 것도 다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 집에 혼자 있으면서 빅토리아는 복숭아 과수원을 혼자 운영했단다.

 

3.

1954년 인근에 댐 공사를 한다고 했어. 그렇게 되면 빅토리아가 살고 있는 마을과 과수원은 모두 물에 잠기게 돼.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반발을 했지만, 빅토리아는 사랑하는 이들이 모두 떠난 이 마을에 미련이 없어서 가장 먼저 정부에 집과 땅을 팔았단다. 이 일로 빅토리아는 마을 사람들에게 따돌림까지 당했단다. 루비앨리스만 그녀를 똑같이 대해주었어. 빅토리아는 마을에서 루비앨리스만이 유일한 친구였단다. 어느날 루비앨리스가 쓰러지셨는데, 다행히 빅토리아가 발견하여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갔단다.

빅토리아는 루비앨리스가 입원한 병원에 갔다가 인근에 있는 대학교에 무작정 들어갔단다. 자신의 복숭아 나무들을 이전하고 싶은데 방법을 물어보려고 했던 거야. 무작정 만난 교수님이 자신의 학교에 괴짜 식물학 교수가 있다면서 그가 도와줄 거라면서 소개해주었어. 그 교수의 이름은 그리니였어. 그리니 교수는 빅토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도와주겠다고 했어. 어찌 보면 그것도 식물학 교수의 입장에서 보면 커다란 프로젝트이자 연구일 수 있거든. 학생들까지 동원하여 빅토리아의 복숭아들은 새로운 땅으로 이전하게 되었단다. 이제 집도 이사를 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동생 세스가 찾아왔단다.

세스도 어느덧 스물두 살이었어. 빅토이라는 세스가 돈 때문에 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스는 돈 때문에 온 것이 아니고, 진실을 이야기하러 왔다고 했어. 윌슨은 자신이 죽인 것이 아니고, 자신의 친구가 죽인 것이라고 했어. 하지만 빅토리아는 왜 말리지 않았냐고 했고, 세스는 그 당시 상황에서 말릴 수 없다고 했어. 빅토리아는 그 친구에게 자수를 해서 죗값을 받으라고 했더니 그 친구는 죽고 이 세상에 없다고 했단다. 빅토리아는 화를 내면서 세스를 다시 내쫓았단다. 하나 밖에 없는 식구이지만 세스를 용서할 수 없었어.

빅토리아는 아이올라의 집을 정리하고 파오니아로 이사를 갔단다. 파오니아 생활은 친절한 이웃과 그리니 교수의 도움으로 잘 적응해갔단다. 다행히 이전한 복숭아 나무들도 건강하게 열매를 맺기 시작했어. 그렇게 혼자 생활도 적응해서 살다 보니 가슴 속 한 켠에 늘 아픔을 주는 아들이 자주 생각났어. 아들의 생일에 헤어졌던 그곳을 가보았단다. 그곳에 눈에 띄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에 돌멩이 하나를 올려 놓는 의식을 하면서 아들의 생일을 기념했단다. 그 이후 매년 아들의 생일에 그곳을 찾아서 돌멩이를 올려놓았단다. 1962년 아들의 13번째 생일날누군가 그곳을 다녀간 것 같은 흔적이 있었어. 작은 발자국들도 있었고빅토리아는 혹시 라는 생각을 하면 긴장을 했단다. 그리고 그 다음해도 기대를 가지고 그곳에 갔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었단다.

 

4.

또 시간이 흘러 1970아들의 생일날 그 바위에 갔다가 깜짝 놀랐단다. 비닐 봉지 안에 편지가 돌에 괴여 있었어. 빅토리아는 그 긴 편지를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단다. 그 편지는 잉가 테이트라는 사람의 편지였어.

