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4)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 여러분들이 새로운 친구를 사귀었다고 어른들에게 말하면, 어른들은 도무지 가장 중요한 것은 물어보지 않는다. <그 애의 목소리는 어떠니? 그 애는 무슨 놀이를 좋아하니? 그 애도 나비를 채집하니?> 절대로 이렇게 묻는 법이 없다. <그 앤 나이가 몇이지? 형제들은 몇이나 되고? 몸무게는 얼마지? 그 애 아버지는 얼마나 버니?> 항상 이렇게 묻는다. 이렇게 묻고 나서야 어른들은 그 친구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여러분들이 <나는 아주 아름다운 장밋빛 벽돌집을 보았는데요, 창문에 제라늄이 있고, 지붕 위에 비둘기가 있고……> 이런 식으로 어른들에게 말한다면, 어른들에겐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1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비로소 그들은 소리친다. <정말 예쁜 집이겠구나.>


(44)

그때 난 아무것도 알지 못한 거야!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그 꽃을 판단했어야 했는데. 그 꽃은 나를 향기롭게 해주고 내 마음을 밝게 해주었어. 거기서 도망쳐 나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 어설픈 거짓말 뒤에 따뜻한 마음이 숨어 있는 걸 눈치챘어야 했는데. 꽃들은 정말 모순덩어리야! 하지만 난 꽃을 사랑하기엔 너무 어렸어.”


(53)

바로 그렇다. 누구에게나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요구해야 하느니라.” 왕은 계속했다. “권위는 무엇보다도 이성에 근거를 두는 법이니라. 네가 만일 네 백성들에게 바다에 빠져 죽으라고 명령을 한다면 그들은 혁명을 일으키리라. 짐이 복종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은 짐의 명령이 지당하기 때문이니라.”


(76)

할아버지 생각엔 제가 어딜 찾아갔으면 좋겠어요?” 그는 물었다.

지구가 괜찮아.” 지리학자가 대답했다. “그 별은 평판이 좋아……”

그래서 어린 왕자는 자기 꽃을 생각하며 길을 떠났다.


(92-93)

나는 친구들을 찾고 있어. <길들인다>는 게 무슨 뜻이야?”

그건 모두를 너무나 잊고 있는 것이지.” 여우가 말했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관계를 맺는다고?”

물론이지.” 여우가 말했다. “너는 아직 내게 세상에 흔한 여러 아이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나는 네가 필요 없어. 너도 역시 내가 필요 없지. 나도 세상에 흔한 여러 여우들과 전혀 다를 게 없는 한 여우에 지나지 않는 거야. 그러나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리는 서로 필요하게 되지.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야. 나는 너한테 이 세상의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고……”


(94-95)

자기가 길들인 것밖에 알수 없는 거야.” 여우가 말했다. “사람들은 이제 어느 것도 알 시간이 없어. 그들은 미리 만들어진 것을 모두 상점에서 사지. 그러나 친구를 파는 상인은 없어. 그래서 사람들은 친구가 없지. 네가 친구를 갖고 싶다면, 나를 길들여 줘!”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린 왕자가 말했다.

아주 참을성이 있어야 해.” 여우가 대답했다. “처음에는 나한테서 조금 떨어져서 바로 그렇게 풀밭에 앉아 있어. 나는 곁눈질로 너를 볼 텐데, 너는 말을 하지 마. 말은 오해의 근원이야. 그러나 하루하루 조금씩 가까이 앉아도 돼……”


(98-99)

잘 가.” 여우가 말했다. “내 비밀은 이거야.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아야만 잘 보인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기억해 두려고 되풀이했다.

네 장미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너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나의 장미에게 소비한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는 기억해 두려고 되풀이했다.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어버렸어.” 여우는 말했다. “그러나 너는 잊으면 안 돼. 네가 길들인 것에 너는 언제까지나 책임이 있어. 너는 네 장미한테 책임이 있어……”

나는 내 장미한테 책임이 있어……” 어린 왕자는 기억해 두려고 되풀이했다.


