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통권 181호 - 2021년 11월~12월, 창간 30주년 기념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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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녹색평론 181(2021 11-12)>를 읽었단다. 읽기 전에 이번 호가 녹색평론 30주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 올해 계속해서 녹색평론 30주년 특별 기획으로 출간하기도 했고그렇다고 거창한 것은 아니었고, 녹색평론답게 조용하지만, 의미 있는 글들을 실어 주었단다. 녹색평론을 창간하고 늘 함께하던 김종철 님의 부재가 아쉬웠지만, 김종철 님의 동지이자 따님이신 김정현 님께서 잘 이끌어주셔서 녹색평론이 길을 잃지 않고, 30주년까지 잘 온 것 같구나.

아빠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법정 스님의 책을 통해서였단다. 그래서 그 이후에 빼놓지 않고 읽어봤는데, 아빠도 녹색평론을 함께 한 지가 10년이 넘었구나. 20주년 특집, 25주년 특집이 엊그제 같았는데, 세월은 너무나 빨리 흘러 어느덧 30주년이 되었구나.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이어졌는데, 양질의 책 내용처럼 독자수도 계속 늘어나고 출판사도 번창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리 되지 않은 것 같더구나. 예전에도 녹색평론의 재정적 사정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최근에도 여전한 것 같아. 이 좋은 글들을 많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것 또한 안타깝구나.

갑작스럽게 김종철 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김정현 님께서 녹색평론을 잘 이끌고 계시고는 있지만, 조금은 힘에 부치신 것 같구나. 이번 30주년 기념호 녹색평론을 출간하고, 1년 동안 휴식의 시간을 갖는다고 하는구나. 그렇게 30년간 쉼 없이 달려왔으니, 1년간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1년은 금방 휙 지나가니 그리 긴 시간도 아니고…. 1년 동안 잘 쉬시고, 더욱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만나길 바래본다. 식상한 인사말이지만, 녹색평론이 우리 사회에 영원한 녹색 빛이 되어 주기를….


1.

아빠는 녹색평론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단다. 세상을 보는 눈, 사회를 보는 눈, 국가를 보는 눈의 시력을 높여 주었어. 가끔 그 내용이 어려워 이해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비슷한 주제를 다룬 글들을 계속해서 실어주어, 여러 번 읽다 보면 이해가 가기도 했어. 그리고 많은 불편한 진실들도 알게 되었어. 녹색평론은 창간 할 때부터, 그러니까 30년 전부터 그런 불편한 진실들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려고 노력했고, 그런 불편한 진실을 없애기 위해 여러 조언들 해주었단다.

아래도 김종철 님의 녹색평론 창간사에 있던 말인데, 지금 이야기를 해도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글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 들려주어도 좋은 글이고 말이야. 그만큼 김종철 님은 세상을 보는 눈이 남다르셨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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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전대미문의 생태학적 재난은 결국 인간이 진보와 발전의 이름 밑에서 이룩해온 이른바 문명, 그 중에서도 특히 서구적 산업문명에 내재한 논리의 필연적인 결과로서의 사회적, 인간적, 자연적 위기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지구상에서 사람이 삶을 영위하는 올바른 방식은 과연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것을 요구하는 진실로 심오한 철학적 종교적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녹색평론사> 창간사, 1991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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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것은 우리나라 집권층들이 그런 말을 새겨 듣지 않은 것이 문제였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 지도자들도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었지. 결국 30년이 지난 지구는 기후위기와 끝날 것 같지 않은 무서운 전염병에 커다란 위기에 빠져 있구나. 이런 것들이 자본주의의 병폐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한번 만들어진 시스템을 겁나서 바꾸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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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지난 2~3세기 동안 이른바 문명세계가 산업문명을 통해서 이룩했다고 하는 높은 생활수준은 실은 인간사회가 자신의 보금자리를 끊임없이 찢고 할퀴는 난폭한 짓을 되풀이함으로써 얻어진 부산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구 자본주의의 산물인 산업경제와 그것에 의존해온 근대적 문명은, 그것이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와 지하자원을 대량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것인 한,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종말의 파국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한계를 그 출발점에서부터 내포하고 있다.”(<책머리에>,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녹색평론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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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님의 녹색평론 창간사에서 하나만 더 보자꾸나. 당시만 해도 과학 기술이 우리 인류에 주는 편리함과 빠름으로 인해 과학 기술은 찬양의 대상이었단다. 하지만 그때 이미 과학기술이 인류와 지구 생태계의 대재난을 초래할 것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의 말은 안타깝게도 현실이 되고 만 것 같구나. 이렇듯 세상에는 김종철 님과 같은 선지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적은 게 현실인가 보구나. 누가 사람들을 이렇게 조종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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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오늘날 과학기술의 힘이 막강하고, 부분적이나마 과학기술 수준이 찬탄스러운 것이라 해도, 과학은 여전히 우리의 삶의 바탕과 이 세상과 우주의 근원적인 진리를 해명하는 데에는 너무나 미약하고 부적절한 수단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하물며, 기계론적 우주관과 선형적 진보사관에 의지하여 전개되어온 지난 수세기의 근대과학기술의 성과는 이제 인류의 파멸까지도 배제하지 않는 지구생태계의 대재난을 초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해온 것이 아닌가? 삶의 태반을 망가뜨리면서 그것을 진보와 발전이라고 믿어온 것은 실로 우매의 극치라 할 만하고, 완전한 미치광이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인간의 본질적 관계, 그리고 근대과학의 근본가정에 깔려 있는 폭력성에 대한 뿌리로부터의 철저한 반성 없이, 계속하여 더 많은 과학과 더 정교한 기술만을 구한다면 파멸은 불가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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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녹색평론 30년 동안 줄곧 이야기해온 주제 중에 하나가 농촌에 대한 이야기란다. 이번 30주년도 농촌의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그런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들도 같이 제시했단다. 우리나라 농촌의 여러 문제점은 정치 구조에 의해 일어난다고 했어. 중앙집권적 정치시스템이다 보니 농촌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의견이 많이 묵살된다는 거야.

면에 살고 있는 국민들이 모두 반대하는 사업이 그 면에 진행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것이 가능하단다. 그래서 그 면에 사는 국민들이 반대 시위를 하고 말이야. 지방자치제도가 있지만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거지. 지방자체제도가 제대로 동작하기 위해서는 군을 폐지하고 읍면 단위로 이루어져야 하며, 읍면장과 이장은 직접 선거로 뽑아야 한다고 했어. 지금은 군수들이 보이기 사업으로 하다고 보니 자신이 왕처럼 행동하는 것 같아. 면의 국민들과 툭하면 충돌이 일어나고, 비리나 저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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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외국의 지방자치제도를 보면, 군수와 군청이 아예 없는 나라도 많다. 그러니 면의 주민들이 반대하는 사업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대한민국도 516 군사쿠데타 이전까지는 그랬다. 516 이전의 기초지방자치는 시, , 면 자치였다. 면장, 읍장도 직선으로 뽑고 면의원, 읍의원도 뽑았다. ()은 지방자치단체가 아니었다. 그런데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세력이 쿠데타에 성공하자마자 지방자치를 중단시키면서,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면,읍을 군()으로 강제 통합했던 것이다.