1949년 잉가는 빅토리아를 두고 간 블루를 또 다른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아들처럼 정성스럽게 키웠대. 이름은 루카스라고 짓고 자신의 친아들 맥스웰과 비슷한 달수인 것 같아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쌍둥이라고 했어. 잉가의 남편 폴은 그리 성격이 좋은 이가 아니었어. 맥스웰은 그런 아빠를 쏙 빼 닮았단다. 그에 반해 루카스는 차분하고 병든 동물들도 잘 보살펴주었어. 그런데 루카스는 커가면서 피부색 때문에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았어. 그래서 늘 우울해 보였단다. 잉가는 루카스를 데리고 드라이브를 갔다가 루카스를 처음 만난 곳을 가게 되었고, 큰 바위 위에 정돈된 돌멩이를 보게 되었단다. 그때가 빅토리아가 왔다가 작은 발자국을 봤던 그 때였단다. 그 돌멩이를 보고 잉가는 루카스의 친엄마가 이곳에 왔다고 직감했단다. 그리고는 루카스의 친엄마가 나타나서 루카스를 빼앗아 갈까 봐 걱정했단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그곳에 오지 않았어.

1969년 미국은 베트남과 전쟁 중이었고, 젊은이들을 전쟁에 보내려고 추첨을 했단다. 그러니까 추첨에 당첨된 사람만 군인이 되어 전쟁에 참가해야 하는 거야. 그런데 그걸 생일로 결정했어. 맥스웰과 루카스는 쌍둥이라고 했으니 생일이 모두 8 31일로 되어 있었지. 그런데 그만 8 31일도 당첨되고 말았단다. 잉가는 슬픔에 빠져 루카스만이라도 전쟁에 나가지 않게 하려고 했어. 그러면서 루카스에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었어. 그리고 같이 병무청에 가서 루카스의 입영을 막으려고 했단다. 잉가가 두 아들 모두 군대에 간다는 소식에 이성을 조금 잃었던 것 같구나. 루카스에게 그렇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면 루카스가 좋아할까. 당연히 루카스는 충격에 빠지겠지. 루카스는 그날 바로 집을 나갔단다. 그리고 얼마 후 루카스의 편지가 도착했는데 군에 자원입대를 했다고 했어.

맥스웰은 군대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신체검사에서 어렸을 때 부러진 팔 때문에 부적합 판정을 받게 되었단다. 그래서 입대가 취소되었어. 이후 맥스웰은 입대취소라는 실망에 젊은 혈기까지 어우러져 술과 약물에 빠졌어. 그러던 어느날 맥스웰은 술에 취해 토악질을 하다가 토사물에 기도가 막혀 죽고 말았단다. , 잉가가 너무 불쌍하구나.

장례식장에 루카스도 왔어. 잉가는 루카스에게 돌아와 달라고 애원했지만 다시 떠났단다. 루카스도 젊어서 그런지 잉가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그렇게 다시 루카스가 떠나고 나서 잉가는 루카스의 친엄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단다. 그 편지가 바로 빅토리아가 본 편지란다.

빅토리아는 가장 친한 이웃 젤다에게 자신의 숨겨진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했어.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했단다. 빅토리아는 젤다의 응원에 힘입어 잉가에게 연락하고 만나기로 했단다. 잉가와 빅토리아는 오랜 시절 서로 모른 채 다른 삶을 살았지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운명의 줄로 연결되어 있었단다. 빅토리아와 잉가는 만나 한참을 이야기했단다.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어. 그리고 일 년 뒤. 안전하게 군복무를 끝내고 돌아온 루카스 빅토리아와 잉가는 함께 루카스를 맞이했단다. 그렇게 소설은 끝이 났단다.

이야기를 다시 하다 보니그래도 많이 까먹지 않고 이야기한 것 같구나. 그렇다고 아빠가 한 이야기에 오류가 없는 것은 아니고…^^ 지은이의 데뷔작이라고는 하기에는 너무 훌륭한 작품이었어. 아빠가 서두에서 기대를 하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이 소설은 기대를 가득하고 읽어도 그 기대를 충분히 채워주었을 것 같구나. 아빠가 최근 몇 달 내에 읽은 소설 중에 가장 좋았단다. 바닥까지 내려갔던 주인공 빅토리아가 복숭아 나무처럼 다시 열매를 맺는 것 또한 좋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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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5-416)

그랬다. 젤다의 말이 옳았다. 내 과수원이 그랬듯 나 역시 새로운 토양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회복력을 가지고 있었고, 내 의지와 관계없이 뿌리째 뽑히고도 어떻게든 살아왔다. 그러나 셀 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넘어지고, 무너지고, 두려움에 웅크린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나는 강인함은 이 어수선한 숲 바닥과 같다는 걸 배웠다. 강인함은 작은 승리와 무한한 실수로 만들어진 숲과 같고, 모든 걸 쓰러뜨린 폭풍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는 숲과 같다. 우리는 넘어지고, 밀려나고,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최선을 희망하며 예측할 수 없는 조각들을 모아가며 성장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방식으로 성장한다는 것 하나만으로 우리 모두는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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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셸리 리드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구나.