(110-111)

아저씨네 별에 사는 사람들은,” 어린 왕자가 말했다.

정원 하나에 장미를 5천 송이나 가꾸고 있어…… 그래도 거기서 자기들이 구하는 것을 찾지는 못해……”

찾지 못하지.”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자기들이 구하는 것을 장미꽃 한 송이에서도 물 한 모금에서도 찾을 수 있을 텐데……”

물론이야.”내가 대답했다.

그리고 어린 왕자는 덧붙였다.

하지만 눈은 장님이야. 마음으로 찾아야 해.”


(119)

사람들에겐 별이라고 해서 다 똑 같은 별은 아니야. 여행을 하는 사람들에겐 별이 길잡이일 거고, 어떤 사람들에겐 작은 빛에 지나지 않을 거야. 학자들이라면 별을 문젯거리로 생각하겠지. 내가 만난 사업가들한텐 별은 황금이야. 그러나 별은 말이 없어. 아저씨가 보는 별은 다른 사람들하곤 좀 다를 거야……”

무슨 말을 하는 거니?”

아저씨가 밤에 하늘을 바라볼 때면, 내가 그 별들 중의 어느 별에서 살고 있을 테니까, 그 별들 중의 어느 별에서 웃고 있을 테니까. 아저씨에겐 모든 별들이 웃고 있는 것으로 보일 거야. 아저씨는 웃을 줄 아는 별들을 가지게 되는 거지!”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1-31 1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1-31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2-01-31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어린왕자는 명작인거 같아요~!!

bookholic 2022-02-01 09:42   좋아요 1 | URL
저도 다시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 예전과는 또 다른 느낌이더라구요~~^^ 다음엔 또 어떤 느낌일지...
 















(11)

어쩌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꿋꿋하게 삶을 꾸려가는 모습에서 그 어떤 무용담이나 모험담보다 더 큰 용기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처한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다. 이제는 그들도 희망을 가질 때가 되었다. 나는 그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인류애를 지닌, 가슴이 뜨거운 피디가 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카메라를 들도 평범한 그 누군가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전한다.


(59)

전쟁이 나든 종교가 무엇이든 그것은 어른들의 일이다. 아이들은 어느 나라를 지목하여 태어날 수도 전쟁을 막을 수도 없는 힘없는 생명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적어도 세 가지 권리는 있다고 생각한다.

배고프지 않을 권리, 학교에 다니며 교육을 받을 권리, 그리고 아프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


(73)

피디를 시작하던 때 내가 방송이 재미있고 신난다. 피디라는 직업 정말 좋다라고 말하자 한 선배는 시간이 지나면 그냥 단지 직업일 뿐이야. 나이를 먹으니 열정도 많이 식더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나이가 들어도 출연자들을 만나 카메라에 담는 일이 더더욱 신나고 행복해진다. 내가 철이 안 들어 그런가 하는 생각도 해 보지만 아마도 내 생애는 마리암과 같은 출연자를 만나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으로 언제까지나 행복할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또 다른 마리암을 만나러 세계를 돌아다닌다.


(111)

남편과 가족은 아프가니스탄 여성으로 공개적으로 사랑과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집을 낸 나디아를 죽여야 했다. 그런 입에 담을 수 없는 단어를 사용한 나디아를 명예살인 한 것이다. ‘명예살인이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거나 죄를 지은 아내나 딸, 여동생을 죽여 가문의 위신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이 천재 시인은 시()와 자기 목숨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140)

그런데 세상에 음악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파키스탄 페샤와르로 취재 갔을 때 나는 음악을 극도로 혐오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바로 탈레반이다. 그들은 인간이 즐기기 위해 만든 음악은 신이 금지한다고 주장한다. 흥겨워 어깨를 들썩이고 음악을 흥얼거리는 것은 절대 신이 용납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탈레반은 이런 신념을 곧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음반 가게나 라디오, 텔레비전을 파는 상점에 폭탄 테러를 감행한 것이다.


