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그런 거야, 친구. 둘 가운데 하나를 택할 수밖에 없는 거지. 현재의 사회구조가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애쓰든가, 나처럼 자신이 부당한 우위를 누리고 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기꺼이 누리든가 말이야.”

아니, 만일 그것이 정당하지 않다면, 자네는 그 혜택을 기꺼이 누릴 수 없을걸. 적어도 난 그렇게 못할 거야. 나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잘못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니까.”


(126-127)

도대체 그녀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걸까? 그녀는 살고 싶은 거야. 어쩌면 나도 그녀와 똑같이 행동했을지도 몰라. 그녀가 모스크바로 날 찾아온 그 끔찍한 시절에 내가 그녀의 말을 들은 것이 과연 잘한 것인지는, 지금까지도 잘 모르겠어. 난 그때 남편을 버리고 새롭게 인생을 시작했어야 했어. 어쩌면 난 정말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런데도 과연 지금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난 그를 존경하지 않아. 그가 필요할 뿐이야.’ 그녀는 남편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난 그를 견디고 있지. 과연 이것이 더 나은 걸까? 그때 난 아직 사랑을 받을 수 있었어. 내게도 아직은 아름다움이 남아 있었으니까.’ 다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계속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거울을 들어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의 손가방에는 작은 손거울이 있었고, 그녀는 그것을 꺼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마부와 덜컹덜컹 흔들리는 사무원의 등을 보면서, 그녀는 만약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부끄러울 것 같다고 느껴 거울을 꺼내지 않았다.


(328)

그는 그녀에게 전보다 더 싸늘했다. 마치 그녀에게 굴복한 것을 후회하기라도 하는 듯. 그래서 자기에게 승리를 안겨 준 그 말, 바로 내가 얼마나 절실하게 끔찍한 불행을 느끼는지, 내가 나 자신을 얼마나 무서워하는지라는 그 말을 떠올리며, 그것이 위험한 무기라는 것, 그리고 앞으로 두 번 다시 그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들 사이에 그들을 묶는 사랑과 더불어 모종의 투쟁을 일으키는 사악한 영이 자리 잡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가 그의 마음에서 몰아낼 수 없는,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서는 더더욱 몰아낼 수 없는 사악한 영이……


(329)

사람이 익숙해질 수 없는 환경은 없다. 특히 주위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갈아가는 것을 볼 때는 더욱 그렇다. 석 달 전만 해도 레빈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다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는 생활, 그것도 자신의 수입을 넘어선 생활을 하면서, 술에 취해(그로서는 클럽에서 있었던 일을 달리 표현할 말이 없었다.) 한때 아내가 사랑한 남자와 꼴사나운 우정을 나누고, 더욱더 꼴사납게도 타락한 여자라는 말 외에 달리 표현할 길 없는 여자의 집을 찾아가고, 그 여자에게 마음을 뺏겨 아내를 슬프게 한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고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친 데다 밤에 잠도 못 자고 술까지 마신 탓으로 깊고 편안하게 잤다.


(452)

그래, 난 몹시 불안해. 그리고 이성이 인간에게 부여된 것은 인간을 불안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야. 그러니 난 벗어나야 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저 모든 것을 보는 게 끔찍하기만 한데, 촛불을 꺼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어떻게 끄는 거지? 저 차장은 왜 승강용 발판을 뛰어다니는 걸까? 저 객실에 있는 젊은 사람들은 왜 소리를 지르지? 저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말하고 무엇 때문에 웃는 걸까? 모든 게 진실이 아냐. 모든 게 거짓이고, 모든 게 기만이고, 모든 게 악이야!’


(455-456)

그녀는 성호를 그었다. 십자가를 긋는 친숙한 동작이 그녀의 마음속에 처녀 시절과 어린 시절의 모든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갑자기 눈앞의 모든 것을 뒤덮고 있던 암흑이 찍어지고, 일순간 과거의 모든 눈부신 기쁨과 함께 삶이 그녀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그녀는 다가오는 두 번째 객차의 바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바퀴와 바퀴 사이의 중간 지점이 그녀와 나란히 온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빨간 손가방을 내던지고는 어깨 사이에 머리를 푹 숙인 채 객차 밑으로 몸을 던져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러고는 마치 곧 일어날 자세를 취하려는 듯 경쾌한 동작으로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았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시가 한 짓에 몸서리를 쳤다.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무엇 때문에?’ 그녀는 몸을 일으켜 고개를 뒤로 젖히려 했다. 하지만 거대하고 가차 없는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떠밀고 그녀를 질질 잡아끌고 갔다.’ 하느님, 나의 모든 것을 용서하소서!’ 그녀는 어떤 저항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왜소한 농부가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철로 위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불안과 허위와 슬픔과 악으로 가득 찬 책을 읽을 때 그 옆에서 빛을 비추던 촛불 하나가 어느 때보다 밝은 빛으로 확 타오르더니, 이전에 암흑 속에 잠겨 있던 모든 것을 그녀 앞에 비춰 보이고는 탁탁 소리를 내며 점점 흐릿해지다가 영원히 꺼지고 말았다.