그런데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이런 박정희의 잔재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1991년 지방자치를 부활시키면서도 면,읍 자치를 부활시키지 않고 군 단위로 지방자치를 부활시킨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이상한 지방자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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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중앙집권적 정치제도로 인해, 남의 동네에 필요한 전기를 만드는 발전소를 우리 동네에 만드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거란다. 그걸로 끝이 아니고, 그 전기를 남의 동네까지 전송하느라, 고압송전탑을 또 우리 동네와 남의 동네 사이에 있는 동네들에 만들고물론 그 동네의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말이야그래서 반대 시위라도 하려면 하면 님비(NIMBY)라고 비판하고하지만, 누가 진짜 님비(NIMBY)인지는 조그만 생각해 보면 알게 된단다. 그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기 지역의 전기는 자기가 해결해야 한다고 하는데우리나라가 중앙집권적 정치제도가 너무 확고해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 생각은 안 드는구나. 솔직히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우리도 사실 위에서 이야기한 남의 동네근처에 살고 있어서 읽는 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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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렇다면 누가 님비(NIMBY)인가? 전기를 많이 쓰면서도 우리 지역에 발전소가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쪽이 님비인가, 아니면 우리 지역에서 쓰는 전기도 아닌데 발전소와 송전선을 우리 지역에 건설하겠다고 밀어붙이니 거기에 반대하는 것이 님비인가? 사실은 서울과 그 인근 지역이야말로 극단의 님비이다. 외부에 전기를 의존하면서도 스스로 전기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곳이다. 게다가 발생하는 생활쓰레기도 자체 처리를 못하고 외부로 반출해서 버리는 도시가 서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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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그런데 이런 방식은 놔두고, 농지를 훼손해가면서 태양광발전을 늘리겠다는 것은 전환이 아니라 공멸로 가는 길이다. 이것은 전력시스템 측면에서 보더라도 매우 위험하다.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이 급증하는 상황에서 장거리 초고압송전에 의존하는 전력시스템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경우 수도권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초고압송전선 몇 군데에서 동시에 사고가 나면 전력시스템이 붕괴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한전은 그 위험을 감추기 위해 송전선을 덕지덕지 건설하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해답은 지역분산형으로 전환하고, 자기 지역의 전력 자급률을 높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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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30주년 기념호에도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오늘은 한가지만 더 이야기를 하고 마치련다. 비싸지만, 즐겨 먹지는 못하지만 간혹 그 달콤함에 사 먹게 되는 샤인머스켓이라는 과일그것이 예상은 했지만, 유전자 조작까지는 아니지만 성장호르몬을 처리하여 씨가 없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그 때 사용한 성장호르몬 지베렐린에 대한 안정성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유전자 조작과 비슷한 것이구나. 예전에 씨가 없게 조작한 과일들을 많이 먹으면 불임의 원인이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샤인머스켓을 좀 멀리해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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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57)

샤인머스켓은 낯선 과일이다. 칠레와 FTA 협상이 타결된 이후 눈에 띄게 늘어서 수입한 청포도라고 짐작했는데, 우리 땅에서 재배하는 일본 품종인 걸 얼마 전에 알았다. 기껏 육종했건만 한국에 주도권을 빼앗겨 아쉬움이 크다는데, 약삭빠른 일본 자본도 가끔 실수하나 보다. 먹어보니 씨가 없고 아주 달다. 유기농 포도를 재배하는 이는 포도 영양분의 85%가 씨에 있다는데, 샤인머스캣은 왜 씨가 없을까? 그렇게 육종한 걸까? 아니라고 한다. 꽃이 필 때와 열매가 생길 즈음, 식물 성장호르몬인 지베렐린을 두 차례 처리한 결과이다.

지베렐린은 사람과 가축에 해가 없다지만, 복합오염 시대에 우리가 그 위험을 아직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요즘 거봉도 씨가 없다. 같은 방식으로 처리했을 텐데, 먹기 편해지려고 씨를 꼭 없애야 했나? 바나나도 씨가 없는데, 지베렐린과는 관계없다. 우연히 씨 없는 열매를 찾아냈고, 알뿌리로 번식이 가능한 그 다년생 풀을 집중적으로 재배해 오늘의 바나나 품종이 세계 과일시장을 점유하게 되었다. 씨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깨진 자동차 유리 파편처럼 생긴 씨앗이 촘촘히 박힌 바나나를 발견하면 새 품종을 찾을 기회이므로 팔지 않으니 시장에 나오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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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녹색평론> 창간 3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의 마음은 몹시 무겁다.

책의 끝 문장: 숲이 없으면 사람도 살 수 없다.


결국 이러한 문제의식들은 생명협동운동으로서 직거래운동과 유기농운동을 결합해 도농상생의 공동체를 일구기 위한 한살림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직거래운동은 유통마진을 줄여 생산자, 소비자 서로에게 이익을 주는 것에 머물지 않고, 상호 신뢰를 통해 생산과 소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꿔내는 새로운 경제운동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유기농운동 역시 농약과 화학비료 사용을 줄여 건강한 농산물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 순환과 생태계 복원, 생명존중 실천이라는 의미를 폭넓게 담고 있다. 따라서 친환경 유기농업의 등장 이유를 우루과이라운드 등 농산물 수입개방 상황에서 국내산 농산물의 경쟁력 강화 차원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런 운동적 관점을 놓친 매우 협소한 시각이다. - P25

고도로 화폐화된 자본주의사회는 세계화와 도시화로 필연적으로 귀결되어, 수많은 사회문제와 환경문제를 낳고 있다. 이러한 시대에 ‘지역화’는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역화폐에 담겨 있는 본래적 의미를 잘 살린다면, 화폐(국가화폐와 은행화폐) 의존적인 삶을 벗어나 지역화된 사회로 이행하는 데 지역화폐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홍동면의 지역화폐운동은 궁극적으로 화폐(지역화폐도 포함)가 부족해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한 공동체로 가는 이해 도구로 지역화폐만큼이나 유용한 것도 없다. - P47

신혼부부 앞에서 주치의는 "태어날 당신 아들은 운동을 좋아할 텐데 야구에 적성이 맞고, 투수보다 유격수를 추천"할지 모른다고 리 실버는 전망했다. 젊어서 담배를 하루 한 갑 이상 피우면 60세 이전에 폐암에 걸릴 확률이 80%가 넘으니 금연을 권하거나 수정란 유전자를 폐암을 피할 유전자로 바꾸라고 권유할 것으로 예견하면서, 그런 현상을 피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자식에게 좋은 유전자를 주입하는 걸 누가 통제할 수 있겠는가? 좋은 유전자로 세대마다 바꾼 부유층은 그렇지 못한 일반 계층과 어울리지 않을 텐고 그렇게 10세대 이상 지나면 서로 다른 종으로 구별되고 서로 관심이 없어질 거라고 실버는 예상했다. 침팬지에게 인간이 애정을 느끼지 않듯. - P61

라운드업은 광범위한 효능을 지닌 제초제일 뿐만 아니라 광범위하게 생명체들을 죽이는 독극물이다. 꽃가루를 매개하는 유익한 곤충이나 토양 생물을 말살한다. 라운드업레디 작물들로 인해 북반구에서 왕나비의 90%가 사라졌고, 과학자들이 ‘곤충 대멸종’이라고 부르는 현실 속에 우리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GMO 대두를 이용하여 가짜 고기를 생산하는 일을 ‘환경적으로 책임 있는 선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P80