(194)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로 본 전쟁과 전쟁을 겪어 본 아이들 눈에 비친 진짜 전쟁은 많이 달랐다. 우선 그림 속 사람들이 개미처럼 작았다. 반면 무기나 탱크는 사람들에 비해 과장되게 컸다. 내가 그림 전문가 수준의 안목은 아니나, 무기가 사람을 죽일 만큼 어마어마한 화력을 내뿜는다는 것이 아이들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고, 그런 무시무시한 무기 앞에서 인간이란 한없이 나약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나무와 꽃 같은 아름다운 것을 그려야 할 동심이 전쟁으로 물든 것 같아 안쓰러웠다.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나라와 어른들 잘못 만나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생과 사를 가르는 전쟁에 노출되었나 싶었다.


(246)

미군에게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겠다며 의지를 불태우는 이들은 말하자면 독립군인 셈이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독립군들이 만주 벌판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는 모습이 떠올랐다. 테러리스트냐 독립군이냐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독립군도 일본 입장에서는 테러리스트이다. 이라크 저항 세력도 미군 입장에서는 테러리스트이다. 하지만 우리의 독립군과 마찬가지로 이라크 사람들에게 그들은 독립군이다. 역사의 평가는 후대에 한다지만 내가 그때 그들에게서 받은 인상은 애국심에 불타는 독립군이었다.


(302-303)

이라크는 인간이 전쟁 때문에 얼마나 많이 피폐해지는지 너무도 잘 보여 준 곳이다. 이라크 사람들도 전쟁으로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전쟁터에 내몰린 미군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전쟁에는 승자가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목숨이 희생되고 나서 얻는 승리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지금쯤 마이크가 집으로 돌아가 엄마와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엄마가 해 준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기를 바란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람돌이 2022-01-28 16: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분 책 좋던데 이런 책도 있었군요. 조만간 봐야겠습니다

bookholic 2022-01-29 23:05   좋아요 0 | URL
네, 글을 읽기 쉽게 잘 쓰시는 것 같아요.
전쟁이라는 무거운 주제지만, 그 속에 사람들에 촛점을 맞추셔서 글들이 따뜻합니다...
바람돌이 님, 즐거운 설명절 되십시오~~^^
 














(19)

[계승범] 그렇죠. 명에 대한 광해군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죠. 게다가 명이 후금 진영으로 들어가 선제공격을 하겠다며 원군을 요청했는데, 광해군은 명나라 군대가 반드시 패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광해군은 조선이 명을 도와서 군대를 보내면 아까운 조선 병사들만 죽을 것이고 거기에 후금의 원한까지 사서 후금이 우리에게 보복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죠. 반대로 신하들은 명이 분명 이길 텐데 우리가 미적거리면서 확실하게 돕지 않으면 나중에 후환이 있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누가 이길 것인가? 그 판단에 차이가 있었던 거죠.

(77)

[이다지] 저는 이 얘기 들으면서 중국의 유명한 명의 편작이 떠올랐어요. 편작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저보다 더 뛰어난 의사 두 명 있는데 모두 제 친형들입니다. 형들 중에는 큰 형님이 가장 뛰어나고, 둘째 형님이 그 다음입니다. 큰 형님은 환자가 증상을 느끼기도 전에 환자의 얼굴만 보고 무슨 병이 생길지를 미리 알고 치료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둘째 형님은 환자의 병세가 미약할 때 병을 알아내어 치료해 주니 환자들은 간단한 치료를 받은 줄로만 알고 크게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병이 커져서 심한 고통을 느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치료를 시작하니 환자들은 큰 병을 치료해 주었다고 믿고 고마워하는 것일 뿐입니다.” 양생이란 결국 이런 개념이 아닐까요?