(500)

그때는 진리를 알았는데 지금은 잘못 알고 있다니, 그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가 그 문제를 차분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자마자 모든 것이 산산조각으로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때 착각을 한 것이라고 인정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의 정신 상태를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데다, 그것을 약점 탓이라고 인정해 버리면 그 순간을 더럽히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과 고통스러운 갈등을 겪으며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정신을 팽팽히 긴장시켰다.


(509)

추론은 그를 의심으로 이끌었고 그로 하여금 무엇을 해야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깨닫지 못하게 방해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때, 그는 자신의 정신 속에서 두 가지 가능한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좋은지 어느 것이 나쁜지 판단하는 완전무결한 재판관의 존재를 계속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하지 않으면 그 즉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무엇인지, 자기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위해 사는지 인식할 가능성을 전혀 깨닫지도 보지도 못하면서, 그러한 무지 때문에 자살을 두려워할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그와 동시에 인생에서 자신만의 고유하고 일정한 길을 굳건하게 개척해 가면서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540)

민중이란 말이 너무 애매해서 말이야.” 레빈이 말했다.

읍 서기들, 교사들, 어쩌면 1000명의 농민 가운데 한 명은 그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지도 몰라. 하지만 미하일리치 같은 나머지 8000만 명은 자신의 의지를 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엇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표명해야 않을 뿐 아니라 무엇에 대해 자신의 의지를 표명해야 하는지 최소한의 개념도 갖고 있지 않아. 그렇다면 우리가 무슨 권리로 그것을 민중의 의지라고 말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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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그 자신이 민중과 함께 살고 있고 그의 모든 이해관계가 민중과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스스로를 민중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자신과 민중 안에서 어떤 특별한 성질이나 단점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자신을 민중과 대립된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오랫동안 주인으로, 중재자로, 특히 조언자로(농부들은 그를 신뢰하여 40베르스타 떨어진 곳에서도 그에게 조언을 구하러 왔다.) 살아왔으면서도 민중에 대해 어떠한 민중을 사랑하느냐는 질문만큼이나 그를 난처하게 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민중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 인간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그는 모든 종류의 인간을 끊임없이 관찰하며 그들을 이해하려 했다. 그 가운데에는 그가 훌륭하고 흥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농부들도 있었다. 그는 인간들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특징을 찾아 그들에 대한 이전의 견해를 바꾸고 새로운 견해를 확립하였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는 그 반대였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생활과 대조하여 시골을 사랑하고 찬미한 것과 똑같이, 민중에 대해서도 그가 좋아하지 않는 계급의 사람들과 대조하여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사람 일반과 대조되는 무엇으로 파악했다. 그의 체계적인 이성 안에서는 민중의 생활에 대한 일정한 형식이 뚜렷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형식은 민중의 생활 자체에서 어느 정도 끌어낸 것이기도 하지만 주로 대조를 통해 얻은 것이었다. 그는 민중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그들에게 공감하는 태도를 결코 바꾸려 하지 않았다.


(30)

, 철학에 관한 이야기는 그쯤 해.” 그가 말했다. “모든 시대를 통틀어 철학의 주요 과제는 바로 개인의 이해와 공공의 이해 사이에 놓인 필연적인 연관을 찾아내는 것이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내가 너의 비교를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다는 거야. 자작나무 가지는 누가 꽂아 둔 게 아니라 심거나 씨를 뿌려서 얻은 거야. 그러니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해. 자신의 제도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인지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고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민족, 그런 민족만이 미래를 가질 수 있고, 그런 민족만이 역사적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


(77)

상관없어요. 어쨌든 당신네들은 자신의 사랑이 무르익거나 선택을 기다리는 두 여자 사이에서 저울질을 끝내면 청혼을 하잖아요. 하지만 여자에게는 누구를 선택할지 묻지 않아요. 물론 다들 여자가 스스로 선택하기를 바라죠. 하지만 여자에게는 선택권이 없어요. 그저 .’, ‘아니오.’라는 대답만 할 수 있죠.”