"지난 2~3세기 동안 이른바 문명세계가 산업문명을 통해서 이룩했다고 하는 높은 생활수준은 실은 인간사회가 자신의 보금자리를 끊임없이 찢고 할퀴는 난폭한 짓을 되풀이함으로써 얻어진 부산물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구 자본주의의 산물인 산업경제와 그것에 의존해온 근대적 문명은, 그것이 재생 불가능한 화석연료와 지하자원을 대량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것인 한,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종말의 파국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한계를 그 출발점에서부터 내포하고 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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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

만약 나폴레옹이 비스와 강 건너편으로 후퇴하라는 요구에 화를 내지 않고, 군대에 진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고, 하사 전원이 재복무를 원하지 않았더라도 역시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영국의 음모가 없고, 올덴부르크 대공이 없고, 알렉산드르가 모욕을 느끼지 않고, 러시아에 전제 권력이 없고, 프랑스혁명과 뒤이은 독재와 제정시대가 없고, 거슬러올라가 프랑스혁명을 유발한 여러 원인이, 기타 등등이 없었다면 역시 전쟁은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원인 중 하나만 빠졌어도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원인-수십억 가지 원인-은 사건을 유발하여 우연히 동시에 겹친 것이다. 따라서 사건의 특정한 원인이랑 없으며,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몇 세기 전 인간 무리가 자신과 유사한 자들을 죽이면서 동에서 서로 이동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백만의 인간이 자신의 인간다운 감정과 이성을 버리고 서에서 동으로 전진하며 자신과 유사한 자들을 죽여야만 했던 것이다.


(17)

인간에게는 양면의 생활이 있는데, 하나는 생활의 흥미가 추상적일수록 자유로워지는 개인적 생활이고, 또하나는 자기에게 정해진 법칙을 좋든 싫든 실행해야 하는 자연력이 행사되는 집단적 생활이다.

인간은 의식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생활하지만, 역사적이고 전인류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무의식적인 도구 역할을 한다. 일단 실행된 행위는 돌이키지 못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른 이의 무수한 행위와 합쳐지며 역사적 의미를 띠게 된다. 인간은 사회적 단계의 높은 곳에 설수록, 더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을수록 다른 사람에 대해 더 큰 권력을 갖게 되고, 또 개개 행동의 숙명과 필연성이 더 명백해진다.


(19)

어느 것도 원인은 아니다. 이 모든 것은 생명이 있는, 유기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일어날 때의 모든 조건이 일치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이 세포질의 분해 등등 때문이라고 하는 식물학자나, 내가 먹고 싶어 떨어지라고 빌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나무 밑의 사내아이나 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 간 것은 그가 그것을 바랐기 때문이고, 그가 패망한 것은 알렉산드르가 그의 패망을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갱도가 뚫려 몇만 푸드나 되는 산이 무너지는 것이 마지막 갱부의 마지막 곡괭이질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한 것이다. 역사상의 사건에서 이른바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 사건에 명칭을 부여하는 라벨이며, 원래 라벨이라는 것이 그렇듯 사건 그 자체와는 가장 관계가 적다.

자기 자신에게는 자유로운 것이라 생각되던 영웅들의 모든 행위도 역사적 의미에서 보면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 전체와 관련되어 있고, 개벽 이전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50)

과오의 가능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나폴레옹의 신념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그의 생각에 따르면 자신이 하는 행위는 전부 다 선한 것인데, 그것은 그 행위가 선악의 관념에 합치해서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한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었다.


(70-71)

가장 많은 사람이 있는 여덟번째 파는 수적으로 다른 파들에 비해 99 1의 비율로 많았는데, 그들은 평화도, 전쟁도, 공격 작전도, 드리사든 어디든 방어 진지도, 바르클라이도, 황제도, 풀도, 베니히센도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오직 중요한 한 가지, 즉 자신을 위한 최대의 이익과 만족만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황제가 있는 사령부를 돌러싼 얽히고설킨 음모의 진흙탕 속에서, 실로 다양한 범위에서, 다른 때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성공을 얻게 될 수 있었다. 어떤 자는 그저 자신의 유리한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오늘은 풀에 찬성하고 내일은 반대파에 찬성하다가도 모레는 그저 책임을 피하기 위해, 그것이 황제의 마음에만 들었다는 이유로, 아무 의견도 없다고 했다.


(83-84)

천재라는 말은 광휘와 권력에 둘러싸여 있는 군인에게 우매한 대중이 그 권력에 천재라는 어울리지도 않는 성질을 덧붙이고 아첨하며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아는 훌륭한 장군들은 모두 바로 같거나 얼빠진 자들이다. 가장 훌륭한 장군은 바그라티온이며, 이것은 나폴레옹도 인정했다. 그런데 보나파르테 자신은 어떨까! 나는 아우스터리츠 전장에서 보았던 자기만족에 찬 그 우매한 얼굴을 기억한다. 훌륭한 사령관에게는 특별한 자질 같은 것은 필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니 시정(詩情)이니 부드러움이니 철학적 탐구에 의한 회의(懷疑) 같은 가장 고매한 인간의 자질은 없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령관은 시야가 좁고, 자신이 하는 일이 몹시 중요하다고 확신해야 하며(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서 용감한 사령관이 될 수 있다. 보통 사람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동정하거나,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생각하는 것은 금물이다.


(120)

피예르가 로스토프네에서 돌아오던 중 감사에 찬 나타샤의 눈빛을 떠올리며 하늘의 혜성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새로운 무언가가 계시되었다고 느낀 그날부터, 지상의 모든 것이 공허하고 어리석다는, 그동안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던 의문은 더 이상 떠오르지 않게 되었다. 전에 무슨 일을 할 때나 머리에 떠올랐던 왜? 무엇을 위해? 같은 무서운 의문은 이제 전혀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는데, 그것은 또다른 의문도 아니고 이전의 의문에 대한 대답도 아닌 그녀의 모습이었다. 부질없는 이야기를 듣거나 자신이 말을 해도, 인간의 비열함과 무의미함에 관해 읽거나 들어도 전처럼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고, 인생이 짧고 불확실한데 인간은 왜 그렇게 악착을 부릴까 자문하지도 않았으며, 그저 마지막 본 그녀 모습을 떠올리면 모든 의문이 사라졌는데, 그것은 그녀가 그의 머리에 떠오른 의문에 대답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모습이 순식간에 그를 전혀 다른 밝은 정신활동의 영역, 올바른 자도 없고 죄지은 자도 없는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아름다움과 사랑의 영역으로 데려가기 때문이었다.


(156)

전쟁에 참가한 수많은 사람도 모두 각자의 본성, 습관, 조건, 목적 등에 따라 행동했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허영에 차고, 기뻐하고, 분개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스스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또 그것이 자신을 위한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들 모두가 의지를 갖지 않는 역사의 도구였으며,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이해가 될 일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활동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불변의 운명이고, 인간 사회에서 계급이 높을수록 자유는 줄어든다.