(94-95)

[정철상] 허균이 남긴 글과 기록을 추론해 볼 때, 허균은 언변능숙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외향적이며 낙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죠. 실제로 허균은 임진왜란 시기에 왜군에 쫓기면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경치를 즐기고 누정마다 걸린 시판을 평하는 여유까지 즐겼다고 합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허균은 풍부한 직관적 감성을 지닌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러한 성격이 타고난 천재성과 결합되어 소설이나 시 등 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것으로 보입니다. 허균은 감성만 풍부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 세계를 다루는 이론 분야에도 능했습니다. 유학뿐 아니라 불교, 도교, 천주교 등을 깊이 있게 파고든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102-103)

[신병주] 허균의 혁명가로서의 면모를 가장 뚜렷이 보여 주는 글이 바로 <호민론>입니다. <호민론>에서는 백성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눕니다. 먼저 시키는 일만 하는 백성인 항민(恒民)이 있습니다. 또 세상에 원망을 품는 원민(怨民)이 있죠. 원민은 저항은 하지 않고 억울함을 속으로 삭힙니다. 반면 세상에 대한 울분이다 원한을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호민(豪民)입니다. 결국 활빈당을 조직해서 조정 관리들에게 맞서는 홍길동이 호민이라는 구상이죠.


(148)

[최태성] 일단 명나라는 멸망했을 거 아니예요. 그럼 광해군 그늘 밑에서 친청 세력이 성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실제로 이로부터 100년 뒤에 북학파가 나와서 청의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잖아요.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아마 그런 세력이 더 일찍 형성되었을 테고, 청의 문물을 빨리 수용하면서 근대 사회로 일찍 진입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일제강점기도 없었을 테고 산업화도 더 빨라졌겠죠.


(176)

[윤성은] 그렇죠. 이 인절미가 오늘 얘기하는 주제와 연이 깊은 음식이거든요. 백성들이 피란 온 인조에게 인절미를 가져다 줬다고 해요. 그때 이 떡을 처음 먹어 본 인조가 너무 맛있어서 누가만든 떡이냐?’ 했더니, 답하기를 이름은 정확히 모르나 임씨가 만든 떡입니다.’ 해서 임절미, 임절미 하다가 인절미가 됐다는 거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6)

스페인 내란 소식을 접한 오웰은 즉시 보통사람의 존엄을 위해 싸우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1936 12 23일 런던을 떠나 26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스페인에서는 공산당이 지지하는 정부가 공포정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웰의 눈에 바르셀로나의 거리와 사람들 사이에는 평등이 넘쳤다.” 그 광경은 싸워서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보이게 스페인 전쟁은 본질에서 계급전쟁이었다. 이기면 보통사람의 대의는 강화되고, 패한다면 지대수익자들이 환호하리라는 사실, 그 외에 나머지는 모두 거품이었다. 스페인에서 혁명전사가 된 오웰은 바르셀로나에서 일주일 머문 후에 POUM의 독립노동당 분대원으로 아라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72-73)

귀국 즉시 스페인 반파시스트 진영의 내분, 정확히는 스탈린 공산주의 세력의 반혁명적 기회주의적 실상을 낱낱이 밝힌 <카탈로니아에 경의를>의 집필에 착수했다. 그런 작업은 좌파정치의 미래, 진정한 민주사회주의의 앞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오웰이 아니면 다른 누구도 그 일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진실이었다. 스페인 상황을 선별적으로 보도하던 좌파미디어는 결과적으로 소련의 입장을 그대로 따른 셈이었다. 오웰은 런던의 지식들이 결코 일어나본 적이 없는 사건들 위에 정서적 상부구조를 구축한다고 탄식했다. 그가 POUM을 강하게 지지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언론이 귀기울여주지 않고, 좌파언론은 오로지 중상만 해댔기 때문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오웰이 스페인에 오기 전부터 POUM파시즘의 직접적 도구로 간주한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패권 혹은 권력 장악이 최고의 선이 되면서, 사회주의라는 대의는 너무도 쉽게 소실되었다.