(122)

그들은 그가 지난 8년 동안 내 삶을 얼마나 숨 막히게 했는지, 내 안에 살아 있던 모든 것을 얼마나 억압했는지 몰라. 그들은 몰라. 그가 단 한 번도 나를 사랑이 필요한 살아 있는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걸. 그들은 그가 항상 날 모욕하고 스스로에게 만족했다는 것을 모르지. 내가 노력하지 않았나? 온 힘을 다해 내 삶의 정당성을 찾으려 애쓰지 않았던가? 내가 그를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나? 더 이상 남편을 사랑할 수 없을 때, 그때는 아들을 사랑하려고 애쓰지 않았던가? 하지만 때가 온 거야. 난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난 살아 있는 여자야. 내게는 죄가 없어. 하느님은 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그런 여자로 만드셨어. 이제야 그걸 알겠어. 그런데 지금 도대체 이게 뭐야? 남편이 날 죽이거나 그를 죽이기라도 한다면, 난 그 모든 것을 견디고 그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아냐, 그는……


(217)

하지만 난 당신이 무엇에 놀라는지 잘 모르겠군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너무나 뒤떨어진 민중이 자기들에게 낯선 모든 것에 저항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유럽에서 합리적인 농업이 가능한 것은 민중들이 교육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도 민중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그게 전부예요.”


(218)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학교가 민중에게 자신들의 물질적 상태를 개선하도록 돕는다는 겁니까? 당신은 학교와 교육이 민중에게 또 다른 필요를 느끼게 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상황만 더욱 나빠질 뿐입니다. 왜냐하면 민중은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할 테니까요. 덧셈, 뺄셈, 교리문답 같은 지식이 무슨 수로 민중들의 물질적 상태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준다는 건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248)

레빈은 자신이 최근에 진심으로 생각하던 바를 말했다. 그는 모든 것에서 죽음이나 죽음으로의 접근만을 보았다. 하지만 그가 계획한 일이 그의 마음을 더욱 사로잡았다.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야 했다. 그에게는 어둠이 모든 것을 뒤덮은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이러한 어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일이 이 어둠 속에서 그를 이끌어 줄 유일한 끈이라고 느끼며 온 힘을 다해 그것을 붙잡고 그 뒤를 따라가고 있다.


(297)

그게 어때서? 난 지금도 계속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어. 죽을 때가 되었다는 건 사실이야. 이 모든 게 다 무의미하다는 것도. 자네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난 나의 사상과 일을 너무나 소중히 여기고 있어. 하지만 자네도 한번 생각해 봐.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전체는 아주 작은 혹성에 핀 작은 곰팡이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세상에 무언가 위대한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사상이나 일 같은 것 말이지! 이 모든 건 모래알에 불과해.” 레빈이 말했다.


(512)

레빈이 결혼한 지도 석 달이 지났다. 그는 행복했지만, 그 행복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그는 걸음걸음마다 예전의 공상에 대한 환멸과 예기치 못한 새로운 매력을 발견했다. 레빈은 행복했다. 그러나 일단 가정생활에 발을 들여놓자, 그는 걸음걸음마다 그 행복이 그가 상상하던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걸음걸음마다 그는 호수 위를 행복하게 떠다니는 보트를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그 보트에 몸소 앉았을 때 느꼈음 직한 것을 경험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앉아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한시도 잊지 말고, 발아래에 물이 있다는 점, 노를 저어야 한다는 점, 익숙하지 않은 손으로 하면 아프다는 점, 보고만 있을 때는 쉬울 것 같지만 그것을 직접 해 보면 무척 즐겁기는 해도 굉장히 힘들다는 점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던 것이다.


(520-521)

그는 러시아에서 빈곤이 발생한 것이 토지 소유의 불평등한 분배와 그릇된 경향 때문만이 아니라, 최근 러시아에 변칙적으로 보급된 외국 문명, 특히 도시로의 집중을 초래한 교통망과 철도, 사치풍조의 심화, 그로 인해 농업이 쇠퇴할 정도로 발전한 공업 및 신용 대출과 그 동반자인 주식 거래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한 국가에서 부()가 정상적으로 발전할 경우, 이 현상들은 농업에 상당한 노동이 투입된 이후에야, 농업이 올바른, 적어도 일정한 조건에 이른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될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국가의 부는 균등하게, 특히 부의 다른 싹들이 농업을 앞지르지 않는 한에서 성정해야 할 것 같았다. 또한 교통망도 농업의 일정한 상태에 따라 그에 상응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러시아의 그릇된 토지 이용을 고려할 때 경제적 필요고 아닌 정치적 필요에 따라 생긴 철도는 아직 시기상조일 뿐 아니라 그것에서 기대되는 농업의 조성을 가져오는 대신 농업을 앞지르고 공업과 신용 대출의 발전을 초래함으로써 농업을 저지할 것 같았다. 그래서 동물의 한 기관의 편향적이고 지나치게 빠른 발달이 전체적인 발달을 저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부의 전반적인 발전에 있어서 신용 대출, 교통망, 공업 활동의 강화유럽에서는 시기적절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이겠지만 농업의 정비라는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를 제쳐 둔 채 그저 러시아에 해악만 끼칠 것 같았다.