(156-157)

이제 우리는 1812년에 프랑스군이 파멸한 원인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파멸한 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이 겨울 원정 준비도 없이 이미 늦은 때에 러시아 땅 깊숙이 침입했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러시아의 모든 도시가 소각되고, 그들이 불러일으킨 러시아 민중의 적개심으로 생긴 전쟁의 성격 때문이었다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최고의 지휘관이 통솔한 세계 최고의 80만 군대가, 수적으로 절반도 되지 않는 경험 없는 지휘관들이 통솔하는 경험 없는 러시아군과 맞붙어 패망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러한 경과 외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예측한(지금은 누구에게나 분명히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누구도 그런 사실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러시아 측 노력은 전부가 러시아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방해하는 쪽으로 향하고 있었고, 프랑스측에서는 나폴레옹이 아무리 경험이 풍부하고 군사적 천재라 불렸을지라도 여름이 끝날 무렵 모스크바로 나아갔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들을 파멸시킬 게 분명한 일을 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 격이었다.


(268)

모두가 원한다면 해야겠지, 도리가 없으니…… 하지만 여보게, 이건 정말이야, 인내와 시간, 이 두 용사보다 강한 건 없고, 이 두 가지가 모든 것을 해주지만, 조언자들은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아, 그게 잘못이야. 누구는 좋다고 하고 누구는 안 된다고 하니,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는 대답을 기대하는 듯이 물었다. “그래, 자네라면 어떻게 하라고 하겠나?” 그는 깊고 총명한 빛을 띤 눈을 반짝이며 다시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가르쳐주지.” 안드레이 공작이 대답하지 않자 그는 말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가르쳐주지. 의심 속에서는, 어보게,”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몸을 삼가라.”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270-271)

닥쳐오는 커다란 위험을 알아챈 사람들에게 흔히 보이는 것처럼, 적이 모스크바로 접근해 오고 있는데도 자신들의 상황에 대한 모스크바 사람들의 생각은 조금도 진지해지지 않고 오히려 더 경박해졌다. 위험이 닥쳐오면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으레 두 개의 목소리가 똑같이 강하게 말하기 시작하는데, 하나의 목소리는 위험의 성질을 잘 파악해 벗어날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고 무척 이성적으로 말하고, 또하나의 목소리는 모든 것을 예견하고 사건의 전반적인 움직임에서 달아나는 것은 인간의 힘에 부치고 위험을 생각하는 것은 괴롭고 고통스러우니 그것이 눈앞에 닥칠 때까지는 외면하고 즐거운 일만 생각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더욱 이성적으로 말한다. 혼자일 때 인간은 대개 첫번째 목소리에 따르지만, 집단사회는 두번째 목소리에 따른다. 지금 모스크바 시민의 경우가 그랬다. 모스크바가 이해만큼 흥겨웠던 적은 오래도록 없었다.


(313-314)

명예, 사회의 안녕, 여자에 대한 사랑, 조국-이 그림들이 나에게 얼마나 위대하고 깊은 의미로 가득찬 것으로 보였던가!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내가 나를 위해 떠오른다고 느낀 아침의 차가운 백색 광선 아래서 그저 단순하고, 흐릿하고, 조잡할 뿐이다.’ 특히 주의를 끈 것은 그의 인생에 있었던 세 가지 큰 슬픔이었다. 여자에 대한 사랑, 아버지의 죽음, 러시아의 절반을 점령한 프랑스군의 침입. “사랑!...... 신비로운 힘으로 가득해 보이던 그녀! 나는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나는 내 사랑, 그녀와의 행복에 관해 시적인 계획을 세웠었다. 오 귀여운 소년!” 그는 분노에 차 소리내어 말했다. ‘그런데 어땠는가! 나는 이상적인 사랑 같은 것을 믿고 내가 없는 일 년 동안 그녀가 당연히 절개를 지킬 거라 생각했다! 우화에 나오는 착한 비둘기처럼 나와 헤어져 있는 그녀가 나만을 생각하며 야윌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단순했다…… 모든 것이 너무나 단순하고 추악했다.


(320-321)

전투가 이기려고 굳게 결심한 자가 이기는 법이야. 왜 우리가 아우스터리츠에서 패했을까? 아군과 프랑스군의 손실이 거의 비슷했는데도 우리가 너무 성급히 우리가 졌다고 말했고, 그래서 진 거야. 우리가 그렇게 말했던 것은, 당시 거기서 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빨리 전장에서 달아나고 싶어했기 때문이네. ‘졌다-달아나자!’ 이러면서 우리는 달아났어. 만약 저녁때까지 우리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지. 그러나 내일 우리는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걸세. 자네는 우리 진지의 좌약이 약하고 우익이 너무 뻗어 있다고 하지만,”그는 계속했다. “전부 쓸데없어. 그런 건 있지 않아. 내일 우리를 기다리는 건 무엇일까? 그건 수억 개의 다양한 우연이고, 이것이 적이 달아나느냐 우리가 달아나느냐, 이쪽을 죽이느냐 저쪽을 죽이느냐에 따라 순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며, 지금 하는 일들은 그저 오락일 뿐이야. 자신과 함께 진지를 둘러본 그들은 전체의 움직임에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를 하고 있어. 그들은 그저 자신의 작은 이해에 사로잡혀 있거든.”


(325)

전쟁은 예의를 차리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가장 역겨운 것이고, 우리가 이것을 이해해야만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걸세. 우리는 엄격하고 엄숙하게 이 무서운 필연성을 다뤄야 해. 요컨대 허위를 버려야 하는 거야.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이지 절대 장난이 아니니까. 그렇지 않으면 전쟁은 한가하고 경솔한 사람들의 오락거리가 되고 말 걸세.


(341-342)

여기에 발췌한 작전명령은 그가 승리를 거둔 전투들에서 내린 작전명령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뛰어났다. 전투중에 내렸다는 명령들도 종전보다 못하지 않고 비등했다. 그러나 이 작전명령과 지시가 그전 것보다 뒤떨어진다고 생각되는 것은 보르디노 회전이 그에게 첫 패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하고 빈틈없는 작전명령이나 지시도 패전하면 매우 졸렬한 것으로 생각되고, 학식이라도 있는 군인들은 보란듯이 그것을 비난하며, 아무리 조악한 작전명령이나 지시도 승리하면 더없이 훌륭한 것으로 여겨지고, 진지한 사람들이 다수의 책을 쓰면 그 조악한 지시의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


(380)

천만의 말씀입니다. 각하, 승패를 판가름하기 어려울 때는 끈기 있는 쪽이 승리자가 되는 법입니다.”


(385)

정말 이것이 죽음이라는 걸까?’ 안드레이 공작은 풀과 쑥과 뱅뱅 도는 검은 공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의 흐름을 전혀 새롭고 부러움이 깃든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죽을 수 없다, 죽고 싶지 않다. 나는 삶을 사랑하고, 이 풀과 땅과 공기를 사랑한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모두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상기했다.