오늘은 여기까지

 

PS,

책의 첫 문장: 저수지 아래 시커먼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책의 끝 문장: 자갈이 깔린 물가를 따라 내딛는 우리의 발걸음을 이 땅이 단단히 붙잡아 줄 거라고, 아들도 나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내가 어머니를 그리워한 건 꽃피는 사랑에 관해 조언을 듣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날 밤 잠에 빠져드는 순간까지 내가 그토록 간절히 소원했던 건, 여자도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었다. 물론 어머니가 살아 계셨더라도 내 편을 들어줬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머니를 잃은 딸이 누릴 수 있는 이점을 하나만 꼽으라면, 실제로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머릿속에서만큼은 어머니를 확고한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 P66

나는 일평생 착한 딸로 살아왔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으며, 어른들을 공경했다. 성경책을 읽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복숭아를 수확할 때면 얇디얇은 유리 공을 만지듯 조심스럽게 비틀어 따서 부셸 바구니 안에 살포시 담았다. 항상 집 안을 쓸고 닦았고, 남자들이 배고프지 않도록 끼니를 챙겼고, 빨래를 깔끔하게 정돈했고, 빈틈없이 농장을 관리했다. 불필요한 질문을 하지 않았고, 내 울음소리가 침실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도록 늘 조심했다. 어머니 없이 살아가는 방법도 오롯이 혼자 힘으로 깨우쳤다. 그렇게 착한 딸로 살던 내가 노스 로라와 메인 스트리트 모퉁이에서 우연히 마주친 꾀죄죄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단 한 번의 폭풍우가 강둑을 무너뜨리고 강물의 흐름을 바꾸어버리듯 한 소녀의 인생에 닥친 단 하나의 사건은 이전의 삶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 P164

거대하고 신비로운 태피스트리로 장식된 숲속의 집에서 잠을 청할 때문 숲의 심장이 뛰는 소리, 주변의 무수한 생명이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나와 함께 호흡하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밤이 두렵지 않은 건 살면서 처음이었다. - P188

세스는 나를 쳐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칠 대로 지친 데다 괴로워하는 얼굴이 그를 스물두 살이 아니라 여든 살의 노인으로 보이게 했다. 세스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서 순간 나는 한때 동생을 아꼈던 어린 누나의 애틋한 마음으로 돌아갔다. 두려움과 혼란을 풀어내고 애틋함만 남기고 싶었다. 동생을 구해주고 싶었다. 동생의 악함과 세상의 악함을 내 선한 행동으로 상쇄하고 싶었다. 나도 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내 모습이 내 안에 있었다고, 그러니 네 안에도 생각지 못한 면이 존재할 거라고 세스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 P277

긴 진입로를 벗어나는 내내 뒤돌아보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그러나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트럭을 세우고 밖으로 나와 나를 만들어준 이 공간을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 나서야 트럭으로 돌아와 차를 몰았다. 나는 과거를 뒤로하고 새롭게 출발할 것이었다. 나는 기적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새로운 토양이 충분히 강인하기만을 바랐다. 뿌리채 뽑힌 내 나무들이 새로운 곳에서 온갖 역경을 견디고 살아남는다면, 빌어먹을 온갖 불행이 닥치더라도 나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P284

초여름 빗물로 불어난 하얀 강물이 힘차게 흐르고 있었다. 강물은 자신의 운명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듯 매우 아름다웠다. 곧 저수지가 될 거니슨강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댐이 건설되고 거니슨강 하류에 수문이 개방되어도, 지금 흐르는 강물의 일부는 변함없이 아래로 흘러갈 거라고 확신했다. 아무리 느리더라도, 아무리 험난하더라도, 아무리 적은 양이더라도 강물은 어떻게든 물길을 찾아내 꾸준히 흐를 것이다. 그러면, 노스포크강을 따라 새로운 삶을 꾸린 나는 그 반대편에서 흐르는 강물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 P322