(524)

하지만 불만에 찬 사람이 자신의 불만에 대해 다른 누군가를, 특히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을 탓하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다. 레빈의 머리에도 어렴풋하게나마 그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그 무엇도 그녀의 탓일 수는 없다.) 그녀가 받은 너무나 피상적이고 경박한(‘그 멍청한 차르스키, 그녀가 그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나도 알아.’) 교육 탓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래, 집에 대한 관심(그녀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을 제외하면, 자신의 몸치장을 제외외하면, broderie anglaise를 제외하면, 그녀에게는 진지한 관심이 전혀 없어. 나의 일에 대해서도, 농사에 대해서도, 농부들에 대해서도, 그녀가 상당한 재능을 보인 음악에 대해서도, 독서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이 없단 말이야.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완전히 만족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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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구멍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44
켄 폴릿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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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예전에 지인의 소개로 재미있게 읽은 <대지의 기둥>이라는 책이 있단다. 그 소설의 지은이가 켄 폴릿이라는 사람인데, <대지의 기둥>을 읽고 나서 그 사람의 다른 작품도 한번 읽어봐야지, 마음을 먹었는데 이제서야 한번 읽어보는구나. 세월이 빠른 것인지, 거참… <대지의 기둥>을 읽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5년이 되었다니믿기지가 않는구나.

켄 폴릿이라는 사람은 스릴러와 역사소설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는구나.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 책이 바로 아빠가 이번에 읽은 <바늘구멍>이라는 책이란다. 무려 40년도 더 된 책이라고 하더구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한번 찾아보니 그 영화도 거의 40년이 다 되었더구나. 세월은 많이 흘렀지만, 소설의 재미는 그대로 담겨져 있더구나. 이 소설의 배경은 1944년 즈음이야. 세계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었던 시절, 스파이들에 관한 소설이란다. 스파이를 다룬 소설이다 보니 스파이 소설 전문가 존 르카레도 생각이 났는데, 존 르카레의 소설들보다는 좀 더 가볍다고 해야 할까, 읽기 편하다고 해야 할까, 어느 쪽을 손을 들어주기 어려운 각자의 장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1.

소설의 제목이 왜 바늘구멍일까. 바늘구멍이 영어로 뭘까? 원제를 봤더니 “Eye of the Needle”이더구나. 왜 소설 제목을 바늘구멍이라고 했는지는 소설을 이야기하다 보면 나온단다. 이 소설은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는구나. 2차 세계 대전 막판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 연합국은 독일에 혼란을 주기 위해 가짜로 공군기지를 만들어 시선을 돌리는 작전을 폈고 그 작전이 성공하여 노르망디 상륙 작전도 성공했다고 하는구나. 그 속임수 작전을 포티튜드 작전이라고 하는데 그 사건에 지은이의 상상력이 가미된 소설이 바로 이 소설이란다.

먼저 중요 등장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해 줄게. 페이버라는 사람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독일 스파이란다. 형용사를 하나 사용하면 잔인한독일 스파이란다. 이름 페이버도 가명이야. 정체가 조금만 드러날 것 같으면 가차 없이 죽였어. 그를 유혹하던 젊은 과부였던 하숙집 여주인도 죽인 후, 흔적을 지우고 사라져 버렸어.

영국 군사 정보부 MI5라는 곳이 있었는데, MI5는 앤드루 대령이 이끌었고, 퍼시벌 고들리먼이라는 교수도 MI5에 합류하게 되었단다. 퍼시벌은 프레더릭 블로그스라는 파트너와 함께 일했단다. 프레더릭은 아내 크리스틴을 독일군의 폭격으로 잃고 혼자가 되었단다. 그들은 영국에서 활동하는 바늘이라는 별명을 가진 독일 스파이를 쫓고 있었어. 별명이 왜 바늘이냐면 바늘처럼 뾰족한 스틸레토로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란다. 스틸레토?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어서 검색을 해보았단다. 그랬더니….. 아주 뾰족한 하이힐만 잔뜩 검색이 되고, 그 사이에 아주 뾰족한 칼이 보이더구나. , 저렇게 바늘처럼 뾰족하게 생긴 칼이 스틸레토구나. 그 독일 스파이가 누구냐면 바로 앞서 이야기했던 페이버란다.

데이비드와 루시라는 신혼 부부가 있었단다. 데이비드는 예비 파일럿으로 곧 전투기를 탈 예정이었어. 그런데 신혼 여행 중에 교통사고로 그만 불구의 몸이 되어 휠체어 신세가 되었단다. 루시는 크게 다치지 않았어. 데이비드의 상심이 커서 그들은 속세를 떠나 폭풍의 섬이라고 부르는 외진 섬에서 지냈어. 그 섬에는 그들 부부 이외에 섬을 관리하는 어르신 한 분, 톰이 멀리 떨어져 지냈단다.