(441)

전쟁이란 인간의 자유가 하느님의 계율에 따르는 가장 어려운 복종이다.’ 어떤 목소리가 말했다. ‘소박함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이다. 하느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은 소박한 것이다. 그들은 말하지 않고, 행동한다. 한 말은 은이고, 하지 않은 말은 금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고통이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모를 것이고, 자기 자신을 모를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피예르는 꿈속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기보다 들었다) 모든 것의 의미를 마음속에서 하나로 결합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결합한다?’ 피예르는 자문했다. ‘아니다, 결합이 아니다. 사상은 결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모든 사상을 연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 연결해야 한다, 연결해야 하는 것이다!’ 피예르는 자기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이 말로써 표현되고, 자기를 괴롭히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고 느끼고 마음속 깊이 감격하며 혼잣말을 되풀이했다.


(492)

러시아 사절단에게 나는 전쟁 같은 것은 원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고, 나는 오로지 그들 궁정의 그릇된 정치와 싸운 데 불과하고, 알렉산드르를 사랑하고 존경하며, 나와 나의 국민을 욕되게 하지 않는 강화 조건이라면 이 모스크바에서 받아들이겠노라고 말해주리라. 나는 내가 존경하는 황제를 모욕하기 위해 승리의 행운을 이용하고 싶지 않다. 귀족들에게도 말하리라. 나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내가 원하는 것은 평화와 나의 모든 신민의 안녕이라고. 하지만 그들 앞에 나서면 나는 분명 더욱 고무될 것이고, 언제나처럼 명료하게, 장중하게, 또한 당당하게 말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정말 모스크바에 있는 걸까? 그렇다, 저것은 모스크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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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2-04 1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4권!
북홀릭님 주말 대작 전!평 완독의 끝을 향해 !!

bookholic 2021-12-05 10:38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4권도 드디어 끝냈습니다...
scott님께서 얼마 전에 왜 <전쟁과 평화> 4권을 말씀하셨는지 알겠어요 ㅎㅎ
 
나무의사 우종영의 바림
우종영 지음 / 자연과생태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좋아하는 나무의사 우종영 님이 몇 년 전에 쓰신 에세이 한 편을 읽었단다. 제목은 <나무의사 우종영의 바림> 책 제목에 있는 바림이란 단어는 아빠는 처음 보는 단어였단다. 지은이 우종영 님이 나무의사이고 나무와 산을 무척 사랑하시는 분이라서, ‘바림이 한자로 수풀 림()이라고 생각하고 바림이 어떤 숲의 한 종류라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그런 뜻이 아니더구나.

바림은 순 우리나라 말로 그림을 그릴 때 물을 바르고 마르기 앞서 물감을 먹인 붓을 대어, 번지면서 흐릿하고 깊이 있는 색이 살아나도록 하는 일이라고 하더구나. 뜻도 좋고 발음소리도 좋은 순 우리말을 하나 알게 되어 시작부터 좋았단다. 이 책은 나무의사 우종영 님에 틈틈이 적어두었던 글들을 주제별로 엮은 글이란다. 틈틈이 문득문득 생각을 적은 글이라고 해서 결코 가볍지 않았단다. 인문학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글도 있고, 자연과학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글도 있고, 삶을 뒤돌아보게 하는 글들이 많았단다. 물론 나무에 관련된 글들이 가장 많았지. , 그럼 아빠의 마음에 스며드는 듯한 바림 같은 우종영 님의 글들 몇 개를 소개해 볼게.


1.

5 부로 구성되어 있어. 1부에서는 나무가 사람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면 어떤 내용으로 쓸까? 라는 지은이의 상상에서 시작된 글들의 모음이란다. 첫 번째는 가로수가 쓴 편지였는데, 아마 나무의사 우종영 님이 가장 불쌍하게 여기는 나무가 가로수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구나. 시멘트의 작은 틈에 뿌리를 내리고, 툭하면 가지를 잘리는 고통을 받는 가로수. 하루 종일 매연과 소음으로 시달리는 가로수. 아빠는 그 동안 별 생각이 보던 가로수였는데, 이 글을 읽고 보니 정말 불쌍한 생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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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도시 빌딩숲은 광합성을 방해한다.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는 숲,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 빌딩을 처음 만난 날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바람에 흔들리는 가지와 흔들린 만큼 빛이 뿌려지는 공평한 숲이 아니다. 그나마 햇빛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는 건 다행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당시 최고 권력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우쭐대며 무엇이 필요한지를 물었을 때, 햇빛을 가리지 말아 달라고 했다. 나무는 디오게네스와 달리 우쭐대는 빌딩 숲 사이에서 나무 큰 나무들 사이로 이사 온 것 같구나. 나도 얼른 커야겠다며 긍정적인 마음으로 빛을 향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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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는 나무 예찬에 관한 글들이 실려 있단다. 아빠도 나무를 좋아하는 편이란다. 산에 가면 많은 나무들이 함께 뿜어내는 향기가 좋고, 곧게 뻗어 중력을 거스르며 자라는 나무의 기개가 좋고, 스스로 아름다운 모습을 주기도 하지만, 다른 것과 함께 어우러져 환상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도 좋단다. 예를 들어 겨울에 눈 덮인 나무의 모습을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잖아.

그런 나무들을 잘 자라는 게 하는데 여러 요소들이 있어. 햇빛, 흙 속의 영양분, 적당한 물 등. 그런데 아빠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단다. 바람. 바람은 나무에게 방해만 주는 녀석인 줄 알았거든. 가끔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으로 나무가 뿌리지고, 뿌리 채 뽑히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야. 물론 그런 강한 바람은 나무의 적이지만, 살살 시원하게 부는 바람은 나무에게 필수라고 하는구나. 나무의 대사활동에 도움을 주고, 뿌리는 튼튼하고 하고, 과일 나무는 과일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말이야. .. 숲 속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문득 떠오르니 갑자기 산에 가고 싶구나. 우종영 님의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늘 산에 가고 싶게 만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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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바람은 빛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뀐 것이다. 만약 바람이 없다면 잎의 온도는 엽록소가 파괴될 만큼 올라갈 것이며, 증산작용을 하지 못해 대사활동이 떨어진다. 맛있는 과일과 곡식과 맺지 못한다. 바람은 나무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다. 꽃가루를 옮겨 주기도 하고, 씨앗을 멀리 보내 주며, 뿌리의 발달을 돕는다. 나무를 옮겨 심고 지주목을 받쳐 주어야 하는 것도 바람에 흔들려 새롭게 태어나는 뿌리가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지주목이 오래도록 나무가 흔들리지 못하게 한다면 뿌리는 깊고 멀리 뻗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바람이 불 때 흔들리지 않으므로 자기 뿌리가 그만큼 든든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반면에 너무 강한 바람은 나무를 넘어트리거나 가지를 부러트리기도 하고, 깃발이 흔들리는 것처럼 한쪽 가지를 몽땅 빼앗아 가기도 한다. 특히 외따로 자라는 나무에게 바람은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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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는 나무의 본성에 대한 글들이란다. 같은 생명체이긴 하지만 사람을 비롯하여 다른 생명체들과 다른 나무만의 특징들을 이야기를 해주었단다. 다른 생명체와 다른 나무의 가장 큰 특징은 아무래도 오래 사는 것이 아닐까 싶구나. 몇 백 년, 몇 천 년 된 나무들을 예사로 볼 수 있으니 말이야. 그런 오래된 나무들의 속은 대부분 비어 있다고 하더구나. 마치 노자의 사상처럼 말이야. 비어야 채울 수 있다는 듯실제로 그 비어 있는 곳에 다른 생명체들을 품는다고 하는구나. 작은 동물들의 안식처가 되는 것이지()란 것은 나무처럼 오래 사는 생명체여야 깨달을 수 있는 것 같구나. 비움이 좋다는 진리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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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오래된 나무는 대부분 속이 비어 있다. 나무는 하늘과 땅이라는 두 개의 젖꼭지를 물고 양쪽에서 자양분을 취하는 유일한 생명체다. 가지는 하늘에 근본을 두고 뿌리는 땅에 근본을 둔다. 두 개의 근본을 가지며 나이를 먹을수록 중심을 비우므로 하늘과 땅의 소통을 이룬다. 속이 비어 있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텅 빈 공간이다. 노자는 비어 있음으로써 유용하다고 했다. 마차 바퀴통은 중심이 비어야 살을 끼워 저항을 줄이며 구를 수 있고, 그릇은 비어 있어야 쓸모가 있다. 사람도 어딘가 비어 있어야 다른 사람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있듯이, 나무는 속을 비워 냄으로써 많은 생명체를 품는다. 나무의 텅 빈 속은 아늑하며 따뜻하고 숨기 좋으므로 하룻밤 쉬어 가는 동물이 번갈아 드나드는 공간이 된다. 살아서 몸을 보시하는 보살의 화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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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에서 나무와 바람에 관한 이야기를 한 번 더 하셨는데, 그 이야기가 너무 공감이 가고 좋아서 또 발췌해 보았단다. 아빠도 너희들에게 바람 같은 존재가 되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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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