서늘한 소나무 그늘에 앉았다. 바닥에 손을 뻗어 잡히는 대로 흙 두 줌을 퍼 올렸다. 퍼 올린 흙에는 시커먼 흙, 솔잎, 조약돌, 잔가지, 나뭇잎, 자그마한 달팽이 껍데기, 솜처럼 하얀 깃털이 들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탄생, 성장, 그리고 죽음이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 쓰러진 나무 사이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 모든 굴곡을 이겨내고 틈을 뚫고 빛을 향해 쭉쭉 뻗어 나간 생명들을 둘러보았다. 숲에 깃든 태곳적 혜안은 너무 깊고 복잡해 오롯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게 꼭 필요했던 지혜를 다시금 떠올릴 만큼은 헤아릴 수 있었다. 숲은 내게 말했다. 모든 존재를 그 자체로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건, 바로 겹겹이 쌓인 시간의 층이라고. - P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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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성교육 하자 - 건강한 성 관점을 가진 아들로 키우는 55가지 성교육법 성교육 하자
이석원 지음 / 라온북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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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Shawn이 언제 이렇게 컸니? 너가 점점 커가면서, 아빠가 성교육을 좀 해주어야 한다고 늘 생각을 했어. 요즘에는 학교에서도 해준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들의 성교육의 아빠의 의무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단다. 그렇다고 아빠가 성교육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야. 아빠가 어렸을 때 성교육을 제대로 받아본 적도 사실 없단다. 그래서 좀 막막했어. 어떤 말을 해주어야 하나. 성교육이라는 것이 어떻게 생각하면 조금 민감한 수도 있는데 말이야. 인터넷 서점에서 책들을 좀 검색해 보았단다.

많은 이들이 보고, 평점도 괜찮은 책들 중에 이석원 님의 <아들아 성교육 하자>라는 책이 눈이 들어왔단다. 그래서 책을 샀지. 그런데 한참 동안 책탑 속에서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지. 시간이 좀더 흐르고 Shawn 2차 성징이 나타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어. 더 이상 미루면 안되겠다 싶어서 책탑 속에서 이 책을 찾아 이번에 읽게 되었단다. 아빠는 2차 성징이 오기 전에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빠가 잘못 알고 있었더구나.

이 책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하면 좋다고 하면서 다섯 살 무렵부터 틈틈이 일상 대화 속에서 알려주는 것이 좋다는구나. 그러니까 일부러 시간을 내지 말고 일상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라는 거야. 물론 지은이도 말씀하신 것처럼 내 아이의 최고의 성교육 전문가는 바로 양육자라고 했어. 부모가 아닌 이들이 아이들을 돌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부모라고 안 하고 양육자라고 한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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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세상에서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성교육 전문가가 누굴까? 바로 양육자.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도 내 아이에게만큼은 꼭 제대로 된 성교육을 해주고 싶을 것이다. 양육자는 자녀에게 올바른 성 개념과 가치관을 심어줄 의무가 있다. 가치관의 사전적 의미는 인간이 삶이나 어떤 대상에 대해 무엇이 좋고, 옳고, 바람직한지를 판단하는 관점이다. 양육자는 자녀가 성을 바라보는 판단의 기준을 잘 세우도록 가르쳐주어야 한다.

================

 

1.

성교육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과 관계라고 하는구나. 가족끼리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좋지만, 규칙이 필요하고 서로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성평등에 대한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아들에게 사용하지 말아야 말들도 알려주었단다. 그런데 아빠가 아래 말들 중에 일부 했던 말이 있어서 가슴 뜨끔했단다. 아빠도 알게 모르게 성차별을 하고 있었나 보구나. 깊이 반성하고 앞으로 아래 말들은 입에 담지 말아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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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양육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아들에게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울지 마. 남자는 씩씩해야 해.”

착하기만 한 남자는 매력 없어.”

너는 꼭 여자처럼 행동하는구나.”

남자인 네가 참아야지.”

남자가 그렇게 힘이 약해서 어떡하니.”

남자는 돈을 벌어 가정을 책임져야 해.”

남자가 비겁하게.”