루시는 결혼 당시 임신을 했었고, 결혼해서 얼마 후 아이를 낳았단다. 섬에 이제 한 명이 더 늘었구나. 아이의 이름은 조. 데이비드를 위해서 외진 섬에 왔지만 데이비드의 상실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어. 늘 신경이 예민하고 화도 자주 내어 정상적인 생활이 쉽지 않았어. 어린 아들을 돌보고 그런 남편을 보살펴야 하는 루시였지만, 언젠가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어.


2.

페이버가 잔인하다고 했는데 또 하나 일화를 이야기해줄게. 그에게 정보를 전달해 주려고 한 자기편 요원도 정보를 얻고 죽여버리는 사람이었어. 무자비한 사람. 그의 임무는 연합군이 어디를 공격하려고 준비하는 정보를 캐는 일이었어. 그 정보를 알게 되면 유보트를 타고 귀환하는 것이었지. 그는 영국의 한 기지를 염탐했어. 누가 봐도 대규모 공군 기지였어.. 대충 보거나 하늘에서 보면 말이지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 기지는 모두 가짜였던 거야. 그 공군기지를 진짜였다면 연합군의 타겟은 아마 칼레라는 지역이 될 거야. 그런데 이것이 가짜라는 것은 연합군의 타겟은 노르망디라는 것이지. 독일은 연합군의 타겟이 칼레인지, 노르망디인지 몰랐거든. 이 중대한 소식을 빨리 본국에 타진해야 하는 페이버는 유보트를 타기로 한 접선지 스코틀랜드 바다로 가야 했어. 그런데 그가 본 공군 기지에서 얼마 가지 못해 영국군 다섯 명과 마주치게 되었지. 그에게 다섯 명은 아무것도 아니었지. 삽시간에 그 다섯 명을 모두 처치했어. 예상치 못한 일로 그의 행적이 들통날 수 있었지. 그는 빨리 그곳을 떠났어. 영국군도 다섯 명이 죽은 것을 알고 자신의 위장 작전이 드러났다는 것을 깨닫고 바늘을 추적하는데 혼신을 기울였단다. 기차를 타고 이동 중에 페이버는 자신을 알아보는 검표원도 죽이고 달리는 기차를 탈출했지.

….

영국 정보부 소속인 퍼시벌과 프레더릭도 바늘을 추적하면서 성과를 보였어. 그의 단서를 확보하고 젊은 시절 사진까지 확보했어. 그리고 그를 쫓는데 안타깝게도 한발씩 늦었단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연합국의 가장 중대한 정보이자, 전쟁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중대한 정보이기 때문에 영국을 빠져나가기 전에 붙잡아야 하는데 말이야..


3.

페이버는 유보트와 접선하기로 한 날 이변이 생겼어. 폭풍우가 몰아친 거야. 페이버는 배를 훔쳐 바다로 나갔지만, 폭풍우로 인해 접선에 실패하고 배는 난파되어 간신히 몸만 추스르고 어떤 외딴 섬에 올라갔단다. 그 섬에 유일하게 빛이 나오고 있는 집이 있어서 그곳까지 간신히 갔다가 노크를 하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어.

그 집은 바로 데이비드와 루시의 집이었지. 루시는 페이버가 누군지도 모르고 보살펴 주었단다. 이 폭풍우에 찾아온 사람이라니루시는 페이버를 간호해 주다가 그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겨났어. 데이비드가 다친 이후로는 사랑도 한 번 하지 않았기 때문에 루시는 사랑에 굶주리고 있었을지도 몰라. 데이비드가 톰과 양치기 일을 한다고 집을 비웠을 때 루시와 페이버는 사랑을 나누게 된단다. 루시는 위험한 행복을 느꼈어.. 아주 오랜만에 찾아온 사랑이랄까. 하지만 페이버가 누구인지 안다면….

….

페이버는 데이비드와 톰의 양치기 일을 도와주러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데이비드는 페이버의 정체를 알아 챘어. 차 안에서 데이비드와 페이버의 결투가 벌어졌고, 데이비드가 죽고 말았단다. 페이버는 데이비드와 자동차를 벼랑에 떨어뜨려버렸단다. 페이버는 루시에게 와서 모른 척 하고 데이비드는 톰의 집에서 자고 온다고 이야기했어. 그리고 그 다음날 페이버는 톰의 집에 가서 톰마저 죽였단다. 이제 섬에는 페이버, 루시, 어린 조이렇게 세 명이었어. 페이버가 톰을 죽이고 있는 사이, 벼랑 밑에 자동차와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 루시.. 그곳에 가서 그 사람이 데이비드인 것을 확인하고, 페이버가 데이비드를 죽였다고 생각했어. 벌벌 떨면서 톰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지만, 이미 톰도 죽어 있었지

….