(109)

조지 오웰에게 세인트 시프리언스 예비학교와 버마는 그의 삶 전체, 즉 가난과 전쟁의 체험뿐 아니라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깊고도 넓게 영향을 미쳤다. 이 점은 무엇보다 오웰의 삶과 작품들이 웅변으로 보여주지만, 여러 계기에 걸친 그의 직접진술과 말년에 이를수록 빈번해지는 회상과 환기, 주변인물과 전기작가들의 증언이 확인해준다. 오웰에게 학창시절과 버마 시절은 삶과 글쓰기의 원체험이었다.


(116)

무엇보다 부자애들은 결코 매질을 당하지 않았는데, 오웰의 기억에 따르면, 연소득 2천 파운드 이상의 부모를 둔 아이가 매 맞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가난한 집 학생은, 일류 사립고에 진학하여 학교의 명성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학비가 감면됐고 따라서 입학이 가능했다. 학교의 명성이 금전적 이익과 직결되던 산황에서 장학금은 학교()편에서는 장기투자였던 셈이다. 우웰이 그 경우에 속했다. 그런데 공짜 점심은 정말 없었다. 반액장학생이던 그가 치러야 했던 비용은 주로 정신적인 모욕과 상처였다.


(133-134)

오웰이 제국경찰을 그만두고 7년이 지난 1934년에 출간된 <버마 나날들>은 오웰이 동양에 대해 쓴 유일한 반제국주의 소설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붙들었던 <끽연실 이야기>는 버마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미완성으로 남았기 때문에 그 의도와 내용은 추측하기 힘들다. <버마 나날들>은 영국제국주의의 실상에 관한 현장기록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정치적 각성과 반성을 유인하기 위한 지식인 오웰의 행동이었다. 버마 체험에 대한 오웰의 회상들이 대체로 그렇듯, 책의 행간 곳곳에는 도저한 석벽(石壁)과도 같은 인종적 편견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이 스며 있다. 오웰은 거기에서 제국주의가 현지인들뿐 아니라 지배자들의 일상에도 깊숙이 침투해서 모두의 싦과 의식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166-167)

세계가 전체주의로 흐르리라는 오웰의 예감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짙어졌다. 그는 조만간 모든 민족주의 운동은 초인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고, 히틀러가 떠난 자리에 스탈린, 영미의 백만장자 그리고 드골 유의 온갖 작은 독재자들이 들어설 것으로 보았다. 세계적 흐름인 중앙집권적 체계는 경제적으로는 기능적일지 모르나 정치적으로는 비민주적 카스트 체제와 같이 가기 마련이다. 거의 신적인 카스트가 꼭대기에 있고 밑에는 적나라한 노예들이 있는 위계적 구조에서 유례없는 자유의 박멸이 진행될 것이다. 그때 언론의 자유는 첫 번째 치명적 죄악이며 후에는 무의미한 추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오브라이언의 주장에 따라 4개 손가락을 5개로 보듯, 지도자의 뜻대로 2+2=5가 되는 세상이다. 그때 자율적 개인은 존재가 말살되고 작가는 창조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오웰은 이런 유의 문명이, 나라들이 외부와는 완벽히 단절된 가운데 피차 끊임없는 유사전쟁을 벌이면서, 수천 년 동안 정체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인류의 방향이었다.


(177)

특히 전쟁 발발 이전 즉 오웰이 아직 평화주의를 고수하던 때에, 자본주의하에서 민주주의란 파시즘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보통사람들의 존엄이 구현되는 사회였다. 그는 인간이 지닌 본질적이고 태생적인 위험이 형제애에 대한 신뢰 그리고 보통사람들의 전통이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평화주의를 떠난 이후에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보통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경계하고 그것의 개선(예방)을 위해 노력하는 한 절망은 언어도단이었다.