나무에게 바람은 어떤 존재일까? 만약 나무가 태어나자마자 학교에 들어갔다면 바람은 무서운 훈육주임이고, 사춘기에는 친구, 청년기에는 연인, 사회에 진출하면 질서와 규율, 노년기에는 스킨십을 잊지 못하게 하는 추억이다. 숲속에서 태어난 어린 나무에게 바람이란 큰 나무나 겪는 일이지만, 가끔씩 큰 나무도 감당 못하는 바람이 불어올 때면 어린 나무에게도 무서운 존재로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뿌리를 사방으로 뻗어 나갈 것이다. 좀 더 커서는 바람을 맞아놀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친구처럼 대하고, 이제 어엿한 나무가 되면 바람을 그리워하게 된다. 장성해 숲의 주인이 되어 갈 즈음이면 바람은 누구랄 것도 없이 더 크고자 하는 욕망을 통제한다. 노년이 되면 무성했던 가지와 잎도 사라지고 엉성한 가지 사이로 바람마저 피해 간다.

==================

….

아빠가 우종영 님의 책 중에 가장 처음 읽은 책은 <나도 나무처럼 살고 싶다>란 책이란다. 그 책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문구가 나무는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사람도 어느 정도 간격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야. 사랑하는 가족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야. 그 문구가 이번 책에서도 다시 한번 소개되어 반가웠단다. 나무처럼 일정 간격 두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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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오래된 숲일수록 소소해지며, 적당한 간격으로 서 있음을 볼 수 있다. 생물학 용어에서 개체거리란 어떤 생물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다른 개체와 유지해야 할 거리를 말한다. 너무 가까이 있으면 경쟁관계가 되며, 너무 떨어져 있으면 관계를 맺을 수 없으므로 개체거리가 중요하다. 풍매화의 꽃가루나 곤충을 이용해 수분하는 나무도 개체 간 거리가 필요하다. 나무는 움직이지 못하므로 근친관계가 이루어지기 쉽다. 따라서 무리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서로 유전자 교환이 이루어질 수 없기에 집단적으로 분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꽃에 신경 쓰지 않는 풍매화는 바람이 부는 봄날 일시에 꽃가루를 날려 보내야 한다. 나무에게는 부부라는 개념이 없고, 정자에 해당하는 꽃가루를 무작위로 방출해 암술의 주두에 닿으면 수정되는 방식, 즉 물고기처럼 체외사정으로 성교하는 셈이다. 그런 일은 분류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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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에서는 나무가 우리에게 베풀어 준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단다. 나무가 우리에게 베풀어 준 것을 어디 손으로 헤아리겠니. 지은이는 그 중에 나무들이 자신에게 걷기를 충동질했다고 하는구나. 좋아하는 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걸어야 하니까. 그러면서 걷기에 대한 예찬을 쏟아내는데, 좋은 글들이 참 많았단다. 모든 글들을 마음에 새기고 그의 말 따라 아빠도 부지런히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은이가 이야기한 걷기에 대한 예찬을 모두 적고 싶지만, 너무 양이 많아서 두 문단만 뽑아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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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걷기는 끊임없이 몸과 타협해야 한다. 기계를 돌보는 엔지니어처럼 몸 구석구석을 점검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동안 쓰지 않아서 퇴화한 근육들이 아우성을 치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마음은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가슴에 있어야 할 영혼은 발바닥에 머무르며 온몸은 발바닥의 지시를 받는다. 걷기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이다. 잔잔한 고통을 통해 몸과 마음이 화해하는 행위다. 그동안에 잊었던 몸 구석구석을 돌아보게 하며 서로가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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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

걷기란 이동 수단이 아니라 내면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수단이다. 걷기란 수많은 질문과 답이 오가는 과정이다. 자연스럽게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의문점들이 떠오른다.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말하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된다. ‘그동안 잘 있었니, 미안해, 주로 마음이 몸에게 일방적으로 화해를 청하는 모습이다. 몸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고 강조하지만, 그런 경지는 걷기를 통해 잠시 맛볼 수 있다. “나는 나의 몸이다라고 한 그의 말처럼 걷기에서 내 몸과 나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하나 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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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제 5부는 지은이 우종영 님의 직업인 나무의사로서 나무에 대한 예우와 나무의사로서의 경험들을 이야기해 주었단다. 그러면서 나무를 생명체라고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다루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했어. 나무들이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들도 아마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할 텐데 말이야. 최근 인권에 빗대어 동물권이라는 말들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것처럼 생명체인 나무권에 대한 이야기도 했단다. 그러면서 최소한의 생존권을 주어야 한다고 했어. 가로수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간신히 목숨만 이어가는 그런 환경에 처해진 나무들은 없도록 말이야.

지은이 우종영 님은 정말 나무를 사랑하는 분 같더구나. 아빠가 그런 나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만, 길가에 있는 가로수를 보면서 위로의 쓰다듬을 하곤 해야겠구나. 그들 또한 생명체임을 생각하고 말이야. 고맙다. 나무야.