섬에서 다급한 일이 벌어지고 있을 때 퍼시벌과 프레더릭도 페이버가 폭풍의 섬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어. 그들도 폭풍의 섬으로 향했단다. 소설의 끝은 어떻게 될까. 결국 바늘 페이버는 그 섬을 살아서 빠져 나오지 못했단다. 그래서 그가 가지고 있던 일급 정보는 독일까지 못했고, 독일은 그 가짜 공군 기지가 진짜라고 생각하고 칼레를 완벽 대비하고 노르망디는 수비를 소홀히 했단다. 그 결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

이렇게 소설이 끝났단다. 당시 독일이 그 공군기지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노르망디에 온 전력을 집중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도 전쟁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이 났겠지? 미국이 핵폭탄을 독일에도 떨어뜨렸을까? 우연과 우연이 쌓여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다시는 이런 잔인한 역사가 만들어지지 않기를그리고 세계를 우울의 역사로 만든 코로나19의 역사도 싫구나.


PS:

책의 첫 문장 : 사십오 년 만에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책의 끝 문장 : 데이비드가 할아버지의 무릎에서 뛰어내리며 찻잔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마법의 주문이 풀릴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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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셔의 손 - 2017년 제2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김백상 지음 / 허블 / 2018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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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좋아하는 미술가 중에 에셔라는 사람이 있단다. 그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매우 독창적이면 창의적이라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야. 그의 대표작 중에 <그리는 손>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판화로 알고 있는데 정교한 손을 판화로 그리는 것만으로 놀라운데, 손이 그림 밖으로 나와 있는 듯한 착시효과와 서로 다른 손을 그리는 끝이 없는 돌고 도는 독창적인 그림이었어.


우연히 인터넷 서점 서핑을 하다가, 에셔의 <그리는 손>을 떠오르게 하는 책 제목을 하나 봤단다. <에서의 손>. 무슨 책인가 궁금해서 책 소개를 봤더니 미술 관련 책이 아니라, SF 소설이라고 하더구나. 그리고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을 받은 책이라고 하는구나. 전에 한국과학문학상 단편 수상집을 읽었는데, 장편 부분도 있었나 보구나. 아빠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SF 소설 장르에 흥미를 가지고 있어서 이 책도 관심이 갔단다. 거기에 제목에 에셔가 들어가 있잖아. 그래서 이 책을 읽었지. 지은이는 김백상이라는 분으로 처음 알게 된 사람이야 경영학도였는데, 나중에 글이 쓰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하더구나. 자신의 천성을 못 버리는 것 같구나.

1.

엄지척을 들 만큼 재미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나름 지은이의 과학적 상상력이 돋보인 것 같구나. 가까운 미래, 전뇌 이식은 일상이 되었단다. 전뇌는 전자두뇌의 줄임말 같은데, 뇌에 넣어서 우리 뇌를 보좌하는 역할을 한단다. 전뇌를 이식하면 멀티태스킹이 가능하고, 원래 뇌 안의 생각들을 데이터로 바꿀 수도 있고, 물론 저장과 무선 통신도 가능했단다. 보통 사람들은 여섯 살이 되면 전뇌 이식을 하곤 했어.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전뇌를 이식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 전뇌를 이식했다가 몸에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전뇌부적응자가 있고, 아예 시도조차 할 수 있는 전뇌불능자들도 있었어. 이들은 소위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었단다. 하지만 예술가들이나 운동 선수들도 전뇌를 하지 않았어. 그들은 순수한 인간으로 특출한 능력들을 보여야 인정을 받았거든전뇌를 이식하면 운동 선수의 자격도 될 수 없었지.

2.

주인공 진은 코스모스라고 하는 하는 포탈 사이트의 서버를 관리하고 있었는데, 그 코스모스가 폭탄 테러를 당하고 난 다음 그 일을 그만두고 케이스를 스스로 발굴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어. 여기서 이야기하는 케이스란, 어떤 적당한 사람을 선정해서 그에게 접근한 후 그를 설득해서 그의 기억, 정확히 이야기하면 전뇌에 저장된 기억 지워주는 일을 했어. 그가 케이스를 선정할 때는 불우한 삶을 겪거나 괴로운 기억을 지우고 싶은 사람들이었어. 컴퓨터 포맷에 윈도우 초기화와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어. 언어 능력 등은 다 유지하고 자신의 경험만 지워주니까 말이야. 그 대신 그렇게 지운 이의 기억은 진이 다 볼 수 있었고, 진은 자신만이 알고 있는 은밀한 곳에 그 기억들을 저장해 두었어. 당사자들은 기억을 지우고 나면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일을 해왔는지 전혀 모르고 다시 새로운 살을 살게 된단다.