(190)

오웰이 보기에 지식인은 권력을 지니거나 권력을 추구했으며, 늘 권력 주변에 서성댔다. 그가 지식인과 지배계급을 동일시했던 이유이다. 그는 지배층의 오만과 위선을 경멸하듯 지식층과 오만과 위선을 경멸했다. 그에게 지식인의 위선과 권력욕은 모두 가장 가동할 권력의 형식이면서 자본주의 외적 내적 발전형태인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를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이었다. 따라서 오웰의 지식인 됨 혹은 지식인으로서의 삶은 그 자체가 가해자의 근원적 죄의식에 닿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떠남내려감그리고 엄혹한 글쓰기 과정을 모두 개인적 속죄의 근거로 삼는 한에서만 비로소 스스로에게 정당화될 수 있었다.


(254-255)

노동계급 가정이야말로 유대와 평등이라는 동일한 가치가 배양되는 통합공동체의 기초였다. <위건 피어로 가는 길>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노동계급 가정에서는 따뜻하고, 품위 있고, 깊은 인간적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쉽지 않다. 육체노동자는 (…) ‘교육받은사람보다 행복할 가능성이 더 많다. 그의 가정생활은 자연스럽게 더 정상적이고 보기에도 좋게 꾸려진다. 나는 종종 노동계급 가정의 실내가 독특하고도 손쉽게 완전성, 말하자면 완전한 대칭으로 꾸며져 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299-300)

유럽대륙에 전운이 감돌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오웰의 성찰은 깊어졌고 과격해졌다. “우리는 영국이 민주국가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인도통치에서 보듯이, 겉으로는 덜 자극적일지 모르나 독일 파시즘 못지않게 악하다. 자신의 조국에서부터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않고 어떻게 파시즘에 대항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웰이 보기에 파시즘이라는 경쟁제국주의에 대항하는싸움에서 자본주의-제국주의 정부와 협력한다면 이는 파시즘을 뒷문으로 불러들이는 것과 같았다. 적어도 경제체제에 대한 한 영국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파시즘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때는 아직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317)

오웰이 스스로 선택한 경험들은 시대상황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상황을 적극적으로 만들어갔다는 점에서 보다 개인적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일관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관된 도덕적 힘이었다.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을 강요하지만, 도덕적 힘은 개인의 선택을 추동한다. 오웰은 버마 행,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생활, 영국 북부와 스페인으로의 여정, 그리고 인생 말년의 고독과 불편함을 스스로 선택했다.


(352)

오웰은 이처럼 노동운동의 속성과 현실적 한계에 누구보다도 민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농계급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은 오직 프롤레타리아에 있다는 것, 그것이 오웰의 단순하고 일관된 주장이었다. 앞에서도 보았지만, 오웰은 스페인에서 지식인에 대한 불신뿐 아니라 노동계급의 뼛속 깊이 자리 잡은 평등의 본능에 대한 깊은 신뢰를 경험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영국의 지배계급은 기본적으로 친파시스트적이었고 스페인을 프랑코에게 넘기는 것이 계급 이해를 위하는 길이라고 보았다. 영국이 독일과 전쟁에 돌입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궁지에 몰렸기 때문이었다.


(359-360)

오웰은 도저한 사회주의자였지만, 보통사람에 의해 보통사람의 가치와 정서가 구현되는 정치에 희망을 걸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입장은 왕왕 인기가 없었고 종종 시대에 뒤처지기도 했지만, 그는 그것을 견지하고 추구하는 데 추호의 망설임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윤리와 함께 가는 것이었다. 오웰은 손수건 산업의 도덕성을 먼저 따진 후에야 코를 푸는 사람이었다.


(379)

오웰이 보기에 이 전쟁이 똑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는 점만큼 분명한 것은 없었다. 특히 노동계급에게 영국제국주의와 독일 나치즘 가운데 누가 승리하느냐는 중요한 차이를 만들 것이고,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이 영국의 전쟁노력을 지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물론 전쟁에서 중립이란 없으며, 한쪽을 돕든가 다른 쪽을 도울 수밖에 없다.” 부자들이 희망하는 타협된 평화는 결국 영국을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만들 것이다. 설사 전쟁에 진다 하더라도 먼저 국내적 혁명을 일궈내면 완전한 패배로 볼 수 없거니와, 혁명을 추동했던 사상이 살아 있는 한 투쟁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싸우다 지는 것과 싸움 없이 항복하는 것의 차이는 그저 명예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웰은, 히틀러를 인용하여, 항복하는 것은 국가의 영혼을 파괴한다고 보았다. 타협도 정지도 없었다.