남자애는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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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교육을 하게 되면 몸의 명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성기의 명칭을 뭐라고 해야 하나? 아빠도 사실 이것을 좀 고민한 적이 있단다. 지은이는 정확한 명칭으로 알려주어야 한다면서 성기의 정확한 명칭은 음경이라고 알려주었단다.

================

(62)

자기 몸의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자신을 바로 알고 사랑할 수 있을까? 성교육은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올바르게 사랑하는 방법이다. 성교육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바로 그 출발점이 내 몸과 소중한 곳에 대해 올바르게 아는 것이다. 따라서 양육자가 아이에게 소중한 곳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 이제부터 양육자가 아이에게 음경이라는 성기의 정확한 이름을 알려주자.

================

 

2.

이 책의 지은이 이석원 님은 성교육 전문가로써, 수천 회에 걸쳐 교육과 상담을 진행했다는구나. 그런 경험을 통해서 양육자들의 질문과 고민을 받고 같이 답을 찾았던 것들을 바탕으로 이 책을 엮은 것이란다. 그래서 아이들이 하는 성적 행동에 대해서 대처하는 방법도 같이 제시해 주었단다. 아이들이 점점 커가면서 나타나는 행동과 신체의 변화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해주는지 잘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예를 들어 아이가 음란물을 보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무작정 혼을 내는 것이 아니고 걱정되어 이야기한다는 식으로 대화를 풀어나가야 한다고 했어. 그러면서 음란물에 나온 내용을 따라 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불법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했단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아빠도 이런 상황에 닥쳤을 때, 다짜고짜 화부터 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

이렇게 사례들을 통해서 대처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데 아빠가 이 책을 한번만 읽고는 다 기억하지 못할 테니, 책상 옆 가까운 책꽂이에 꽂아두고 가끔씩 꺼내보면서 상황에 맞는 대처법을 잘 알아두어야겠구나. 그리고 오늘날같은 디지털 시대에서 성관련 콘텐츠는 너무나 쉽게 접할 수 있고, 그만큼 디지털 성폭력과 디지털 성범죄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란다. 그래서 그런 디지털 성폭력과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예방법과 대처 방법도 가이드해주고 있단다.

이 책은 아빠가 Shawn에게 성교육을 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읽은 책인데 아빠도 몰랐던 내용들을 더 많이 알게 된 것 같구나. 하기야 아빠도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말이야…. 아무튼 일상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 책에서 알게 된 내용들을 이야기해봐야겠구나.

 

PS,

책의 첫 문장: 성교육은 부모와 자녀 중 누구에게 먼저 필요할까?

책의 끝 문장: 아이에게 건강한 성교육이라는 가장 위대한 유산을 물려줄 여러분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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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유명한 사람을 정당하게 평가하려면 우리 시대가 아닌 그 시대의 잣대로 그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 한 시대의 잣대로 그 이전 시대의 고귀한 인물들을 평가하면 그 빛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잣대로 평가하면 아마도 사오백 년 전에 살던 유명한 사람들 가운데 모든 면에서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잔 다르크만큼은 예외이다. 어느 시대의 잣대로 평가해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하거나 의심할 필요 없다. 어느 한 시대의 잣대로도, 또 모든 시대의 잣대로도 잔 다르크는 흠 없고 이상적일 정도로 완벽하다. 잔 다르크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그 자리는 죽을 수밖에 사람이 오른 그 어떤 높은 곳보다도 위에 있다.

 

(13)

무자비한 잔혹함이 법이었을 때에 잔 다르크는 동정심으로 가득했다. 절개를 찾아볼 수 없는 때에 굳은 절개를 가진 사람이었고 영예가 무엇인지 잊어버린 시대에 영예로운 사람이었다. 어떤 것도 믿지 않고 모든 것을 비웃는 시대에 잔 다르크는 자신의 신념을 바위처럼 굳게 지킨 사람이었고, 속까지 거짓으로 물든 시대에 한결같이 진실한 사람이었다. 아첨과 비굴이 난무한 시대에 잔 다르크는 품격을 흠 없이 유지했다. 조국의 가슴에서 희망과 용기가 죽어 사라진 때에 잔 다르크는 꺾이지 않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었다. 사회 고위층의 몸과 마음이 더러운 때에 잔 다르크의 몸과 마음은 흠 없이 순결했다.