PS:

책의 첫 문장: 가을, 가로수 낙엽들은 갈 곳을 잃고 가벼운 몸을 뒤척이다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책의 끝 문장: 나무의사가 되려는 사람은 모름지기 명의가 되려 하지 말고 직업인으로서 존경받는 직종을 만들어 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무뿌리에는 살아있는 세포들이 밀집되어 있다. 그런 만큼 신선한 산소도 많이 필요하다. 그래서 토양 속 틈은 뿌리들에게 생명의 공간이다. 제주도나 울릉도에 가서 숲길을 걸으면서도 마음이 편한 것은 화산석이라 뿌리들이 숨 쉬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제주 산천단의 천연기념물인 곰솔을 보면 탐방객 때문에 길옆은 답압이 심할 텐데도 싱싱하게 잘 자란다. 화산석에 숭숭 뚫린 공기구멍 덕분이다. 나무의 뿌리 분포는 대부분 지표면 15센티미터 안에 물려 있다. 뿌리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숨 쉬기를 원하는지 알 수 있는 증거다. 가로수는 늘 어두운 땅속에서 물과 양분, 신선한 산소를 찾아 길을 떠난다. 부족함을 벗 삼아 느린 숨을 쉬며 길 위에서 수행한다. - P20

나무는 사람을 닮고 사람은 나무를 닮는다. 오랜 세월 동안 같이 겪었을 홍수와 가뭄, 추위와 더위,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옹이 박힌 나이테를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다. 사람은 갔지만 나무는 살아남아 사람의 삶을 증언하기도 하고, 질긴 생명력으로 이 땅에 살다간 조상들과 닮아서 그들의 숨결을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선했던 민초들의 삶을 보듬어 주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해 주며 스스로 신이 된 신목들을 만나 본다. - P34

토머스 파켄엄의 말을 들어보자.
"오래된 나무들의 크기는 수령과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대신 나무의 장수는 스트레스와 관련된 같았다. 가장 오래된 브리슬콘소나무는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열악한 환경을 선택했다. 겨울에는 눈보라에 시달리거나 폭설에 파묻혔고 봄여름에는 뙤약볕에 바짝 말라 버렸다. 눈 녹은 물 이외에는 마실 것도 없었고 생장이 가능한 시기는 1년에 고작 몇 주에 불과했다. 스트레스로 인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저 수준으로 생장이 느려졌다."
- P63

흙이 발효되는 냄새와 얼굴에서 온몸으로 전해지는 따뜻한 습기, 들뜬 꽃들의 분 냄새, 나는 그것들을 내 몸 안에 가두어 두려고 큰 숨을 들이쉬고는 내뱉질 못했다. 며칠 전만 해도 인쇄소에서 잉크 냄새에도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밤에는 기계 위에 걸쳐 놓은 마루에서 잠을 자야 했다. 무엇인가가 내 몸을 꽃향기와 흙 내음 속으로 격렬하게 내몰았다. - P80

멈춤이 자람보다 중요한 것은 대형 사고를 막을 수 있어서다. 나무의 생장을 멈추게 하는 상태를 스트레스 상태라고 하며, 생장하기에 적절치 못한 상태에 접어들었을 때를 뜻한다. 나무는 고온과 저온, 동해와 냉해, 바람, 대기오염, 수분 등이 많고 적음에 따라 각종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이때 생장을 멈추기 못한다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모든 나무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각 나무는 반응하는 정도가 다르므로 상대적인 개념으로 생각해야 한다. 혹독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온 나무는 상대적으로 좋다고 여겨지는 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182

나무 진단은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요구한다. 나무의 껍질은 나이와 환경을 대변한다. 세월에 따라 변하는 시간의 지문이다. 젊은 껍질과 늙은 껍질이 공존한다. 해쓱한, 까칠한, 촉촉한, 검은, 검버섯, 푸른, 이끼, 거칠고 부드러움, 질감과 색감이 조응하며 언어로 드러난다. 본질은 그 언어 속으로 숨는다. 마침내 나무의사는 언어를 뒤지며 원인을 찾아낸다. - P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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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01 07: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북홀릭님이 좋아하는 에세이라니 급관심이 갑니다. 나무는 잘 모르지만 나무 보는걸 좋아하는데 읽어보고 싶어요 ^^

bookholic 2021-12-02 07:48   좋아요 2 | URL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겠지만,
저는 우종영 님의 책들이 다 좋았어요~~^^
기회가 닿는다면 한 번 읽어보시길~~~
쌀쌀한 날씨지만 따뜻한 하루 되시고요~~

mini74 2021-12-01 22: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바람이란 단어에 이런 뜻도 담겨 있군요 참 예뻐요. 나무이야기와 에세이라. 저도 관심이 갑니다. ~

bookholic 2021-12-02 07:53   좋아요 1 | URL
좋은 우리말들이 많이 있는데, 잘 쓰지는 못하네요...
우종영 님의 책에는 나무 이야기 속에 사람 이야기가 있어서 더 좋았어요...
오늘 하루도 행복하고 따뜻하고 편안한 하루 되시길~~~^^
 















(113)

루이 16세도 죄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처형당했지만, 일 년 후 루이 16세를 처형한 자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무엇이 나쁜 것인가? 무엇이 좋은 것인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하는가? 무엇 때문에 살고, 나는 대체 무엇인가? 삶이란, 죽음이란 무엇인가? 만물을 지배하는 힘은 무엇인가?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들에 단 한 가지 대답도 얻지 못했고, 한 가지 대답이 있긴 했지만 논리적이지 못하고 또 모든 의문에 대한 대답도 되지 못했다. 그 한 가지 대답이란 죽으면 모든 것은 끝난다. 죽으면 모든 것을 알게 되거나, 더 이상 그런 의문을 갖지 않게 된다였다. 그러나 죽는 것은 무서웠다.


(166)

키예프에 도착한 피예르는 관리인들을 모두 가장 큰 사무소로 불러 그들에게 자기의 의도와 희망을 설명했다. 농노적 종속관계에서 농민을 완전히 해방하기 위한 방법을 즉시 강구할 것, 그때까지는 당분가 농민에게 지나친 노동을 시키지 말 것, 아이가 있는 부녀자에게는 일을 시키지 말 것, 농민을 원조할 것, 처벌은 훈계로 그치고 체형은 금할 것, 각 영지에 병원과 고아원과 학교를 설립할 것 등이었다. 몇몇 관리인은(그중에는 거의 문맹인 청지기도 있었다) 젊은 백작이 자기들의 관리 소홀과 돈을 착복하는 데 불만을 품은 거라고 해석하고 겁을 먹은 패 피예르의 말을 들었다. 또 처음에는 두려워하다가 피예르의 떠듬거리는 말투와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무리도 있었고, 주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그저 만족하는 세번째 무리도 있었는데, 총 관리인을 포함한 네번째 무리에 해당하는 가장 슬기로운 자들은 자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주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를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깨달았다.


(237)

로스토프는 이 모퉁이에 서서, 연회를 벌이는 사람들을 한참 동안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도저히 결말이 나지 않는 괴로운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음속에 무서운 의혹이 일었다. 얼굴이 완전히 달라지고 아집도 사라진 데니소프,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과 오물과 질병으로 가득한 병원의 광경이 떠올랐다. 그 병원에서 맡았던 시체 냄새가 아직도 너무 생생해서 대체 어디서 냄새가 나는지 사방을 두리번거렸을 정도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제 황제가 되어 알렌산드르 황제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손이 희고 자기만족에 빠진 보나파르트가 떠올랐다.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이나 전사자들은 대체 뭐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일까? 포상을 받은 라자레프와 처벌을 받고 사면되지 않은 데니소프도 떠올랐다. 그는 이렇게 이상한 상념에 잠긴 자신을 깨닫고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246)

, 사랑, 행복!’ 떡갈나무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너희는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부질없고 무의미한 기만에 싫증을 내지도 않는거냐. 언제나 똑같고, 언제나 기만할 뿐인데! 여기에는 봄도, 태양도, 행복도 없다. 봐라, 저기 짓눌려서 죽은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는 전나무들이 있을 뿐이고, 나고 꺾이고 상처 난 내 손가락들이 등에서건 옆구리에서건 제멋대로 뚫고 나가 돋는 동안 이렇게 서 있어야 할 뿐이다. 나는 너희의 희망과 기만을 믿지 않는다.’