(431)

러시아 사회주의는 내적으로 전체주의화했고, 외적으로 제국주의화함으로써 사회주의의 본래 의미를 철저히 왜곡시켰다는 것이 오웰의 기본 시각이었다. “1930년 이래 나는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거의 보지 못했다. (…) 반대로 나는 그것의 지배자들이 여타 지배계급과 다름 없이 권력을 탈취하고 유지하려고 혈안이 된 위계적 사회로 전화되는 뚜렷한 증거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소련신화를 몰락시키는 일이야말로 사회주의 운동의 부활을 위해 핵심적 과제가 돼야 한다고 단언한다.


(461)

오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는 전쟁으로 간주했다. 영국이 독일보다 도덕적으로 반드시 우월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제국주의는 나치즘보다 더 사악하다 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출판할 자유가 독일보다는 영국에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오웰이 보기에 영제국의 가장 어두운 부분인 인도에도, 전체주의 국가에서보다 훨씬 많은 표현의 자유가 존재했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정신이 독일과 소련을 넘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이런 절박한 인식이야말로 작가로서 오웰이 전체주의에 결연히 맞서야 했던 배경이었다.


(503)

오웰에게 문학과 정치적 가치는 상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년에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늘 가장 원했던 것이 정치적 글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었다고 고백했다. 특히 스페인 전쟁 이후 자신의 모든 진지한 작품들이,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저항하고, 그가 이해하는 대로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 써왔다고 말한다. “나는 어떤 동기가 가장 강력한지 확실히 말할 수 없지만, 어떤 동기가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안다. 내 작업을 돌아볼 때, 내가 생기 없는 책을 쓰고, 미사여구, 의미 없는 문장, 화려한 수사, 곧 눈속임에 위해 있을 때는 예외 없이 정치적 목적을 결여했을 때였다는 것을 본다.


(519)

오웰에게 나쁜 작가는 무엇보다 무책임하고 부주의한 스타일리스트였다. 특히 그는 테크닉에 치중한 문학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혹독했다. 그에 따르면, 새로운 문학운동은 통상 선배들에 대한 학살을 시도함으로써 시작되는데, 종종 그때 일어난 문학 테크닉의 변화는 정치적 변화와 긴밀히 얽혀 있었다. 쓸모없는 작품을 양산하는 문예사조도 후대의 기억에 일정한 자국을 남기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과 1920년대의 천박한 상식에 대한 반발로 각각 태동한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는, 그것들의 생산해낸 작품들은 기교에 치우친 쓰레기에 불과하지만, 아직 기억은 된다는 점이다.


(545)

오웰에게 희망은 (민주적) 사회주의에 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일종의 도덕적 자유주의이기도 하다. 거기에서 국가는 경제적 삶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떠안음으로써 국민을 빈곤 실헙 등의 공포에서 해방시키지만, 국민 개인의 지적 삶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때 예술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에서처럼, 혹은 그보다 더욱, 번성할 터인데, 예술가는 더 이상 경제적 압박하에서 작업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2-23)

나는 엄마를 말리는 데 애를 먹었다. 엄마는 베개에 몸을 기댄 채 내 눈을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보다시피 매가리가 풀린 게야. 너무 피곤하고 진이 다 빠져버렸어. 내가 늙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단다. 하지만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며칠이 지나면 일흔여덟이야. 완전히 늙어 버린 셈이지. 그러니 준비를 해야겠구나. 인생의 책장을 한 장 넘기려고 해.”