 

(50)

아빠, 주지 말라 하시면 아빠 말씀대로 해야죠.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몸의 한 부분이 한 일 때문에 몸의 다른 부분이 벌을 받는 건 옳지 않잖아요. 군인 아저씨의 머리가 나쁜 짓을 했더라도 배고픈 건 머리가 아니라 배잖아요. 배는 아무도 해치지 않았으니 아무 잘못이 없잖아요. 그리고 그럴 마음이 있어도 배는 실행할 수가 없었을 테니 제발…”

 

(355)

너희는 파테 전투를 기억하고 자랑스러워하길 바란다. 너희는 프랑스인이고 파테 전투는 너희 나라의 길고 긴 역사에 기록된 가장 장엄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파테 전투는 우뚝 서서 구름 위로 머리로 내밀고 있다! 너희가 어른이 돼서 파테로 순례를 떠나게 된다면 그곳의 어떤 것 앞에서 모자를 벗고 묵념에 잠길 수 있을까? 구름에 닿을 듯한 기념비 앞에서일까? 그래, 모든 나라는 어느 시대나 전장에 기념비를 세워 공을 세운 이들의 이름과 승리에 대한 기억을 파릇파릇 새롭게 하려고 한다. 프랑스는 파테 전투와 잔 다르크를 홀대하고 잊어버릴까? 오랫동안 잊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의 다른 전쟁과 영웅과 비교해 그에 걸맞은 큰 기념탑을 세우게 될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늘 아래 그만한 것을 세울 공간이 있다면 말이다.

 

(356-357)

그런데 외딴 시골에서 아무것도 배운 적이 없는 시골 처녀가 나와서 백발노인같이 오래된 이 전쟁, 3세대 동안 이 땅을 휩쓸고 모든 것을 불태운 이 전쟁에 맞섰다. 그리고 가장 짧지만 가장 놀라운 전투가 역사에 기록되었다. 7주 만에 전쟁은 끝났다. 7주만에 91살 먹은 거인 같은 거대한 전쟁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때려눕혀 버렸다. 시골 처녀는 오를레앙에서 그 거인에서 놀라운 한 방을 먹이고, 파테에서는 도망가는 거인의 등에다가 마지막 한 방을 먹였다.

 

(360)

보장시에서 잔은 프랑스 대무관장 리슈몽과 왕을 화해시키려고 했다. 잔은 리슈몽을 쉴르 루아르에 데려감으로써 자신의 약속을 훌륭히 이루었다. 잔의 위대한 업적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였다.

1. 오를레랑 구출

2. 파테 전투 승리

3. 쉴리 쉬르 루아르에서 이룬 화친

4. 왕의 대관식

5. 무혈 행군

 

(446)

왕들은 대신들과 장군들을 배신하고 대신들과 장군들도 국가의 수장을 배신하면서 서로를 배신해 왔다. 병사들은 잔을 전적으로 의지했고 또 잔밖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잔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잔은 얼어붙은 급류를 녹여서 끓어오르게 하는 태양이었다. 그 태양이 없어졌으니 다시 얼어붙은 것이다. 프랑스군과 온 프랑스는 이전의 모습, 곧 죽은 시체로 되돌아갔다. 단지 죽은 시체일 뿐이며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각도 희망도 포부도 움직임도 없는 시체일 뿐이었다.

 

(552)

잔의 모습을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 잔은 꼭 검은 그림자 같았다! 슬픈 표정으로 축 쳐져 있는 이 부서질 것 같은 작은 생명이 내가 아는 잔 다르크란 말인가. 선두에 서서 불 같은 열정으로 죽음과 빗발치는 포화의 불빛과 소리를 뚫고 달려가던 그 잔 다르크란 말인가. 잔의 이런 모습을 보자 내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555-556)

그러나 그리 생각하고 바랐던 내가 바보였다. 잔 다르크는 다른 인간들과 다른 존재였다. 원칙에 대한 충성, 진리에 대한 충성, 자신이 한 말에 대한 충성, 이 모든 것들이 잔의 뼈와 살 속에 있는 잔의 일부였다. 잔은 변할 수 없었다. 잔은 자기 몸속에 있는 것을 내쫓을 수 없었다. 잔은 충성 그 자체였고 인간이 된 절개였다. 잔이 어느 곳에 서서 발을 딛고 있으면 그곳에서 잔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옥도 그곳에서 잔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다. 잔의 음성들은 잔이 저들이 요구하는 항복을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잔은 굳건히 서 있었다. 잔은 온전히 복종하며 무슨 일이 닥쳐와도 기다릴 것이다.