(324)

그는 그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모습을 잠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인생 전체가 새롭게 보이는 것 같았다. ‘인생이, 기쁨으로 충만한 모든 인생이 내 앞에 펼쳐져 있는데, 나는 이 막히고 비좁은 틀 안에서 무엇을 두려워하고 조바심내고 있을까?’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그는 오랜만에 미래의 행복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는 적당한 양육자를 구해 아들의 교육을 일임하기로 결정했고, 사임하고 외국으로 나가 영국과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둘러보고 오기로 마음먹었다. ‘젊음과 체력이 이토록 넘치게 느껴질 때 나는 내 자유를 누려야 한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행복의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고 했던 피예르의 말은 진리이고, 나도 지금은 그것을 믿는다. 죽은 자를 묻는 일은 죽은 자에게 맡겨야 하며, 생명이 있는 한 살아서 행복해져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349)

예전 같으면 내가 이런 사랑에 빠질 거라고 누가 말했더라도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안드레이 공작이 말했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이야. 지금 내게는 온 세계가 둘로 나뉘어 있어. 하나는 그녀가 있는, 온갖 행복과 희망과 빛이 있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그녀가 없는, 우울과 어둠뿐인 곳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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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5)

모두가 자기 신념에 따라서만 전쟁을 하고자 한다면, 전쟁은 없어질 걸세.” 그는 말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죠.” 피예르는 말했다.

안드레이 공작은 피식 웃었다.

정말 좋겠지만, 그런 일은 결코 없거든……”

그럼, 당신은 뭐 때문에 전쟁에 나가시는 겁니까?” 피예르는 물었다.

뭐 때문이냐고? 나도 모르겠어. 그래야 하는 거니까. 또한 내가 전쟁에 나가는 것은……” 그는 말을 멈췄다가 이었다. “지금 여기서 보내고 있는 나의 삶이, 내 삶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야!”


(186)

그러나 이 기쁨은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빠는 모두가 이유도 목적도 모르는 채 말려들고 있는 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우리를 버리고 간다고 하니까요. 사건과 사교의 중심인 그곳뿐만 아니라 흔히 도시인들이 전원의 노동과 자연의 고요가 있는 곳이라고 상상하는 이곳에서도 전쟁의 반향이 울리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무거운 마음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행군이니 진격이니 하시면서 나로서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만 하고 계십니다. 그제는 평소처럼 마을의 거리를 거닐고 있었는데, 갑자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곳에서 소집되어 군대에 보내지는 신병들이었습니다…… 나는 출발하는 사람들의 어머니, 아내, 아이들이 비탄에 잠긴 모습을 보았고,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이 오열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인류는 우리에게 사랑과 모욕에 대한 용서를 가르쳐주신 구세주의 율법을 잊고 서로를 죽이는 기술 속에 자기들의 주요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80-281)

산 자와 죽은 자를 갈라놓은 것 같은 이 선을 한 발짝 넘어서면 미지와 고통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거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누가 있을까? 이 들과 나무와 태양에 빛나는 지붕 저쪽에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알고 싶다. 이 선을 넘는 두렵다. 그러나 넘어보고 싶다. 그리고 머지않아 이 선을 넘어 거기에, 이 선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죽음 저쪽에 무엇이 있는지 결국 알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힘이 넘치고 건강하고 쾌활하고 흥분해 있고, 나와 똑같이 건강하고 활기차고 흥분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적과 마주보고 있는 사람들은 똑같지는 않아도 다들 이렇게 느끼고 있었고, 이 느낌은 이 순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특별한 광채와 즐겁고 날카로운 인상을 주고 있었다.


(383-384)

이 사람들은 누구지? 무엇 때문에 왔지? 이 사람들한테 무엇이 필요한 걸까? 그리고 언제쯤 이런 것들이 모두 끝나는 걸까?’ 눈앞에서 변하고 있는 그림자들을 바라보면서 로스토프는 생각했다. 팔의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졸음이 엄습했고, 눈 속에서 빨간 동그라미들이 튀었고, 이 목소리들, 이 얼굴들이 주는 인상과 통증이 고독감과 하나로 녹아들었다. 이 사람들, 부상하거나 부상하지 않은 이 병사들이 그의 힘줄들을 으스러뜨리고, 짓누르고, 비틀고, 부러진 팔과 어깨의 살을 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457)

아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을 거쳐 요람에서 나와 어른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온 세계 공통의 오래된 모든 경험도 백작부인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성장의 각 시기에 있었던 아들의 변화는, 그것과 똑 같은 길을 밟고 성장한 무수히 많은 사람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 그녀에게는 언제나 신기한 것이었다. 스무 해 전 그녀의 심장 아래 어딘가에서 숨쉬던 조그마한 존재가 응애응애 울기도 하고 젖을 빨기도 하고 옹알거리기도 한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이 존재가, 편지로 미루어보건대 강건하고 용감한 사나이가 되어 세상의 아들들과 사람들의 귀감이 되었다는 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509)

안개가 자욱한 밤, 달빛이 안개 속으로 신비롭게 비치고 있었다. ‘그렇다, 내일이다, 내일!’ 그는 생각했다. ‘내일, 어쩌면 나의 모든 것이 끝날지도 모른다. 이런 추억도 모두 사라지고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아니 확실히 내일이다, 내 역량을 남김없이 발휘할 순간이 마침내 처음으로 찾아온 것이다.’


(510)

그러나 내가 이러한 것을 원하고, 명예를 원하고,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고, 남들에게 사랑받는 것을 원하는 것. 내가 오직 그것만을 원하고,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죄는 아니다. 그렇다. 그것만을 위해서인 것이다! 나는 절대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아아! 명예와 사람들의 사랑 외에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죽음도, 부상도, 가족을 잃는 것도 나는 전혀 두렵지 않다. 많은 사람-아버지, 누이, 아내는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다-이 아무리 소중하고 사랑스럽더라도 명예의 한순간을 위해, 사람들에게 승리를 자랑하는 한순간을 위해, 내가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알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나는 아버지와 누이와 아내를 지금 당장이라도 버릴 수 있다. 이런 생각이 아무리 무섭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라 해도 나는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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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11-27 15: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것 안 읽었는데... 어떤가요? 속도가 잘 나가나요?

bookholic 2021-11-27 20:33   좋아요 2 | URL
제가 고전을 읽기에 적합한 뇌를 탑재하지 않았지만,
이 책은 나름 잘 읽히고 있어요... 3권 마치고 4권 한 권 남았어요.
문학동네의 이 시리즈가 글씨도 좀 큼직하고,
번역도 괜찮게 되어있는 것도 한몫 한 것 같아요~~
즐거운 주말 되시고요~~^^

레삭매냐 2021-11-29 09:2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전 언제나 읽을 수 있을까요.

bookholic 2021-11-29 09:49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 님도 언젠가는 꼭 읽으실 겁니다~~^^
즐거운 한 주 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