(34)

. 그런 것 같았다. 심지어 암인 게 분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눈언저리에 든 멍이며 살이 빠지는 것 하며. 그런데 의사는 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아들이 미쳤다는 사실을 가장 나중에 인정하는 이는 부모고,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가장 나중에 인정하는 이는 자식이기 십상이다. 엄마는 평생 동안 암에 걸리지 않을까 두려워해 온 만큼 나와 내 동생은 엄마가 암에 걸릴 수 있다는 걸 믿지 않곤 했다.


(58)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 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79)

사실이었다. 전문가들이 내린 진단과 예측, 그리고 결정을 무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악순환에 갇힌 셈이었다. 환자는 의사들의 소유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니 그들의 손아귀에서 환자를 빼내 와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수요일에는 수술과 안락사 중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당시로서는 굳어 가던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게 되면 엄마가 장폐색증을 견디면서 지옥을 맛봐야 하는 처지에 놓일 게 뻔했다. 의상들이 안락사를 거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요일 아침6시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용기를 내서 N박사에게 그대로 돌아가시도록 어머니를 내버려두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내가 어머니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N박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자 특유의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나를 냉대했다. 의사들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어머니에게서 몇 년 더 사실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셈입니다라고. 내가 엄마를 죽게 내버려 두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였다.


(96)

엄마가 다른 이들에게 내 영혼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대신에 나를 조금 더 믿고 내게 마음을 더 써 줬더라면 우리 관계가 좀 더 좋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엄마가 그러지 못했던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복수심이 너무나 컸고, 치료해야 할 상처가 너무나 깊었던 까닭이다. 무언가를 할 때면 엄마는 늘 스스로를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길 거부해 온 엄마가 어찌 나를 이해해 보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태도를 꾸며 내는 데 있어서도 엄마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 때면 엄마는 무척 당황하곤 했는데, 이는 이미 주어진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도록 교육받은 탓이었다.


(106)

푸페트는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로 지냈다. 나 역시 혈압이 높아 얼굴이 붉어진 상태다. 우리는 엄마가 임종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또한 그걸 지켜보면서 모순적 감정을 느끼는 우리의 처지로 인해 특히나 힘들었다. 고통과 죽음 사이에 경주가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죽음이 이기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죽은 듯 잠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볼 때면, 우리는 시계를 매달아 둔 검은색 리본이 미미하게나마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게 위해 엄마가 입고 있는 하얀색 실내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심스레 관찰하곤 했다. 이게 마지막 경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136-137)

그러나 엄마의 죽음이 늦춰진 결과, 어떤 면에서 우리는 얻은 게 있었다. 그 덕분에 거의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누군가를 읽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수많은 후회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그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죽음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부재로 인해 완전히 소멸하는 동시에 반대로 자신의 현존 덕분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이 세계만큼이나 거대한 존재가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우리 삶에서 더 크고 많은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던 존재, 극단적인 경우에는 우리 삶 전부에 해당하는 존재로까지 여겨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가 다른 이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정신을 잃을 전도로 아찔함을 자아내는 이 사실을 외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 한계-물론 한계의 범위를 정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내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누군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151-152)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사랑, 우정, 동료애가 죽음이 야기한 고독을 능가할 때가 있다. 하지만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있을 때조차 나는 엄마와 함께 있지 않았다. 엄마를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속고만 살아온 엄마를 거짓말로 끝내 다시 한 번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엄마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운명과 공모한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죽음을 거부하고 죽음에 맞서 싸우던 엄마와 세포 구석구석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엄마의 패배로 나 역시 쓰러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임종하는 자리에는 세 번씩이나 참석했던 나는 정작 엄마의 임종은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엄마의 머리맡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조소를 머금은 채 음산하게 춤을 추던 죽음의 신을 보았다. 한 손에 낫을 든 채로 문을 두드린다는, 밤새워 듣던 이야기에 나오는 그 죽음의 신을, 낯설고도 끔찍한 모습을 하고서 머나먼 다른 곳에서 찾아온다는 죽음의 신을 나는 보았다. 죽음의 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입을 활짝 벌리고 턱뼈를 드러내며 웃던 엄마의 바로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


(153)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이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