 

(569)

잔은 바쁜 나날의 음악 같은 즐거운 소리들, 수천 가지 다양한 소리들에 둘러싸여 살아왔지만, 이제는 자기를 감시하는 감시병들의 단조로운 걸음 소리만 들을 뿐이었다. 잔은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걸 좋아했지만 이제 이야기 나눌 사람이 곁에 아무도 없었다. 잔은 쉽게 깔깔대며 웃곤 했지만 이제는 벙어리가 되었다. 잔은 친구와 어울리는 걸 좋아하고 명랑했으며, 바쁘게 이런저런 일로 하고 온갖 재밌는 일을 하며 살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오로지 쓸쓸함과 납처럼 무거운 시간을, 우울한 정적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루하게 가만있을 따름이었고, 낮이든 밤이든 같은 원을 빙빙 돌면서 머리를 피곤하게 하고 가슴을 부서뜨리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 살아 있지만 죽은 것, 바로 그것이 분명 잔이 여기서 누리는 것이었다.

 

(626-627)

잔 다르크에게 애국심이란 감정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열정이었다. 잔의 애국심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었다. 잔은 눈으로 보고 만져볼 수 있도록 애국심으로 몸으로 변한 존재였다. 사랑과 자비, 동정심과 용기, 전쟁과 평화, 시와 음악, 이런 것은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곧 남자로나 여자로나, 또 어떤 나이로나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국심이라는 것은 이제 막 피어난 젊고 가녀린 이 소녀의 모습으로만, 곧 순교자의 화관을 머리에 쓰고 조국을 얽어매던 굴레를 끓어버린 칼을 손에 든 이 소녀의 모습으로만 세상 끝날까지 남게 되지 않을까?

 

(643)

그러나 잔은 법률 책을 읽은 적도 없고 법원에 가본 적도 없었지만 열여섯 살에 재판에서 탁월한 능력을 드러냈다. 군사 훈련을 받은 적이 전혀 없었지만 첫 전투에서 탁월한 지휘관의 능력을 보였다. 첫 전투에서 보인 용기도 교육의 결과가 아니었다. 남자아이라면 남자는 겁을 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기에 용감해질 수 있지만 잔은 남자아이가 아닌 여자아이였다. 젊음이 꽃을 피우던 시절, 사슬에 묶여 감옥에 갇힌 잔은 몇 주 동안 자신을 죽이려고 애쓰는 많은 재판관들, 곧 프랑스의 가장 명민한 지성들 앞에 앉아 있었다. 잔은 자기 편이 아무도 없었고 재판에 관련된 일을 모른 채 혼자 싸웠지만 재판관들의 학식을 무학의 지혜로 압도했다. 그리고 저들의 속임수와 계략을 타고난 지혜로 무찔러 저들을 놀라게 했고, 이 모든 불리한 상황에도 날마다 승리를 거두어 한 발도 후퇴하지 않았다.

 

(646)

잔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행복하지 않았다. 잔은 동정심이 많았다.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둔 전투에서 잔은 승리를 잊은 채 죽어가는 한 적군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에 누인 채 동정어린 말로 위로해 주었다. 전쟁 포로들을 학살하던 잔인한 그 시절에 잔은 아군을 가로막아 적군의 포도들을 모두 살려 주었다. 잔은 너그러웠고 잘못을 쉽게 용서해 주었으며 이타적이고 너그럽게 베푸는 사람이었다. 야비한 것이라고는 한 점이 없이 잔은 순결했다. 그리고 언제나 잔 다르크는 소녀였다. 소녀답게 귀엽고 고매했다. 처음 부상을 당했을 때 잔은 겁을 먹고 가슴에서 붉은 피가 쏟아지는 것을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녀는 잔 다르크였다! 이내 수하의 장군들이 퇴각 나팔을 불게 하는 것을 보고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시 공격을 이끌어 적의 요새를 점령했다. 잔의 성품은 모난 데가 없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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