그의 열한 번째 케이스 수연. 수연은 전뇌불능자 부모를 두었고 수연의 부모님은 사고로 죽고 말았어. 어렸을 때부터 혼자였던 수연은 격투기에 재능을 보여 격투기를 하게 되었고, 11연승을 달리고 있던 어떤 챔피언을 꺾고 새로운 챔피언에 올랐어. 하지만 그 승리를 한 다음날 아침 앞에 보이지 않게 되었어. 병원에 갔더니 눈에 피가 고여 있다고 했고, 결국 실명을 하게 되어 인공 눈인 의안을 넣기로 했단다. 전뇌와 마찬가지로 의안을 착용하면 더 이상 격투기 선수 자격이 될 수 없어서 격투를 그만 두었단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전뇌 이식도 함께 하기로 했어. 그런데 전뇌를 넣은 다음부터 몸에 부작용이 생겼어. 몸 동작도 이상하고, 말도 더듬고, 입 다무는 것도 제어가 잘 안되어 침도 질질 흘렸지. 인정하기 싫었지만 전뇌부적응자가 된 거야. 수연은 우연히 어떤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직업은 포주)를 손 봐준다는 것이 목을 비틀어 죽게 하는 사고가 일어났어. 그런데 그 사고를 통해 수연이 얻은 감정은 희열. 죽음을 통해 희열을 찾는 수연은 이후 못된 짓들을 하는 남자들을 몰래 죽였어. 그로 인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지. 네 번째 살인을 했을 때 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십대 소녀 마리. 마리는 그런 수연에게 살갑게 굴었고 그들은 이후 친한 사이가 되었단다.

그런데 그 마리는 앞서 이야기했던 포탈 사이트 코스모스 서버의 폭탄 테러에 테러범으로 참여한 이들 중에 한 명이 된단다. 테러가 끝이 나고 대부분 범인들은 무죄를 주장하였는데 마리는 그 테러 사건에서 죽은 유일한 희생자가 된단다.

...

3.

강현우라는 사람이 있어. 그의 직업은 서처. 뒤처리를 해주고 사람도 찾아주는 뭐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지. 경찰을 도와주다가 007가방을 하나 줍게 되는데 그 안에 징그럽게도 사람의 뇌가 있었어. 그 뇌는 살아 있었고, 전뇌도 있어서 그 뇌의 케이블을 연결하자, 어떤 병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어. 며칠 뒤 그 전뇌는 의체를 가진 멀쩡한 사람으로 나타났단다. 그의 이름은 샘. 직업은 천재 해커.

강현우에게 의뢰가 하나 들어왔어. 전뇌 회사 사장이 한 의뢰인데, 최근 전뇌가 지워지는 사건이 일어난다고일명 백지증후군전뇌 자체 문제가 아닌 것이 서울에서만 발생한다고 했어. 그러니까 누군가 전뇌의 데이터를 지우고 있다는 것이지.. 누군지 알겠지? 아빠가 맨 처음 소개했던 진. 그는 가장 최근에 백지증후군에 걸린 수연을 조사해 보았지만 전혀 단서를 찾지 못했어. 현우가 구해준 해커 샘이 아주 작은 스파이 곤충을 이용하여 해킹을 해서 수연의 기억을 지운 남자의 정체를 밝혀낸단다. 코스모스 문지기였던 사람이야.

….

또 다른 등장인물 정미연. 유능한 전뇌 연구자. 시험관 인공 아기로 정마리를 낳고, 마리가 갓난아기일 때 전뇌를 이식했어. 여섯 살 이전에 전뇌를 이식시키는 것을 불법인데 미연은 전뇌를 이용하여 마리를 엄청난 능력치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지. 미연은 늘 연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마리의 육아는 인공로봇 보모에게 맡겼어. 하지만 미연의 이런 육아의 결과는 열네 살 마리가 테러에 참여하여 죽고 만 것이었어. 미연은 이 일로 망연자실하게 된단다. 죽은 마리를 만나러 갔다가 수연을 만나게 된단다.

섭리. 그는 일곱 사도 사건의 배후란다. 일곱 사도 사건은 포탈 사이트 코스모스의 서버 폭탄 테러로도 부른단다. 그는 불특정 사람들의 전뇌를 조정하여 포탈 사이트 코스모스의 서버에 폭탄을 설치하게 했단다. 그래서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테러에 참여한 이들이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 모두 무죄를 주장하게 된 것이란다. 단 사람 마리만 빼고.. 마리는 그 테러 사건으로 죽었잖아. 그 사건이 있고 얼마 뒤 그를 찾아온 여자가 한 명 있었어. 수연. 수연을 섭리를 죽이고, 그 시신을 미연에게 보냈단다. 마리에 대한 복수라면서

이후 아빠가 이야기해 준 등장인물들이 얽히고 설켜서 이야기가 진행된단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처럼 전뇌가 진짜 있다면 어떨까? 아빠의 기억과 추억을 잘 보관해주는 장점도 있겠지만, 내가 기계인지 사람인지 정체성에 혼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아빠는 선택하지 않을 것 같구나.

3.

이렇듯 이 소설을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나오는데, 그들이 그 이전에 나온 인물들과 서로 얽혀 있단다. 마치 에셔의 <그리는 손>처럼 말이야. 그리고 아빠가 제대로 읽은 것이라면 시간적인 순서가 헛갈리게 된단다.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시간순서가 맞지 않았어. 아빠는 처음에는 그 뒤엉킨 시간 때문에 아빠가 책을 잘못 읽었나 싶었는데, 그 또한 지은이의 의도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에셔의 <그리는 손>도 보면 앞으로 그려질 손이 이미 과거의 손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있는 그림이잖아. 그것처럼 이 소설도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시간을 왜곡시켜 이야기를 해간 것은 아닌가 싶었단다.

….

전에 읽은 <한국과학문학상 단편 수상집>보다 나은 것 같았단다. 물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빠가 SF 소설을 지은이의 의도대로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그래도 지은이 김백상님의 다음 작품을 기대해볼 만했단다.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 밤새 비가 내렸다.

책의 끝 문장 : 수면을 박차 오르는 새들의 힘찬 날갯짓을 그리는 진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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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0-11-27 0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 봄 ‘에셔의 방‘ 전시회를 다녀왔어요~~
이 작품들이 판화인가 싶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입체적이더라구요^^
그래도 그때는 그나마 마스크를 쓰고도 좀 다녔는데 코로나가 여지껏 기승을 부릴지는 몰랐어요^^
‘에셔의 손‘ 이라는 소설이 있네요~~
기회되면 읽어보고 싶어요^^

bookholic 2020-11-28 02:12   좋아요 1 | URL
네, 코로나가 이렇게 오래 갈 줄이야...
코로나 때문에 한동안 못 만난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려고 했는데,
코로나가 더 심해져서 또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이번 주말도 집콕독서 해야할 것 같아요..
즐거운 주말 되십시오~~^^
 

















(5)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

 - 로마서 12:19


(13)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99)

이것 봐.” 스테판 아르카지치가 말했다. “자네는 매우 순순한 사람이야. 그건 자네의 미덕이자 결점이기도 하지. 자네는 순수한 성격이라 인생 전체가 순수한 현상으로 이루어지길 바라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자네는 공무(公務) 활동을 경멸해. 자네는 행위와 목적이 언제나 일치하기를 바라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또 자네는 한 인간의 활동이 언제나 목적을 갖기를, 사랑과 가정생활이 언제나 일치하기를 바라지. 하지만 그런 일은 불가능해. 인생의 변화, 인생의 매력, 인생의 아름다움, 그 모든 것은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기 마련이야.”


(115)

세상에는 모든 행운을 두루 갖춘 경쟁자를 만났을 때 그 즉시 상대방의 장점을 모두 외면하고 단점만을 보려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그 행복한 경쟁자에게서 무엇보다 그에게 승리를 안겨 준 장점들을 발견하려 하고 가슴이 저리도록 아픈데도 그에게서 좋은 점만을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레빈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228)

그만! 그만하세요!” 그녀는 이렇게 소리치며, 그가 탐욕스럽게 쳐다보는 자신의 얼굴에 엄한 표정을 지으려고 헛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차가운 기둥을 잡고 승강구에 올라 재빨리 객차의 연결 통로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이 작은 통로에 멈춰 선 채 방금 전 있었던 일을 곰곰이 머릿속에 떠올렸다. 비록 자신의 말도, 그의 말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 짧은 순간의 대화로 그들이 무섭도록 가까워졌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녀는 이러한 사실레 놀라면서도 행복을 느꼈다.


(305)

당신은 정말로 모르십니까? 내게는 당신의 삶의 전부라는 걸. 난 평온이란 걸 모릅니다. 그래서 당신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나의 모든 것, 사랑……, 그렇습니다. 난 당신과 나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내게는 당신과 내가 하나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에게든 당신에게든 평온 따위 있을 것 같지 않군요. 내 눈에는 절망과 불행, 아니면 행복, 그것도 커다란 행복의 가능성만 보일 뿐입니다. 그것이 과연 불가능한 일일까요?” 그는 입술만 움직여 이렇게 덧붙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찾기 위해 이성의 힘을 총동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랑 가득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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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1-24 13: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1,2,3 권을 최근 지인에게 선물했어요. ㅋ

bookholic 2020-11-24 23:38   좋아요 1 | URL
워낙 유명한 작품이지만, 두께와 고전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멀리 했었던 책입니다.
그런데 읽어 보니 흡입력이 대단한 책이더군요.. 왜 고전이 되었는지 알겠네요...
진작 읽어 볼 것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도 읽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